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81화: 하지 말라는데 한사코
“전하, 아라를 시정에 계속 둬선 안 됩니다. 차라리…….”
주 추밀부사는 ‘차라리’라고 운만 뗐을 뿐 차라리 어떻게 할 건지는 태자가 말하길 기다렸다. 태자가 아라를 어느 정도 총애하는지 몰라서 함부로 이을 수가 없었다.
태자는 조금 화가 난 듯 주 추밀부사를 노려봤다.
“고를 너무 얕잡아 보는군! 아라 같은 홍루 여인은 그저……. 고는 그저 백성의 실정을 체험한 것뿐입니다. 일개 창기를 궁에 들여요? 내 보기에 외숙은 소육보다 철이 없습니다. 이런 말은 소육도 한 적 없습니다!”
태자는 그렇게 말하자마자 소육도 했었던 것 같다는 생각이 별안간 들었다. 게다가 한 번도 아니었다. 됐다. 소육이 하는 말은 모두 헛소리이니 했더라도 안 한 것이나 마찬가지지.
“예, 영명하십니다. 소육이 예전엔 고얀 짓만 하더니 요즘은 장래가 좀 보입니다.”
주 추밀부사는 얼른 아들 칭찬을 한마디 더 보탰다.
“큰 외숙이 첫째를 만나러 간 것, 아십니까?”
태자는 돌연 그 일이 떠올라서 주 추밀부사를 흘겨보며 물었다.
“방금 듣고 깜짝 놀랐습니다. 나중에 황명이라는 걸 알고 그제야 진정했지요. 휴, 형님이 나이가 많아서 판단이 흐려진 모양입니다. 전하도 아시다시피 이렇게 나이 들지 않았을 때도 흐린 판단을 많이 하지 않았습니까.”
주 추밀부사는 일단 선부터 그은 후에 형님을 위해 변명해 주었다. 어찌 됐든 같은 주씨 성이고 두 사람의 어머니가 아직 멀쩡히 살아 계시니까.
주 추밀부사의 말에 태자는 콧방귀부터 뀌고서는 이어서 말했다.
“첫째 시중들 여인을 데리고 들어갈 때, 외숙이 어떻게든 궁리해서 아라도 첫째에게 들여보내세요. 일단 궁으로 들인 다음 외숙의 잘난 형님에게 보내서요. 황자 시중을 들고 싶다지 않습니까. 거기도 황자 아닙니까!”
주 추밀부사는 놀라서 입이 다 벌어졌다.
“태자 전하! 아라는…… 이건…….”
너무 황당한 일이었다.
“아라가 뭐요? 이게 뭐요? 어찌? 외숙도 고가 마음에 안 듭니까?”
아직 화가 풀리지 않은 태자는 그 말에 다시 포악해졌다. 주 추밀부사는 더 말할 엄두가 나지 않아서 얼른 대답했다.
일단 대답부터 하고 보자. 방법은 나가서 생각하자. 그런 다음, 역시 고 사사를 찾아가 상의해야겠다.
뱃속 가득한 충성심을 표현하지도 못하고 오히려 벼루를 얻어맞고 기어 나오느라 체면이 다 떨어진 수국공은 풀이 죽어서 나오느라 영원을 찾아갈 기분이 들지 않았다.
게다가 장 선생의 말이 다 옳은 것도 아니지 않나. 장 선생은 원래 능력이 그저 그런 사람이었다. 정말로 능력 있었다면 대왕야가 위리안치되지도 않았겠지.
수국공은 아무것도 할 생각이 안 들어서 무기력하게 저택으로 돌아갔다. 아무런 말도 하고 싶지 않아서 곧장 서재로 들어갔다.
큰처남 하 대야와 이야기 중이던 수국공 세자 주유해가 기별을 듣고 하 대야와 함께 다급히 서재로 달려갔다.
수국공은 누가 뼈를 다 뽑아간 듯이 힘없이 팔걸이의자에 앉아 있다가 아들과 하종수가 들어오자 무기력하게 겨우 손가락만 까닥했다.
“대랑 왔느냐. 이야기해라. 나는…….”
“아버지, 무슨 일입니까? 왜 이렇게…….”
주유해가 깜짝 놀라 물었다. 고모가 세상을 떠난 후로, 정확히는 대황자가 위리안치된 후로 그는 새가슴이 되었고 아버지의 이런 무기력한 모습에 간이 파르르 떨리고 얼굴이 창백해졌다.
“괜찮다. 두려워하지 마라.”
아들이 예전부터 간이 작고 지금은 더 작아진 걸 아는 수국공이 애써 기운을 차렸다.
“대왕야를 들여다보고 오라고 황상께서 부르셨었다.”
“예?”
주유해는 얼떨떨해졌고 하종수는 두 눈이 빛났다. 그러다가 금세 가슴이 철렁했다. 이상하다! 국공이 이러는 걸 보면 설마 황상이 대왕야를 사사하려는 걸까…….
“잘 지내는지, 생활은 불편하지 않은지 살펴보고 오라고 하시더구나.”
