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94화: 쉽게 얻게 할 수 없는 것
영원은 문 이야를 흘겨봤고, 문 이야는 솔직하고 담담한 표정을 지었다.
“칠야, 칠야를 남으로 여기지 않아서 이런 말씀도 드리는 겁니다. 이 혼사…… 칠야는 생각 있는 분이고 제게 말을 꺼낸 이상 결정을 내리셨겠지요. 그러니 설득하지 않을 겁니다. 헛수고 아닙니까, 그렇지요? 다만, 너무 심각하게 여기지 마십시오. 잘 되면 되는 거고, 안 되어도 그만이라고 생각하세요. 세상에 널리고 널린 게 여인 아닙니까. 그렇지요? 우리 대낭자는 심지가 굳은 분이라서 진심으로 마음이 움직인 게 아닌 이상…… 크흠!”
문 이야는 연신 목을 가다듬고는 말을 이었다.
“솔직히 말해서, 우리 대낭자 같은 나이에 이렇게 심지가 굳은 분은 저도 처음 봅니다. 칠야의 안목은 참 훌륭합니다. 다만 너무 깊게 생각은 하지 마세요. 반한 마음 같은 건 몇 년 지나면 잊습니다. 내려놓고 생각하세요.”
“자네 지금 무슨 말인가?”
영원의 얼굴이 눌은 솥 바닥처럼 어두워졌다.
“저도 다 칠야를 위해서 드리는 말씀입니다. 허허, 됐습니다, 됐어요. 헛소리한 것으로 생각하세요. 대낭자 생각을 제가 어찌 알겠습니까. 칠야가 저보다 더 많이 생각하셨겠지요. 어찌 됐든 저는 대낭자의 속을 모르겠습니다. 칠야……. 예, 예, 예.”
문 이야는 영원의 음침한 눈빛에 손사래 치며 뒤로 물러났다.
“예, 못 들은 것으로 치세요. 어찌 됐든 애쓰셔야 할 겁니다. 아이고, 편안한 곳에서, 편안할지 아닐지 모를 곳으로 가는 일인데, 휴, 우리 대낭자가 바보도 아니고……. 예, 입 다물겠습니다. 다물면 되잖습니까. 칠야는 복 받으신 분입니다. 칠야, 성공하시길 바랍니다. 저는 볼일이 있어서 이만!”
문 이야는 영원에게 잡아먹히기 전에 얼른 장삼 옷깃을 여미고 날 듯이 밖으로 나가서 달아났다.
문 이야는 단숨에 다포에서 달려 나가 조금 더 멀어진 다음에 걸음을 멈추고 숨을 돌렸다. 이마를 툭툭 치며 껄껄 웃다가 행인이 괴물 보듯 바라보는 걸 보고 웃음을 거두고 엄숙하게 헛기침을 하면서 뒷짐을 진 채 이신을 만나러 한림원으로 향했다.
이신은 ‘영 칠야가 혼담을 넣을 생각이다’는 말을 듣자마자 손을 떨었고 붓끝이 선지를 물들였다. 이신은 붓을 필세에 던지고 종이를 뭉쳐서 쓰레기통에 넣고 일어서서 밖으로 달려 나가려 했다.
“어머니도 아셨지요? 얼른…….”
문 이야가 이신을 휙 잡아끌었다.
“어딜 가나! 침착하게! 아직 시작도 안 한 일이네. 자네 꼴 좀 보게! 앞으로 어쩌려고 이런 꼴을 보이는가! 아직 말이 끝나지도 않았네!”
이신은 겸연쩍은 듯 웃었다.
“옳은 말씀입니다. 제가 좀 급했지요. 말씀하세요, 말씀하세요.”
문 이야는 영원과 주고받은 말을 토씨 하나 빼지 않고 말하고는 득의양양한 모습으로 이신을 바라봤다. 이신은 미간을 단단히 좁혔다.
“이야가 그렇게 말씀하신 건…….”
이신은 근래 문 이야와 툭하면 영원이 언제 혼담을 넣으러 올지에 대해 상의했었다. 문 이야는 이 혼사를 매우 매우 흡족해했다. 그런 문 이야가 그런 식으로 말했다면…….
이신은 금세 무슨 의미인지 깨달았다.
“이야, 영 칠야가 혼담을 꺼낸다고 우리 이가에서 곧바로 옳다구나 고개를 끄덕일 거란 생각은 하지 말라고 일부러 그렇게 말씀하신 겁니까?”
문 이야는 누렇게 뜬 수염을 쓰다듬었다.
“그것도 그렇고, 또 하나는 자기가 혼담을 꺼내는 것이 대단히 허리를 굽힌 것이 아님을 알려주려는 걸세. 물론 칠야가 그렇게 생각하진 않을 걸세. 하지만 만일은 대비해야지. 둘째, 대낭자는 혼인할 생각이 없음을 알려주려고 그런 걸세. 그래도 낭자가 허락한다면, 그건 칠야의 체면을 대단히 세워준 것이라는 걸 알게 해야지.”
이신은 살짝 이상한 표정을 짓다가 이내 내려놓았다. 그것도 매우 맞는 말이었다.
