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금동-375화 (375/463)

375화: 내려놓기 어려운 마음

이신은 마음이 편안해진 듯한 진안방의 모습에 내심 안도했지만, 마음은 계속 무거웠다. 본 황조는 문인을 후대하고 개국 이래 적어도 아직은 일갑 진사를 처형한 선례가 없었다. 방안인 진안방이 지금으로부터 2년 뒤에 머리통이 떨어진다니……. 근래 황상의 옥체가 평온하지 않다고 들었는데.

영원은 온 신경이 계소영에게 쏠려 있었다. 그는 계소영과 가까운 사이가 아니었다. 하지만 이동이 당부한 일은 반드시 해내야 하니 제대로 머리를 굴리지 않을 수가 없었다. 영원은 머리를 굴리면서 계소영 곁으로 다가갔다. 일단 말 걸 기회를 찾아야 했다.

계소영은 여염 옆에 서 있었고 여염은 이신과 나직이 이야기하고 있었다.

“그 문 선생이 바로 문도지?”

이신이 고개를 끄덕였다. 여염은 편안해진 얼굴로 무슨 이야기를 하는지 껄껄 웃는 진안방을 힐끔 보고는 목소리를 더 낮췄다.

“문도가 주역에 지극히 능통하다고 들었네. 육효(六爻) 점괘는 틀리는 경우가 드물다면서?”

“일단 안심시킨 걸세. 안 그러면 괜히 없는 사달도 일어날 수 있어.”

이신이 나지막이 대답했다. 영원은 조금 떨어져 있었지만 청력이 매우 좋아 똑똑히 들었다. 그는 잠시 생각하다가 고개를 내밀고 끼어들었다.

“큰 안개, 나도 하나 들은 이야기가 있네.”

계소영, 여염과 이신이 동시에 그를 돌아봤다. 영원이 상반신을 숙이며 나직이 말했다.

“수녕백 세자 강환장이 대상국사 후원에 무릎 꿇고 있었던 일, 다들 알지?”

이신이 눈살을 찌푸렸다. 모르는 일이었다. 여염이 이신을 바라봤다. 그도 모르는 일이었다. 계소영은 눈을 내리깔았다. 알고 있었다. 그 일로 부친이 크게 화를 내기도 했었다.

영원이 머쓱한 듯이 헤헤 웃었다.

“모르나? 나도 딱히 지켜본 것은 아니고, 내가 오지랖이 넓은 편이라 말이지. 참 공교롭지. 마침 그가 누군지 모를 사람을 만나야겠다고 대상국사 후원에 무릎 꿇고 있다기에 그만……. 이상하잖은가. 그렇지? 그래서 사람을 보내 지켜보았지. 그날 새벽에 큰비가 지나고 온 하늘에 별이 가득하고 다른 곳은 다 멀쩡한데 강환장이 무릎 꿇은 그곳에만 짙은 안개가 자욱했다지 뭔가. 안개가 걷힌 후에 강환장은 일어나서 돌아갔고.”

계소영의 안색이 살짝 변했다. 이신과 여염은 눈이 휘둥그레져서 영원을 바라봤다. 영원이 어깨를 으쓱했다.

“뜬금없이 생긴 안개라서……. 내가 얼마나 놀랐는지 아는가.”

“칠야가 이런 작은 일에 놀란다고?”

이신이 헛웃음 쳤다.

“내가 간이 좀 작네.”

영원의 진지한 얼굴에 여염이 웃음을 터트렸다. 이신은 콧방귀를 뀌었고 계소영은 그 말을 못 들은 듯 무슨 생각을 하는지 넋을 놓고 있었다.

이신이 눈살을 찌푸리고 바라보다가 무슨 일인지 물으려는데 계소영이 손사래 쳤다.

“난 괜찮네. 아무 일 없어. 화원의 경치가 참 좋군. 좀 거닐다 오겠네.”

그러고는 영원을 돌아보며 물었다.

“함께 가겠나?”

이신과 여염은 눈빛을 주고받고는 계소영과 영원이 앞서거나 뒤서거니 화청에서 나가는 걸 묵묵히 바라봤다.

계소영과 영원은 앞뒤로 서서 각자 경치 감상하면서 아무런 말 없이 걸었다. 그렇게 한참 멀리 가다가 계소영이 걸음을 살짝 늦추고 영원을 돌아봤다.

“자네가 경성에 오기 전부터 강환장은 진왕부 장사였네. 줄곧 지켜본 건가?”

“그렇네.”

영원은 매우 시원스럽게 대답했다. 계소영은 다시 입을 다물고 고개를 숙인 채 또 멀리 간 후에야 조금 주저하며 물었다.

“지켜보고 있었으니, 이상한 점이 있다는 걸 알겠군.”

“이상한 점이 한둘이 아니라서 말이지. 어떤 걸 말하는 건가?”

영원이 능글맞게 되물었다. 계소영은 또 입을 다물었다. 호숫가에 도착해서 구곡교를 따라 호수 안에 있는 정자까지 들어가서 저 멀리 보이는 뭍을 바라보다가 한참 만에 눈을 내리깔고 입을 열었다.

“얼마 전에 진왕비가 회임했네.”

영원이 멈칫했다. 모르는 일이었다.

“지키지 못했어. 회임 맥을 짚어내자마자 잃었네. 진왕비가 회임한 일, 진왕비 본인도 몰랐을 때 강환장이 알았네. 어떻게 알았을까?”

