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금동-376화 (376/463)

376화: 사고뭉치 주육

영원은 헛웃음 치며 살짝 허리를 숙였다. 무슨 말인지 알아들었다.

“하지만 그녀는 나를 거들떠보지도 않네. 내 마음만 생각하고 그녀와 혼인한다면, 아무리 생각해도 그녀에게 좋을 것이 없네. 나만 좋자고 하는 일이지.”

영원은 살짝 감동한 표정이었다. 계소영이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내가 영 칠야처럼 막내로 태어나 허튼짓하며 자랐다면, 만사 하고 싶은 대로 하는 것까지는 아니더라도 적어도 속세의 예법에 구애받지 않을 수 있다면 말이지. 계가가 영가처럼 무(武)로 집안을 일으켰고, 그 많은 도덕, 예법이 없다면, 강남이 북부처럼 사납고 거친 곳이라면, 그녀와 혼인해도 서러울 일이 없도록 해줄 수 있네. 그럼 나도 종신대사에서 허리를 굽힐 일이 없고. 하지만…….”

계소영이 걸음을 멈추고 길가의 나무를 두드렸다.

“나는 종손이네. 그녀는 종부가 되어야 해! 계가는 대가족이야. 할머님 같은 분도 지금까지 버티면서 얼마나 많은 서러움을 겪은 줄 아는가? 지금까지도 종친 어르신은 할아버님 이야기만 나오면 걸맞은 혼사가 아니었다고 한탄하네. 아버지는 어렸을 때 강남 고향집에 돌아가는 걸 제일 싫어했네. 내가 어릴 때 고향 집에 돌아가면, 심지어 내 앞에서도 할머님의 출신을 타박했네. 무술을 익힌 사람은 저속하다고. 할머님은 심지어 할아버님이 아니라면 돌아가신 후에 그냥 경성에 묻히고 싶다고까지 말했었네.”

영원은 침묵하다가 허탈한 듯 한숨을 내쉬었다.

“그 당시 할아버님과 할머님이 경성에 자리 잡았을 때, 계씨 일족은 경성에 자리 잡은 사람이 없었네. 계씨 일가의 거인이 경성에 자리 잡게 되었을 때, 할아버님이 벌써 수상 자리에 올라서 적어도 경성으로 옮겨온 사람은 할머님 앞에서 불손하게 굴지 못했지. 그러나 지금은 계씨 일가가 경성과 강남에 반반씩 있네. 휴! 아무리 생각해도 내 뜻 하나 이루자고 그녀가 평생 서러움을 겪게 할 순 없네.”

영원은 계소영을 돌아보며 입을 뻐끔거렸다. 뭐라고 위로해야 좋을지 몰랐다. 사실 위로할 필요도 없고 위로할 수도 없었다. 그저 따라서 한숨을 내쉴 수밖에.

역시 인생은 모든 것을 뜻대로 이룰 수 없는 법인가 보다.

“어머나!”

앞에서 놀라 고함치는 소리가 나지막이 들렸다. 침울해하던 계소영과 영원이 동시에 고개를 들었다. 목단꽃 뒤 돌의자에 앉은 묵 육낭자와 명 삼낭자가 놀라고 아연한 눈빛으로 두 사람을 돌아보고 있었다.

“길을 잘못 온 건가.”

영원이 다급히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계소영은 벌써 깊이 장읍했다.

“두 낭자를 놀라게 했습니다.”

계소영은 장읍하며 뒷걸음치다가 한창 두리번거리는 영원의 발등을 밟았다. 계소영이 비틀거리며 넘어지려 하자 영원이 얼른 손을 내밀어 붙잡았다.

저 앞의 명 삼낭자와 묵 육낭자는 어느새 일어서서 두 사람을 향해 살짝 무릎을 구부리며 예를 갖췄다.

“계 공자, 영 칠야.”

“육낭자.”

영원은 계소영의 어깨를 누르며 부축하는 동시에 그를 두 낭자 쪽으로 돌려세우며 묵 육낭자에게 인사했다.

“정말 미안합니다. 나와 계 형이 경치에 빠져 길을 잃었습니다.”

