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79화: 욕을 하는데요?
“그리고 또 하나.”
장 선생은 또 하나 있다고 말하고는 고개를 숙인 채 걷기만 할 뿐 다시 입을 열지 않았다.
“무슨 일인가?”
수국공은 잠시 따라가도 장 선생이 아무런 말을 하지 않자 물을 수밖에 없었다.
“영 칠야를 한 번 만나세요.”
장 선생은 또 말을 멈추고 망설여지는 듯 눈살을 찌푸리고 있다가 한참 만에 다시 이었다.
“예, 역시 한 번 다녀오는 게 좋겠습니다. 직접 가세요. 제가 한 말은, 제 입에서 나오고 국공야 귀에 들어가서 국공야 입에서 다시 나올 땐 영 칠야의 귀에만 들어가야 합니다. 영 칠야에게 가서, 대왕야는 이미 폐인이니 구차하게나마 살아가도록 은혜를 베풀어 달라고 하십시오.”
수국공은 입을 벌리고 경악해서는 장 선생을 바라봤다. 넋이 아예 나갔다. 영원에게 부탁하라니? 무슨 관계가 있다고? 영원이 무슨 상관있다고? 대왕야의 일에 그가 은혜를 베풀고 말고 할 자격이 어디 있다고?
“영원? 빌더라도 태자에게…….”
“제 말대로 하세요. 앞으로 알게 될 겁니다. 우리의 몇십 년 정을 생각해서 귀띔하는 겁니다. 영 칠야와 잘 지낼 수 있으면 최대한 가깝게 지내세요. 제가 말씀드린 두 가지 일은 첫 번째는 조금 틀리거나 조금 차질이 생겨도 아무런 상관없습니다. 하나 두 번째 일은 조금만 잘못되어도 대왕야는 물론이고 수국공부도 오래가지 않아 초토화됩니다.”
수국공은 어안이 벙벙하고 망연해졌다. 장 선생은 수국공을 쳐다보지 않고 고개 숙인 채 천천히 걸음을 내디뎠다.
“지금 제가 할 수 있는 건, 최선을 다해 대왕야의 목숨을 보전하는 것입니다. 주가 양방(兩房)의 직계가 평온하게 살아간다면 앞으로 대왕야의 나날도 좋아지겠지요. 국공야, 우리가 알고 지낸 지 수십 년이고 제가 국공야께 큰 은혜를 입었지요. 명심하세요. 주가의 운은 다했습니다. 운이라는 게 그렇습니다. 정점이 있으면 바닥이 있는 법입니다. 주가는 몇십 년 떵떵거리고 살다 보니 조심해야 한다는 걸 다 잊었습니다.”
망연하기만 하고 동의하지 않는 듯한 수국공의 표정에 장 선생은 순간 흥이 깨져서 하던 말을 뚝 그치고 한숨을 내쉬었다.
“사전(祀田: 제사를 지낼 곡식을 거두는 밭)을 준비하고, 가문의 여식 중에 나이 찬 낭자는 어서 혼인시키세요. 너무 어린 낭자는 정혼부터 하고 혼수를 두둑이 마련해주고……. 됐습니다, 됐어요. 각자의 복이 있는 법이니, 천명을 따를 수밖에요.”
수국공이 조금 화가 난 것 같은 모습이자, 장 선생은 서글픈 마음이 들어서 손사래 쳤다.
“됐습니다. 지쳤습니다. 돌아가세요.”
그 말을 남기고 돌아서서 가버렸다.
수국공은 눈살을 살며시 찌푸렸다.
장 선생의 성격이 갈수록 괴상해지는데?
그는 장 선생이 어깨를 늘어뜨리고 기운 없이 멀어지는 걸 바라보다가 한숨을 푹 내쉬고 돌아섰다. 몇 걸음 내딛다가, 여전히 웅장한 왕부 정전을 바라보며 잠시 망설이다가 돌아서서 작고 좁은 문을 통해 곧장 밖으로 나갔다. 대황자를 다시 만나고 싶지 않았다.
