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금동-390화 (390/463)

390화: 기술

“껍질이 얇긴 하네요.”

이동이 고개를 내밀고 혈장을 유심히 들여다봤다. 영원도 고개를 내밀며 이동의 어깨 위로 젓가락을 쑥 내밀어 혈장을 건드렸다.

“그러니까요. 안 그래도 얇은데 찌기까지 하니, 자칫하면, 펑!”

이동은 그 ‘펑’ 소리에 깜짝 놀라서 몸을 움츠리다가 어깨가 영원의 품에 부딪쳤다. 영원이 허둥지둥 이동의 앞을 가로막았다.

“조심해요!”

손을 너무 급하게 뻗다가 젓가락이 손에서 미끄러져 솥 안 혈장 위로 떨어졌다.

“아이고야, 난리 났네!”

영원이 크게 고함치며 손을 내밀어 젓가락을 잡아채서 젓가락이 혈장을 찌르기 전에 얼른 들어 올렸다.

혈장은 무사했지만 영원의 소맷자락은 솥 안의 뜨거운 물에 빠지고 말았다.

이동은 겸연쩍은 걸 신경 쓸 겨를 없이 얼른 손을 내밀어 영원의 소맷자락을 잡았다.

“안 데었어요? 뜨거운 물이에요! 젓가락이 떨어져서 혈장이 터지면 뭐가 어때서요!”

영원은 이동보다 훨씬 빨랐다. 물이 떨어지는 소맷자락을 꾹 쥐고서 열기가 식자 말리는 척 아닌 척 이동의 손에 소맷자락을 맡겼다.

“낭자 앞이잖습니까. 잘한다고 해놓고, 망치면 얼굴을 어찌 들고 다닙니까? 옷은 상관없어요.”

“옷은 상관없지만, 당신이 다치면요?”

이동은 영원의 소맷자락을 붙들고 들어 올려 손목을 보았다. 붉은 곳 하나 없이 멀쩡한 걸 보고는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이번엔 운이 좋았어요. 앞으로 이렇게 경솔하게 굴지 말아요. 정말로 데면……. 휴!”

정말로 덴다 해도 어쩔 건가.

“그럴 일 없어요. 다 가늠했습니다. 걱정하지 말아요.”

영원은 고개를 바짝 들이대며 유난히 부드럽게 말했다. 이동은 그 말에 온몸이 부자연스러워져서 젖은 소맷자락을 뿌리쳤다.

“내가 걱정은 왜 해요. 뎄더라도 쌤통이지!”

영원은 웃으며 바닥에 떨어진 젓가락을 걷어차고 새 젓가락을 들고 와서 주저하다가 이동을 바라봤다.

“소매가 젖어서 불편하니 겉옷을 벗겠습니다. 날이 좋아서 말리면 됩니다.”

“여기엔 칠야가 입을 만한 옷이 없어요.”

이동이 사람을 보내 찾아보라고 하려고 일어서자 영원이 서둘러 그녀를 말렸다.

“됐어요, 됐습니다. 옷 가져왔습니다. 소매가 젖은 것뿐이고 마침 더워서 그런 거지, 입고 있어도 됩니다. 금세 말라요.”

“그냥 벗어요.”

이동도 사람을 부르지 않았다. 장원에 그가 입을 만한 옷이 분명 없다. 어차피 옷을 가지고 왔다니 됐다.

영원은 장삼을 벗고 소매를 걷으면서 접이의자에 앉아서 혈장을 툭툭 치고 뒤집으며 중얼거렸다.

“다행이다, 다행이야. 혈장만 멀쩡하면 다른 건 다 상관없지.”

이동의 접이의자는 아까부터 솥과 가까웠고, 영원은 그녀와 딱 붙어 있었다. 두 사람은 거의 어깨가 붙은 채 혈장이 담긴 솥을 지켜봤다. 너무 가까워서인지, 불이 뜨거워서인지, 아니면 다른 이유 때문인지, 이동은 얼굴이 뜨거워지는 것만 같았다. 심장 뛰는 속도도 불규칙해졌다.

