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84화: 꿈이 야무져
잠시 후, 두 행수가 화려한 옷차림에 오만해 보이는 어멈을 데리고 위로 올라왔다. 어멈은 올라오자마자 생글생글 웃으며 경멸의 기색이 가득한 눈빛으로 예를 갖추면서 아라를 위아래로 훑었다.
두 행수는 어멈의 공손한 모습에 내심 안도했다. 공손할수록 희망이 있다.
“누가 자네를 보낸 거지?”
아라가 두 행수를 힐끔 보고 물었다. 두 행수와 여러 해 손잡은지라 손발이 척척 맞았다.
“우리 어르신이지, 또 누가 있겠습니까? 아라 낭자, 지금 차림도 훌륭하군요. 지금 바로 가시지요. 아무것도 챙기지 않아도 됩니다. 챙겨도 어차피 앞으로는 못 씁니다.”
어멈은 대답부터 하고는 곧바로 재촉했다.
“자네 저택으로 가는 건가?”
아라가 다시 두 행수를 힐끔 보고 물었다. 어멈은 웃기만 하고 대답하지 않고 재촉만 했다.
“아라 낭자, 어서 가세요. 늦으면 안 됩니다.”
“옷은 챙기지 않더라도 몇 년 동안 모은 은자와 장신구는 가지고 가야지.”
두 행수가 손에 찬 금팔찌를 흔들자 아라가 바로 알아듣고 말했다.
“그건 그렇군요. 그럼 얼른 챙기세요.”
어멈은 헛웃음 지었다. 그 궁에 있으려면 은자가 있고 없고, 그야말로 천지 차이지.
“다다, 가서 챙기렴.”
아라는 다다에게 분부하고 두 행수를 바라봤다. 두 행수가 콧등을 문지르자, 웃으며 말을 이었다.
“금은보화도 가지고 가야 하고, 다다도 반드시 데리고 가야 해. 그리고 두 행수도. 다 어릴 때부터 날 모신 사람들이야. 내가 어디에 있든 이 두 사람은 함께 가야 해.”
어멈은 웃음 띤 두 행수, 그리고 아라를 번갈아 봤다. 보아하니 궁으로 데리고 가려고 한다는 걸 이미 알고 있는 듯했다.
은자도 가지고 가려고 하고 사람도 데리고 가려고 하다니, 속셈이 참 깊군. 하긴 그렇지. 이 정도 속셈이 없으면 더러운 창기 주제에 어떻게 태자를 구슬려서 궁에 들어가겠나. 사내 시중에 도가 튼 사람이니 대갓집 규수와 비교할 수가 없겠지. 어쩌면 정말로 하늘에 날아올라 봉황이 되어 두 번째 귀비 마마가 될지도 모르고.
그 생각이 들자, 어멈의 표정이 변했다. 온몸으로 풍기던 거만한 느낌도 사그라지고 공손해졌다.
“그야 당연하지요. 낭자 혼자 들어가라는 건 말도 안 되지요.”
두 행수는 조금씩 안도하면서 아라를 향해 눈짓하고는 어멈에게 다가가 노련하게 은표를 찔러 주었다.
“어멈, 말씀 좀 해 보세요. 귀댁에 며칠 머물다가 나오는 겁니까, 아니면…… 우리도 준비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아이고, 뭘 이런 걸 다.”
은표를 받은 어멈은 목소리를 낮추며 샐샐 웃었다.
“아라 낭자를 모시고 저택에 들어가면 마차에서 내릴 것 없이 뒷문으로 바로 나와서 궁으로 모시라는 분부였습니다.”
두 행수는 크게 안도하고는 뿌듯해 보이는 아라를 힐끔 돌아보고 다시 어멈을 향해 웃음 띠며 말했다.
“참 잘 되었군요. 어멈, 솔직히 말해서 우리 낭자는 괜히 여기저기 돌아다니다가 시간을 지체할까 봐 걱정했답니다. 어멈도 알겠지만 태자 전하의 성격이, 분부하면 즉시 해야 하지 않습니까.”
“그렇지요. 태자 전하는 원래 일 처리가 벼락같은 분이시지요. 아라 낭자, 축하합니다. 앞으로 대단해지시겠어요.”