수국공은 자극전으로 직행해서 장 선생의 당부대로 모든 것이 다 좋다고 고했다. 대왕야는 잘 지내는 것 같았고, 다만 시중들 사람이 조금 부족한 것 같다고, 대왕야가 부족하다고 한 게 아니라 자기가 보기에 그런 것 같다고 고했다.
황상은 열심히 듣고는 살며시 한숨을 내쉬었다. 한결 안도한 모습이었다.
“그 일은 자네에게 맡기지. 신경 써서 사람 골라서 보내게. 잘 골라야 하네. 그런 쪽으로 홀대해선 안 되네.”
수국공은 공손히 대답하고 물러가려다가 주저하며 물었다.
“황상, 사람을 궁에서 골라서 보내도 되겠습니까? 궁 안 사람이 법도를 제일 잘 압니다. 대왕야는 어릴 때부터 궁에서 살았고 왕부를 세워서 나간 지 몇 년 되지 않았습니다.”
황상은 즉시 고개를 끄덕이며 허락했다. 사소하고 사소한 일이었다.
“궁에서 고른다면, 황상이 보시기에 영 황후의 지시를 따르는 게 옳겠습니까, 아니면 태자가 알아서 하는 게 옳겠습니까?”
수국공은 살짝 안도한 후에 얼른 다음 말을 물었다. 이 말이야말로 진짜로 묻고 싶은 말이었다.
“태자에게 맡기게.”
황상은 잠시 침묵하다가 대답했다. 수국공은 더욱 안도하고 얼른 물러나서 곧장 태자를 찾아가 이 일을 고했다.
수국공의 보고가 끝나기도 전에 태자가 곁에 있는 벼루를 집어 들어 내던졌다. 다행히 살에 맞았고, 아파서 얼굴 근육이 뒤틀렸지만, 뼈를 다치진 않았다.
“그놈도 포기하지 않았고, 외숙도 포기하지 않은 것이지요? 고가 그렇게 만만합니까?”
태자가 삿대질하며 욕을 하자 수국공은 기겁해서 털썩 무릎 꿇고 허둥지둥 해명했다.
“신이 아니라, 황상입니다. 황상께서 신이 외숙이니 가 보라고 하셨습니다. 신이 아닙니다. 신이 어찌 감히요.”
태자는 비아냥거리는 표정이었다.
“외숙! 정말로 외숙 노릇하려고 갔단 말입니까? 왜요? 고는 외숙에게 부족합니까? 고가 홀대한 것이 있습니까? 외숙이라 고가 어쩌지 못할 것 같습니까?”
수국공은 끽소리도 더할 엄두를 내지 못하고 연신 고개를 조아렸다.
태자는 그런 그를 내려다보며 눈을 가늘게 뜨고 노려보다가 어깨를 걷어찼다.
“알랑거리려고 미인을 보내고 싶으면 알아서 고르세요! 고는 왜 찾아온 겁니까! 왜요? 고 앞에서 외숙이랍시고 거드름 피우는 것도 모자라서 그놈 대신 형님 노릇까지 하게요? 꺼지세요!”
수국공은 일어날 엄두가 나지 않아서 엉금엉금 기어서 계단 아래로 내려간 다음에도 더 기어가다가 겨우 일어섰다. 대전 밖에서 기다리던 관리, 내시와 호위가 보는 앞에서 몸을 일으킨 수국공은 다리를 바들바들 떨면서 천천히 자리를 떴다.
궁전 밖, 고서강은 노구를 이끌고 나가는 가련한 수국공의 모습을 심드렁하게 바라보다가 그의 모습이 사라진 후에 고개를 숙이고 곰곰이 궁리했다.
태자의 대전 밖, 주육이 꽁꽁 싸맨 아라를 데리고 수상한 모습으로 다수방에 들어갔다. 아라를 구석으로 밀어 넣고는 자기는 까치발을 들고 대전으로 통하는 창 앞에 서서 손가락으로 휘장 틈을 비집고 대전 안을 바라봤다. 대전 안엔 태자가 수국공의 어깨를 걷어차고 꺼지라고 고함치고 있었다.