“놀라게 해서 미안합니다.”

영원에게 붙잡혀서 두 낭자를 마주한 계소영은 고개도 들지 못하고 다시 장읍하며 사과했다.

묵 육낭자는 원래 대범한 성격이었고, 영원과 만난 적도 있는 데다가 오라버니가 거의 매일 영 칠야 이러쿵저러쿵하는 걸 들어서 무의식적으로 이미 낯선 사람으로 여기지 않던지라 태연하게 웃으며 답례했다.

“영 칠야, 그렇게 체면 차리지 마세요.”

계소영을 흠모하는 명 삼낭자는 갑작스럽게 이렇게 만나게 되자 묵 육낭자처럼 대담하게 두 사람을 훑어볼 수가 없었다. 그녀는 살짝 고개를 숙이고 눈을 내리깐 채 예를 올릴 뿐 아무런 말을 하지 않았다.

영원과 계소영이 뒷걸음질 치며 서둘러 돌아서려는데 주육이 꽥 고함치는 소리가 들렸다.

“두 사람, 여기서 미인과 밀회하고 있었군!”

“헛소리하지 마라!”

“헛소리하지 말게!”

영원과 계소영이 이구동성으로 주육을 호통쳤다. 묵 육낭자와 명 삼낭자가 눈빛을 주고받고 바로 돌아서려는데 묵칠이 주육 뒤에서 나와 성큼 다가왔다.

“응, 육누이였구나. 그리고 명가 누이도. 소육, 허튼소리 하지 마라!”

묵칠도 얼른 돌아보며 주육을 호통쳤다. 주육도 상대를 확인하고는 허둥지둥 두 사람을 향해 연신 공수하고 장읍했다.

“두 분 누님…… 아니, 아니, 두 분 누이, 내가 헛소리했다. 내 입이 이리 방정이지! 나중에 자리를 마련해서 두 분 누이에게 제대로 사과하지.”

묵 육낭자가 입을 가리고 빙긋 웃었다.

“칠 오라버니에게 육 공자 말씀 많이 들었어요. 연회는 됐어요.”

묵칠이 다급히 육낭자의 말을 잘랐다.

“넘어가면 안 되지! 이놈이 연회를 여는 기회가 많지 않아. 내가 육누이와 삼누이 대신 가겠다. 한 번으론 안 돼! 육누이 한 번, 삼누이 한 번!”

“가세.”

계소영은 주육의 고함에 매우 거북해진 데다, 주육과 묵칠이 연회를 여니 마니로 옥신각신하는 걸 보고 사람들을 채근했다. 하지만 계소영이 동쪽으로 가자고 하니, 주육으로서는 반드시 서쪽으로 가자고 어깃장을 놓아야 했다.

“이 지경이 됐는데 서두르긴 뭘 서둘러? 원 형님과 여기까지 와서 뭘 했지? 소칠이랑 한참 찾아다녔는데.”

영원은 자기를 힐끔거리면서도 계소영에겐 눈길도 주지 않는 명 삼낭자를 슬쩍 쳐다보다가 묵칠을 한 번 보고는 머리를 굴리기 시작했다.

“계 형과 함께 여기저기 둘러보고 있었다. 계 형 뒤를 따라왔는데, 어쩌다 보니 여기로 온 것이지.”

“원 형님은 몰랐겠지만, 계 형은 분명 알고 왔겠지.”

주육은 이십여 년 살면서 한 번도 앞뒤 생각을 하고 말한 적이 없었다. 그래도 묵 육낭자는 별 느낌이 없었다. 주육과 어린 시절부터 알았고, 대여섯 살까지는 종종 함께 놀아서 주육이 어떤 인물인지 잘 알기에 아예 상대하지 않았다. 그러나 명 삼낭자는 달랐다. 안 그래도 계 공자를 흠모하는 마음이 가득했다. 그리고 묵칠과의 혼사가 거의 결정되어 가는 상황이라, 계 공자를 흠모하면서도 불안하고 죄책감을 느꼈다. 마음이 생겼으니 생각이 많을 수밖에 없는데 주육이 이렇게 말하니 순간 얼굴이 확 붉어졌다.

