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금동-393화 (393/463)

393화: 상의

만 어멈은 영원을 보자마자 만나지도 않고 바로 기별하러 왔다. 이동이 고개를 끄덕이자 만 어멈이 서둘러 나갔다가 금세 다시 돌아왔다. 표정이 조금 괴상했다.

“별일은 아니랍니다. 어제 급하게 돌아가느라 낭자에게 인사하지 못했다고 일부러 인사하러 온 거랍니다. 이따 묵 칠소야와 경성으로 돌아간다고요.”

녹매는 머리를 빗겨주며 빙그레 웃었고 만 어멈은 그런 녹매를 향해 눈을 부릅떴다.

“그냥 아직 일어나지 않았다고 해.”

이동은 어째서인지 몰라도 얼굴이 붉어지는 기분이었다. 순서가 바뀐 인사법에 자기가 다 창피해서 얼굴이 붉어지는 건지, 아니면 일부러 와서 인사한다는 사실에 저절로 얼굴이 붉어지는지 모를 노릇이었다.

“예.”

만 어멈은 시원스럽게 대답하고 다시 나갔다가 또 금세 돌아왔다.

“영 칠야가 묵 칠소야의 일은 거의 정해졌다고 안심하시랍니다. 그리고 다른 것도 안심하시랍니다.”

“다른 거? 무슨 다른 일? 무슨 뜻이래?”

이동이 매우 예민하게 묻자, 만 어멈이 위아래로 그녀를 살폈다.

“아마도 그냥 한 말이겠지요. 오낭자도 일어났는데 같이 산책하고 오시겠어요? 오늘 날씨가 아주 좋답니다.”

“그래.”

만 어멈이 얼른 화제를 돌리자 이동은 묘하게 안도했다.

영원과 묵칠은 각자 고민을 품고 재빠르게 말을 달려 경성으로 들어가 동서로 갈라졌다.

영원이 정북후부 입구에서 말에서 내리자마자 두 행수가 뒤에서 달려들어 무릎을 꿇었다. 정북후부 골목 입구 다포에 종일 진 치고 있다가 드디어 영 칠야를 만난 것이었다.

“칠야!”

영원은 살며시 눈살을 찌푸렸다.

“들어와서 이야기해라.”

두 행수는 얼른 기어 일어나서 무심결에 주변을 둘러보고는 영원의 뒤를 바짝 쫓아 정북후부로 들어갔다.

영원은 두 행수가 좌우를 살피는 모습을 곁눈으로 보면서 눈썹을 까딱였다. 이 행수, 능구렁이가 따로 없군.

“말해라. 무슨 일이냐.”

영벽에 도착하자 영원이 걸음을 멈추고 두 행수를 향해 돌아섰다.

“칠야, 제발 아라를 살려주세요. 그리고 다다도요. 제발 아량을 베풀어서, 아라 그 멍청한 것을 좀 살려주세요. 나리께서 구해주지 않으면 분명 길게 못 삽니다.”

두 행수는 털썩 무릎을 꿇고 비처럼 눈물을 흘렸다.

“어떻게 구해야 할까? 네가 말해 보아라.”

영원은 눈물을 철철 흘리는 두 행수를 냉담한 눈빛으로 바라봤다.

“구해주시려고만 하면 분명 방도가 있으시겠지요.”

두 행수가 어물쩍하는 말에 영원이 싸늘하게 웃었다.

“태자가 친히 지명해서 대황자부에 보낸 것이다. 내가 아라를 구하려면 태자를 거스르게 되고 태자를 거스르면 황상을 거스르게 되는데, 내가 그 죄를 쓸 수 있을 것 같으냐?”

두 행수는 고개를 들고 영원을 올려다봤다. 입을 뻐끔거릴 뿐, 말이 나오지 않았다. 그녀는 사리에 밝은 사람이었다. 영원이 한 말은 모두 사실이었다. 아라를 구하려면 태자 눈 밖에 난다. 태자 눈 밖에 나면 황상 눈 밖에 난다. 아라 때문에 황상 눈 밖에 날 사람이 온 세상에 누가 있을까?

꼿꼿이 꿇고 있던 두 행수는 온몸에 힘이 빠져서 푹 꼬꾸라져서 소리 없이 통곡했다.

“일어나라.”

잠시 그녀를 내려다보던 영원의 목소리가 아까보다는 덜 냉랭했다.

“너는 사리에 밝은 사람이지. 나를 찾아와 부탁하는 걸 보면 아라가 내 사람이라는 걸 짐작한 것이겠지. 아라가 어리석기 짝이 없고 일을 망쳐대지만, 어찌 됐든…… 아라는 내 사람이다. 그런 이상 네가 부탁할 것 없다. 돌아가라. 대황자부에서 착실하게 지내라고 소식을 넣어라. 그리 오래 버티지 않아도 될 것이다.”

영원이 말을 마치고 돌아서서 가버리자 두 행수는 멍하니 있다가 서둘러 목소리를 높였다.

“소식을 어떻게 전합니까? 칠야?”