“셋째, 쉽게 얻은 것은 소중히 하지 않는 법. 온갖 고생을 하며 얻은 것은 적어도 자기가 한 고생을 생각해서라도 소중히 여기겠지.”
문 이야가 이어서 하는 말에 이신은 더는 참지 못하고 쿨럭쿨럭 기침하기 시작했다. 대체, 이게 무슨 말이야.
“이야의 말씀은, 일부러 난처하게 하겠다는 뜻입니까?”
“그럴 것까지는 없고. 그냥 지켜보기만 하면 되네. 대낭자 관문은, 자네가 지켜보고, 나도 지켜보고, 태태까지 지켜보기만 하면 분명 그것만으로도 어려울 것이네.”
문 이야는 어쩐지 남의 불행을 즐기며 고소해하는 모습이었다.
이신은 생각하고 또 생각하다가 눈살을 찌푸리며 나지막이 물었다.
“그럼 만일…… 어렵다고 포기하고 가버리면요? 그럼 어찌합니까?”
문 이야는 두 눈을 동그랗게 뜨고 쥘부채로 이신의 어깨를 내리쳤다.
“이렇게 변변치 않기는! 영 칠야가 어렵다고 금방 돌아설 사람인가! 그 사람은 어려움을 알고 물러서는 사람이 아니야. 어려움이라는 게 무슨 뜻인지 평생 모를 사람이네! 잘 듣게, 정말로 포기한다면, 어려워서 포기하는 게 아니라 아예 진심이 아니었던 걸세! 그렇다면 대낭자가 큰 위험에서 벗어난 것이고!”
이신은 연신 고개를 끄덕였다.
“이야의 가르침이 옳습니다. 제가 변변치 않았습니다.”
영원은 다포에서 차를 연달아 대여섯 잔 마신 후에야 어슬렁어슬렁 밖으로 나갔다. 근심 가득한 얼굴로 생각에 잠긴 채 걸었다. 제대로 궁리해서 단번에 끝내야 할 일이었다.
묵칠도 근심 가득한 마음을 끌어안고 고개를 숙인 채 저택 앞에서 말에서 내렸다. 고개를 떨군 채 중문까지 들어가서, 고개를 떨군 채 전 노부인의 거처로 가서 문안을 드리고, 무기력하게 전 노부인과 이야기 몇 마디 나누고는, 고개를 떨군 채 거처로 돌아갔다. 거처 앞에서 걸음을 멈추고 뜨락 문을 올려다보며 멍하니 서 있다가 돌아서서 육누이의 거처로 직행했다.
묵 육낭자는 명 삼낭자와 마주 앉아 시를 짓고 그림을 그리고 있었다. 묵칠이 왔다는 말에 명 삼낭자가 붓을 내려놓고 일어서려 하자 묵 육낭자가 손사래 치며 말렸다.
“이렇게 된 이상 오라버니와 이야기를 많이 나누고 좀 더 알아봐요.”
소탈하면서도 성품이 너그러운 명 삼낭자는 살짝 어두워진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안으로 들어간 묵칠은 고개를 숙인 채 ‘육누이’ 하고 부르고는 늘 앉는 자리로 다가가 털썩 주저앉았다. 묵칠이 명 삼낭자가 있는지도 눈치채지 못하고 한숨만 푹푹 내쉬고 있자, 살짝 무릎 숙여 인사하던 명 삼낭자는 알아서 일어날 수밖에 없었다.
묵 육낭자가 피식 웃음을 터트렸다.
“오라버니, 무슨 일이에요. 꼴 좀 봐요. 정말이지…….”
묵 육낭자는 정말이지 뭐라고 형용해야 좋을지 몰랐다. 묵칠은 또 한숨을 푹 내쉬었다.
“누이야, 이 오라버니 정말 괴롭다. 아니, 괴로운 게 아니라 힘들다. 아니 힘든 게 아니라 어렵다……. 어찌 됐든 너무 어렵다. 네 오라비, 그냥 죽고 싶다.”
묵 육낭자는 명 삼낭자를 바라봤다. 제대로 기분을 설명하지도 못하는 오라버니의 모습 때문에 명 삼낭자에게 매우 미안하고 또 마음이 안 좋았다.
“대체 무슨 일이에요?”
명 삼낭자가 물었다. 그 목소리에 묵칠이 휙 고개를 들다가 명 삼낭자가 눈앞에 있는 걸 보고 너무 놀라 의자에서 벌떡 일어났다. 그러다 그만 미끄러져 바닥에 엉덩방아를 찧고 말았다.
“아이고! 누이! 삼 누이가…….”
“칠소야가 들어오기 전부터 여기 있었어요.”
명 삼낭자는 묵칠이 허둥지둥 일어나서 이대로 뛰쳐나가야 할지 아니면 다시 의자에 앉아야 할지 망설이는 모습을 보며 담담하게 말했다.
“할 말이 있어서 육저아를 찾아온 것 같은데, 그렇다면 그 어려운 일이 무언지 육저아에게 말하려 온 거잖아요. 대체 무슨 일이에요?”
