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77화: 저들끼리 상의해서
묵칠은 튀어나가려고 버둥거리는 주육을 붙잡은 채, 격노한 계소영과 다채로운 표정을 짓는 영원을 바라봤다. 주육과 비교하면 나름 똑똑한 묵칠은 영원이 무슨 생각인 건지 조금은 짐작했다. 명 삼낭자와 계소영을 이어줄 수 있다면 너무나 좋은 일이었다. 계소영은 자기보다 훨씬 뛰어난 사람이다. 학식이 가득한 명 삼낭자와는 영원이 말한 대로 재녀와 재자였다. 명 삼낭자는 좋은 인연을 얻게 되는 것이고, 계소영은……. 명 삼낭자가 같은 사람과 혼인하는데 제가 무슨 불만이 있겠나.
계소영이 소매를 휘두르며 사라지자 묵칠은 조마조마한 마음으로 후다닥 달려가서 간절하게 영원을 바라봤다. 주육도 있어서 물어보고 싶어도 물을 수가 없었다. 하지만 묻지 않자니 괴로워서 마구 손가락질해대며 입을 열었다.
“그…… 계 탐화? 칠 형님? 이 일, 어때?”
“어떻긴 뭐가 어때?”
영원이 대답하기 전에 주육이 흉악한 얼굴로 이를 갈며 먼저 대답했다.
“어떻긴 뭐가 어때? 꼴 좀 보라지. 탐화면 뭐? 뭐가 대단해서? 날을 잡아서 몽둥이찜질을 해줘야지. 감히 원 형님 앞에서 으르렁거려? 죽고 싶나!”
“안심해라.”
영원은 묵칠에게 대답부터 해주고, 주육의 머리통에 꿀밤을 세게 먹였다.
“넌 어째 갈수록 방자하게 입을 놀려? 아까 두 낭자가 아라나 류만인 줄 아냐? 네가 함부로 경박하게 굴어도 된다고 생각한 것이야?”
“그럴 리가. 그런 거 아니오…….”
아까 제 말이 심했음을 잘 아는 주육은 영원이 훈계하자 얼른 눈빛을 피하고는 말을 돌렸다.
“한참 나와 있었더니 목마르군. 들어가서 차 마십시다. 술도.”
“잘 들어라. 난 분명 귀띔했다. 아까 일, 내가 어렵게 계 탐화를 진정시켰다. 네가 입을 나불거려서 소문이 퍼지기만 해 봐라. 남 몽둥이찜질 할 생각하지 말고, 네가 어떻게 죽을지부터 고민해라.”
영원이 싸늘하게 하는 말에 주육은 겁에 질려 목을 움츠렸다.
“형님, 걱정 붙들어 매시오. 아깐 내가 잠깐 미쳤었지. 나도 이 일의 경중을 아오. 끽소리 안 하겠소. 생각도 안 해.”
“하나는 내 친누이고, 하나는 내 친누이와 다름없다. 우리 백부와 비교하면 아버지는 성격이 좋으신 거다. 우리 백부가 아마 늦어도 가을엔 경성에 돌아오실 거다. 우린 형제 사이니까 이번엔 봐주마. 다시는 이야기하지 말자. 내가 돌아가서 육누이에겐 잘 말해두마.”
묵칠이 주육을 두드리며 하는 말에 주육이 얼른 장읍하며 사과했다.
“아까는 내가 미쳤었지. 내일 내가 감사의 뜻으로 제대로 한턱내겠어. 그리고 원 형님에게도!”
화청으로 돌아갔더니 계소영이 영원을 힐끔 보자마자 얼른 멀리 피했다. 영원도 신경 쓰지 않고 찻잔을 들고 화청 창가로 다가가서 저 멀리 호숫가를 바라보며 조금 전에 성사한 큰일을 저녁에 어떤 식으로 이동에게 이야기해 줄지 궁리했다.
복안 장공주는 미시 말까지 있다가 모두가 모르는 체하는 가운데 이동의 배웅을 받으며 마차를 타고 돌아갔다.
