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92화: 부질없는 방문
“방도가 있으니까 말을 꺼낸 거겠지.”
이동은 갑작스럽게 찾아온 그 불편한 느낌을 뒤의 말로 대충 얼버무리고 넘겼다.
“무슨 방도가 있겠습니까. 묵 칠야를 시켜서 난리나 부리겠지요. 전 노부인의 총애를 믿고요. 하지만 전 노부인은 사리에 밝은 분입니다. 아무리 손자를 총애해도 그건 아닙니다. 종신대사를 난리 부린다고 통하겠습니까? 제가 보기엔 성사되기 어려운 일입니다.”
이동은 그 불편한 느낌 때문에 마음이 다소 어수선해졌다.
“응. 묵가 쪽은 우리가 어쩔 수 없어. 영…… 이왕 말을 꺼낸 이상 방법이 있겠지. 뭐가 어찌 됐든…… 다행히 아직까진 별일도 없고, 그저 얼굴 한 번 보고 이야기 조금 나눈 거라 아무것도 아니야.”
만 어멈이 한숨을 내쉬었다.
“그렇긴 한데, 휴, 낭자, 이렇게 해요. 영 칠야가 무슨 짓을 하든 상관하지 마세요. 상관할 수도 없고요. 사내들이 밖에서 무얼 하든, 오낭자 쪽엔, 여기까지만 하고 성사될 가능성이 커지기 전까진 아무런 말도 하지 마세요. 상 대내내에게 거론하는 건 더 안 되고요. 그리고 탕가에도요. 성사되면 큰 경사고, 오늘 오낭자 모습을 보아하니 오낭자도 기뻐할 겁니다. 탕가는 묵 승상가와 연이 되면 미칠 정도로 좋아할 것이고요.”
만 어멈이 입을 비죽였다. 그녀는 상 대내내, 오낭자, 심지어 탕호우까지 좋게 생각했다. 그러나 탕가는 어쩐지 자꾸 무시하게 된다.
“성사되지 않는대도 탕 오낭자와 상 대내내만 모르면 돼요. 그러면 아예 일어나지 않은 일이 됩니다. 오낭자가 실망할 일도 없고요. 실망하면 슬퍼질 테니까요.”
이동이 고개를 끄덕였다.
“나도 그럴 생각이야. 어멈도 그러는 게 좋겠다고 생각한다니 그렇게 해. 수고스럽지만, 어멈에게 맡길게.”
이동은 말을 잠시 멈췄다가 탕 오낭자 이야기인지 자기 이야기인지 모를 말을 중얼거렸다.
“내일부터 다시 만나지 않으면 돼.”
영원과 묵칠은 단숨에 묵칠 모친이 묵칠에게 남겨준 배가 장원으로 돌아갔다. 비가 크게 내린데다가 급하게 달린 바람에 비옷을 입었대도 두 사람이 장원에 들어갔을 땐 이미 흠뻑 젖어 있었다.
두 사람은 각자 실내로 들어가서 뜨거운 물에 몸을 담그고 나와서 생강탕 두 그릇을 연달아 마셨다. 묵칠은 옷을 갈아입고 나와서 개운하게 기지개를 켰다.
참으로 이상했다. 이가 장원에서는 십 년이라도 잘 수 있을 것처럼 피곤하더니 자기 장원으로 오자 십 년 동안 잘 필요 없을 정도로 눈이 또랑또랑했다.
묵칠은 방 안을 서성거리다가 밖으로 나가 회랑을 따라 영원의 거처로 향했다. 어쩐지 고민이 생긴 느낌이었다.
영원은 머리카락을 늘어뜨린 채 통이 큰 흰 장포를 입고 화항에 정좌해서 서신을 쓰고 있다가, 묵칠이 들어오는 소리를 듣고는 고개도 들지 않고 앉으라고 말했다.
“일단 앉아라. 서신 좀 쓰고.”
