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95화: 입에 올릴 수 없는 방법
“어느 댁 낭자인가요?”
“그건 알려줄 수 없지.”
명 삼낭자가 이어서 묻는 말에 묵칠이 단칼에 거절했다.
“팔(八)자에 획도 아직 긋지 않은 일이다. 아직 나 혼자 망상을 품은 것이지 그 낭자는 모른다. 규수의 명예와 관련된 일이다.”
“아아, 이런 일이 규수의 명예와 관련된 일이라는 걸 알긴 하는군요? 알면서, 내가 누구를 마음에 들어 하느니 아니니, 그런 이야기는 어째서 쉽게 하는 건가요? 내 규중 명예는 명예도 아니라는 건가요?”
명 삼낭자는 묵칠 앞에서 느끼던 거북함과 불안감이 싹 사라져서 뒷짐 진 채 서슬 퍼렇게 몰아세웠다. 묵칠은 겁에 질려 뒷걸음질 치고 또 쳤다.
“남이 있는 앞에서 이야기한 것도 아니지 않으냐. 그냥 누이, 네 앞에서……. 그래, 내 잘못이다. 내가 잘못했다. 이렇게 사과하마.”
묵칠은 시원스럽게 잘못을 인정했고 또 시원스럽게 장읍하고 또 하며 사과했다.
“알았어요. 그냥 생각 없이 한 말로 여길 거예요.”
알았다는 명 삼낭자의 말에 묵칠이 크게 안도했다.
“마음에 드는 낭자가 있는데 할머님한테 말씀드릴 것이지, 나하고 무슨 이야기를 하겠다는 건가요?”
명 삼낭자는 오로지 본론이 중요했다.
“뻔히 알면서 묻기는! 할머님이 누이, 너를 마음에 들어 하지 않으시냐. 우리가 천생배필이라고. 내가 아니라고 이야기했었다. 그런데 이야기만 하면 안색을 흐리시면서 다른 일은 허튼짓해도 봐줄 수 있어도 이 일만은 절대로 안 된다고 하지 않으시냐. 아버지를 찾아가도 아버지는 주절주절 쓸데없는 말씀만 하신다. 방법이 너무 없어서 누이를 찾아온 것 아니냐. 나보다 영리하니 제발 내가 마음에 드는 사람과 혼인할 방도를 생각해다오. 걱정하지 말고. 나도 반드시 누이가 원하는 사람하고…… 아니지, 요 망할 입! 반드시 누이와 어울리는 사람과 혼인할 수 있게 해주마! 그치와 매일 고리타분한 문장이나 짓고 괴상한 시를 읊어도 나와 사는 것보다 훨씬 낫겠지.”
명 삼낭자는 ‘고리타분한 문장, 괴상한 시’라는 말에 양손을 허리춤에 올리고 반박하려다가 숨을 훅 내쉬며 그냥 삼켰다.
됐다. 중요한 건 본론이지.
“계획은 있나요?”
“계획이 있으면 누이를 찾아왔을까.”
묵칠은 너무나 고민됐다.
“칠 형님도 입만 열면 계획이 있는지 묻는다. 내가 무슨 방법이 있겠나. 내가 멍청한 걸 다들 알면서! 뻔히 내게 아무런 방도가 없는 걸 알면서 굳이 무슨 계획이 있느냐고들 묻기는!”
“알았어요, 알았어. 이번엔 내가 말실수했어요.”
명 삼낭자는 난처해서 눈시울이 다 붉어진 묵칠을 바라보며 얼른 잘못했다고 했다.
“그럼 어느 댁 낭자인지는 내게 알려 줘야 해요.”
“안 된다고 했지!”
묵칠이 다시 핏대를 세웠다.
“말해주지 않으면 방도를 어떻게 생각해요! 어느 댁 낭자인지 모르면 그 혼사에 어떤 어려움이 있는지 모르는데, 어떻게 방도를 생각하라는 건가요? 게다가 묵 오라버니는 입만 열면 계 공자를 입에 올리면서, 자기 일은 뻥긋도 하지 않겠다는 건가요?”
명 삼낭자는 화가 나서 씩씩거렸다. 사람이 왜 이렇게 반응이 느려!
묵칠은 주저하기 시작했다.
“그건 그렇군. 그래도 안 된다. 그 사람은 속셈이 없는 사람인데, 나중에 네가 놀리기라도 하면…….”
“바보예요? 우리 혼사를 어떻게 망칠지, 같이 이야기하고 있는 건데, 지금 내가 다른 사람 놀리게 됐나요? 아무리 감싸고 싶어도 이러는 건 아니랍니다.”
“그건 그렇지! 누이도 큰 골칫거리를 안고 있지!”
묵칠이 두 눈썹을 함께 치켜올렸다. 명 삼낭자는 화가 나서 흥흥거렸다.
“탕가 오낭자다.”
묵칠이 목소리를 잔뜩 낮춰서 하는 말에 명 삼낭자는 눈썹을 치켜떴다가 다시 내리고는 묵칠을 위아래로 훑어봤다. 그 시선에 묵칠은 온몸이 거북해졌다.