묵칠은 흠흠거리며 아무런 말도 하지 못했고 명 삼낭자는 잠시 바라보다가 뒤로 물러났다.
“그럼 이야기 나누세요. 난 나중에 다시 올게요.”
명 삼낭자는 바로 돌아섰다. 육낭자도 오라비 모습을 보니 언니 앞에서는 말 못 할 일임을 깨닫고 붙잡지 않았다.
명 삼낭자가 돌아가려고 하자, 묵칠은 무슨 생각이 들었는지 대뜸 손을 들어 앞을 가로막았다.
“잠깐, 이 일은…….”
묵칠은 말을 멈추고 재빨리 머리를 굴렸다. 종신대사를 상의할 첫 번째 후보는 칠 형님인데 칠 형님은 상관하지 않겠다고 못을 박았다. 그럼 누구한테 말을 해야 하나. 육누이에게는 말 못 하고, 지금 눈앞에 있는 이 누이는…….
명 삼낭자는 눈이 휘둥그레져서 묵칠을 바라보다가 찜찜한 기분이 들었다. 왜 이러는 거지? 뭐에 씌었나?
눈앞에 있는 이 누이는, 말하자면 어려움을 함께 겪는 형제 같은 사이였다. 자기는 아내로 맞이하기 싫고 상대도 자신을 지아비로 맞이하기 싫어한다. 자기는 멍청하지만 이 누이는 꽤 똑똑하다. 자기 대신 앞날을 계획할 사람으로 골라준 거라고 할머님도 말씀하시지 않았나.
그래! 명 누이와 상의하자!
“누이에게 이야기해야 하는 일이다.”
머리를 다 굴린 묵칠은 눈 깜빡할 사이에 결정을 내렸다. 명 누이가 날 돕는 건 자기 일을 해결하는 셈이기도 하지!
“우리 나가서 이야기하자!”
묵 육낭자는 눈이 휘둥그레져서 명 삼낭자를 바라봤다. 명 삼낭자도 넋이 빠져서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네 칠 오라버니, 네 말대로 얼뜨기 같구나!
“그럼 화원으로 갈까요?”
침착한 내공이 일류인 명 삼낭자는 잠깐 넋이 빠졌다가 금세 태연해졌다.
“음, 좋지.”
묵칠은 결정은 내렸지만 근심이 줄어든 건 아니라서, 육 누이를 향해 공수하는 것도 잊고 뒷짐 지고 고개를 떨군 채 명 삼낭자의 치맛자락을 쫓아 나갔다.
화원을 반 바퀴 거닐어도 묵칠이 근심 가득한 모습으로 고개를 숙인 채 걷기만 하자 명 삼낭자가 참지 못하고 걸음을 멈추고 돌아봤다.
“대체 무슨 일이에요. 말 좀 해 봐요!”
“아? 계속 가길래 적당한 곳을 아직 찾는 줄 알았지.”
묵칠은 뱃속 가득한 근심 외에 억울한 느낌도 조금 들었다. 명 삼낭자는 그의 말에 답답해서 허공을 올려다봤다.
“여기서 이야기할까? 여기도 좋겠구나. 그래, 그럼 이야기하마. 그게 말이다…….”
묵칠은 좌로 보고 우로 보고 또 우로 보고 다시 좌로 보면서 옷깃을 쓰다듬고 소맷자락을 쓰다듬은 다음에 또 옷깃을 쓸어내렸다.
“이렇게 된 일이다. 내가 명 누이 눈에 차지 않는 거 나도 안다. 누이는 계 공자가 마음에 들었지.”
명 삼낭자는 그 말에 핏기 하나 없이 얼굴이 창백해져서 떨리는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지, 지금 날 부른 게, 날 모욕하기 위해서였어요?”
묵칠은 제 입이 또 방정을 떤 걸 알고는 덩달아 얼굴이 창백해져서 손사래 쳤다.
“아니다, 아니야! 그런 뜻이 아니다. 내 말은, 내가 하고 싶은 말은, 그러니까 나도 너와 혼인하고 싶지 않다는 것이다. 아니, 아니다. ‘도’가 아니라, 내가 누이 너와 혼인하고 싶지 않다. 혼인하고 싶은 사람이 있다. 마음에 둔 사람이 있다. 너와 혼인하고 싶지 않다. 너와 혼인해야 한다고 생각만 하면 죽고 싶다.”
명 삼낭자는 눈을 부릅뜨고 묵칠을 바라봤다. 자신이 더 화가 나고 더 수치스러워야 할 말인데, 그녀는 묵칠을 빤히 보다가 별안간 웃음을 터트렸다.
묵칠은 대번 마음이 놓여서 이마의 땀을 닦았다.
“아이고, 이것 봐라. 매번 너와 이야기하려면 겁이 나서 이렇게 땀부터 난다. 이렇게 어찌 살겠냐.”
“칠소야, 그렇게 말씀하시면 안 되죠. 설령 온몸이 땀으로 젖는대도 그건 칠소야의 자업자득이에요.”
어째서인지 몰라도, 명 삼낭자는 순간 활기차졌다.
“그래. 다 자업자득이다.”
묵칠은 풀이 죽어서 또 땀을 훔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