어멈은 시기가 느껴지는 말투로 그렇게 말했다. 삼류 창기가 높은 나무에 오르다니. 몇 년 지나 아들이라도 낳으면……. 아이고머니나, 세상일은 모를 일이지!
두 행수는 철저히 마음 놓고 웃으면서 어멈을 아래로 안내했다.
“일단 내려가서 차 마시면서 기다리세요. 우리 낭자가 정리 좀 하고 옷 갈아입을 시간 좀 주세요. 어쩌면 들어가자마자 태자 전하를 만날지도 모르잖습니까. 정리하고 들어가면 태자 전하도 기쁘고, 태자 전하가 기뻐하면 다들 기뻐할 일 아닙니까.”
“그건 그렇지요.”
어멈은 물론 최대한 편의를 봐줄 생각이었다.
두 행수는 어멈을 기다리게 마련해 주고 서둘러 다시 위층으로 올라갔다. 다다는 벌써 큰 상자, 큰 보따리 하나를 정리했고 아라는 멍하니 넋을 잃고 있었다.
두 행수가 상자와 보따리를 보고는 입을 떼려는데 아라가 휙 돌아서서니 두 행수를 빤히 바라봤다.
“나 궁에 가지 않을래! 행수 어르신, 어서 칠야에게 가 봐요. 아니지. 어르신은 저 어멈을 지켜야지. 다다, 네가 가. 어서 칠야에게 가!”
두 행수는 화가 나서 어쩔 줄을 몰랐다.
“어리석은 것! 칠야를 찾아가서 어쩌게? 태자가 널 궁으로 들이려는데, 칠야가 막을 수 있을 것 같아?”
“그럼? 휴. 나도 참…….”
스스로 죽을 자리에 다리를 뻗고 말았다. 반년이나 1년 정도 잠잠히 있으라고 칠야가 그랬는데, 왜 참지 못했을까!
“그럼 어떡해요? 입궁하면 옥에 들어가는 거랑 뭐가 달라요. 옥보다 더 처참하지.”
아라는 눈물이 나올 것 같았다.
“침착해라!”
두 행수는 아라의 모습에 답답해서 가슴이 오르락내리락했다.
“일단 눈앞에 닥친 일부터 해결하자. 입궁하라니 서둘러 들어가야지. 목숨부터 지켜야 할 것 아니냐. 휴. 대체 몇 번 이야기했어, 이 멍청한 것아. 칠야가 왜 기다리라고 했을지 왜 생각하지 않은 것이야. 태자가 황상이 되면 방법이 있을 줄 알았더냐?”
“응?”
아라는 멈칫하다가 금세 무슨 말인지 알아들었다.
“하지만 태자로 세웠는데 이제 와서 무슨 다른 방법이 있겠어요.”
“어떻게든 됐겠지! 이런 일은 접자희에도 많지 않으냐! 네가 궁에 들어가든 말든, 칠야는 해야 할 일을 하실 게다! 내 보기에…….”
두 행수의 머릿속이 확 밝아졌다.
“네가 궁에 들어가서 태자 곁에 있으면 칠야를 도와줄 수도 있겠구나. 그런 날이 오면, 칠야는 의리 있는 분이시다. 울지 말아라. 이젠 그렇게 할 수밖에 없다. 내 말 들어라. 앞으로는 다시는 허튼짓 해선 안 된다. 허구한 날 난리를 부리더니, 잘 되었다. 이게 무슨 꼴이냐.”
두 행수는 말할수록 화가 치밀었다. 이렇게 어리석은 계집애를 키웠다니. 노후 자금을 마련할 수 있을 줄 알았는데 웬걸, 노후 자금은커녕 목숨을 밀어 넣어야 할지도 모르게 생겼다.
“어서 가자. 조금 전에 말한 대로 하는 거다. 나도 함께 궁으로 들어가마. 내가 단속해야겠어!”
두 행수는 화가 나서 아라와 길게 옥신각신하지도 않고 아라의 등을 떠밀고 다다 발치의 큰 상자와 보따리를 가리켰다.
“보따리는 챙기고, 상자는 돌려놓아라. 싹 다 가지고 가면 퇴로는 어쩌려고!”
“누가 훔쳐 가면 어쩌려고요.”
