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78화: 평온한 노후는 사치
자극전에서 나온 수국공은 태자궁 문 앞을 지날 때 걸음을 멈추고 무심결에 자극전을 돌아보았다. 그렇게 잠시 주저하다가 결국 태자부터 만나려던 생각을 접었다. 지금은 흠차 신분인데 태자를 만나러 가서 예를 갖춰야 할지 말지도 큰 골치였다. 게다가 태자가 성질을 부리며 못 가게 하거나 독주를 들고 가라고 하면 어쩌나.
수국공은 그 생각에 저도 모르게 걸음을 서둘러 선덕문에서 나와 대황자부로 향했다.
장 선생은 호수 정자에 단정히 앉아서 물을 묻혀 바닥에 글씨를 쓰다가 수국공이 황상의 명을 받고 왔다는 사환의 말에 들고 있던 붓을 허공에서 멈칫했다. 얼굴엔 기쁜 듯, 슬픈 듯, 예상한 듯, 예상하지 못한 듯한 표정이 떠올랐다.
장 선생은 조금 힘겹게 일어서서 정전으로 향했다. 조금 느린 걸음이었지만 평소와 비교하면 훨씬 빠른 편이었다.
대황자 아랫자리에 비스듬히 몸을 틀고서 거북해서 어쩔 줄 모르며 앉아 있던 수국공은 장 선생이 안으로 들어오자 구세주를 만난 듯이 벌떡 일어섰다. 서둘러 다가가려다가 걸음을 멈추고 대황자를 바라보며 조심스럽게 해명하듯 입을 열었다.
“장 선생이군! 장 선생도 여기 있을 줄 몰랐네!”
“왜 이제야 오나.”
대황자가 눈살을 찌푸리며 장 선생을 질타했다. 평소에 태만한 것은 몰라도 외숙이 찾아왔는데 태만해? 됐다. 이 담장에서 나가면, 그때 두고 보자.
수국공은 대황자가 안색은 어두워도 별말 하지 않는 걸 보고는 허리를 굽실하고는 돌아서서 장 선생을 부축했다.
“선생, 잘 지내셨소? 여기에 있었군. 그 후로 계속 선생을 찾았소. 여기저기 찾아다녔는데, 나중에 해가아가 선생이 고향에 돌아가지 않았을까 하길래 그런 줄 알았더니…….”
“국공야, 소생을 염두에 두셔서 감사합니다.”
장 선생은 대황자의 분노를 아예 무시하고 수국공을 바라봤다. 진심으로 우러나서 감격하는 수국공의 모습에 조금 감동했다.
“선생, 이쪽으로.”
수국공은 장 선생을 부축하고 의자 곁으로 다가가면서 대황자의 안색을 살폈다. 대황자가 아무런 말도 하지 않자 앉으라는 말은 못 하고 주저했다. 대황자는 만나서 감격하는 두 사람을 보더니 안색이 더 어두워져서는 입을 꾹 다물고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장 선생은 팔걸이를 잡으며 자리에 앉아서 수국공을 향해 손짓했다.
“국공야도 앉으시지요. 오신 지 얼마나 됐습니까?”
수국공은 안도하는 동시에 또 조마조마해졌다.
선생이 들어와서 대왕야에게 예도 갖추지 않고 제 맘대로 앉았다. 휴. 됐다. 지금은 예전이 아니지.
“일각쯤 됐네. 황상께서 대왕야를 들여다보라고 분부하셨네. 잘 지내는지, 부족한 건 없는지, 시중드는 사람은 충분한지, 흡족히 시중드는지, 일손을 보태지 않아도 되는지.”
수국공은 얼굴을 구기고 한마디도 하지 않는 대황자의 눈치를 살피다가 결국 자리에 앉았다. 이미 한 말을 주절주절, 다시 장 선생에게 하고 또 했다. 어색하지 않으려면 계속 이야기할 수밖에 없었다.
“그럼 제가 모시겠습니다. 곳곳을 둘러보고 가시지요. 황명인데 직접 보셔야 보고하지요.”
장 선생은 팔걸이를 짚으면서 일어서서 살짝 고개를 들고 정전 위쪽 높이 앉은 대황자를 올려다봤다.
“국공야를 모시고 좀 둘러보고 오겠습니다. 마침 할 이야기도 있고요.”
“이런 작은 일에 자네가 갈 것 없다.”
대황자는 더 거북하고 불편했지만, 그래도 지금은 예전과 다르다는 걸 요즘은 드디어 깨달았다. 물론 예전이나 지금이나 장 선생을 용인하는 것은 그가 생각하는 관용의 한계 안에서만이었다.
“둘러보고 다시 와서 살펴본 상황을 왕야께 보고드리겠습니다.”
장 선생은 대황자가 분명히 동의하지 않음에도 그 말을 무시하고는 대황자를 향해 공수하고 돌아섰다.
“가시지요.”
수국공은 대황자를 쉴 새 없이 힐끔거리며 잠시 망설이다가 결국 장 선생을 따라 정전에서 나갔다.