영원은 명 삼낭자의 얼굴이 눈에 띄게 붉어지는 걸 보고 눈썹을 치켜올렸다가 다시 내렸다. 곧바로 묵칠과 주육 사이를 파고들어서 주육을 손가락질했다.

“또 허튼소릴! 계 공자는 명가 낭자와 아는 사이도 아니다! 응? 지난번에 남쪽에 문풍이 강한 두 세도가가 있다고 했었지? 하나는 계가고, 또 하나가…… 얼핏 생각해 보니 명가인 것 같은데?”

“명가 맞소!”

주육이 어이없다는 얼굴로 영원을 흘겨보며 한숨을 내쉬었다. 제 원 형님은 다 좋은데 이쪽으로 아둔했다. 자기보다 더 아둔했다.

“낭자들도 사내와 함께 글공부한다는 게, 계 형 집안이던가? 아니면……. 헷갈려서, 원.”

영원이 눈살을 찌푸리며 머리통을 툭툭 쳤다. 계소영은 영원을 흘겨봤다. 영원이 모르는 척하는 건 알지만, 무슨 생각으로 이러는 건지 당장 떠오르지 않았다.

“명가다, 명가! 이쪽으로는 계가가 명가만 못하다고 우리 할머님이 말씀하신 적 있지.”

“재녀와 재자였구나!”

영원이 쥘부채로 손바닥을 탁탁 두드리며 감탄했다. 묵칠은 멈칫하고는 명 삼낭자와 계소영을 번갈아 보다가 명 삼낭자를 바라봤다. 명 삼낭자는 그 시선에 초조하고 난처해졌다. 묵 육낭자는 살짝 창백해진 얼굴로 묵칠을 노려봤다. 남녀 문제에 대해서는 가장 영리한 주육은 딱 봐도 이상하게 구는 세 사람을 보고는 ‘하!’ 소리를 내며 명 삼낭자를 향해 손가락질하려다가 계소영 쪽으로 휙 팔을 돌렸다.

“하하, 그렇게 된 거로군. 재녀와 재자라! 자네 알고 보니…… 아하하하. 난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네!”

영원이 주육의 머리통을 내리쳤다.

“또 허튼소리 한다! 어서 가자!”

영원은 한 손으로 주육을, 다른 손으로는 화가 나서 얼굴이 창백해진 계소영을 끌고 돌아서서 자리를 떴다.

묵칠은 따라가다가 다시 돌아와서 명 삼낭자에게 다가갔다.

“칠 형님의 말이 맞다. 누이는 계 공자와 진정한 재자, 재녀지……. 그 뭐냐, 계 공자가 누이를 이렇게 찾아오기까지 했잖아. 나도 좋은 일이라고 생각한다. 아주 좋아. 매우 좋아!”

묵칠은 그 말을 남기고 돌아서서 걷다가 달리기 시작했다. 명 삼낭자의 붉었던 얼굴이 창백해졌다. 온몸이 부들부들 떨렸다. 내 청백을 더럽히려는 거야?!

“언니, 상대하지 말아요. 소육은 칠 오라버니처럼 고얀 짓만 해. 어릴 때부터 그랬어. 영원은 망할 놈 중의 우두머리고. 상대할 것 없어. 번번이 저런 허튼짓을 해. 가요. 돌아가면 밤새 벌 세우라고 할머님께 말씀드릴 거야.”

묵 육낭자는 화가 나서 발을 굴렀다. 돌아가면 반드시 할머님께 다 말씀드릴 거야!

“나도 알아. 나는……. 어르신께 말씀드리지 마. 내가, 찔리는 게 맞아.”

명 삼낭자의 눈에서 눈물이 뚝뚝 떨어졌다.

계 공자를 흠모하는 게 사실이니 양심에 가책을 느낄 뿐이었다.

계소영 무리는 단숨에 다른 쪽으로 달려갔고 저 멀리 화청이 보이자 계소영이 영원을 휙 뿌리치고 코앞에서 삿대질했다.

“무슨 생각이지? 결백을 더럽히는 건 살인이나 마찬가지라는 걸 모르나?”

