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96화: 형님!
명 삼낭자는 눈을 부릅뜨고 묵칠을 바라보며 또 한참 말이 없었다. 묵칠의 손가락이 다 떨리기 시작했을 때 겨우 다시 입을 열었다.
“계 공자가 혼담을 넣게 하면 돼요. 우리 어머니한테요! 이제 알아들었죠?”
“알았다, 알았다. 왜 화를 내는 것이냐. 진작 이렇게 말하면 될 것을. 한마디면 될 것을 빙빙 돌리기는. 글공부한 인간들이란……. 쯧! 그건 쉽다! 기다려라. 바로 가서 성사하고 오마!”
“돌아와요!”
묵칠이 곧바로 돌아서서 달려가자 명 삼낭자가 얼른 불렀다.
“잘 들어요. 나는 계 공자가 마음에 든 게 아니에요……. 잘 들어요, 내가 계 공자를 점찍었다고 말하면 안 돼요! 내가 부탁한 거라고 말하면 안 돼요! 그리고 또…….”
“알았다, 알았어. 네 체면을 상하게 하면 안 된다는 거 아니냐. 육누이랑 똑같구나. 알았다. 걱정하지 말아라!”
묵칠은 손을 휘휘 저으며 돌아서서 달려갔다.
명 삼낭자는 제자리에 한참 서 있다가 천천히 숨을 내뱉고 천천히 돌아서서 천천히 육낭자의 거처로 향했다. 너무나 혼란했다. 또 너무나 들떴고. 너무 조마조마해서 얼른 육저아와 이야기해야 할 것 같았다.
태양이 서쪽으로 기울고 곧 하늘이 어두워질 무렵, 영원은 이가 골목과 그리 멀지 않은 곳에서 마차를 타고 휘장 틈을 통해 차츰 어두워지는 하늘과 점차 밝아지는 등롱을 바라봤다.
하늘이 완전히 어두워지고 등불이 환하게 켜졌을 때, 영원은 마차에서 뛰어내려 담을 따라 이가 저택 뒷담으로 달려가 후각문 앞에 도착했다. 주변을 둘러보고 자물쇠를 열어 안으로 들어간 다음 숲을 따라 이동의 거처를 향해 직행했다.
월동문으로 들어간 다음 걸음을 멈추고 매무새를 고친 다음 이 발을 내밀었다 저 발을 내밀었다 하며 주춤거리다가 굳은 얼굴로 성큼 걸음을 내디뎌 회랑 안으로 들어갔다.
회랑 아래 등불이 환하고 실내에 그림자가 아른거렸다. 영원은 창 아래 서서 그물창에 비친 그림자를 바라봤다. 오늘은 수련과 녹매, 그리고 본 적 없는 시녀가 당직인 모양이었다.
동동은? 없나? 그럴 리가 없다. 그녀가 없는데 시녀들이 상방에서 무얼 하겠나.
영원은 살짝 몸을 움직여 이쪽 창에서 저쪽 창 아래로 가서 안을 들여다봤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아서 조금 더 몸을 뺐다. 그물창에 손가락을 대고 구멍을 뚫으려다가 얼른 다시 거두고 뒷걸음질 쳤다. 잠시 더 바라보다가 머리를 긁적이고는 크흠 목을 가다듬었다.
잠시 후, 상방의 휘장이 젖히더니 수련이 휘장을 열고 밖으로 나와서 굳은 얼굴로 영원 앞으로 다가갔다.
“칠야, 우리 낭자가 돌아가시래요. 앞으로 다시 오시지 말고요.”
“너희 낭자가? 그렇게 말했다고? 너희 낭자 몸이 편찮은 것이냐? 무슨 일이 있나? 장부 맞추는 거냐? 아니면 어디 아픈 것이냐?”
“다 아니에요. 우리 낭자는 멀쩡해요. 장부를 맞추지도 않고요. 칠야가 이렇게 새벽에 담을 넘어 다니는 거, 이런 법도는 없다고 하셨어요. 돌아가세요. 다시는 오지 마시고요.”
수련은 더 굳은 얼굴로 말을 마치고는 몸을 옆으로 비틀고 가란 듯이 공손히 손짓했다.
“급한 볼일이 있어서 찾아왔다고 전해라! 큰일이다. 묵칠과…… 크흠, 묵칠의 혼사 때문에 왔다. 큰일이다. 반드시 낭자와 상의해야 한다. 가서 낭자에게 전해라. 내가 언제 볼일 없이 온 적 있더냐? 다시 가서 낭자에게 전해라. 얼른!”
영원은 매우 다급해졌다. 그때 녹매가 휘장을 열고 머리를 내밀었다.
“칠야께서 말씀하지는 볼일, 큰일이 우리 낭자와 무슨 상관인지 모르겠다고 하세요. 어서 돌아가세요. 다시 오지 마시고요. 안 그러면 사람을 부를 거예요.”
영원이 녹매를 빤히 바라봤다.
“무슨 일이냐? 이게…….”
“수련 언니, 낭자가 문 이야를 모시래요. 그리고 태태, 대야도요.”
녹매가 한마디 더 하자 영원은 반사적으로 뒷걸음질 쳤다.