“선생, 대왕야가 위리안치되긴 했지만, 아무리 그래도 황자일세. 황상이 여전히 아끼시고.”
수국공은 계단에서 내려와 몇 걸음 걷다가 결국 참지 못하고 장 선생에게 귀띔했다.
“압니다. 황상이 아끼지 않았다면 지금까지 이 호화로운 왕부에 살지도 못했겠지요. 국공야가 들르지도 않았을 테고요.”
장 선생이 느긋하게 대답했다.
“알면서 아까는 왜……. 휴. 선생, 대왕야의 성격을 잘 알지 않나. 앙심 품는 성격일세. 대왕야 편을 들려는 게 아니라, 선생 본인을 생각해야지. 행여…….”
그 말에 장 선생이 피식 웃었다.
“행여요? 국공야, 왕야가 살아서 이 왕부에서 나갈 날이 오리라 여기십니까?”
“선생!”
수국공이 무심결에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볼 것 없습니다. 높은 담장 안입니다. 설령 누가 듣는다고 한들, 어쩌겠습니까?”
장 선생은 뒷짐 진 채 사방의 높은 담장을 올려다봤다.
“이 담장, 국공야가 사람을 데리고 세운 겁니다.”
“아, 그렇지. 나도 황명을 받아서…….”
수국공은 온몸이 어색하고 난감해졌다.
“이 담장을 세워서 대왕야의 안전을 보전하신 겁니다.”
장 선생이 이어서 하는 말에 수국공이 얼떨떨해졌다.
“에? 선생 그 말은…… 이건…….”
비아냥거리는 것인가?
“이 담장이 아니었다면 지금까지 살아 있겠습니까?”
장 선생은 걸음을 멈추고 정전 방향을 바라봤다. 수국공은 또 얼떨떨해져서 잠시 멍하니 있다가 한숨을 내쉬었다. 눈물이 맺혔다.
“선생, 말 좀 해 보게. 어쩌면 저렇게 정신 나간 짓을 할 수 있나. 독으로 어미를 독살하다니. 친어미일세. 낳고 기른 친어미.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정도로 아낀 어미. 눈 감기 전까지 가장 놓지 못하던 것도 대왕야일세. 마지막 유언도 죽이지 말고 잘해달라고 황상께 부탁했네. 선생, 어떻게 저렇게 양심이 없을 수가 있겠나. 인간이…… 그게 인간이 할 짓인가?”
“오로지 총애만 한 결과지요. 남 탓을 할 수 없습니다.”
장 선생의 말은 표정처럼 으스스할 정도로 싸늘했다. 수국공은 입을 달싹였다. 뱃속 가득 들끓던 할 말이 결국 비통한 한숨으로 변했다.
“여기서 나가게 해달라고 하던가요? 태자와 대적해달라고? 아니면 태자를 죽이라고?”
장 선생은 수국공의 탄식과 괴로움을 아랑곳하지 않았다.
“그렇네. 태자가 어떻게 지내는지 묻고는 화를 내며 모두를 모으라고…….”
수국공은 대황자의 분부만 생각하면 허리가 끊어질 것만 같았다.
“영 황후는 아직 경성에 있습니까? 장공주는요?”
“있네. 연말에 양빈을 숙비로 진봉하고 황상에게 후궁을 들여준 일, 모두 영 황후가 관장했네. 장공주는 귀비의 장례 때 보록궁으로 옮긴 이래 지금까지 줄곧 거기서 지내고 있네. 돌아간다는 이야기는 없네. 오황자는 지금 연경궁에서 지내네. 태자가 지정해준 곳이지. 오황자는 매일 보록궁에 들러 한 시진 동안 장공주에게…… 뭘 배우는지는 모르겠지만 배우고 있다네.”
수국공은 하나를 물으니 열을 줄줄 설명했다.
“뭘 배우겠습니까. 치국, 주군의 길을 배우겠지요. 그것 말고 장공주가 아는 것도 없습니다.”
장 선생이 담담하게 말했다.
수국공의 안색이 변했다. 장 선생이 빙그레 웃으며 그런 그를 바라봤다.
“아직도 태자, 혹은 대왕야가 보위에 오를 거라는 망상을 품고 계십니까?”
“대왕야……는 이렇게 됐지만, 태자는 태자로 세워졌네.”
수국공이 대답했다. 태자는 태자가 됐다. 이 확정된 일을 어떻게 망상이라고 할 수 있나.
장 선생은 싸늘하게 웃고는 설명도 하지 않고 계속해서 물었다.
“조정에 변화는 있습니까? 큰 변화만 말씀하시면 됩니다.”
“승상이 하나 늘었네. 초 상서가 승상이 되었어. 묵 승상부 이공자가 호부 상서로 승진했고. 다만 임시일 뿐, 하반기엔 지방으로 이동한다는군. 다른 건…….”
“됐습니다.”
장 선생은 수국공의 말을 자르고 살짝 한숨을 내쉰 다음 말을 멈췄다가 결국 다시 물었다.
“어째서 고 사사가 새로운 승상이 되지 않았습니까? 태자가 아무런 말이 없었습니까?”
