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금동-389화 (389/463)

389화: 고수 맞습니다

“이제 생각났다. 응, 그렇게 말한 것 같군. 그때는 분명 그럴 작정이었을 겁니다. 그래서 그렇게 이야기했겠지. 지금은……. 낭자, 내가 그렇게 말했을 때 여 승상이 믿었을까요?”

“여 승상이 믿었는지 아닌지는 모르겠고요, 당신은 언제나 자기가 한 말을 지킨다고 하지 않았던가요? 일언 중천금이니, 대장부의 말은 침을 뱉어도 웅덩이를 팔 수 있을 만큼 무겁다고 하지 않았던가요?”

이동은 어차피 영원은 가끔 이렇게 하나도 믿음직하지 않다고 생각했다.

영원이 두 손으로 제 얼굴을 문질렀다.

“그렇긴 하지. 난 말수가 적은 사람인데 왜 낭자 앞에선 이렇게 말이 많았을까요. 무슨 말이든 다 한 것 같은데? 이건 지키기 어려운 약속인데, 당시에 왜 깊이 생각하지 않았을까. 여 승상에게 그런 말을 하지 말았거나 했더라도 낭자한테 이야기하지 말아야 했는데. 낭자만 모르면 나중에 얼마든지 모른 척……. 크흠, 비록 그런 적은 한 번도 없었지만……. 지금은 모른 척하려야 할 수가 없군. 됐습니다. 이런 건 때가 되면 다시 생각해야 합니다. 그때가 되면 남아 달라고 여 승상이 부탁할지도 모르잖습니까? 만사 방법이 있는 법입니다.”

이동은 걸음을 멈추고 돌아서서 영원을 빤히 봤다. 영원이 제 머리통을 내리쳤다.

“낭자에게 한 말은 내가 재가 되더라도 지킵니다. 다른 사람은, 여 승상에게 한 말은 최대한 지켜야지요. 하지만 낭자도 알다시피 여 승상 같은 사람에게 한 말은, 조정은 원래 전쟁터 같은 곳이라 했던 말을 다 지킬 수가 없습니다……. 낭자는 사리 밝은 사람이니 이런 일은 어쩔 도리가 없다는 걸 알 겁니다.”

이동은 깊이 숨을 들이마시고 영원의 말에 대답하지 않고 돌아서서 걸어갔다.

“이야기하면 바로 이해해 줄 줄 알았다니까. 우리 둘은 말이 잘 통한다는 걸 진작 알고 있었습니다. 이 이야기는 됐고, 호주 고향 집에 가 본 적 있습니까?”

“없어요.”

이동도 영원이 경성을 떠날지 말지, 언제 떠날지에 대해 더 이야기하고 싶지 않아서 자연스럽게 넘어가는 화제를 이어받았다.

“하지만 호주에 점포 몇 개 있고 대장궤 중에 호주 사람이 많아요. 고향 집이 아직 호주에 있어서 거의 매달 호주에서 보내는 물건을 받고요. 외할머니가 계실 땐 한 달에 두어 번씩 평소에 먹는 은행, 연자 같은 걸 호주에서 받았죠. 외할머니는 경성 연지를 절대로 쓰지 않았어요. 온 세상을 통틀어도 호주 심가 노포에서 파는 연지가 제일 좋다고요.”

“어르신이 경성에서 사느라 고생하셨군.”

영원이 탄식하자 이동이 고개를 끄덕이며 연신 한숨을 내쉬었다.

“경성으로 옮기게 되었을 때 어머니는 결심을 바로 하지 못하셨대요. 오히려 외할머니가 그러자고 했대요. 어차피 어머니는 재가할 생각이 없고 자식이 딸 하나뿐이니 경성에서 사는 게 낫다고요. 호주는 작은 지방이라 꽉 막힌 분위기니까 경성으로 가는 게 낫다고요.”

외할머니를 떠올린 이동은 조금 우울해졌다. 지금 외할머니를 다시 떠올리니 중간의 몇십 년이 다 사라진 기분이었다. 외할머니의 목소리, 웃는 모습, 작은 습관, 성격까지 다 떠오르는 듯했다.

