소설리스트

금동-398화 (398/463)

398화: 다 스스로를 위해서

고자의는 차를 내려놓고 고서강의 침상 자락에 몸을 틀고 앉았다.

“며칠만 지나면 나을 것이다. 난 괜찮다.”

고서강은 아들의 손을 토닥이며 눈 밑이 시커메지고 눈에 핏발이 선 아들을 바라봤다.

“며칠 고생이 많았다.”

“아버지,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소자의 본분입니다.”

곧 나을 거라는 아버지의 말에 고자의는 안도했다. 씁쓸하고 서럽고 두려운 마음에 순간 왈칵 솟구친 눈물이 뚝 떨어졌다.

“네가 아직 어린데 아비가 어찌 쓰러지겠느냐.”

고서강은 눈물을 뚝뚝 흘리는 아들을 바라보며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울지마라. 눈물처럼 쓸모없는 게 없다. 병도 쓸모없고. 아비가 왜 병이 난 줄 아느냐? 말해 보아라.”

고자의는 얼른 눈물을 닦았다.

“아버지는…… 태자가 병문안 와서입니까?”

고자의가 떠보듯 물었다. 아버지는 태자가 돌아간 후에 쓰러졌다. 고서강은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끄덕였다.

“아비가 체면 불고 하고 모두가 보는 앞에서 진언하면 태자 성격에……. 태자가 날뛰긴 했지. 이 앞니도…….”

고서강은 이가 빠진 자리를 쓰다듬었다.

“그런데 태자가 이럴 줄은……. 휴!”

고자의는 두려움이 은근히 느껴지는 목소리로 속삭였다.

“아버지, 아버지가 며칠 몸져누워계셨던 동안, 아버지가 태자의 명성을 위해 고육지계를 썼다는 뜬소문이 돌았습니다.”

고서강은 쓴웃음을 지었다.

“나도 그러리라 생각했다. 바로 그래서, 휴. 소오야, 아비가 왜 그런 체면 없는 짓을 한 줄 아느냐? 그저 발 뺄 기회를 잡고 싶었을 뿐이었다. 그런데 지금은 발을 빼기는커녕 오히려 더 깊이 빠졌구나. 아비가 며칠 동안 궁리하고 또 궁리했는데, 태자가 다녀간 일, 저런 모습, 아무래도 뒤에 고명한 사람이 있는 것 같구나. 그 고명한 사람이…….”

고서강은 더 말하고 싶지 않았다. 그 고명한 사람이 자신을 붙들고 늘어질 생각인 듯했다. 무슨 일이 있어도 자신을 사지로 내몰려는 듯했다.

“아버지?”

잠시 기다려도 고서강이 아무런 말도 하지 않자 고자의가 그를 불렀다. 고서강이 생각에서 깨어났다.

“됐다. 그 이야기는 하지 말자. 너도 나이가 찼으니 혼사를 어서 정해야겠다. 올해 안에 성혼하고 내년 봄이 오면 지방직을 청해서 떠나거라.”

고자의는 어안이 벙벙해졌다.

“아버지? 육부에서 몇 년 역임하다가 5품이 된 후에 지방으로 가라고 하지 않으셨습니까.”

“그때는 그때고 지금은 지금이다. 네 혼처를 반드시 잘 골라야 한다.”

고서강은 넋이 나간 듯이 천장을 올려다봤다. 고가는 아무래도 겁을 피하지 못할 듯했다. 소오의 처는 가문을 반드시 잘 골라야 한다. 딸을 아끼는 능력 있는 집안으로. 제 딸아이를 봐서 친정에서 나서주면 소오도 살길이 열릴 것이다. 고가에 소오 일파가 남으면 앞으로 다시 재기할 길이 반드시 열리리라.

하가 노부인 추(鄒)씨는 하빈에게 당당하게 예를 갖춘 후 축하 인사를 올렸다. 하 십일낭은 며칠 전에 빈으로 진봉했다. 하가에서 축하 선물을 진작 보내긴 했지만, 진봉한 후에 처음 마주하는 것이라 인사는 해야 했다.

하빈은 단정하게 앉아서 매우 신중한 모습으로 추 노부인을 일으키고 자리에 모시라고 시녀에게 명했다.

추 노부인은 편안하게 앉아서 느긋한 표정으로 하빈과 일상 이야기를 나눴다.

작고한 하 노태야는 평생 미인을 사랑했고 후원에 서녀를 잔뜩 남겼다. 추 노부인은 양심에 물어도 서녀들을 박대한 적이 없는 떳떳한 적모라고 자신했다. 적어도 그녀 스스로는 서녀와 친딸을 거의 차이 없이 대했다고 자신했다. 그래서 높은 나무에 날아올라 봉황이 된 하 십일낭 앞에서도 허리를 꼿꼿이 세울 수 있었다.

“드릴 말씀이…….”

추 노부인은 운을 떼고는 금세 말을 멈추고 대전을 둘러봤다. 하빈은 무슨 뜻인지 알아듣고 실내에 있는 모두를 물렸다. 내키진 않지만, 아직은 예전의 주 귀비처럼 되지는 못했다. 아직은 하가, 그리고 하가 뒤에 있는 수국공부 눈 밖에 날 순 없었다. 그래서 추 노부인의 눈빛에 순응하며 모두를 물릴 수밖에 없었다.