“태자는 고 사사를 밀었네. 다만 투두법으로 초 승상이 콩을 가장 많이 얻었네.”
수국공이 한숨을 내쉬었다. 그때 그도 참여했다. 하지만 고 사사에게 던지지 않았다. 사방(四房)에 세력을 보태주기 싫었다.
“태자는요? 반응이 어땠습니까?”
“모두의 의견인데 뭘 어쩌겠나. 게다가 태자는 국본이네, 누가 되든 다 태자의 신하 아닌가.”
수국공은 제가 던진 콩만 생각하면, 비록 잘못이 없다고 확신하지만, 어째서인지 이야기하고 싶지 않았다. 이야기만 나오면 내내 뜨끔했다.
장 선생은 하하 웃으며 수국공의 어깨를 힘껏 두드렸다. 수국공은 어리둥절해졌다.
“바깥 이야기는 그만하고 대왕야 이야기를 하지요. 대왕야의 분부, 어쩔 셈이십니까?”
한바탕 웃어댄 장 선생은 아까보다 홀가분해진 느낌이었다.
“대왕야가 위리안치된 이유가 다른 것이라면, 그게 뭐든 만회할 여지가 있을 걸세. 하지만 이 일은…… 황상이 대왕야를 아낀다 해도 태자도 이미 세웠네. 늙은 나 하나로 무슨 수가 있겠나. 내가 최선을 다하지 않는 게 아니라 실로…….”
수국공이 하소연을 시작하자 장 선생은 그를 비뚜름하게 바라보다가 고개를 저으며 웃었다. 한참 웃다가 또다시 수국공의 어깨를 두드렸다.
“어미를 시해하고 말고는 큰일이 아닙니다. 자고로 제왕의 자리에 앉은 자 중에 부모를 시해하고 형제를 도륙한 자는 얼마든지 있습니다. 성사한 후에 희생양을 찾으면 만사대길입니다.”
“그렇게 이야기할 일이 아니지. 대왕야 일은…….”
수국공의 안색이 퍼레졌다. 그 역시 아는 이치였다. 그러나 지금 자신은 태자 곁에 있었다. 태자 역시 생질이다. 위리안치된 대황자를 위해서, 일가가 멸문당할 위험을 무릅쓰고 애쓰고 싶지 않았다.
“대왕야의 문제는 어미를 시해하고 말고가 아니라, 너무 어리석다는 것입니다.”
장 선생의 말에 수국공은 아연해서 한참 넋이 나갔다가 감추려고도 하지 않고 크게 안도하며 쓴웃음 지었다.
“선생, 식은땀이 다 나는군.”
장 선생은 세상을 차단하는 높은 담장을 가리켰다.
“국공야가 세운 이 높은 담장, 대왕야를 가두기도 했지만 지키기도 합니다. 이 높은 담장이 무너지지 않는 한, 이 안에 있는 한, 앞으로 이 높은 담장이 있기 전과 다름없이 살거나, 더 좋게 살진 못할지 몰라도 늙어 죽을 때까지 조용히 사는 건 아무런 문제 없습니다. 귀비의 혈통을 적어도 하나는 보존하는 것이지요.”
수국공은 사실 무슨 말인지 알아듣지 못했지만, 그러든지 말든지 연신 고개를 끄덕였다. 그의 바람도 그러했다. 대왕야가 사달을 내지 말고 착실하게 이 담장 안에서 복을 누리길 바랐다. 안 좋을 것도 없지 않나.
“대왕야의 분부를 들은 것만으로 충분합니다. 이 담장을 나가면 잊어버리세요. 다른 사람에게 말하지도 말고요. 단 한 글자도 입에 올리지 마십시오. 황상이 물으시거든, 대왕야는 잘 지낸다고 하세요. 그리고 일상생활이 어떤지 세세히 말씀하시고, 일손은 어떠냐고 물으면 충분하다고 하세요.”
장 선생은 짚어만 주던 예전과 달리 세세히 분부했다. 수국공은 고개를 끄덕이며 들었다. 장 선생의 분부 한마디 한마디가 마음에 들었다. 이렇게 하는 게 제일 좋지!
“그리고.”
장 선생은 주변을 둘러봤다. 이 담장 곳곳은 이 담장이 세워지기 전보다 더 훨씬 더 꼼꼼히 보수되어 있었다.
“황상께 말씀하세요. 대왕야 시중드는 사람이 부족하다고. 아마도 황상은 그 일도 국공야에게 맡길 겁니다. 국공야는 대왕야의 취향대로 미인을 골라서 보내주세요.”
장 선생은 말을 멈추고 눈을 내리깔았다.
“양갓집 규수로 고를 것 없고, 자질이 뛰어난 기녀를 골라서 보내세요. 말 잘하고, 시중 잘 드는 아이로요. 할 일이 생기는 게 좋지 않겠습니까.”
수국공은 얼떨떨하다가 금세 깨달았다. 여색으로 대왕야의 한가한 마음을 달래주려는 것이다.
“안심하게. 안심해. 알아들었네. 그건 쉽지. 좋은 일이고.”
수국공은 연거푸 고개를 끄덕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