영원 몸에서 풍기는 숨결에 숨이 막히는 것 같았다. 땀 냄새 같기도 하고 나뭇잎 향기 같기도 하고. 이동은 억지로 잠시 버티다가 얼굴이 갈수록 뜨거워지자 벌떡 일어나서 천막 가장자리로 걸어갔다.

“왜 그럽니까?”

영원은 얼떨떨한 듯 손을 멈추고 고개를 들어 이동을 바라봤다. 이동은 목이 바짝 타는 것 같았다.

“아니에요. 불 곁에 있으니 좀 더워서요. 숨 좀 돌리려고요. 계속하세요. 터지겠어요.”

영원은 주저하다가 솥 아래 곧 불이 꺼질 것 같은 장작을 보고는 젓가락을 내려놓고 장작을 조금 더 넣었다.

“그럼 조금 옆에 서 있어요. 거긴 바람구멍이에요. 더운데 바람구멍에 서 있으면 안 돼요. 불도 크지 않은데, 하긴, 너무 솥 가까이에 서 있었지.”

이동은 고분고분 옆으로 더 물러났다. 두 손으로 손수건을 들고 햇볕에 쬐는 게 싫은 듯이 손수건으로 앞을 가렸다. 얼굴이 너무 심하게 뜨거웠다. 어쩌면 심하게 붉어졌을지도 모른다. 가려야 했다.

“다 되어갑니다. 이리 와 봐요.”

영원이 손짓했다. 바람을 잠시 쐬며 마음을 다스린 이동은 다 되어간다는 말에 돌아서서 접이의자를 조금 멀리 당기고 앉아서 솥을 향해 고개를 내밀었다.

영원은 옆 탁자에서 옷 꿰맬 때 쓰는 바늘을 들어서 혈장을 가볍게 찔렀다. 바늘을 빼자 핏물이 작은 바늘구멍을 통해 스며 나왔다.

“아직 안 됐군.”

영원의 말에 이동은 금세 깨달았다.

“피가 굳어야 하는 거군요? 아직 안 굳었어요?”

“맞습니다. 역시…….”

“똑똑하지 않아요. 이런 간단한 걸 똑똑해야 아나요?”

이동이 영원의 말을 막자 영원은 엄숙하고 진지하게 말했다.

“똑똑하다고 하려는 게 아니라 나뭇잎이 떨어지는 것만 봐도 가을이 온 걸 알듯이 변화를 잘 알아챈다고 하려던 겁니다.”

이동은 ‘하’ 소리를 내며 솥에 든 혈장을 가리켰다.

“저것도 찔러 봐요. 저건 됐을지도 모르잖아요.”

“그러려던 참입니다.”

영원이 나머지 세 줄을 찔렀다. 그중 하나가 피가 조금 나오는 듯하더니 잠잠한 걸 보고 영원이 흥분한 듯 하하 웃었다.

“됐다, 됐어. 하나가 됐으니 나머지도 곧 될 겁니다. 큰일 완성!”

영원이 펄쩍 뛰어올라 탁자에서 은 쟁반을 꺼내 이동에게 건넸다.

“이거 들어요. 움직이지 말고.”

이동이 쟁반을 들자 영원이 양손에 젓가락 한 쌍씩 들고 혈장의 양 끝을 잡아 조심스럽게 들어 올려서 쟁반에 놓았다. 이동은 쟁반을 든 채 영원이 바늘을 찌르는 걸 지켜봤다. 역시나 첫 줄이 익자 나머지 세 줄도 금세 다 익은 모양이었다. 영원은 혈장 세 줄을 다 꺼내고 쟁반을 받아 갔다.

“자, 이제 썰어 봐요.”

이동은 탁자 쪽으로 따라가서 영원이 쟁반에서 혈장 하나를 들어 올려 도마에 내려놓는 걸 바라봤다. 영원은 옆에서 앞이 뾰족한 칼을 꺼내서 흥분한 얼굴로 손잡이를 이동에게 건넸다.

“한번 해 봐요. 조심하고. 힘을 너무 주면 안 됩니다. 날카로운 칼이라 살짝 대도 잘려요.”