묵칠은 화항 자락에 앉아서 구석에 쌓인 책 중에 한 권을 꺼냈다. 대충 훑어보고 내던지고는 다른 책을 꺼냈다. 그렇게 구석에 있는 책 여남은 권을 싹 다 뒤적이고 다 내던지며 그중에 뭘 골라서 뒤적이며 시간을 보내야 하나 망설이는 참에 영원이 붓을 내려놓았다.
묵칠은 영원이 봉투에 서신을 넣는 걸 보고는 얼른 들고 있던 책을 내던지고 얼른 다가갔다.
“형님이 말한 대로 비가 갈수록 많이 내리는걸.”
영원은 대영을 불러 서신을 복백에게 전하라고 명령하고는 대영이 나간 후에 기지개를 켜고 차를 내리러 일어섰다.
“행군하고 전쟁하려면 첫째가 날씨를 보고, 방향을 구별할 줄 알아야 한다. 날씨를 본다는 건 소위 위로는 천문, 아래로는 지리를 보는 것이다.”
영원은 물을 따른 은주전자를 홍니로 위에 올려놓고 숯을 홍니로에 넣은 다음 화항 탁자에 올려놓았다. 그리고 찻잎과 다구를 꺼내서 화항으로 돌아와 찻잎을 그을릴 준비를 했다.
묵칠은 한쪽 다리를 접어 올려서 무릎에 턱을 괸 채 영원이 느릿느릿 차를 내릴 준비하는 걸 바라봤다. 영원이 맞은편으로 돌아와 열심히 찻잎을 그을리기 시작하자 묵칠은 매우 근심인 듯 한숨을 푹 내쉬었다.
“칠 형님, 이제 선 더 볼 것 없을 것 같다.”
“응?”
영원은 멈칫하고는 고개를 들고 묵칠을 바라봤다. 진짜로 매우 놀란 듯한 얼굴이었다.
“그만 본다고? 마음에 든 사람이 생겼나? 아니면 명 삼낭자와 혼인하는 것도 나쁘지 않겠다 싶어서?”
“그건 아니고…… 마음에 든 사람이 생겼다고 해야 하겠지.”
묵칠이 쭈뼛거리며 말했다. 영원은 그 모습에 놀란 얼굴로 손을 떨다가 차병 한 조각을 홍니로 안에 떨어뜨리고 말았다.
“마음에 든 사람이 생겼다니, 언제? 왜 난 몰랐지? 의리도 없구나. 마음에 든 사람이 있는데 한마디도 하지 않다니. 티 나지 않게 선볼 상대를 보여주느라 내가 고생하는 것도 안 보이느냐?”
“아니! 의리 없는 게 아니고! 전부터 마음에 든 사람이 있었던 게 아니야. 내가 입 다물고 있었던 것도 아니고. 그러니까, 그러니까 오늘, 오늘 생긴 거다.”
“응? 어느 댁 낭자 말이냐? 오늘 낭자라곤 두 사람뿐이었는데, 둘 다 좋은 가문 출신은 아니잖냐. 설마 시녀가 마음에 든 것이냐?”
영원의 시치미 떼는 내공은 매우 훌륭했다.
“그 탕가 오낭자다.”
원래 말을 돌릴 줄 모르는 묵칠은 몇 마디 만에 털어놓았다.
“난 오낭자가 마음에 든다. 항상 웃고, 웃는 모습도 어여쁘고. 말주변도 좋고. 아니 말주변이 좋은 건 아니고. 뭐랄까……. 아무튼 웃는 모습이 참 예쁘다. 내가 무슨 말을 하든 바로 알아듣고, 오낭자가 좋아하는 건 나도 다 좋아하고.”
“네가 혈장을 좋아해?”
영원이 즉시 콕 찌르자 묵칠이 머리를 긁적였다.