“며칠 전에 국공야가 황상의 분부를 받아 대왕야를 만나러 갔었습니다.”

추 노부인이 본론에 돌입했다. 하빈은 신중한 가운데 뿌듯한 듯 대답했다.

“압니다. 황상께서 말씀하셨어요. 대왕야가 잘 지낸다고 안심하셨지요.”

“황상의 장자입니다. 어릴 때부터 곁에 두면서 정무를 가르치셨습니다. 두어 살 때부터 황상과 함께 용상에 앉아서 대신들의 절을 받았고요.”

속뜻이 있는 듯한 추 노부인의 말에 하빈이 살짝 눈살을 찌푸렸다.

“아시겠지만, 대왕야는 우리 하가를 매우 아끼셨습니다. 대왕야가 누굴 가장 신임하겠습니까? 수국공부가 아니라 우리 하가입니다.”

아랫자리에 앉아 있어도 추 노부인은 여전히 집에 있을 때처럼 적모의 위엄을 보이며 말했다.

하빈은 아무런 말 없이 침묵했다.

“수국공은 대왕야의 친외숙이자 태자 전하의 친외숙입니다. 혈통이 이어져 있으니, 누가 되든 같습니다. 뼈를 부러뜨려도 근골은 이어졌다고 하지 않습니까. 수국공이 훤히 아는 일이고, 대왕야와 태자도 훤히 아는 일입니다. 대왕야가 가장 신임하는 건 우리 하가고, 태자가 가장 통한하는 것 역시 우리 하가겠지요.”

추 노부인의 말에 하빈의 안색이 변했다.

“황상은 춘추가 있지만, 마마는 아직 젊습니다.”

추 노부인이 은근히 경고했다.

“마마의 오라비는 황상이 사실 예전처럼 대왕야를 아낀다고 생각합니다. 대왕야는 우선 그 담장 안에서 나오셔야 합니다.”

“친어머니를 독살한 사람이에요…….”

하빈이 나지막이 반박했다. 어미를 시해한 사람을 꺼내는 게 무슨 소용이 있어서.

추 노부인이 매섭게 하빈을 흘겨봤다.

“마마는 사서를 읽지 않으셨지요. 그건 아무것도 아닙니다. 촛불이 흔들리는 밤에 도끼 소리가 난 것이 어디 한 번뿐이겠습니까. 제대로 설명할 수 없는 일은 많습니다. 게다가 귀비마마가 대체 무슨 이유로 눈 감은 건지 누가 똑똑히 설명할 수 있겠습니까? 대왕야는 그런 사람이 아닙니다.”

(※촉영부성[燭影斧聲]: 송나라 태종 조광의가 형인 조광윤을 야밤에 도끼로 죽이고 황제가 되었음을 가리키는 말)

하빈은 촛불이 흔들리는 밤에 도끼 소리가 무엇을 가리키는 말인지 알아듣지 못했지만, 추 노부인에게 직접 물어볼 일은 절대로 없었다. 그녀는 그저 눈살을 찌푸린 채 한참 가만히 있다가 나직이 입을 열었다.

“어머니, 제게 시키실 일이 무엇입니까?”

추 노부인의 표정이 눈에 띄게 홀가분해졌다.

“별일은 아닙니다. 황상 곁에서 대왕야 이야기를 종종 하면 됩니다. 기회가 되면 황상을 설득하고요. 어찌 됐든 친아들입니다. 어미를 시해했는지 아닌지, 아무도 모르지 않습니까. 안 그렇습니까? 아무리 생각해도 이해할 수 없는 일인데, 무슨 사정이 있을지 어찌 압니까.”

“그런 말까지 황상께 드리란 말씀인가요?”

하빈은 조금 언짢아졌지만, 대놓고 드러낼 수는 없었다.

“기회가 있으면 하세요. 어찌 됐든 어미를 시해한 죄로 갇힌 것이니까요. 기회가 되면 잘 이야기해서 빨리 나올 수 있으면 좋습니다. 그렇지 않으면……. 휴, 마마도 아시겠지만, 태자가 정말로 보위에 오르면, 하가와 마마 모두 재난이 닥칩니다. 태자의 성격을 모르십니까? 마마가 황상을 놓지 못한다고, 마마를 산 채로 순장한다고 한대도 세상 사람은 태자의 효성을 칭송할 것입니다.”

하빈은 부르르 진저리쳤다.

“알아들었어요.”

“그럼 됐습니다.”

추 노부인은 흡족한 듯 칭찬하고는 일어섰다.

“그럼 이만 쉬세요, 마마. 이 늙은이는 이만 물러갑니다.”

하빈은 잠시 망설이는 듯하더니 일어서서 살짝 허리를 숙였다.

“어머니, 조심해서 가세요.”

추 노부인이 대전 밖으로 나간 뒤, 하빈의 유모 정씨가 병풍 뒤에서 나왔다. 정 어멈은 빠르고 가벼운 걸음으로 대전 문 앞까지 달려가서 추 노부인이 멀어지는 걸 보고는 가슴을 쓸어내리면서 하빈 곁으로 돌아갔다.