다다는 근심 가득한 얼굴로 보따리를 짊어졌다.
“똑같이 어리석은 것 같으니! 아라는 태자 시중들러 입궁하는 것이다. 누가 감히 아라 물건을 훔친단 말이냐? 죽고 싶어서?”
두 행수는 다다의 머리라도 쥐어박고 싶었다. 다다는 다급하게 고개를 끄덕이며 힘껏 상자를 밀어 넣고 보따리를 짊어진 채 후다닥 아래로 내려갔다.
수국공부로 들어간 마차는 역시나 멈추지도 않고 곧바로 각문을 통해 밖으로 나갔다. 황성을 향해 줄곧 북쪽으로 가는 마차 안에서 아라는 휘장 틈으로 높고 붉은 궁궐 벽을 바라보며 눈물을 뚝뚝 흘렸다.
마차는 황성을 빙 둘러서 겨우 마차 하나 통과할 좁은 각문을 통해 안으로 들어갔다. 나이 든 내시 몇이 고개를 내밀고 들여다보고는 곧 손짓하며 들여보냈다.
마차는 그리 멀리 가지 않아서 매우 작은 뜨락에 멈췄다. 뜨락 안에 여자들이 여남은 명 삼삼오오 무리 지어 서 있는데, 하나같이 매우 아리따운 얼굴이었다.
두 행수와 다다가 아라를 뒤따라 마차에서 내리자 궁중 복장 차림의 두 여인이 다가와서 무뚝뚝한 얼굴로 물었다.
“아라가 누구냐?”
사실 물을 것도 없이 한눈에 알아봤다. 두 여인은 설명도 없이 양옆에서 아라를 데리고 옆에 있는 작은 집채로 들어갔다.
다다가 따라가려고 하자 두 행수가 얼른 붙잡았다.
“뭐 하는 것이냐. 법도 때문에 가는 거다!”
입궁해서 시중드는 사람은 귀인을 만나기 전에 몸수색하고 깨끗하게 씻어야 한다.
다다는 조용해져서 큰 보따리를 짊어진 채 신기한 듯 눈알을 굴렸다. 처음으로 궁에 들어오는 것이었다.
두 행수도 조용히 주변을 살피면서 어린 낭자들도 하나씩 뜯어봤다. 갈수록 이상한 생각이 들어서 잠시 생각하다가 은표를 들고 뜨락 문을 지키는 내시 앞으로 다가갔다. 소매로 손을 가리고 은표를 슬쩍 내시 손에 찔러 주고 나직이 물었다.
“중귀인(中貴人: 총애받는 내관. 내관을 추켜세우는 말), 저 어린 낭자들, 모두 태자 전하를 시중들 사람인가요?”
내시는 은표를 손으로 가늠하며 눈을 내리깔고 힐끔 보고는 흡족한 듯 입꼬리를 끌어 올렸다.
“태자? 꿈도 야무지군. 대황자부에 시중들러 갈 사람이다. 곧 출발할 것이다.”
“대황자요? 그분은…….”
그분은 위리안치된 것 아닌가? 두 행수는 심장이 멎는 것 같았다.
“그분이 뭐? 아무리 그래도 황손이다. 시중들 사람은 계속 보태야 해.”
내시는 입이 벌어지도록 두둑한 은표를 생각해서 몇 마디 더 해주었다.
“그럼 다시 나올 수 있습니까?”
두 행수는 일말의 희망을 품고 물었다. 내시는 뭐라고 말해야 좋을지 모르겠다는 표정으로 두 행수를 흘겨봤다.
“죽으면 나오겠지.”
두 행수는 눈앞이 컴컴해져서 휘청거렸다. 이럴 줄 알았다! 두 행수는 비틀거리며 돌아서서 몇 걸음 걷다가 다시 돌아서서 은표를 더 찔러 주었다.
“앞으로 잘 보살펴주세요.”
내시는 은표를 쥐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이각 후엔 출발할 것이라 보살펴주고 싶어도 보살펴 줄 것이 없었다.
아라는 한 무리 어린 낭자와 똑같이 궁중 복장으로 갈아입고 나왔다. 고개를 숙이고 제 옷차림을 살피면서 두 행수 곁으로 다가가 투덜거렸다.
