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80화: 뒤집어쓴 아라
“태자 전하!”
고서강은 눈물을 뚝뚝 흘리며 쩌렁쩌렁 울며 고했다. 울면서도 발음은 확실하고 목소리는 여전히 우렁찼다.
“소신 도저히 두고 볼 수가 없습니다! 참을 수도 없습니다! 태자 전하! 이번엔 신이 설령 목숨을 내놓더라도 태자 전하의 이런 황당한 짓을 더는 두고 볼 수가 없습니다! 태자 전하! 전하는 국본, 미래 천하의 주인입니다! 태자 전하! 이러시면 안 됩니다! 이렇게 심신과 덕을 수양하지 않고 허튼짓을 하시면 안 됩니다! 잔인하고 어질지 않고, 자비롭지 않고 불효를 저지르시면 안 됩니다. 태자 전하! 이러시면 신하들은 어찌 살겠습니까! 이 천하 만민은 어찌 살아가겠습니까!”
대전 밖에서 안 들리는 체하며 귀만 쫑긋 세우고 듣던 신하들은 하나같이 근심스럽고 두려웠다.
고서강이 하는 말이 솔직히 사실이지. 그렇지. 이런 태자라니, 앞으로 신하들은 어떻게 살아가야 할까.
“미쳤을 뿐만 아니라 나이를 내세워 고를 억누르려고까지 하는구나. 미쳤구나! 죽고 싶은 게로구나!”
태자는 화가 나서 골이 깨질 것 같았다.
“태자 전하! 신은 전하를 위해 이러는 것입니다! 목숨을 걸고서라도 전하를 설득해야겠습니다! 태자 전하! 더는 이러시면 안 됩니다! 태자 전하! 천자는 쉬운 자리가 아닙니다! 이렇게 본분을 지키지 않고 함부로 행동하시면 안 됩니다. 태자 전하! 주유민은 소인배 중의 소인배입니다! 전하, 어진 이를 가까이하고 소인배를 멀리하셔야 합니다!”
언변을 따지면 태자가 열둘이 있어도 고서강의 입을 다물게 하지 못한다. 태자가 다시 화가 머리끝까지 치밀어서 횡설수설, 하는 말이 끝나기도 전에 고서강은 또 목 놓아 울며 청산유수로 말을 늘어놓았다.
태자는 화가 나서 말을 다 더듬었다.
“다, 다, 다, 닥쳐라! 저놈의 입을 막아라! 입을 막아!”
태자가 발을 구르며 주육에게 분부하자 주육이 후다닥 고서강 앞으로 달려가 손을 내밀었다. 한 자만 더 뻗어도 입을 막을 수 있는데 거기서 더 뻗을 엄두가 나지 않았다.
손을 물면 어쩌나.
“전하, 어찌 막아야 할지, 막을 수가 없습니다!”
주육의 손이 고서강의 입 앞에서 쭈뼛쭈뼛, 내밀었다가 거뒀다가 좌로 갔다가 우로 갔다가, 다시 우에서 좌로 갔다. 도저히 손을 쓸 수가 없었다.
고서강도 주육을 상대하지 않고 오로지 간절하고 애통하게 진언했다.
“꺼져라!”
태자는 기절할 것만 같아서 주육을 걷어찬 다음 다리를 높이 치켜들고 고서강의 입을 걷어찼다. 나이가 들어서 안 그래도 치근이 좋지 않은 고서강은 걷어차이자마자 앞니가 빠지면서 피가 솟구쳤다.
“태자 전하, 이건 걸왕과 주왕의 행실입니다! 이러실 수 없습니다! 불가합니다!”
‘불’자를 입에 올릴 때마다 피가 뿜어져 나오자, 고서강은 아예 불가, 불가, 불가! 하고 외치면서 피를 뿜었다. 태자의 옷자락에 점점이 피가 튀고 대전 금빛 바닥 위에도 피가 온통 튀었다.
고서강은 피를 줄줄 흘리면서 피를 뿜어댔고, 콧구멍에선 피 묻은 거품이 튀어나왔다. 태자는 무서워져서 무심결에 뒷걸음질 치고 또 뒷걸음질 쳤다. 고서강은 무릎걸음으로 다가가고 또 다가가서 태자의 다리를 덥석 부여안았다.
“태자 전하!”
태자는 고서강이 피범벅이 되어 달려들자 꽥 고함치며 고서강을 걷어차고 또 걷어차고 다시 걷어찼다.
“꺼져라! 꺼져라! 썩 꺼져라!”
“태자 전하…….”
고서강은 꺽꺽 소리를 내다가 뒤로 휙 넘어가더니 기절해 버렸다.
태자전에서 벌어진 일은 즉시 세 상공에게 전해졌다. 묵 승상은 종복이 토씨 하나 틀리지 않고 생생하게 전한 고서강의 말을 듣다 말고 차를 멀리 내뿜었다. 차를 뒤집어쓴 종복의 가슴이 흠뻑 젖었다.
“계속해라.”
묵 승상은 손수건을 찾아 손을 닦으며 연신 크흠 목을 가다듬었다. 그 산서 놈, 체면이고 말고 없구나. 벗어나려고 이제 이런 연극을 다 해?