장공주가 가자마자 다들 속속 인사하고 돌아갔다. 영안백부 민 노부인은 며느리 화 대내내, 딸 조염과 함께 나왔다. 화 대내내는 민 노부인을 마차에 부축해서 태우고 뒤따라 탔다.
민 노부인이 허리를 두드리며 나직이 투덜거렸다.
“장공주 성격이 제멋대로라더니, 정말 그렇구나. 황자, 공주는 신하 집에 방문할 일이 있으면 다들 잠깐 앉았다가 가곤 하지, 이렇게 일찍 와서 늦게 가는 사람이 어디에 있을까. 정말 힘들어 죽겠다.”
“우리가 다 돌아간 다음에 이가는 뒷정리하느라 밤새 바쁘게 움직여야 할 거예요. 우리는 불평할 일도 아니에요.”
화 대내내는 등받이를 들고 알아서 괸 다음에 마차가 덜컹거리며 움직이자 휘장을 걷고 이가 저택을 힐끔 바라봤다.
“어머님, 형국공부는 어떤 것 같으세요. 아무래도…….”
화 대내내는 거기까지 말하고 입을 다물었다. 조염을 형국공 세자와 혼인시키려는 민 노부인의 바람은 아무래도 희망이 없어 보였다.
“휴, 형국공 부인이 거론한 가문 좀 봐라. 제 아들이 어떤 인물인지 생각도 하지 않더라. 욕심은 많고.”
민 노부인은 화 대내내가 딸 혼사 이야기를 꺼내자 고민도 되고 화도 났다. 형국공부는 더 고민할 것이 없을 듯했다.
“형국공부는 고귀한 집안이긴 한데, 겉만 화려하지 실속은 없어요. 육저아가 그 집에 들어가면 편치 않을 거예요. 눈앞에 좋은 혼처가 있네요.”
화 대내내는 싱글벙글 웃으며 마차가 멀어지는 방향을 가리켰다.
“이가요.”
“이가는 상인 가문이고 그 집 대랑은 양자 아니냐.”
상인 출신이라고 평생 손가락질당해 온 민 노부인은 상인 가문을 지극히 예민하게 대하고 무시했다.
“상인 가문이 뭐가 어때서요? 이가 대랑은 전려 출신이고 집안에 은자가 넘쳐나죠. 재주가 출중하고요. 내 보기엔 10년 안 되어서 3품으로 진급할 거예요. 어쩌면 상공이 될 수도 있죠. 지금 우리 조정의 묵 승상과 여 승상 모두 그저 그런 출신인데 지금은 경성에서 손꼽히는 집안이 되었잖아요.”
“그건 다르지. 묵 승상과 여 승상은 조금 궁핍해서 그렇지 모두 서생 가문 출신이다.”
민 노부인은 역시 가문을 제일 중시했다.
“이가는 식구가 모두 셋, 인품부터 뛰어난 이 대랑은 말할 것도 없고 이가 대낭자도 지금은 말도 못 하게 대단해요. 장공주가 어찌 대하는지 보셨지요? 장공주 앞에서 말발이 그렇게 먹힌대요.”
화 대내내는 민 노부인의 말을 상대하지 않고 자기 생각대로 말을 이었다.
화 대내내의 주견(主見)이 민 노부인의 주견인지라, 민 노부인은 한마디 더 꿍얼거리고는 아무런 말 없이 화 대내내의 이야기를 들으며 속으로 셈하기 시작했다.
장 태태와는 몇십 년 알고 지냈는데 사람됨이야 말할 것도 없지. 통 크고 후덕하고. 이 대랑 역시 인품이 아주 훌륭하고. 이가 대낭자는 다시 친정으로 돌아왔으니 재가하기엔 어렵겠지. 음, 재가하지 않는 게 제일 좋지. 혼자 먹고 쓰는 데 얼마나 든다고. 정말 혼인하게 되면 혼수를 어마어마하게 해가야 할 텐데.
정말로 좋은 혼처긴 하지. 시어머니는 말할 것도 없고, 양자라도 양자 나름의 장점이 있고. 친어미가 아니니 효도하라고 육저아를 다그치지 못할 것이고. 동서도 없고, 들러붙을 가난한 친척도 없고.
민 노부인은 마음이 움직였다.