이동은 칼을 받아쥔 다음, 구경할 생각에 신난 듯한 영원을 흘겨봤다. 그녀는 손잡이를 쥐고 잠시 가늠하고는 젓가락을 들고 혈장을 뒤적였다. 선지를 먹어 봤고 자르는 것도 별로 힘든 게 없었다. 이동은 다시 영원을 힐끔 바라봤다. 영원의 표정만 봐도 혈장 자르는 게 쉽지 않을 듯했다.

이동은 한 손으로 칼을 쥐고 다른 손으로 칼을 쥔 손을 잡고서 이리저리 가늠했다. 자를 위치를 구하고 칼을 대려는데 영원이 손을 내밀어 말렸다.

“잠깐! 여기는 안 됩니다. 여기를 자르면 이 혈장 한 줄을 다 버려야 하잖아요. 자, 여기.”

영원이 혈장 끝 쪽을 가리켰다.

“여기를 자르면 적어도 절반은 지킵니다.”

이동은 그를 흘겨보며 코웃음 치고는 살짝 자르라는 영원의 충고를 무시하고 힘을 주어 내리쳤다. 혈장은 잘리지 않고 안에 든 것이 덩어리째 쏟아져나왔다.

영원은 아까운 표정을 지었다.

“아이고, 아까워라! 봤지요? 내 이야기를 안 믿더니. 북삼로 제일 혈장은 찌는 것도 기술, 자르는 것도 기술입니다. 자자, 그냥 내가 할게요.”

영원은 이동에게 칼을 넘겨받고 보라는 듯이 몸을 틀고 섰다.

“잘 봐요. 내 솜씨를 똑똑히 보세요. 자, 이렇게. 두 손가락으로 살며시 겉을 쥐고, 힘을 너무 주면 안 됩니다. 너무 힘이 안 들어가도 안 되고요. 그리고 스윽. 봤지요? 어때요? 내 칼솜씨, 흠잡을 곳 없지?”

영원은 가지런히 썰린 혈장을 칼로 들어 올려서 접시에 올려놓고는 한 손으로 혈장을 잡고 계속해서 잘랐다. 한 조각 자를 때마다 반드시 이동 앞에 내밀고 자랑하고는 접시에 올려놓았다.

영원은 한 접시 가득 채우고는 길게 한숨을 내쉬더니, 칼을 내려놓고 별안간 큰소리로 대영을 불렀다. 대영이 향긋한 향유에 버물린 다진 마늘 접시를 들고 쪼르르 들어왔다. 이동을 향해 굽실 예부터 갖추고는 마늘 접시를 혈장 접시 옆에 놓고 은 쟁반에 남은 혈장을 옮겨 담았다.

대영은 혈장을 옮겨 놓더니, 거의 눈 깜빡할 사이에 두꺼운 수건으로 손을 감싸고 김이 모락모락 나는 작은 솥을 들고 왔다. 얇고 넓게 썬 살코기와 오화육, 산채 등이 솥 안에서 부글부글 끓고 있었다. 가지런히 썬 혈장을 솥 안에 넣었다.

“맛봐요! 따듯할 때 먹어야 맛있습니다.”

영원이 젓가락을 이동에게 건넸다. 이동은 젓가락을 든 채 향유 마늘즙을 두른 혈장과 탕 사이에서 망설였다.

“이거부터 먹어요. 이게 최곱니다.”

영원이 혈장을 가리키자 이동이 젓가락을 들고서 다소 두려운 얼굴로 혈장을 들어 올렸다. 영원이 얼른 작은 접시를 들어 혈장 아래 바쳐주고는 이동이 혈장을 입에 넣는 걸 행여나 마음에 들지 않을까 걱정하는 얼굴로 빤히 바라봤다.

이동은 천천히 맛을 보고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확실히 맛있네요. 선지보다 더 야들야들하고 맛도 좋네요. 피비린내는 조금도 나지 않고 창자 외피는 씹는 맛이 있고. 맛이 괜찮아요.”

이동이 영원에게서 작은 접시를 받아들고 솥에서 혈장 두 조각과 살코기, 산채를 집어 올리자 영원이 국자로 탕을 조금 떠주며 싱긋 웃었다.