“그건 사소한 거고! 내 말은 큰일에서 말이지. 오낭자가 옳다고 생각하는 건 나도 옳다고 생각한다. 틀렸다고 생각하는 건 나도 틀렸다고 생각하고.”
“응? 두 사람이 큰일을 이야기했느냐? 둘이 언제 그렇게 많은 이야기를 한 거냐. 큰일도 이야기했다고? 나는 왜 몰랐지?”
영원이 더 놀란 듯이 묻는 말에 묵칠이 헤헤 웃었다.
“많이 이야기하지도 못했는데 큰일은 무슨. 그냥 허튼소리를 했지. 허튼소리를 마구마구 했지만…… 말이 아주 잘 통했다고!”
“탕가의 배경이…….”
영원은 난감한 얼굴로 입을 내밀며 고개를 저었다.
“가문이 아니더라도 탕가와 고가는 사돈이고, 동향이다. 쉬운 일이 아니야. 몹시 어려운 일이다!”
“쉽지 않은 일이니, 형님에게 부탁하는 거지. 쉬운 일이면 형님이 나설 필요도 없지.”
묵칠이 알랑거리는 표정을 지었다.
“그야 나한테는 쉬운 일이지.”
영원의 말에 묵칠이 순간 활짝 웃었다.
“다만, 아내감을 슬쩍 선보여 줄 수는 있어도 마음에 든 후엔 네가 알아서 할 일이다. 내가 나설 수는 없다.”
“아?”
묵칠의 마음이 한순간에 또 철렁 내려앉았다. 칠 형님의 성격이 어떤지 너무나 잘 안다. 저렇게 말한 이상 정말로 나서주지 않을 것이다. 묵칠은 다급해져서 땀이 삐질 나왔다. 형님이 나서주지 않으면 고슴도치를 마주한 개꼴이 된다. 어디에 입을 대야 하는지 모르는걸!
“칠 형님, 이러면 안 되지. 형제 사이에 어떻게 죽는 걸 보고 가만히 있을 수가 있나.”
다급해진 묵칠은 죽는다고 말하기까지 했다.
“칠 형님, 형님이 나서주어야지……. 혹시 우리 할아버님 때문에…….”
할아버님 눈 밖에 날까 봐 그러나?
영원은 담담하게 그를 흘겨보다가 마지막 말에 더 매섭게 흘겨보았다.
“내가 네 할아버님 손자도 아니고 왜 무서워하냐. 네 아내 맞이하는 일이니 네가 알아서 해야지. 아무도 대신 나서주지 못해. 그러면 일이 잘못된다.”
묵칠은 얼떨떨해졌다. 그게 무슨 말인데?
“길게 말할 것도 없다. 길게 말해 봐야 네가 알아듣지도 못하고. 핵심만 말하자. 탕가 오낭자와 너는 일단 가문이 안 맞는다. 둘째, 오낭자의 언니가 고서강의 며느리다. 그 두 가지 말고도 네 할머님이 진작 명 삼낭자를 점찍었다. 네 할아버님과 할머님은 일심동체, 명 삼낭자야말로 두 분 마음속의 손자 며느릿감이다. 내가 너와 명가 삼낭자의 혼사를 망가뜨리고 탕가 오낭자를 두 분 며느리로 밀어 넣은들, 생각해 봐라, 탕가 오낭자가 너희 가문에서 잘 지낼 수 있겠느냐?”
묵칠은 눈이 휘둥그레지고 입이 벌어졌다. 한참 만에 한숨을 푹 내쉬며 어깨를 움츠렸다. 얼굴도 울상이 되었다.
“형님, 그럼 오낭자를 놓으라고?”
영원이 싫은 표정을 지었다.
“이 변변찮은 꼴 좀 봐라! 네 어머니가 바로 상인 가문 출신 아니냐? 네 외숙은 지금도 장사꾼이다!”
“대체 어쩌라는 건데!”
묵칠은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다.
“이 머저리야!”