“그러고 보니 정말 그렇구나. 육저아는 곱게 자라서 응석받이인데 이런 가문과 혼인하면 적어도 마음 편하게는 살겠구나.”
“어머니도 괜찮다고 생각하시면 서둘러야 해요. 우리 눈에 좋은 혼사는 남도 그렇게 본답니다. 조 시랑부의 마 부인이 장 태태를 붙들고 이야기하는 거 보셨지요? 얼마나 싹싹하던가요. 이가 대랑을 점찍어서 그런 걸지도 몰라요. 그 집 구저아가 몇 년이나 위로는 못 넘보고, 떨어지는 가문은 마음에 차지 않아 해서 마땅한 혼처를 구하지 못하고 있어요.”
조 시랑부 마 부인의 열정적인 모습을 떠올린 화 대내내는 살짝 눈살을 찌푸렸다. 조 시랑 집안에서 먼저 혼담을 넣으면, 설령 동시에 넣는다고 해도 육저아가 허탕 칠 것이다. 아무래도 영안백부는 속 빈 강정이고 조 시랑은 실권을 쥔 인물이니까.
“그럼 서둘러야지!”
민 노부인은 생각할수록 이가가 제격인데 화 대내내가 그렇게 말하자 다급해졌다.
“예, 서둘러야 해요. 내세울 만한 매파를 찾아야 하고요.”
화 대내내는 그렇게 대답하면서 얼른 속으로 가늠했다.
“고모님은 형국공 부인이니 신분을 따지면 충분하지만, 고모님은 이가와 왕래가 없고 또 하나…….”
화 대내내가 말을 멈췄다가 다시 이었다.
“팔저아의 혼사가 결정되지 않았는데 행여…….”
“행여 네 고모도 이가 대랑을 마음에 들어 할까 봐? 그럼 네 고모는 안 된다. 상 대내내? 탕가는 이가와 대대로 친분 있는 집안이고 상 대내내가 장 태태와도 잘 지내는 것 같던데.”
“제 생각엔 여기저기 부탁할 것도 없어요. 어머니와 장 태태는 몇십 년 친분이 있잖아요. 아예 어머니가 이가에 한 번 다녀오세요. 가서 장 태태에게 직접 넌지시 말해 보세요. 설령 안 되더라도 체면 상해서 앞으로 왕래하기에 껄끄러울 것까지는 없잖아요. 이가는 사돈은 못 되어도 앞으로 잘 사귀어야 할 집안이에요.”
“그래, 그럼 그렇게 하자.”
화 대내내가 금세 결심하고 하는 말에 호탕한 성격인 민 노부인도 시원스럽게 대답했다. 민 노부인은 화 대내내와 잠시 더 상의한 끝에 내일 바로 이가에 가서 장 태태에게 직접 혼담을 거론해 보기로 했다.
영안백부 고부 두 사람뿐만 아니라 조 시랑 부인 마씨와 딸 조 구낭자도 속닥속닥 혼사를 의논하고 있었다.
이번엔 조 구낭자와 어머니 마씨 모두 일치한 안목으로 이가를 점찍었다. 마 부인은 장 태태의 사리 밝음과 좋은 성격, 그리고 이가 대낭자와 장공주의 두터운 친분, 이신의 이갑 1등이 마음에 들었고, 조 구낭자는 이가의 남다른 재물과 이신의 수려함과 고상함이 마음에 들었다.
마 부인 역시 행동파였고, 딸과 몇 마디 만에 의견 일치를 본 후에 곧바로 누구를 중매인으로 보낼지 가늠하기 시작했다.
“초 승상부의 고 부인에게 부탁하자. 초 승상의 체면이 있는데, 이가에서 거절하지 않겠지. 고 부인과 수녕백부가 먼 친척으로 얽혔다는 것 같은데, 고 부인이 수녕백부 고 이낭의 친정이 진작 고씨 일족에서 제명됐다고 몇 번이나 말했다. 고 부인이 인정하지 않는 친척이니 그건 아무런 문제가 없다.”
조 구낭자가 입을 비죽였다.