이어지는 수국공의 말에 하종수의 내려앉았던 마음이 다시 돌아왔다. 두 눈은 더 밝게 빛났다. 역시, 대왕야에게 아직 희망이 있구나!
“대왕야는 잘 지내십니까?”
주유해가 걱정스러운 듯 나지막이 물었다. 마치 그 물음을 대왕야가 들을 수 있기라도 한 듯이.
“내 보기에 잘 지내던데 본인은 아니라고 생각하더구나.”
수국공은 연거푸 한숨을 쉬고는 두 사람을 향해 손짓했다.
“앉아서 이야기하자.”
주유해와 하종수가 양옆에 앉자 수국공이 대황자부에서 보고 들은 걸 이야기했다.
“장 선생 말이 대왕야의 생활은 위리안치되기 전보다 나으면 나았지, 안 좋을 것 없다더구나. 내 보기에도 그랬다. 대왕야가 입은 장삼, 올해 남쪽에서 진공한 복수면장(福壽綿長: 행복과 장수가 오래되길 기원하는 의미. 그러한 문양) 금사 직금 비단이었다. 태자 전하도 어제에야 새로 입은 것이다. 그런데도 대왕야는 별로라고 여기셨다. 됐다. 그만하자. 대왕야의 성격은 예전 그대로다. 귀비마마가 그렇게 아껴도 부족하다 했지. 부족해서…….”
수국공은 더 잇지 못하고 눈물을 훔쳤다.
“황상께 말씀드리셨습니까?”
하종수가 참지 못하고 물었다. 이런 말을 황상에게 고했다면 대왕야는 그야말로 곤경에 빠질 것이다.
“이런 걸 어찌 황상께 말씀드리겠나. 두 사람에게 이야기하고 답답한 속이나 풀려는 것이다.”
수국공이 한숨을 푹푹 쉬었다.
“대왕야는 아직 내려놓지 못하고 내게……. 내가 그럴 능력이 어디에 있느냐. 귀비마마가 안 계신데 우리 주가가 예전과 같을 수 있느냐.”
“십일낭이 궁에 있습니다. 황상이 지극히 총애하시고요.”
하종수가 가만히 있지 못하고 귀띔했다.
“그건 다르지.”
수국공이 가차 없이 대답했다. 십일낭이 아무리 총애받은들 황상 마음속 귀비의 존재와 어찌 비교하랴. 천지 차이인 것을.
하종수의 얼굴에 머쓱한 기색이 스쳤다. 십일낭이 귀비처럼 되려면 아직 시간이 필요한 건 그 역시 잘 알고 있었다.
“국공야, 어떻게 하실 셈입니까?”
“아버지, 장 선생을 만나셨습니까? 장 선생은 뭐라고 합니까?”
하종수와 주유해가 동시에 물었다.
“만났다. 대왕야부에 있을 줄 몰랐구나. 그러니 아무리 찾아도 찾을 수 없을 수밖에. 고향으로 돌아간 줄 알았지.”
수국공은 당연히 아들의 물음부터 대답했다. 하종수의 물음은 대답하고 싶지 않았다. 뭘 어쩔 수 있나.
“장 선생은 그럴 사람이 아닙니다.”
주유해가 나지막이 말했다. 장 선생과 함께 보낸 시간이 가장 길고 정도 제일 많이 들었다.
“장 선생의 인품, 재능, 모두 세간에 보기 드뭅니다.”
“인품은 나쁘지 않지. 재능은…….”
수국공은 한숨을 푹푹 내쉬며 고개를 저었다.
“장 선생 말이…….”
수국공은 말하다 말고 무심결에 하종수를 힐끔 보고는 영원을 찾아가라던 장 선생의 말을 그대로 삼켰다.
“대왕야는 담장 안에 있는 게 낫다고 하더구나. 적어도 조용히 말년을 맞이할 수 있을 거라고. 대왕야가 무슨 말을 했든, 담장 밖으로 나가면 다 잊으라고 하더구나.”
“예?”
하종수는 놀랐다가 다급해졌다. 그러나 그가 뭐라고 말하기도 전에 수국공이 손을 들어 저지했다.
“장 선생 말이, 대왕야가 모친을 시해한 건 별거 아니란다. 대왕야가 큰일을 하지 못한 건 똑똑하지 못해서란다. 들어 봐라, 무슨 말이 이러냐.”
수국공은 이 말을 들었을 때부터 거슬렸다. 그러나 거슬릴 뿐이지 뭐라고 대답해야 좋을지 알지 못했다.
“어떻게 장 선생이 그런 말을.”
주유해도 이 말은 너무 지나치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하종수는 다른 관점이 있는 듯했다.
“일리가 없는 것도 아닙니다. 대업을 하려면 사소한 것은…….”
수국공이 분노해서 하종수의 말을 무질렀다.
“이건 사소한 일이 아니다! 모친을 시해했다! 인간이 할 짓이냐! 이건 천륜이다!”
“예, 얕은 식견으로 입을 놀렸습니다.”
하종수가 얼른 잘못을 인정했다.