“낭자, 아직 사람을 들이지 마세요.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음. 정 어멈, 앉아서 이야기하게.”

하빈의 생모는 정 어멈의 양녀였다. 정 어멈의 말을 따르면 어릴 때 양녀로 들였고 고향에 가뭄이 들어서 양녀를 데리고 경성으로 도망쳐 왔다가 우연한 기회에 하가 노태야를 알게 되어 하가로 들어갔다고 했다. 황당한 이야기였지만, 예전에도 진실을 따지는 사람이 없었고 지금은 더더욱 없었다.

하빈의 생모가 하빈을 낳고 세상을 떠난 뒤, 추 노부인은 하빈을 정 어멈 손에 키웠다. 이 정 어멈은 매우 능력 있고 매우 속셈 깊은 사람이었다.

“낭자, 노부인이 하신 말씀, 저도 다 들었습니다. 낭자는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정 어멈은 하빈의 의중부터 물었다. 하빈이 봉황이 된 후로 모든 일에서 하빈의 의중부터 살피고 움직였다.

“어머니 말씀도 틀린 게 아닌 듯하네.”

하빈은 내키지 않는 듯 대답했다. 정 어멈은 하빈의 안색을 살피며 입을 열었다.

“틀린 건 아니지만, 낭자를 위한 말은 전혀 아닙니다. 제가 전부터 말씀드렸었지요? 하가는 노태야 대부터 똑똑한 사람이 하나 없다고요. 노태야의 주머닛돈은 다 대노야가 움켜쥐고 있는데 대노야는 오로지 수국공부에 빌붙었지요. 수국공부엔 다른 길도 있지만, 하가엔 대왕야밖에 없다는 걸 이제야 깨달은 모양입니다. 하가야말로 대왕야가 가장 신임하는 사람이라는 걸요. 그런데 이제 그걸 깨닫더니 눈앞에 벌어진 일은 또 멍청하게 굽니다.”

“어멈, 그게 무슨 말인가?”

하빈은 조금 어리둥절했다. 그녀는 친어미와 생김새부터 머리까지 매우 닮았다.

“지금 황상이 낭자를 이렇게나 아끼는데, 낭자 쪽으로 계획을 세우는 게 아니라 아직도 대왕야를 생각하다니 말입니다, 정말이지!”

정 어멈이 입을 비죽였다.

“대왕야는 이미 폐인이 되었습니다. 촛불이 흔들리는 밤에 도끼 소리는 무슨! 이게 그것과 같습니까? 대왕야가 모친을 시해한 일은 물증, 증거 다 있습니다. 직접 인정했고요. 뒤집을 여지가 어디 있답니까. 그건 접어두고, 설사 대왕야가 뒤집는다고 해도 몇 다리를 거쳐야 합니까. 낭자 쪽으로 계획을 세우는 것만큼 확실합니까? 아무리 그래도 낭자도 하가입니다!”

“무슨 말인지 나도 알아.”

하빈이 살며시 한숨을 내쉬었다. 막 입궁했을 때 정 어멈이 그런 식으로 그녀를 가르쳤다. 가장 중요한 일은 용종을 잉태하는 일이라고. 단번에 황자를 낳는다면 세상없는 큰 복을 얻는 것이라고.

“하지만.”

하빈은 우물쭈물, 얼굴이 다 빨개져서 겨우 한마디 내뱉었다.

“어멈이 몰라서 그래. 황상, 황상은…… 포옹이나 하지, 막 시작하고는……. 금방…….”

“어쩐지, 어째서 전혀 소식이 없나 했습니다. 예전에 마마의 어머니는 한 달 만에 아이를 가졌거든요. 그랬군요, 그랬어. 진작 이야기했어야지요.”

정 어멈은 안도한 듯이 손뼉을 쳤다.

“진작 이야기하면 뭘 해.”

하빈은 고민인 듯 손수건을 비틀었다. 정 어멈은 비밀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뭘 하긴요. 쉬운 일입니다. 쉽지요, 암. 몸에 좋은 것을 먹으면 그만입니다. 정기가 왕성해질 만한 것으로요!”

“응?”

하빈은 매우 놀랐다. 진정으로 깊은 후택에서 자란 규수에겐 듣도 보도 못한 일이었다.

“그런 게 있단 말이야?”

“물론이지요. 걱정 붙들어 매고 저에게 맡기세요. 제가 직접 환약을 만들겠습니다. 많이도 필요 없어요. 몇 알이면 됩니다. 낭자는 어떻게든 탕에 섞여 황상에게 먹일 생각만 하세요. 이삼 각이면 정기가 왕성해진다는 것이 무엇인지 낭자도 바로 알게 될 겁니다. 낭자, 달거리 계산해서 쓰고 회임하면 더 쓸 것 없습니다.”

“알겠어.”

하빈의 두 눈이 흥분해서 반짝였다. 회임해서 단번에 황자를 낳는다면, 황상 성격에 자신은 주 태후처럼 온 세상 만민의 어른이 될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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