주육은 흥미진진하게 지켜봤다. 수국공부에 살던 시절, 백부는 적잖게 그와 모친, 심지어 부친을 괴롭혔다. 지금은…….
지금은 드디어 응보를 받았지? 예전에 날 괴롭히던 기세로 태자 앞에서 허리를 꼿꼿이 들어 보지 왜! 퉤!
수국공이 기어나가는 걸 본 주육은 통쾌하게 침을 뱉고는 아라를 손짓해서 불러서 ‘태자 전하!’ 하고 외치며 휘장을 젖히고 정전으로 들어갔다.
“네가 웬일이냐?”
태자는 주육을 돌아보고는 뒤에 꽁꽁 싸맨 물건과 흔들리는 다수간 휘장을 힐끔 봤다.
“정문으로 들어올 것이지, 왜 다수간에서 들어오는 것이냐?”
“정문으로 올 수가 없습니다!”
주육은 비밀스러운 표정으로 아라를 향해 손짓했다. 아라는 꼴 보기도 싫은 추한 쓰개 달린 두봉을 휙 벗어던지고 가냘픈 목소리로 서러운 듯 ‘태자 전하!’ 하고 불렀다.
“너였구나.”
태자는 멈칫했다. 이러니 수상쩍게 다수간에서 몰래 들어올 수밖에 없지!
“아라는 왜 데리고 온 것이냐? 이곳은 정무를 보는 곳이다!”
태자가 돌아보며 질타하자 주육은 헛웃음 지었고 아라는 보일 수 있는 모든 나약함과 가냘픔을 보이며 살랑살랑 다가갔다.
“태자 전하, 소인이…….”
아라는 한마디도 끝맺지 못하고 손가락을 아름답게 치켜들더니 손수건으로 눈물을 찍어내면서 그렁그렁한 눈으로 태자를 바라봤다. 말을 잇지 않은 이유는 태자에게 무슨 말을 해야 할지 아예 생각해 두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그녀가 정말로 바라는 건 칠야 앞에서나 이야기할 수 있지, 태자 앞에서 이야기할 수 없는 것이었다.
“됐다, 됐어. 저녁에 보러 가마.”
태자는 조금은 성가시기도 하고 조금은 애틋하기도 했다. 아라가 이렇게까지 그리워하는 걸 봐서 잘 아껴줘야지 싶었다.
아라는 태자의 말에 눈물을 뚝뚝 흘렸다. 아이고, 그러게 오지 말았어야 한다니까! 이럴 줄 알았다니까!
“태자 전하!”
주육이 입을 열었다. 아라가 그렁그렁, 울기만 하고 말을 하지 않자 할 수 없이 대신 이야기하려고 입을 열었다. 그런데 주육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대전 입구에 빛이 아른거리더니 고서강이 대전 앞에 나타났다. 태자의 맞은편에 서서 눈물을 글썽이는 아라와 아라 곁에 서서 막 입을 뗀 주육을 빤히 보는 고서강의 시선에 태자는 순간 민망하고 거북해져서 두 사람을 향해 손을 휘저었다.
“돌아가라. 할 말이 있으면 저녁에 하자. 고 경…….”
“태자 전하, 신, 진언할 것이 있습니다!”
고서강이 우렁찬 목소리로 쩌렁쩌렁 외쳤다. 그 소리에 주육이 기겁했을 뿐만 아니라 태자도 얼떨떨해졌다.
고서강은 털썩 대전 입구에 무릎을 꿇더니 허리를 꼿꼿이 세우고 대전 안을 직시하며 쩌렁쩌렁, 우렁찬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전하는 국본, 앞으로 천하의 주인, 만백성의 모범이 되실 분입니다! 그런데 밝은 대낮, 다 보는 앞에서, 국가 대사를 논의하는 대전 안에서 사창과 밀회하시다니요! 전하! 이것이 전하의 덕행입니까? 본 황조는 효를 근본으로 세운 나라입니다! 수국공은 전하의 친외숙입니다! 전하가 아무리, 그렇대도 수국공을 모욕할 순 없습니다! 전하의 몸에 흐르는 반쪽 핏줄을 모욕해선 안 될 일입니다!”