“흥! 장 선생이 이리 판단이 흐려졌으니 대왕야가 이렇게 되었지. 대왕야는 어릴 때부터 내가 봐 온 분이다. 얼마나 착한 아이였는데 어쩌다가 이 지경이 됐는지 도저히 모르겠더니, 오늘 드디어 조금 알겠더구나. 모두 곁에 있는 사람이 부추긴 것이야. 장 선생이 내 앞에서 이런 말을 하는데 대왕야 앞에서는 못하겠느냐. 대왕야같이 성실한 사람이 이런 말을 자주 들었으니……. 휴!”
수국공이 힘껏 팔걸이를 내리쳤다.
“됐다. 그만하자. 주군이 될 사람의 가장 큰 덕목이 바로 옳고 그름을 판단하고 충신과 간신을 구별하는 것이라고 황상께서 말씀하셨다. 대왕야는 그 점을 몰랐으니 다른 사람 탓을 할 수도 없다.”
연신 고개를 끄덕이는 주유해의 눈시울이 붉어졌다. 그는 어른 품에 안긴 어린 시절부터 앞으로 대왕야를 잘 모셔야 한다는 소리를 듣고 자랐고 걷기 시작했을 때부터 대왕야를 따랐다. 대왕야가 위리안치되었을 때부터 지금까지 대왕야만 생각하면 슬퍼서 목 놓아 울고 싶었다.
하종수는 고개를 살짝 숙인 채 제 계산속을 굴렸다.
월동문으로 들어간 영원은 회랑 기둥 뒤에 기대서 고개만 살짝 내밀고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수련이 물건을 안고 막 수화문을 통해 들어오자 영원은 그녀를 지켜보고 있다가 모퉁이를 돌 때 툭 튀어 나갔다.
“쉿! 나다.”
“나리 말고 누구겠어요!”
수련은 깜짝 놀라서 파르르 떨다가 제대로 보기 전에 누군지 깨닫고는 순간 화부터 치밀었다.
“그렇지. 나 말고 또 누가 있겠느냐.”
영원은 꽤 뿌듯해했다.
“낭자 돌아왔느냐? 거처에 있고?”
“창호지 뚫고 보시지 그러세요.”
수련은 퉁명스럽게 말하고는 가던 길 계속 가려고 걸음을 내디뎠다. 영원이 얼른 뒤를 쫓았다.
“그런 짓을 어떻게 하나! 그나저나, 너희 낭자는 멀쩡히 있다가 갑자기 사찰엔 왜 간 것이냐? 집안에 무슨 일이 생긴 거냐?”
“저야 모르지요.”
수련은 여전히 퉁명스럽게 대답하고는 상방 입구에 도착하자 휘장을 열고 쏙 들어가면서 휘장을 휙 뿌리쳤다. 안으로 따라 들어가려던 영원은 뒤로 튕겨 나왔다.
“어이! 너희 낭자가 있는지 말해주고 가야지!”
영원이 까치발을 들고 밖에서 묻자 이동의 목소리가 안에서 들렸다.
“곁채에 가서 기다리세요.”
영원은 순간 희색이 되어서 몇 걸음 만에 곁채 입구로 다가가 문을 열고 들어갔다.
잠시 후, 이동이 아주 초췌한 모습으로 상방에서 휘장을 젖히고 들어왔다. 늘 앉는 자리에 앉아서 매우 저조한 목소리로 말했다.
“어제도 오셨어요?”
“왜 이러는 겁니까? 무슨 일 생겼습니까?”
영원이 상반신을 수그렸다. 초췌하고 기분이 저조해 보이는 이동의 모습에 표정이 심각해졌다.
“낭자, 어제 유시(酉時: 오후 5시~7시)부터 오늘 유시까지 꼬박 무릎 꿇으셨잖아요. 식사도 하지 않고 물 몇 모금 드셨을 뿐이고요. 돌아오시면 곧바로 쉬라고 태태가 분부하셨어요. 더 힘들면 안 돼요.”
수련과 녹매가 탕과 차를 들고 들어왔다. 수련이 탕과 차를 올리며 이동을 바라보며 말했다. 사실 영원 들으라고 하는 말이었다.
“괜찮아.”
이동이 정말로 매우 피곤해 보이자, 영원이 의자 팔걸이를 짚고 일어나려다가 그대로 멈췄다.
“무슨 일인지 듣고 금방 돌아가마. 걱정되어서 이대로는 못 간다.”
영원이 수련을 바라보며 말했다. 수련은 못 들은 체하고 상대하지 않았다. 녹매는 이동과 영원을 번갈아 보다가 수련과 함께 곁채에서 나갔다. 수련을 잡아끌고 상방 동쪽 구석으로 간 후에야 나직이 속삭였다.
“왜 그러는 거야? 그렇게 눈치 주면 낭자가 난처해지잖아.”
수련이 한숨을 푹 내쉬었다.
“너도 좀 봐봐. 매번 새벽에 여기 오셔. 처음에 우리 낭자, 메마른 고목 같았는데 칠야가 다녀가시면 눈에 띄게 활발해졌어. 칠야가 오는 건 좋은데, 지금은 대체 이게 뭐냐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