“낭자의 삼대, 그리고 더 위로 증외조모까지 다 대단한 여인들입니다.”

영원은 한 손을 가슴에 올리고 이동을 향해 살짝 허리를 숙였다.

“정말 감탄합니다.”

“어머니까지는 몰라도 난 그런 칭찬 가당치 않아요. 난 어리석어요.”

이동은 영원의 인사를 받지 않고 살며시 옆으로 비켜섰다.

“나는 정말로 어리석은 사람이에요. 그냥 운이 조금 좋았을 뿐이고요.”

다시 돌아올 기회가 생겼으니 이번 세상에서 얻은 모든 건 운이 좋아서라고 볼 수밖에 없었다.

“낭자는 나처럼 큰 지혜를 갖추고도 자신을 똑똑히 들여다볼 줄 아는 사람입니다. 진정한 고수랍니다.”

영원의 그 말에 이동이 허리를 숙이고 웃었다.

“난 큰 지혜 같은 건 없어요. 칠야가 그런지 아닌지 모르겠지만, 그 뻔뻔한 점은 천하제일이 맞네요.”

“우리 둘은 언제나 마음이 통하니까 하고 싶은 말을 터놓고 해서 그런 겁니다. 사실 난 숫기 없는 사람입니다. 우리 둘 사이엔 그런 게 필요 없을 뿐이지요. 안 그렇습니까?”

이동은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저었다.

“갈수록 못 들어주겠네요. 우리 둘이 왜요? 칠야는 뻔뻔해서 체면이 필요 없는지 몰라도 난 필요해요.”

영원은 이동의 입에서 ‘우리 둘’이라는 말이 나오자 신이 나서 눈썹이 꿈틀댔다.

“그럼요, 그럼요. 앞으로 체면 상할 일은 내가 합니다. 체면 서는 일을 낭자가 하고요.”

“하.”

이동은 갈수록 믿음직스럽지 않은 허튼소리를 상대하지 않고 저 앞에 보이는 장원 입구 쪽으로 걸음을 서둘렀다. 영원은 얼른 쫓아가서 이동을 앞질렀다.

“서두르지 말고 잠깐 기다려요. 다 정리했는지 내가 보고 오겠습니다. 낭자는 다 정리하고 들어가요. 괜히…….”

돼지 잡는 모습은 그리 보기 좋은 광경이 아니었다.

“그래요.”

이동은 걸음을 늦췄다.

영원은 다리를 높이 치켜들어 펄쩍 뛰더니 허공에서 반 바퀴 돌면서 날아올랐다. 그러고는 날 듯이 앞으로 달려갔다.

이동은 눈이 휘둥그레지고 입이 벌어졌다. 마을에 사는 얼뜨기같이 왜 이래?

영원은 저 앞에서 재빨리 둘러보고는 손짓하지도 목소리 높여서 부르지도 않고 다시 성큼성큼 이동 곁으로 다가와 보물을 바치듯 공손히 말했다.

“다 정리됐습니다. 혈장도 준비됐고요. 갑시다. 혈장부터 쪄드리지요.”

이동은 웃느라 고개도 들지 못하고 장원 입구로 향했다. 장두가 고기를 나눠주던 곳에 벌써 큰 솥 몇 개가 걸려 있고 장두 처가 건장한 아낙들을 거느리고 솥을 씻고 물을 버린 다음 헹구고 있었다.

영원의 종복들은 쉴 새 없이 오가면서 물을 길어 오고 돼지털을 깎고 고기를 씻었다. 묵칠과 함께 온 사환과 종복도 드디어 일하는 무리에 합류해서 파를 벗기고 마늘을 깠다. 장두와 소작농은 종복들의 지휘하에 바쁘게 뛰어다녔다.

이동은 잠시 곁에 서서 그런 광경을 바라봤다. 영원이 말한 대로 살저채를 만드는 건 떠들썩한 일이었다.

“이리 와요!”