“그런 일로 칠야를 귀찮게 할 것 없네. 서신을 쓰고 증표 하나를 함께 내게 주면 되네.”

대영이 자기 주인 대신 하는 말에 두 행수는 놀라고 기쁜 마음으로 무릎걸음으로 돌아서서 대영을 향해 쉴 새 없이 고개를 조아렸다.

“칠야, 감사합니다. 대영 나리 감사합니다!”

영원은 옷을 갈아입고 나온 다음 금방 다시 밖으로 나가 말에 올라타 궁으로 직행했다.

지도를 보고 있던 영 황후는 갑작스럽게 찾아온 영원의 표정이 평소와 다른 걸 보고 무심결에 등을 꼿꼿이 세웠다. 눈빛도 날카로워졌다.

“무슨 일이냐.”

“일은 아니고요, 상의할 일이 있어 찾아왔습니다.”

영원의 표정이 더 진지해졌지만 영 황후는 마음을 놓았다. 표정도 아까보다 담담해졌다.

“일단 앉아라. 차 한 잔 내려줄 테니 마시고 이야기하자.”

“예.”

영원은 숨을 크게 들이쉬고는 영 황후가 평소와 다름없는 모습으로 차를 건네주자 차를 받아 향을 맡고는 잔을 내려놓았다.

“마음에 든 혼사가 있습니다.”

영원이 빤히 바라보며 다짜고짜 하는 말에 잔을 쥔 영 황후의 손에 힘이 들어갔다.

“그 말 하려고, 온 것이냐?”

“예.”

영원이 진지하게 고개를 끄덕이자 영 황후는 찻잔을 탁, 내려놓고 손에 튄 찻물을 손수건으로 닦으면서 퉁명스럽게 입을 열었다.

“정말로 큰일이구나. 말해 보아라. 어느 댁 낭자가 마음에 든 것이냐?”

“이가 낭자입니다.”

영원이 곧바로 대답하자 영 황후는 미간을 단단히 좁히고 침묵했다.

“네 혼사는 아버지와 어머니 허락을 받아야지.”

“그건 필요 없습니다. 제 혼사는 제가 알아서 하라고 아버지가 전부터 말씀하셨습니다. 어머니는 제가 집 떠나기 전에 뵀을 때 누님과 상의하면 된다고 말씀하셨고요. 누님과 상의하는 것이 어머니와 상의하는 것이나 마찬가지라고요.”

영원이 헤헤 웃었다.

“상의하러 온 것이냐, 통보하러 온 것이냐? 내가 안 된다고 하면, 소용은 있고?”

“된다고 하는 건 소용 있고, 안 된다고 하는 건 소용 없습니다.”

영원은 매우 간곡하게 대답했다. 영 황후는 영원을 흘겨보며 찻잔을 꾹 쥐었다. 잠시 고개를 숙이고 찻잔을 내려다보다가 느릿느릿 입을 열었다.

“네 혼사는 아버지도 상관하지 못하는데 내가 무슨 상관을 하겠느냐. 네 마음대로 해라. 다만 하나만 묻자. 솔직히 대답해라. 이가 낭자와 혼인하려는 것, 장공주 때문이냐?”

영원은 매우 시원스럽게 대답했다.

“아닙니다. 장공주 같은 사람은 이가 낭자가 아니라 장공주와 혼인해도 안 되는 건 안 될 사람입니다.”

영 황후는 마시던 찻물을 도로 찻잔에 내뿜었다. 못 마시게 된 차를 찻잔째 다해에 던져 넣었다.

“그렇다면, 네가 이 낭자와 혼인하려는 건, 혼인하고 싶어서라는 것이지? 다른 사람은 아무 상관 없고? 소오 때문이냐?”

“아닙니다. 누님, 내겐 누님이 소오보다 먼저입니다. 누님 때문이 아니니 당연히 소오 때문도 아닙니다. 장공주 때문은 더더욱 아니고요. 그냥 혼인할 때가 되었다고 생각해서입니다.”

영 황후는 한숨을 내쉬었다.

“내가 안 된다고 하는 건 소용 없다고 네가 말하지 않았느냐. 상의가 아니라 통보하러 온 것이구나.”

“누님, 정말로 상의하러 온 것입니다. 누님이 동의하지 않으면 계속 상의하면 됩니다. 누님이 동의할 때까지 상의할 겁니다.”

영원이 진지하고 공손하게 허리를 살짝 숙였다. 영 황후는 다시 한숨을 내쉬며 손사래 쳤다.

“상의할 것 없다. 말하지 않았느냐. 아버지와 어머니도 관여할 수 없는 일이니 나도 관여하지 못한다. 네 아내 문제는 네가 알아서 해라.”

“감사합니다, 누님!”

영원이 훌쩍 일어나서 성큼성큼 밖으로 나갔다.

영 황후는 영원이 대전 밖으로 나가 계단을 내려가서 팔을 휘두르며 매우 유쾌한 듯이 멀어지는 걸 보고 고개를 숙인 채 생각에 잠겼다. 얼마 전에 공물로 들어온 차병을 내오라고 소심에게 분부했다. 장공주를 찾아가서 바둑 몇 판 두어야 할 것 같았다.