주육은 두 눈이 휘둥그레져서 입을 쩍 벌리고 고서강을 빤히 봤다. 머릿속을 맴도는 유일한 생각은 ‘미쳤구나!’였다.
아라는 흥분해서 얼굴이 다 새빨개졌다. 파르르 떨리는 손으로 손수건을 마구 비틀면서 고서강, 태자, 또 고서강, 그리고 주육을 번갈아 봤다.
큰일이 터졌다!
태자는 고서강의 우렁차고 위엄 넘치는 진언에 어질어질해져서 콧김을 내뿜었다. 어찌나 어지러운지, 귀에 소리는 들리는데 한마디도 알아듣지 못했다. 지금 뭐라는 것이냐?
“지금 뭐라는 것이냐?”
태자는 무심결에 주육을 바라보며 물었다. 주육은 침을 삼키고 또 삼키면서 고서강을 가리켰다.
“이자가…… 이, 이, 이자가, 전하를 욕하는데요?”
주육의 그 한마디 결론은 고서강이 한 긴말의 정수(精髓)를 총결해냈다.
고서강은 분노해서 눈을 부릅뜨며 주육을 돌아봤다.
“바로 네놈 같은 간신배, 소인배 말이다! 멀쩡한 태자 전하가! 바로 네놈 같은 간신배의 사주 때문에 이렇게 되셨다!”
“누구? 나? 지금 나 말입니까?”
주육이 제 콧대를 가리켰다. 어안이 벙벙해서 뭐라고 반응해야 좋을지 모를 지경이었다. 욕을 한대도 변변치 못하다고 욕해야 하는 거 아닌가? 간신배, 소인배?!
아라는 주육 곁으로 꿈틀꿈틀 다가가다 생각해 보니 아닌 것 같아서 얼른 걸음을 거두고 태자 뒤로 가서 숨었다.
접자희의 규칙대로라면 이제 그녀를 달기(妲己)니 포사(褒姒)라고 욕할 순서였다. 그러니 피해야지!
(※달기, 포사: 중국 4대 악녀 말희, 달기, 포사, 여희. 달기는 상(은)나라 주왕의 귀비. 포사는 서주 유왕의 총희. 모두 나라를 망하게 한 악녀로 알려졌으나, 실제 역사로 인정되지 않은 상고 시대의 이야기고 망국의 과정이 비슷하게 되풀이된 것으로 보아 망국의 책임을 여인에게 돌리려는 책임 전가의 일환이라는 관점이 있다.)
그런데 웬걸, 고서강은 그녀를 상대하지도 않고 애통하고 비통한 듯 태자를 가리키며 말을 이었다.
“태자 전하! 아무리 여색에 빠지고 욕망에 사로잡혔대도 신분을 생각해서 자중하셔야지요! 결백한 여인이라면 모를까, 누구든 지아비로 삼아 온 경성의 사내 품에서 뒹군 창기를, 이 떳떳한 대전에, 만민이 우러러보는 이 대전에, 감히 직시할 수 없을 만큼 위엄 넘치는 이 대전에 들이다니요! 태자 전하, 어찌 이런 짓을 하십니까!”
고서강은 한 손으로 가슴을 두드리며 소리 없이 통곡했다.
“황상! 선황! 눈을 뜨고 좀 보십시오! 태자 전하! 무슨 생각이십니까? 오늘은 창기를 대전에 들이시고, 내일은 또 무엇을 하실 겁니까? 모두를 지아비로 삼는 이 여인을 천하의 어머니 자리에 올리시기라도 하실 겁니까? 황가 혈통을 더럽히게 하실 생각이십니까! 태자 전하, 전하…….”
“닥쳐라!!”
태자가 버럭 고함쳤다. 드디어 정신을 차렸다. 정신을 차리자마자 화가 나서 머리가 터져버릴 것 같았다.
“미쳤는가? 아니면 마가 들렸나? 귀신에 씌었나?”
태자는 진심으로 궁금했다. 지금 고서강의 행동은 귀신에 씌었다는 것 말고 설명할 길이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