“이것 좀 봐요…….”
“아라야, 큰일 났다. 태자 시중들러 가는 게 아니었다. 너, 그리고 이 아이들, 모두 대황자부로 간다는구나. 높은 담장 안으로.”
두 행수가 눈물을 글썽이며 말했다. 아라는 곧바로 알아듣지 못하고 얼떨떨해졌다.
“어딜 간다고요?”
다다가 보따리를 들고 목을 길게 빼며 헉, 소리쳤다. 아라보다 반응이 빨랐다.
“잘못 들은 거 아니에요?”
“잘못 들을 리가 있느냐?”
두 행수는 더는 참지 못하고 눈물을 흘렸다.
“아라야, 이것들이……. 나쁜 것들 같으니!”
아라는 멍하니 서 있다가 천천히 고개를 치켜들고 소매를 휘둘렀다.
“내가 그럴 줄 알았다! 퉤! 내가 재수 없었던 거예요. 그런 거라면, 두 사람은 나랑 같이 갈 것 없어요. 행수 어른, 다다를 데리고 가요. 다다는 속셈이 없는 애니까, 어르신이 신경 써서 돌봐 주세요. 좋은 혼처 찾아 주고요. 큰 상자에 있는 건, 어르신이 반 가지고 나머지는 다다 혼수로 주세요. 해마다 오늘이 되면, 혹시 생각나면 지전이나 태워주시고요.”
“싫어요. 전 낭자 따라갈 거예요. 정말로 무슨 일이 생기더라도 제가 낭자 시신 수습은 해야죠.”
다다가 눈물을 뚝뚝 흘리며 말했다.
두 행수는 아라가 지전 이야기를 했을 때부터 쉴 새 없이 퉤퉤퉤 침을 뱉었고, 다다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아라가 다다의 머리를 내리쳤다.
“무슨 말을 그렇게 해! 네가 죽어서 뼈가 잿가루가 되었을 때도 나는 살아있을 거야!”
“쓸데없는 소리 그만하고. 우리 셋 다 들어가는 건 안 된다. 이렇게 하자.”
제대로 된 궁리를 하는 건 역시 두 행수뿐이었다.
“내가 아라와 들어가마. 안에서 돌봐 줄 사람은 있어야지. 다다, 네가 칠야에게 가라. 무슨 일이 있어도 방법을 생각해 달라고 부탁드려라.”
“제가 어떻게 나가요? 어떻게 나가요.”
다다는 순간 걱정되고 두려워졌다.
아라가 한숨을 내쉬었다.
“이야기했잖아요. 둘 다 나랑 갈 것 없어요. 들어가면 다시 나오지 못할 곳인데, 뭐하러 그래요.”
“됐다. 역시 다다가 같이 들어가는 게 낫겠다. 내가 밖에서 방도를 궁리해보마.”
두 행수는 생각을 바꿨다.
“아라야, 걱정하지 말아라. 내게 숨이 붙어 있는 한, 반드시 두 사람을 꺼내주마. 그 보따리도 이리 내라. 그 안에서 이런 건 필요 없다. 내가 밖에서 쓸 데가 있다.”
결정 내린 두 행수는 매우 빠르게 행동했고 다다는 큰 보따리를 두 행수에게 건네며 나직이 속삭였다.
“어르신, 반드시 우리 둘을 구해주셔야 해요.”
두 행수는 고개를 끄덕이고는 살짝 고개를 치켜들고 있는 아라를 바라보고 어깨를 두드리며 마지막으로 당부했다.
“들어가서는 만사 조심해야 한다. 무슨 일이 있어도 목숨을 보전해야 해. 살아만 있으면…….”
“알아요.”
아라가 심호흡하고 고개를 끄덕이자 두 행수는 뒤로 물러나서 고개를 숙이고 돌아서서 밖으로 나갔다.
문을 지키던 내시는 그녀가 나가는 걸 보고도 못 본 체했다. 지금 가지 않아도 위에서 사람이 오면 알아서 쫓아낼 것이다. 청백하고 용모가 아름다운 젊은 낭자만 들어간다고 똑똑히 말했었다. 중년 여인은 들어가고 싶어도 들어가지 못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