“뭐, 뭘 보느냐. 그래, 오낭자는 누이보다 학식이 떨어진다. 하지만 나는 그보다 더 학식이 떨어진다. 내가 마음에 든다는데, 어찌? 뭐!”
“어떤 건 아니고요. 오낭자는 참 좋은 낭자인데……. 흠흠. 내 말은, 묵 오라버니 안목이 꽤 괜찮다는 이야기랍니다. 오낭자는 학식도 훌륭하고 성품도 좋아요. 적어도 나보단 좋아요. 음, 생각 좀 해봐야겠어요.”
묵칠이 뭐라고 하기도 전에 명 삼낭자는 단번에 핵심을 찔렀다.
“탕가는 상인 가문이지만, 이 부분은 아마 문제없을 거예요. 오라버니 어머니가 바로 상인 가문이니까요. 오라버니 아버지는 천하에 이름난 재자였고요. 이 부분은 어르신과 승상야 모두 문제 삼지 않을 거예요.”
묵칠은 크게 안도하며 명 삼낭자를 향해 깊이 장읍했다.
“온 세상에서 이렇게 사리 밝은 사람은 역시 누이가 최고다.”
명 삼낭자는 그 칭찬에 하마터면 숨이 막혀서 뒤로 넘어갈 뻔했다. 그녀는 침을 꼴깍꼴깍 삼켰다.
“본론 이야기해요. 또 하나, 탕가와 고가가 사돈이라는 게 문제죠. 하지만 탕 오낭자의 언니는 고가 셋째와 혼인했어요. 고가 셋째는 글렀다고 소문난 사람이죠. 앞날이 글렀다면 변변찮다는 소리고, 삼방(三房)은 앞으로 고가에서 있으나 마나 한 존재에요. 그러니 별 볼 일 없는 사돈인 셈이죠.”
“똑똑해! 누이가 칠 형님보다 똑똑하다!”
묵칠이 명 삼낭자를 향해 엄지를 높이 치켜들었다.
“내가 그랬지. 누이 같은 사람이 나와 혼인하는 건 너무 서러운 일이다.”
“입 좀 다물어요!”
생각이 방해되자 명 삼낭자가 퉁명스럽게 호통쳤다. 묵칠은 목을 움츠리고 고개만 끄덕일 뿐 끽소리도 하지 못했다.
“어디까지 했더라? 아, 그래. 사돈. 내 생각에 오라버니 혼사에서 가장 어려운 점은 할머님이 날 점찍었다는 거예요.”
묵칠이 손뼉을 짝 쳤다.
“그래! 네가 앞을 떡 막고 있어서 그러는 거다. 아주 꽉 막았어!”
명 삼낭자는 눈을 부릅뜨고 이를 부득부득 갈았다.
내가 무슨 상관인데요? 그쪽 할머님의 생각이고 내가 더 서럽습니다! 어떻게 앞을 꽉 막은 사람이 나라고 탓할 수 있나요?
“아니, 누이가 그렇다는 게 아니라……. 누이가 조금 전에 제 입으로 한 말 아니냐.”
묵칠은 명 삼낭자의 분노한 눈길에 제 얼굴에 구멍이 날 것 같아서 기운 없이 대답했다.
“따지지 않을게요!”
명 삼낭자는 숨을 깊게 들이마시고 또 들이마셨다.
중요한 건 일을 잘 마무리하는 것이지. 일부러 그런 것도 아닌데 얼뜨기랑 따질 것 없어. 중요한 일부터 처리하는 게 제일, 제일 중요해!
“그럼 말해 봐라. 네가 가로막은…… 크흠, 내 말은 우리 혼인은 어떻게 해야 없던 일이 되겠느냐? 걱정은 말고 꾀만 내라. 나서는 건 내가 나서마!”
묵칠이 소매를 걷어붙였다.
“다른 건 무슨 허튼짓을 해도 용납해도 이 일은 절대로 안 된다고 할머님이 말씀하셨다고 아까 그랬잖아요. 오라버니 생각엔 여지가 얼마나 있을 것 같나요?”
명 삼낭자가 묻자 묵칠은 소매를 걷어붙이다 말고 팔을 떨어뜨렸다. 어깨도 축 늘어졌다.
“여지는 없다. 할머님 성격은 안 된다고 하면 안 되는 거다.”
“그럼 아버지는요?”
“휴! 아까 이야기하지 않았느냐. 아버지는 주절주절 다 헛소……. 어릴 때 내가 글공부를 열심히 하지 않아서 얼마나 마음 아팠는지 모른다고 하시더라. 어머니를 탓할 생각은 없지만, 내 아들까지 나처럼 되는 건 두고 볼 수 없다고 하셨다. 연달아 몇 대가 다 글공부하지 않으면 묵씨 가문에서 우리 일파는 끝장이라고. 우리 아버지가 이런 말씀을 하시는데 여지가 얼마나 있을 것 같으냐?”
명 삼낭자의 어깨도 축 늘어졌다.
“여기도 여지가 없네요.”
“다른 방도를 더 생각해 보아라.”