영원이 손짓하자 이동이 천천히 다가갔다. 천막 아래 중간 크기의 솥이 걸려 있었다. 깨끗이 씻은 솥엔 깨끗한 물이 반쯤 담겨 있었고 옆에 커다란 옹이에도 깨끗한 물이 담겨 있었다. 물 안엔 어린애 팔뚝만 한 시커메 보일 정도로 자줏빛을 띠는 혈장이 잠겨 있었다.

“앉아요. 혈장은 천천히 쪄야 해서 시간이 좀 걸립니다. 내가 혈장 찌는 거 보면서 여기 앉아 있어요. 대사부나 선보일 솜씨랍니다.”

영원이 작은 접이의자를 들고 와서 솥과 조금 떨어진 곳에 놓았다. 이동은 영원이 뭘 만들어 내는지 지켜볼 요량으로 치마를 가다듬으며 앉았다.

영원은 솥 앞에 웅크리고 앉아서 고개를 숙이고 솥 아래 장작 몇 개를 들쑤시면서 자리를 옮겨 놓자, 불길이 확 타올랐다. 영원은 뒤로 물러나서 쳐다보고는 흡족해하며 웅크린 채 뒤로 물러나서 혈장이 담긴 옹이 쪽으로 갔다. 손을 덥석 넣어 혈장 한쪽 끝을 잡고 조심스럽게 꺼내서 킁킁 냄새를 맡더니 흡족한 듯 고개를 끄덕였다. 혈장을 다시 넣고는 이동을 돌아보며 웃어 보였다.

“혈장을 채우는 게 쉬운 것 같아도 사실 제대로 하려면 어렵습니다. 피를 얼마나 채우는지 매우 중요하거든요. 이건 장대의 솜씨입니다. 장대의 솜씨는 북삼로 일등입니다!”

이동은 양손으로 턱을 괴고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는 잘 모르는 것이니 영원이 그렇다면 그런 거겠지.

솥의 물이 끓자 영원이 다시 솥 앞으로 다가갔다. 장작을 하나만 남기고 솥의 끓는 물이 잠잠해지는 걸 바라보다가 끓는 듯 말 듯 해지자 웃는 얼굴로 이동을 돌아봤다.

“됐습니다. 혈장 찌는 덴 이 정도 불이면 됩니다. 물은 끓는 듯 마는 듯하면 되고요.”

이동은 접이의자를 조금 앞으로 옮겨서 고개를 내밀고 솥 안을 들여다봤다. 주방에 들어가 본 적이 없으니 영원이 하는 말에 그냥 고개를 끄덕였다. ‘물이 끓는 듯 마는 듯’이 어떤 건지 사실 잘 모른다.

영원은 일어서더니 혈장이 담긴 옹이를 솥 옆으로 옮기고는 한 손으로 혈장 끝을 잡아서 한 자 길이의 두꺼운 혈장을 조심스럽게 솥에 넣었다. 한참 들여다보다가 다시 다른 혈장을 잡아서 천천히 넣었다.

“안엔 돼지 피고, 밖은 뭐예요?”

이동은 모두 한 자 길이에 두께가 다 똑같은 혈장을 바라보며 물었다. 보고 있어도 무엇으로 내용물을 담은 건지 떠오르지 않았다.

“돼지 피와 돼지 창자라서 혈장이라고 하는 겁니다.”

영원은 혈장을 잘 넣어놓고 눈을 떼지 않고 지켜보다가 솥 아래 유일하게 남은 장작을 이리저리 옮겼다. 그리고 솥을 또 잠시 지켜보다가 드디어 숨을 내뱉으며 이동의 물음에 대답했다.

“걱정하지 말아요. 깨끗하게 씻었답니다. 내가 얼마나 깔끔한지, 다들 잘 압니다.”

영원이 일부러 설명했다. 차라리 설명하지 않으면 모를까, 설명한 바람에 오히려 더 생각났다. 이동은 저도 모르게 영원을 흘겨봤다.