“이렇게도 먹어 봐요. 더 맛있습니다.”

이동은 천천히 먹고는 탕도 마시고 살며시 숨을 내뱉었다.

“맛있네요. 탕이 좋아요. 새콤한 것이 하나도 느끼하지 않아요.”

“그야 그렇지! 내가 좋다고 하는 건 분명 좋은 겁니다!”

영원이 하하 웃었다. 좋아할 줄 내 알았지!

이동은 혈장을 더 먹으려다가 탕 오낭자와 묵칠이 아직 저쪽에서 청소하는 걸 떠올리고는 ‘어머나’ 하고 외쳤다. 겸연쩍음에 얼굴이 저절로 붉어졌다. 손님이 있는 것을 깜빡하다니, 어쩌다가 이리 부주의해졌을까.

“오낭자와 칠소야가…….”

이동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영원이 웃으며 손사래 쳤다.

“낭자가 걱정할 것 없어요. 벌써 사람을 보냈습니다. 이 솥은 낭자 맛보라고 일부러 끓인 겁니다. 저쪽 큰 솥은 아직 더 끓어야 해요. 살저채는 작은 솥보다 큰 솥으로 끓이는 게 더 맛있습니다. 큰 솥이 다 되면 큰 솥 것도 맛봐요.”

이동이 마음을 놓고 계속 이야기하려고 하는데 어느새 녹나무 쪽에서 만 어멈이 엄숙한 얼굴로 앞장서서 오고 묵칠과 탕 오낭자가 이야기하면서 걸어오는 게 보였다. 녹매와 시녀들은 뒤를 따라서 오고 있었다.

이동이 그들을 발견했으니 묵칠과 탕 오낭자도 당연히 이동과 영원을 발견했다.

“무슨 냄새지? 참 구수하군.”

묵칠이 후다닥 달려오며 과장되게 고함쳤다.

하지만 탕 오낭자는 무심결에 걸음을 늦추더니, 묵칠이 조금 더 멀어지자 걸음을 이동 쪽으로 옮겼다.

천막 안으로 들어온 탕 오낭자는 고개를 숙이고 영원을 향해 예부터 갖추고 살금살금 이동 곁으로 다가가서 고개를 내밀고는 기쁜 듯이 말했다.

“혈장이네! 정말 잘 만들었어요. 맛있겠어요!”

“응, 맛이 괜찮아. 너도 맛보렴.”

이동이 그렇게 이야기하자 문희가 서둘러 젓가락을 탕 오낭자에게 건넸다. 탕 오낭자는 젓가락을 접시에 뻗다가 얼른 다시 거두고는 이동과 영원을 돌아보며 겸연쩍은 듯 말했다.

“언니가 아직 먹지 않았는걸요. 그리고 칠야, 또 칠소야도요.”

“이건 맛보라고 먼저 썰어둔 거야. 난 맛봤어. 맛있더라. 그런데 나는 잘 몰라서 정말로 잘 만들어졌는지 아닌지 모르겠어. 네가 맛보렴.”

이동이 설명부터 하고 고개를 끄덕이자 탕 오낭자는 연신 고개를 끄덕였다.

“제일 좋아하는 음식이라 이건 내가 좀 알아요. 내가 맛볼게요!”

탕 오낭자는 이동보다 훨씬 능숙하게 혈장을 집었다. 젓가락을 들자마자 입에 쏙 넣고 만족스러운 듯 콧소리를 소리를 내면서 또 하나를 집어 먹었다.

“우리 집에서 만드는 것보다 맛있어요. 야들야들해. 경성에 온 이래 다 좋은데 혈장을 먹을 수가 없어서 괴로웠어요. 하필 혈장을 만드는 요리사를 데리고 오지 않았는데, 언니 집 종복은 혈장까지 이렇게 잘 만드네요!”

“혈장, 그리고 저기 살저채들, 다 영 칠야의 솜씨야.”

이동이 웃으며 설명하자 탕 오낭자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영 칠야, 이런 것도 만들 줄 아세요?”

“우리 칠 형님은 못 하는 게 없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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