여 승상은 묵 승상보다 담담했다. 적어도 차를 뿜지 않고 종복의 말을 다 들은 다음 잔을 내려놓더니 참지 못하고 터져 나올 것 같은 웃음을, 얼굴을 문지르며 같이 지워버렸다. 그러고는 컹컹거리며 힘껏 목을 가다듬은 다음 종복에게 분부했다.
“다시 가서 들어라. 그리고……. 됐다. 일단 듣고 오너라.”
종복이 명령을 받고 밖으로 나간 뒤, 여 승상은 관자놀이를 문지르며 일어서서 밖으로 나가서 느긋하게 맞은편 묵 승상 방으로 향했다. 고서강이 이 난리를 부렸으니 사사 자리가 빌 것이다. 아무나 앉을 자리가 아니니 제대로 상의해야 했다.
장공주는 세 승상과 거의 동시에 소식을 들었다. 차를 홀짝이며 이야기를 듣다가 웃으며 오황자를 바라봤다. 맞은편에 앉은 오황자는 조금은 알 것 같고 그보다 의문이 더 많은 것 같은 표정이었다.
내시가 하나도 빠짐없이 보고하고 공손히 물러간 다음 장공주는 잔을 내려놓고 빙그레 웃으며 오황자를 바라봤다.
“재미있지?”
“아니요. 고 사사가 불쌍합니다.”
오황자가 눈살을 찌푸리며 하는 말에 장공주가 웃음을 거뒀다.
“틀렸어! 넷째 형님이 불쌍하다고 해야지.”
“고 사사는 어째서 이런 식으로 태자께 진언합니까? 너무 어리석습니다.”
오황자가 올려다보며 묻자 장공주가 되물었다.
“그럼?”
“넷째 형님이 불쌍하다고 하시는 걸 보니…… 고 사사가 일부러 그런 것입니까? 일부러 태자 형님을 난처하게 하려고요? 태자 형님을 난처하게 해서 고 사사가 좋을 게 무엇입니까?”
“그러게.”
장공주는 말꼬리를 길게 늘이며 또 빙그레 웃었다.
“좋을 게 무엇인지 잘 생각해 보렴.”
“사람들이 그를 충신, 바른 신하라고 칭송할 것입니다.”
오황자는 작은 얼굴에 엄숙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고 장공주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고서강은 충신, 바른 신하가 되려고 이런 일을 했을까?”
“고모님, 넷째 형님이 불쌍한 거라고 하셨잖습니까.”
오황자가 장공주를 올려다보며 입을 다물었다. 장공주는 갸우뚱하고 바라보다가 별안간 웃음을 터트리며 오황자의 이마를 톡톡 쳤다.
“요런 똑똑이를 봤나! 말하면 안 되는 걸 다 알다니, 이 고모의 어릴 때 모습이 좀 있구나. 됐다. 오늘은 여기까지 하자. 돌아가렴. 네 칠 외숙이 기다리고 있을지도 모르겠구나.”
주 추밀부사가 소식을 듣고 잰걸음으로 태자전으로 달려 들어갔을 때, 주육은 벌써 정신을 차리고 아라를 데리고 달아나고 없었다.
태자는 이미 옷을 갈아입고 창가에 서서 씩씩 숨을 몰아쉬고 있었다. 주 추밀부사가 조심스럽게 태자 뒤로 가서 섰다.
“태자 전하, 부디…….”
“따지지 말라고? 아니면 화를 내지 말라고? 흥! 하나 마나 한 소리를 하러 온 겁니까?”
“둘 다 아닙니다. 태자 전하, 신은 그저 고 사사가 왜 갑자기 이런 짓을 하는 것인지 곰곰이 생각해야 한다고 아뢰는 것입니다.”
“미쳐서! 귀신에 씌어서!”
주 추밀부사가 근심 가득한 표정으로 말하는데도 태자는 이가 갈리는 듯 소리쳤다.
“그렇게 생각하실 정도로 태자 전하도 이 일이 매우 이상하다고 생각하시는군요. 전하, 고서강이 왜 이렇게 이상하게 굴까요?”
주 추밀부사가 조심스럽게 태자를 이끌었다. 하지만 태자는 그럴 인내심이 없었다.
“할 말 있으면 그냥 하세요!”
주 추밀부사가 마른침을 삼켰다.
“예, 전하. 고 사사는 사료 깊고 신중한 자입니다. 무슨 일을 하든 세 번 생각한 후 임합니다. 이렇게 충동적인 적은 없었습니다. 태자 전하, 신이 생각하기엔 고 사사는 일부러 전하를 노하게 한 듯합니다.”
“대체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겁니까?”
태자의 마음속 불길이 다시 타올랐다.
“태자 전하, 신이 하고픈 이야기는, 신이 생각하기엔…….”
주 추밀부사는 애가 탔다. 이렇게까지 이야기했거늘. 평소라면 태자도 알아들었을 것이다. 그런데 오늘은 왜……. 구태여 내 입에서 나오는 이야기를 들어야겠다는 걸까?