“우리 원 형님한테 그게 무슨 말버릇이냐!”

주육이 언짢아져서 계소영을 밀치려고 다가갔다. 그의 손이 계소영에게 닿기 전에 영원이 주육을 밀쳐냈다.

“너희 둘 자리 좀 피해라. 계 형과 할 말이 있다.”

어렴풋이 무언가 느낀 묵칠이 계소영에게 달려가려고 버둥거리는 주육을 끌고 한쪽으로 피했다.

“좋은 혼사 아닌가. 명가 삼낭자는 장녀가 아닐 뿐이지, 명가 장방 적녀일세. 명가 삼낭자가 어떤 사람인지는 자네도 조금 전에 보았지. 얼마나 좋은 혼사인가.”

영원이 싱글벙글 웃으며 말하자, 계소영이 어안이 벙벙해져서 영원을 바라보다가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입술을 파르르 떨다가 한참 만에 겨우 말이 나왔다.

“멀쩡한 사람처럼 굴 순 없는가!”

“멀쩡하지 않을 게 무엇인가? 내 말이 틀렸나?”

영원이 억울한 표정으로 어깨를 으쓱였다. 계소영이 기가 차서 콧방귀 뀌고는 소매를 휘두르며 돌아서는데 영원이 대뜸 잡아끌었다.

“난 진짜로 진지하게 한 말이었네. 곰곰이 생각하는 게 좋을 걸세. 소칠은 그래도 입이 무거운 편이지만, 주육은……. 허허.”

영원이 헛웃음을 치자 계소영의 얼굴이 시퍼레졌다.

“지금 날 위협하는 건가?”

“나는 자네를 따라간 거지? 자네가 앞장섰지?”

영원은 계소영의 말에 대답하지 않았다. 당연히 위협하는 거지! 당연한 것 아닌가?

“잘못한 건 자네일세. 맞지? 둘째, 자네가 명 삼낭자를 보고 당황해서 내 발을 밟았네. 난 자네가 망신 사지 않도록 잡아줄 수밖에 없었어. 자네가 당황하는 바람에 지체한 거네. 그렇지 않았다면 두 머저리가 보기 전에 진작 멀리 달아났을 걸세. 두 번째 잘못도 자네가 했지? 세 번째 잘못은……. 그것참 이상도 하지. 명가 삼낭자가 얼굴을 왜 붉혔을까. 얼굴만 붉히지 않았더라도……. 어찌 됐든, 그래서 이 일이 누구 잘못인가?”

계소영은 영원 때문에 화가 나서 침을 꼴깍꼴깍 삼켰다.

“그게 아니라, 내 말을 잘 듣…….”

“내 말을 잘 듣게. 소문이라도 나서 명 삼낭자 명성을 해치게 되면 그건 다 자네 탓이네. 난 자네의 이딴 일을 상관하고 싶지도 않아. 그냥 나중에 후회할 짓을 하지 말라고 귀띔하는 걸세. 내 분명하게 말했네!”

영원은 계소영의 말을 가차 없이 무질렀다. 계소영은 영원을 두들겨 패고 싶은 충동을 억누르며 깊이 숨을 들이마셨다.

“영 칠야. 자네는 이리 억지 쓰는 사람이 아니네. 내 말 듣게. 혼사를 이렇게 내키는 대로 밀어붙이는 법은 없네. 일단 우리 가문 어르신과 그녀 가문 어르신이 원하는지 아닌지, 둘째, 그녀가 원하는지 아닌지…….”

“그야 쉽지! 내가 본 이상 좌시할 까닭이 없네. 너무 쉬운 일 아닌가. 둘이 만나게 해주겠네. 만나서 이야기해 보고 원하는지 아닌지 직접 물어보게. 싫다면…… 뭐 별일도 아니지. 어찌 됐든 낭자를 난처하게 해서는 안 되네. 안 그런가? 오늘로 할까?”

영원이 가슴을 두드리며 하는 말에 계소영은 얼굴을 문질렀다. 아까 무슨 귀신에 씌어서 영원과 함께 이야기하러 나왔을까. 그 바람에 벗어날 수 없는 화를 자초한 것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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