영원이 묵칠에게 꿀밤을 먹였다. 묵칠은 눈물이 찔끔 나와서 머리를 감쌌다. 그래도 아프다고 소리치지도 못하고 그저 웃음 지었다.
“그래, 내가 좀 멍청하긴 하지. 형님, 그냥 터놓고 말하면 안 되나?”
“네 어머님이 예전에 어떻게 묵가에 들어간 것이냐? 묵가에 들어간 후로 박대받은 적 있느냐?”
영원은 화가 나서 흥흥거렸다.
“그야 나는 모르지.”
묵칠이 솔직하게 대답했다. 어머니는 자신을 낳다가 난산으로 돌아가셨다. 어머니가 묵가에서 박대받았는지 아닌지 어찌 안담.
그러다가 순간 똑똑해졌다.
“하지만 아버지 성격만 봐도 내 생각엔 아무도 어머니를 박대하지 못했을 거다.”
“드디어 생각이 트였구나!”
영원이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네 어머니가 바로 상인 가문 여식이다. 따지고 보면 탕가 오낭자보다 조건이 안 좋지. 탕가 오낭자의 친오라비는 그래도 이번 진사 출신 아니냐. 네 외숙과 비교할 수 없지. 하지만 네 어머니는 묵가에 들어간 이래 박대받지 않았다. 네 아버지가 어머니를 지켰으니까. 그런데 너는? 첫째, 아내를 맞이하는 일도 네가 알아서 하지 못하면서 아내를 어찌 지키겠냐? 무슨 자격으로 지킬 것이냐? 그 때문에 내가 돕지 않는 것이다. 탕 오낭자를 네 힘으로 아내로 맞이해도 지킬 능력이 있을지 아닐지 모른다. 그런데 아내로 맞이할 힘도 없으면 지키지 못할 것이 자명하다. 지키지 못할 바에야 그냥 놓아주어라. 탕가 오낭자는 이가 대낭자조차 남달리 대하는 낭자다. 넌 그 낭자와 어울리지 않아.”
영원은 단숨에 말을 내뱉고는 등 받침에 기대앉았다. 다리를 꼬고 흔들거리며 자사호를 들어 올려 느긋하게 홀짝였다.
묵칠은 얼굴이 창백해져서 넋이 나간 듯 멍하니 있었다. 그러다가 별안간 손을 들어 제 뺨을 찰싹 때렸다.
“날 위해서 해준 말이었군!”
주전자 주둥이에 입을 대고 차를 마시던 영원이 목에 걸려 풉 내뱉고는 허둥지둥 자세를 고쳐 앉았다. 주전자를 내려놓고 손수건으로 대충 손을 닦고는 묵칠의 어깨를 툭툭 내리쳤다. 할 말이 없어서 몇 번이고 내리치기만 했다.
“돌아가서 잘 생각해 보아라. 자세히 생각해. 이건 중요한 일이다. 충동으로 해선 안 된다.”
영원은 간신히 말을 꺼냈고 묵칠은 진지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지금 바로 돌아가서 고민해 볼게. 방법이 떠오르면 형님에게 이야기하지.”
영원은 쉴 새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묵칠이 방에서 나가는 걸 보고 한숨을 내쉬며 등받이에 기댔다. 정말로 묵 승상 눈 밖에 나고 싶지 않았다.
다음 날, 이동은 아침 햇살이 창가에 비치자마자 일어났다. 하늘이 밝으면 일어나는 습관은 이미 뼈에 박힌 습관이었다.
이동이 소세하고 나와서 경대 앞에 앉자 녹매가 머리를 빗겨주는데, 만 어멈이 허둥지둥 들어왔다.
“낭자, 영 칠야 오셨습니다. 사환 둘만 데리고 와서 낭자가 일어나셨는지 묻습니다.”
“무슨 일이래?”
이동이 서둘러 물었다.
“가서 여쭤볼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