“무슨 방도가 다 있겠어요. 삼류 수단밖에…….”
묵칠이 단호하게 거절했다.
“그건 안 된다! 오낭자는 지금도 형편이 편하지 않은데 더 안 좋은 일이 생기면 내가 어찌 살겠느냐.”
“나도 그렇게 생각해요. 휴!”
명 삼낭자가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근심 가득한 모습이었다. 방법이 하나 더 있긴 한데, 말을 할 수가 없는걸…….
“더 생각해 보아라!”
다급해진 묵칠은 애원하는 분위기가 되었다.
“누이, 착한 누이. 오라비가 이렇게 부탁한다. 게다가 이건 우리 두 사람의 일이다. 나를 도와야 네 일도 해결된다. 생각해 보아라. 정말로 나와 혼인하면, 말을 해도 내가 하나도 알아듣지 못하는데 어찌 살아가겠느냐. 그렇지 않으냐? 더 생각해 보아라.”
“정말로 방법이 없어요.”
“더 생각해 보아라. 더 생각해 보아라!”
묵칠은 거의 울 것 같았다.
“생각했어요! 우리 둘의 문제라는 걸 오라버니도 아는데, 내가 모르겠어요? 나도 방도를 생각하고 싶다고요! 그런데 방도가 없다고요!”
명 삼낭자도 다급해졌다. 노력하지 않은 것처럼 말하다니.
묵칠은 한숨을 푹 내쉬고 눈물을 뚝뚝 흘리다가 아예 바닥에 쭈그리고 앉아서 얼굴을 가리고 울기 시작했다.
“오라버니!”
묵칠이 다짜고짜 울기 시작하자 명 삼낭자는 기겁했다. 놀라고 어이없어하다가 울지도 웃지도 못할 기분이 되어서 자리에 선 채 한숨을 내쉬었다. 묵칠 앞에 같이 웅크리고 앉아서 소맷자락을 잡아당겼더니 묵칠은 힘껏 소맷자락을 당겨가면서 계속 울었다. 명 삼낭자도 다시 소맷자락을 잡아당겼다.
“칠 오라버니, 울지 말아요. 방법이 하나 있어요. 그런데…….”
“있을 줄 알았다! 있는데 이야기하지 않는 건 줄 알았어!”
묵칠은 순간 울음을 그치고 양손을 함께 들어 올려서 왼손은 왼쪽으로, 오른손은 오른쪽으로 보내며 눈물을 닦았다.
“우리 두 사람의 일이라고 했거늘, 이야기하지 않기는. 정말로 나와 혼인하고 싶은 것이냐? 나는 정말 너와 혼인하기 싫다!”
명 삼낭자는 한 대 때려주고 싶은 충동을 누르느라 안간힘을 썼다.
“거짓말한 거 아니라고요.”
명 삼낭자가 씩씩대며 숨을 몰아쉬는 걸 보고 묵칠은 제가 또 말실수했음을 깨닫고 얼른 사과했다. 명 삼낭자가 벌떡 일어서다가 묵칠이 일어서기도 전에 털썩 다시 웅크리고 앉았다.
“그 방법은…….”
명 삼낭자는 운을 떼자마자 입을 다물더니 얼굴이 빨개졌다. 묵칠은 그녀를 빤히 보며 잠시 기다리지만, 여전히 얼굴을 붉힌 채 말을 하지 않자 조바심이 났다.
“말을 좀 해라! 이러니 글공부한 사람은 장이 구불구불하고 속에 꼭꼭 감춘다고 하지! 오낭자라면 벌써 속 시원하게 이야기했을 거다!”
“이야기해도 비웃지 말아요.”
명 삼낭자는 정말 너무 난처해서 묵칠이 한 말을 똑똑히 듣고도 신경 쓸 겨를이 없었다.
“난 어렸을 때 육누이 기저귀도 갈아줬었다! 그것도 비웃은 적 없다!”
“알았어요! 이야기해요!”
명 삼낭자가 벌떡 일어서자 묵칠도 서둘러 따라 일어서서 빤히 바라봤다. 재촉하고 싶어도 재촉하진 못하고 바라만 보는데 재촉하기 전에 명 삼낭자가 줄줄 이야기했다.
“오라버니 할머님은 결심을 굳혔지만, 우리 어머니는 남몰래 몇 번이나 우셨어요. 오라버니가 이런 사람인지 몰랐다고요. 오라버니 작은 고모님이 얼버무렸거든요. 우리 어머니 말씀이, 묵가가 아무리 좋아도 안 맞는 사람과 혼인하면 안 된대요. 나 같은 성격으로는 평생 속앓이할 거라고요.”
묵칠은 얼떨떨해졌다. 이게 무슨 방도일까?
“우리 어머니 쪽은 마음이 흔들렸으니, 우리 어머니 쪽으로 손을 대면 우리 혼사가 날아갈지도 몰라요.”
명 삼낭자는 말을 마치고 길게 숨을 내쉬며 묵칠을 바라봤다. 묵칠은 어리벙벙하게 그녀를 바라봤다.
“어머니 쪽에 손을 댄다니, 어떻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