“쓸데없는 말은 왜 해요. 이게 뭐라고. 반루 대표 음식 중에도 갖가지 대창 요리가 있어요. 간류비장(干熘肥腸: 대창 볶음), 화폭비장(火爆肥腸: 매운 대창 볶음), 구전대장(九轉大腸: 기름에 튀긴 다음 조미하는 대창 요리), 나도 즐겨 먹어요.”

“난 아무 생각을 안 했습니다만. 낭자가 생각한 거면서.”

영원이 앞뒤로 몸을 흔들며 웃어댔다. 이동은 일어서서 다른 접이의자를 꺼내 그에게 건네고 다시 자리에 앉았다. 영원도 자리에 앉아서 웃으며 솥을 가리켰다.

“이건 낭자가 이야기한 요리보다 더 맛있습니다. 이따 익으면 두껍게 잘라서 반은 산채(酸菜: 절임 배추, 중국식 백김치)랑 먹고 반은 마늘 다진 것과 먹읍시다. 북삼로 일등 요리입니다!”

“북삼로에서 일등 하기 참 쉽네요. 벌써 일등이 둘이잖아요. 북삼로 혈장 만들기 일등, 북삼로 일등 요리, 곧 세 번째 일등이 나오겠네요. 이 한 끼 먹을 동안에 나오는 북삼로 일등은 다 칠야의 말에 달린 거 아닌가요?”

이동이 놀리듯 말했다.

“내가 한 말은 다 사실입니다!”

영원은 억울해하며 젓가락을 들고 솥 안의 혈장을 툭툭 건드렸다. 솥 안의 물은 혈장을 넣은 후에 다시 끓는 듯 마는 듯 끓었고 영원은 솥 밑의 장작을 빼서 끓는 듯 마는 듯 끓는 물을 거의 끓지 않는 상태로 유지했다.

“불이 매우 중요하군요.”

이동이 턱을 괸 채 평가하자 영원이 즉시 엄지를 치켜들었다.

“똑똑해! 한눈에 핵심을 알아보는군!”

이동은 피식 웃고는 아예 그를 상대하지 않고 솥 안의 혈장을 바라봤다. 영원도 혈장을 지켜보며 수시로 건드리고 자리를 옮겼다.

“정말로 만들어 본 모양이네요.”

이동은 영원의 노련한 동작을 바라보며 감탄했다.

“물론이지. 말했잖습니까. 나는 살저채 고수라고. 고수 중의 고수. 이제 직접 봤으니 믿어집니까?”

영원이 억울한 듯 투덜거렸다. 날 믿지 않다니요!

“네, 봤어요. 돼지를 잡은 건 당신이 아니고, 혈장을 채운 건 당신이 아니었죠. 찐 것뿐인데, 그러고도 고수 중의 고수예요? 그럼 칠야가 다 찐 다음에 내가 썰면, 나도 고수 중의 고수겠네요?”

“혈장을 찌는 게 쉬운 게 아닙니다. 아직 안 믿는 모양이군. 혈장은 찌기 어려울 뿐만 아니라 자르기도 어렵습니다. 못 믿겠으면 이따 썰어 봐요. 잘 썰면 정말로 고수 중의 고수가 맞습니다. 만약 잘 썰지 못하면……. 그냥 내가 썰면 됩니다. 내가 썰 테니 낭자는 먹기만 해요.”

영원은 혈장 네 줄을 빙글 돌리고 고개를 내밀고 들여다보다가 긴 젓가락 두 쌍을 같이 들고 조심스럽게 혈장을 뒤집었다.

“봤습니까? 이 뒤집기가 바로 기술입니다. 나는 재주가 좋아서 쉽게 뒤집는 거지, 재주가 떨어지는 사람은 네 줄 중에 적어도 하나는 터집니다. 혈장이 터지면…….”

영원은 젓가락을 휘휘 휘두르며 끔찍한 표정을 지었다.

“피가 다 솥에 튑니다. 그럼 솥 안 물이 핏물이 되죠. 그럼 혈장 한 솥을 다 못 쓰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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