“설령 문제라고 해도 이가에서 그걸 따질 계제는 아니죠. 어머니도 참, 꼼꼼히도 생각하신다니까.”
“다 너 때문 아니냐. 정말로 성사되면 너는 이가에 들어가야 한다. 장 태태가 양어머니라고는 하나 어찌 됐든 시어머니다. 잘 인연 맺을 수 있으면 잘 맺어야지, 설령 맺어지지 못한다고 해도 심기를 거스르진 말아야 한다. 원한이 생겨서는 더더욱 안 되고. 너는 참, 이렇게 어린애처럼 군다니까.”
마 부인이 딸의 이마를 톡톡 쳤다.
“너는 참……. 됐다, 됐어. 이런 응석받이 같은 네 성격만 봐도 이가 같은 지체 낮은 집이 낫다. 그래야 발 뻗고 평생 편안하게 살지.”
“어머니. 그렇지 않아요. 어머니 앞에서나 그렇지, 다른 사람 앞에선, 어머니, 가서 수소문해 보세요. 다들 조가 구낭자를 사리 밝고 대범하다고 칭찬할걸요?”
조 구낭자가 팔을 흔들며 어리광부리자 마 부인이 웃음 지었다.
“그래, 그래! 사리 밝고 대범하지, 암. 내 여식에게 부족한 것이 있을까!”
궁궐 안, 자극전. 황상은 지친 기색으로 주사(朱砂) 붓을 내려놓고 다리를 통통 두드렸다. 상 태감이 서둘러 다가가 황상을 부축해서 탑상에서 내려와서 몇 발짝 곁에서 걷다가 황상의 다리가 편해진 걸 본 후에야 팔을 풀고 화항 위 필묵을 정리했다.
“귀비가 떠난 지 어느새 반년은 되었지?”
느릿느릿 몇 걸음 걷던 황상이 걸음을 멈추고 대전 밖에 화사하게 핀 봄꽃을 바라보다가 살짝 가라앉은 목소리로 말했다.
“예.”
황상이 주 귀비를 거론하자 상 태감은 그 이상 말할 엄두가 나지 않았다.
“대가아도 반년 가까이 갇혀 있었구나.”
잠시 침묵하다가 황상이 다시 나직이 중얼거렸다. 상 태감은 이번엔 끽소리도 내지 않았다.
“수국공을 들라 해라.”
황상은 또 몇 걸음 걷다가 화항으로 돌아와 앉으며 분부했다.
“예.”
상 태감은 공손히 대전 문 앞으로 뒷걸음질 쳐서 내시를 불러 수국공을 들이라 전했다.
수국공은 금세 도착해서 고개를 조아렸다. 황상은 탕 그릇을 내려놓고 부드러운 목소리로 분부했다.
“며칠 전에 대가아가 서신을 보냈네. 짐이 그립다고. 위리안치된 사람이 서신을 내보낸 건 잘못이지. 하지만 짐을 그리워하는 마음이라서, 휴. 자네가 한번 다녀오게. 첫째, 대가아가 잘 지내는지 보고, 둘째, 저택 구석구석 샅샅이 살피게. 필요한 건 다 갖춰져 있는지, 시중들 사람이 부족하지 않은지.”
황상은 잠시 말을 멈췄다가 다시 이었다.
“갇힌 사람이 안에서 할 수 있는 일도 한정적이네. 시중드는 사람이 마음에 드는지 물어보게. 짐이 기억하기로 위리안치되기 전에 그 아이 첩 하나가 죽었었네.”
“예.”
이런 일거리라는 걸 알게 된 수국공은 괴로움이 가득했지만, 겉으로는 조금도 티를 내지 못하고 공손하게 대답했다.
“자넨 대가아의 친외숙이네. 제 어미만큼 대가아를 아꼈지. 자네가 가서 살피는 게 짐도 마음이 놓이네. 대역무도한 짓을 저질렀지만, 어찌 됐든……. 휴, 귀비가 눈 감을 때도 그 아이를 가장 걱정했네. 자네가 가 보게. 제대로 살펴보게. 아무리 그래도 짐의 아들인데 서러움을 겪어선 안 되네.”
“예.”
수국공이 다시 공손히 대답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