선덕문을 나선 영원은 말을 타고 주변을 돌고 또 돌고 몇 바퀴나 돌다가 결정을 내리고 문 이야를 만나러 이가 저택으로 말을 몰았다.

문 이야는 대영과 함께 나와서 이가 저택과 그리 멀지 않은 다포에 들어가서 예를 갖추자마자 곧바로 물었다.

“이렇게 급하게 찾으시다니, 무슨 일이 생겼습니까.”

“큰일.”

영원은 그렇게만 대답하고는 아무런 말 없이 고개 숙이고 차를 마셨다. 한참 기다리던 문 이야는 의아해지기 시작했다.

“무슨 큰일이기에 이렇게 어려워하시는 겁니까?”

“혼담을 넣을 생각이네. 직접 찾아가는 게 좋을지, 아니면 매파를 통하는 게 나을지 의견을 주게. 매파를 통한다면 누구로 하는 게 좋겠나? 그리고, 일단 떠보는 게 좋겠나?”

영원은 잠시 있다가 입을 열었다. 한 번 입을 열더니 시원스럽기 짝이 없이 다 털어놓았다. 문 이야는 얼떨떨해하다가 쥐새끼 수염을 쓰다듬으며 껄껄 웃었다.

“칠야 이것 참……. 허허허. 결정하셨습니까? 음, 좋아, 좋습니다.”

“하나 마나 한 소리를. 결정 내리지 않고 도와달라고 왔겠나?”

영원은 문 이야의 웃는 모습에 조금 화가 났다.

“예, 예, 예. 하나 마나 한 소리 맞습니다.”

문 이야는 매우 사람 좋게 대답하고는 몸을 내밀고 비밀스럽게 물었다.

“낭자가 허락하셨습니까?”

“아직일세.”

영원이 내키지 않는 듯 대답했다.

“규수가 이런 일을 어찌 직접 허락하겠나. 좋더라도 말 못 하지. 낭자를 난감하게 해선 안 될 일이네.”

문 이야는 몇 가닥 안 되는 수염을 쓰다듬었다.

“역시 칠야는 영리한 분이시지요. 우리 낭자와의 혼사가 어려운 점이 바로 그겁니다. 낭자의 허락이요. 낭자만 고개를 끄덕이면 태태야 바라 마지않을 것이고 우리 대야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이 혼사에 허락을 구해야 하는 사람은 오로지 낭자입니다. 매파 같은 건 낭자가 고개를 끄덕인 다음에 내세울 일입니다. 그러니, 허락을 구하는 건 칠야가 직접 하실 수밖에요.”

영원의 안색이 조금 흐려졌다. 문 이야는 빤히 그를 바라보다가 고개를 내밀고 물었다.

“성 밖에서 돌아오시는 길입니까? 이번에 성 밖에서…….”

문 이야가 눈썹을 마구 까딱이자 영원이 그를 노려봤다.

“중요한 일이 있어서 다녀온 걸세! 무슨 생각을 하는 건가!”

“큰일이었군요.”

문 이야는 눈썹을 까닥이는 걸 멈추고 엄숙한 표정을 지었다.

“헛수고였습니까? 아니면 무슨 일이 생겼습니까? 왜 갑자기 혼담을 넣을 생각을 하셨습니까?”

“그거야 다…….”

영원은 말하다 말고 입을 꾹 다물었다.

“쓸데없는 소리 하지 말고. 자네, 좀 진지할 수 없나? 대낭자에게 어떻게 부탁하면 될지나 말해 보게.”

문 이야가 빠르게 고개를 저으며 단호하게 대답했다.

“모릅니다! 제가 그 방법을 알았다면 대낭자가 진작 재가했지, 칠야 차례가 왔겠습니까?”

“문 이야!”

영원은 문 이야의 밉상스러운 상판을 때리지 못함이 한스러웠다. 문 이야는 한숨을 길게 내쉬며 의미심장하게 말했다.

“칠야, 이런 말씀을 드려야 할지 말아야 할지…….”

영원이 삐딱하게 바라볼 뿐 대답하지 않자 문 이야는 말해도 되는 것으로 판단하고 말을 이었다.

“솔직히 이야기해서, 칠야, 우리 대낭자가 재가해야 할 이유가 있습니까?”

영원은 문 이야의 말에 말문이 막혔다. 이게 무슨 말인가?

“생각해 보세요. 우리 대낭자 같은 분에게 이가 같은 집안이 있고, 우리 대야 같은 오라버니가 있는데 어느 누구와 혼인한들, 친정에서만큼 편하게 지내겠습니까? 혼인이 무엇인지 모르는 황화대규녀도 아니고, 혼인할 때 떠들썩하고 위풍당당한 것 하나로 아둔하게 부창부수를 꿈꾸며 아름다운 미래를 꿈꾸겠습니까? 혼인이 무슨 재미가 있습니까? 제가 우리 대낭자라면 다시는 혼인하지 않고 친정에서 유유자적 평생 보낼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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