“신이 생각하기엔 고 사사의 마음이 이미 전하에게서 떠난 듯합니다.”
태자는 멈칫하다가 눈을 가늘게 뜨고 주 추밀부사를 노려봤다.
“내게서 마음이 떠나? 죽고 싶답니까?”
그 말에 주 추밀부사는 말문이 막혀 한마디도 더 하지 못했다. 태자는 태자가 된 후로 자기를 황상처럼 생각하고 있었다. 태자 자리가 불안정하다고 말하면 어떻게 될까. 죽고 싶은 건 자신이 될 것이다. 바로 이 자리에서 죽게 될 것이다.
“대국이 정해진 후 외숙과 고서강이 음으로 양으로 싸운 걸 고도 압니다. 고가 외숙의 속셈도 모를 것 같습니까? 고는 모르는 게 없어요. 그저 외숙의 체면을 생각했을 뿐이에요!”
울화가 잔뜩 치민 태자는 걸린 사람을 붙들고 화풀이했다.
“태자 전하, 신, 실로 그런 것이 아니라…….”
주 추밀부사는 다급해져서 땀이 흘러나왔다. 정말이지 뜬금없는 봉변이었다.
“아니라고요? 고서강이 어리석은 짓 한번 했다고 쪼르르 고 앞에 달려와서 마음이 떠났다고 한마디 하면서! 설령 우물에 빠진 사람에게 돌 던지고 싶어도 뭐라고 이야기할지 궁리 정도는 했어야지요! 머리를 썼어야지요!”
태자는 주 추밀부사의 가슴을 쿡쿡 찌르며 화를 냈다. 주 추밀부사는 울상이 되었다. 이걸 어떻게 명확히 설명하나.
“태자 전하, 신은 그게 아니라……. 태자 전하, 맞습니다. 영명하십니다. 신은 소육을 위해서, 소육을 위해서 그런 것입니다.”
주 추밀부사는 다급해지자 오히려 지혜가 생겼다.
“모두 소육을 위해서입니다. 소육이 아니었다면, 그 고얀 것이 간 크게 망할 짓을 한 바람에 고 사사가 분노해서 잠깐 이상해진 것입니다. 다 소육 때문입니다. 소육이…… 그 아라가…… 태자, 영명하게 조사해 주십시오.”
이야기하면서 생각을 정리한 주 추밀부사는 정리될수록 말이 유창하게 나왔다. 고서강이 마음이 떠났다고 한 건 고얀 아들놈을 지키려는 절박한 마음 때문이었고. 이 모든 것의 사고의 발단은 아라 때문이라고 원인을 분석했다.
“태자 전하, 이번엔 신도 한마디 드려야겠습니다. 아라에게 계속 빠져 있으면 안 됩니다. 마음이 있으면 제대로 방법을 생각해서 안치해야 합니다. 시정에 두는 건 실로 적당하지 않습니다. 소육의 성격이 어떤지, 전하께서 가장 잘 아시듯이 마음이 너무 약합니다. 분명 아라 그것이 죽어라 들러붙었을 겁니다. 아라는 전하가 아끼는 사람이고 소육은 올곧은 아이입니다. 전하가 좋아하는 건 그놈은 모두 중시합니다. 아라가 분부했는데, 따르지 않을 수가 있겠습니까? 전하, 영명하게 생각해 주십시오.”
주 추밀부사는 이야기하면서 머리를 굴렸다. 아라 일은 확실히 잠재된 위험이었다. 이 기회에 해결하는 게 제일 좋았다. 입궁하든, 쫓아내든, 태자의 세를 업고 허장성세하며 연향루에 계속 있게 둬서는 안 된다.
그 말은 태자에게도 먹혔다. 오늘 일, 정말이지 바로 그 아라 때문이었다. 자신이 언제 아라에게 빠졌단 말인가. 자신이 여인에게 빠질 리가 있나.
“소육을 감싸려고 해도 고서강을 모함해선 안 되지. 고 앞에서 고서강의 험담을 하려고 해도 그럴싸한 이유는 생각해서 말했어야지요. 마음이 떠나? 소육이 올곧다더니 내 보기에 외숙도 거기서 거기입니다. 이간질 하나도 제대로 못 하지 않습니까!”
태자는 주 추밀부사의 말, 그리고 자신의 이 예리한 안목, 영명한 사고력을 생각하니 아까 머리끝까지 화가 나고 정신이 혼란하던 때보단 기분이 나아졌다.
“그건 태자 전하께서 영명해서입니다.”
주 추밀부사는 어떤 말을 하면 태자가 기뻐할지 너무나 잘 알았다.
“신이 조정에서 지내면서 말 한마디만 해도 바로 꿰뚫어 보는 건 태자 전하뿐이었습니다.”
주 추밀부사의 아부가 제대로 통했고 태자는 턱을 살짝 치켜들며 코웃음 쳤다.
“알면서도 고 앞에서 꼼수를 부리는 겁니까?”
“아닙니다. 다시는 그러지 않겠습니다.”
주 추밀부사는 고개 숙이고 잘못을 인정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