“알았다, 알았어! 간다! 지금 바로 간다! 정말로 볼일이……. 간다, 나중에 다시 이야기하자.”
영원은 일이 잘못된 것을 깨닫고 서둘러 월동문으로 향했다. 수련이 뒤를 바짝 쫓더니, 영원이 각문을 열고 나가는 걸 지켜보다가 따라서 문을 열고 나갔다. 저택 밖으로 나가는 걸 지켜보겠다는 뜻이었다.
영원은 할 수 없이 수련의 감독하에 후각문 밖까지 나갔다. 문이 등 뒤에서 쾅 하고 닫혔다. 수련의 발걸음 소리가 멀어지더니 사라지기 전에 다시 가까워졌다. 이어서 수련의 목소리가 들렸다.
“가서 도 어멈에게 낭자의 분부를 전해. 각문에 자물쇠를 채우고 구리 녹인 물로 채워 버리라셔.”
영원은 눈이 휘둥그레지고 입이 벌어졌다. 무슨 일일까?
잠 한숨 못 들고 밤새 뒤척이던 영원은 다음 날 수련할 마음도 들지 않았다. 눈을 빤히 뜨고 하늘이 밝아 오는 걸 지켜보고 물시계가 똑똑 떨어지는 걸 바라보다가 조회가 끝날 시각이 되자 옷을 갈아입고 이신을 만나러 한림원으로 조르르 달려갔다.
서고에서 책을 가득 안고 나오는 이신이 보이자, 영원은 허둥지둥 잰걸음으로 달려가 이신이 품에 안은 책을 앗아 왔다.
“무겁습니다. 제가 들겠습니다, 형님.”
이신이 어안이 벙벙해진 사이, 영원은 어찌나 재빠른지, 어느새 품에 안은 책을 홀랑 가지고 갔다. 영원이 책을 안고 무게를 가늠했다.
“이렇게 책이 무거운데 어떻게 혼자 듭니까. 이런 힘든 일은 앞으로 제가 하겠습니다.”
“영 칠야, 형님이라니요. 그 말씀, 소생, 실로 감당할 수가 없습니다.”
이신은 얼굴을 구기며 엄숙한 표정을 지었다. 어젯밤에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이미 알고 있었다. 문 이야의 분부대로 적어도 수수방관해야 했다.
“형님이 형님 소리를 감당하지 못하면 제가 이 형님 소리를 누구에게 하겠습니까. 식견, 학식, 품행, 모두 당연히 형님이십니다. 형님.”
영원이 껄껄 웃으며 말했다.
“칠야, 그 말씀은 더 가당치 않습니다.”
이신이 헛웃음 쳤다.
“황상께서 한림원에서 여러 선생 밑에서 배우라고 하셨습니다. 형님도 한림이시니 제 스승이지요. 형님이라고 부르는 것도 제가 거들먹거리는 것이지요.”
영원이 하하 웃으며 하는 말에 이신은 순간 말문이 막혔다. 한림원 전체 한림이 모두 영원의 스승이라는 말은 확실히 황상이 한 말이었다.
“그럼 선생이라고 부르세요.”
이신은 잠시 말문이 막히더니 가차 없이 말했다. 영원이 싱긋 웃으며 살짝 허리를 숙였다.
“앞으로 잘 부탁합니다, 형님 선생.”
이신은 형님 선생이라는 호칭에 등 뒤에 소름이 돋았다.
“가당치 않습니다. 칠야는 어전에서 일하시는 분이니 분명 공무로 바쁘실…….”
“아닙니다. 전혀 바쁘지 않습니다. 며칠 만에 한 번씩 조회에 나가 서 있는 것뿐인걸요. 너무 한가해서 황상께서도 한림원에 보낸 것 아니십니까. 시간 나는 선생께 배우라고요.”
영원은 이신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공손하게 대답하면서 그 김에 뭐라고 이어질지 모를 이신의 말을 잘랐다.
“오늘은 시간 없습니다.”
이신이 먼저 단칼에 거절했다.
“형님…….”
영원이 난감한 얼굴로 ‘형님’ 하고 부르는데 묵칠이 부르는 소리가 저 멀리서 들렸다.
“칠 형님, 칠 형님! 정말로 여기에 있었군! 찾아다녔다고!”
묵칠은 얼마나 뛰어다녔는지, 복두가 다 삐뚤어져서는 채찍을 들고 뛰어왔다.
“칠 형님, 아이고! 드디어 찾았군. 어제부터 곳곳으로 찾아다녔는데 찾을 수가 있어야지. 왜 여기에 있지? 여긴 쉰내 나서 싫다고 하지 않았어?”
이신이 영원을 삐딱하게 바라봤는데 영원은 평소와 다름없이 태연한 얼굴이었다.
“여긴 한림원이다. 궁을 제외하면 이곳이 가장 고상하고 신성한 곳이니 이곳에서 허튼소리 하면 안 된다! 나는 왜 찾는 것이냐? 할 말 있으면 나중에 해라. 난 바쁘다.”
“나중엔 안 돼! 급한 일이다! 아주 급한 일! 사람이 죽을 수도 있어!”
묵칠은 나중은 둘째치고 숨 쉬는 시간도 아까운 지경이었다.
“칠 형님, 나 방법이 생겼다. 하지만 형님이 도와줘야 해. 전에 도와주겠다고 했었지. 계…….”
묵칠은 이름을 이야기하다가 이 자리에 남도 있음을 떠올리고 영원을 잡아끌었다.
“칠 형님. 우리 나가서 이야기합시다. 내가 한턱낼 테니 비연루에 가자고.”
“오늘 바쁘다고 하지 않았느냐. 끝날 때까지 기다려라. 끝나면 사람을 보내마.”
영원이 꿈쩍도 하지 않는데 묵칠이 끌고 나갈 수 있을 리가 있나. 끌어도 꿈쩍하지 않고 다시 끌어도 역시 꿈쩍하지 않자 다급해진 묵칠이 이신을 가리켰다.
“저자가 부른 것이오? 이 한림이…….”
“닥쳐라! 이분은 내 형님이다. 볼일이 있어서 내가 형님을 찾아왔다.”
영원은 묵칠의 말이 끝나기 전에 덮어놓고 호통부터 쳤다. 묵칠을 걷어차서 세상 끝까지 날려버리지 못함이 한스러운데 하필 이신 앞이라 기품과 소양을 유지해야 했다.
묵칠이 큰소리로 웃었다.
“형님? 하하하, 하하하! 칠 형님, 농담도 참. 이자가? 이자가 뭘 잘못한 거요? 이건 지금…….”
이신은 살짝 물러서서 뒷짐을 지고 즐기는 듯 영원을 바라보고 묵칠을 바라봤다. 영원은 얼굴이 다 시퍼레져서 한 손으로 책을 안고 다른 손으로 묵칠을 끌고 옆으로 옮겨서 이를 악물고 속삭였다.
“이 무지렁이가! 혼사 때문에 찾아온 거겠지! 나도 네 혼사 때문이다. 계가 놈하고 네가 관계나 맺을 수 있느냐, 네가 관계 맺을 수 있어?”
“아이고, 칠 형님. 진작 이야기하지 않고.”
묵칠은 큰 깨달음을 얻었다. 그렇지. 이가 대랑은 계 공자, 여 공자와 한 몸처럼 붙어 다니지. 아이고야, 아이고야. 내가 무슨 짓을!
“칠 형님, 역시 형님밖에 없소.”
묵칠은 감동해서 그렁그렁한 눈으로 제 칠 형님을 바라봤다.
“형님!!”
묵칠은 그렁그렁한 눈으로 이신을 돌아보더니 공손하게 허리를 숙이며 성의 가득하게 형님, 하고 불렀다. 이신의 온몸에 소름이 오소소 돋았다.
“크흠!”
영원은 힘껏 목을 가다듬고는 책을 안은 채 이신을 향해 살짝 허리를 숙였다.
“선생, 갑시다. 영원, 오늘은 선생 앞에서 제자의 예를 갖추겠습니다. 이런 것이 다 제자의 도리라고 전에 조 한림이 말씀하셨습니다. 선생, 가시지요.”
“선생, 가십시다. 가십니다.”
묵칠도 영원 뒤에 서서 영원이 허리를 숙이니 저도 따라 굽실굽실했다.
이신은 이마에 주름이 질 정도로 눈을 치켜떴다. 문 이야가 영 칠야의 들러붙는 솜씨가 보통이 아니라고 하더니, 이건 들러붙는 정도가 아니었다. 이건 떼어내려야 떼어낼 수 없는 찰거머리였다.
“칠야, 하실 말씀 있으면 그냥 하세요.”
그 차이를 인식한 이신은 진심으로 탄복하며 졌음을 인정했다.
“사실 별일은 아닙니다…….”
영원은 그 말을 다 끝내기도 전에 다급하게 말머리를 돌렸다.
“그냥 작은 일이지요. 소칠, 저쪽에 가서 기다려라.”
영원은 다시 고개를 돌려 묵칠부터 멀리 보냈다. 묵칠은 지극히 고분고분하게 덩실덩실 멀리 가서 고개를 빼고 이제나저제나 하고 기다렸다.
“그냥 작은 일입니다.”
영원은 갑자기 또다시 망설여졌다. 동동의 성격이 어떤지 매우 잘 안다. 주장이 강해서, 작정한 일이 있으면 남과 상의하지 않는다. 상의한대도 아마도 어머니와 상의하겠지. 혼인 대사를 사내인 오라버니와 상의할까? 하물며 양자로 들어온 오라버니였다. 어릴 때 함께 자란 사이가 아니라서 아무리 가깝다고 해도 거리가 있다. 이신을 찾아온 건 제대로 사람을 찾아온 게 아닌 듯했다.
“칠야, 대체 무슨 일이십니까.”
영원이 눈살을 찌푸린 채 아무런 말을 하지 않자 이신이 할 수 없이 물었다.
“그게…… 좋은 혼담이 있습니다.”
영원은 결정을 내렸다. 이신은 좋은 혼담이라는 말에 얼굴이 곧바로 흐려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