영원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강환장은 진왕비가 회임한 걸 알았을뿐더러 지키지 못할 것도 알았네. 금방 잃을 거라고 했지. 게다가 아이를 잃은 후 두 달 뒤에 다시 회임할 거라고 했네. 그땐 순조롭게 진왕의 장자를 낳을 거라고 했다는군.”

계소영은 단숨에 빠르게 말했고 영원의 눈이 더 커졌다. 그는 표정이 휙 변해서는 무심결에 뒤로 물러나고 또 물러났다.

소 사야가 말한 운명을 바꾼 사람이 누군지 알았다!

“이런 이야기를 내게 해? 어째서?”

영원은 놀라움과 들뜬 기색을 감추지 못하고 물었다. 그렇게 빤히 보이는 영원의 모습에 계소영은 조금 우스워졌다.

“내 앞에서 이럴 것 없네. 부친은 진왕이 천명을 타고났다고 생각하지만, 내 생각은 다르네. 덕행도 없는 강환장이, 진왕이 바로 천명을 타고난 사람이라는 말을 하다니, 도의가 있는 건가? 그건 천명이 아니라 불길한 징조네.”

영원은 봄바람처럼 웃으며 계소영을 바라봤고, 계소영은 눈살을 찌푸렸다. 꽃처럼 웃는 영원의 모습에 으스스한 느낌이 들어서 진저리치며 그를 바라봤다.

“왜 웃나.”

“기뻐서 그러지. 계 형, 진정한 청출어람이군.”

영원은 기분이 너무나 좋아서 웃음을 참으려고 해도 참을 수가 없었다.

“흥!”

계소영은 정말로 화가 나서 돌아가려고 걸음을 뗐다. 영원은 싱글벙글 뒤를 바짝 쫓으며 물었다.

“계 형에게 묻고 싶은 게 있네. 계 형, 혼사는 정했는가?”

“어찌? 좋은 혼담이라도 넣어주려고?”

계소영이 비아냥거렸다.

“그야 쉽지! 계 형, 마음에 든 낭자가 있는가? 자네가 마음에 든 사람이 있다면 내가 반드시 성사하겠네. 어느 댁 낭자인가?”

영원이 재빨리 대답하자 계소영은 콧방귀를 뀌고는 상대하지 않았다.

“계 형의 인품, 재능이라면 이 경성, 아니 온 세상에서 계 형에게 어울릴 만한 상대는 손에 꼽히지. 초가 낭자? 해가 낭자? 이 두 사람 정도겠지? 참, 묵가 사돈 명가 낭자도 괜찮지. 누가 마음에 들었나?”

영원은 계소영을 바짝 쫓으며 다그쳤다.

“아, 그렇지!”

계소영이 끽소리도 하지 않자 영원이 이마를 내리치며 알겠다는 듯 소리쳤다.

“부끄러워하는군. 그럼 이렇게 하세. 침묵하면 묵인하는 것으로 하지. 내가 어느 낭자 이야기를 할 때, 자네가 아무런 말도 하지 않으면 동의하는 것으로 알겠네. 지금부터 시작하네. 초가 삼낭자?”

“혼인은 부모와 웃어른의 뜻을 따라야 할 일이네.”

대답하지 않으면 묵인하는 것이 되니, 계소영은 재빨리 대답했다. 영원 이 자가 작정하고 혼사를 추진하면 정말로 성사될지 모른다. 그러니 대답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웃어른의 뜻을 따른다고? 본인 생각은 하나도 없고? 평소에 볼 땐 그런 머저리가 아니었는데. 정말로 마음에 든 낭자가 없다고?”

영원은 웃어른의 뜻을 따른다는 계소영의 그 말을 아예 믿지 않았다. 계소영은 영원의 말에 마음이 쿡 쑤셨다.

“영 칠야, 그렇게 말하는 걸 보니 마음에 든 낭자가 있나 보군.”

“당연하지! 휴. 나는 마음에 들었는데 상대는 내가 마음에 없네.”

“아?”

계소영은 걸음을 멈추고 영원을 돌아보며 위아래로 훑었다.

“칠야, 농담이겠지. 칠야를 마음에 두지 않을 여인이 있다고?”

“나도 이상하네. 보게, 나 같은 사내, 학식이 조금 떨어지는 것 말고 다른 건 다 갖췄네. 그런데 나를 안중에 두지 않아! 역시 인생은 원하는 걸 얻을 수 없는 법인가 보네.”

영원은 진심으로 우러나서 탄식하고 고민했다. 이 나이가 될 때까지 어느 여인이든 눈길을 조금만 주고, 기껏해야 웃어주기만 해도 상대는 곧바로 무너졌다. 실패한 적이 단 한 번도 없었다. 나무토막 보듯이 보는 건 그녀뿐이었다. 그런데 그녀가 제대로 쳐다보기만 해도 심장 박동이 어긋났다.

“칠야, 정말로 농담이 아니라고?”

계소영은 믿는 마음이 들었다. 영원의 말투, 표정 모두 거짓말이나 농담이 아니었다. 영원은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휴! 계 형은 누구를 진심으로 마음에 담은 적이 없어서 내 괴로운 마음을 모르네! 아이고!”

영원은 또 한숨을 내쉬었다.

“얼마나 괴로운지. 안 보면 그립고, 보면 행여 말 한마디 잘못해서 기분 언짢게 할까 봐 말을 많이 할 엄두가 나지 않고. 언짢아하는 걸 보면 내 마음도 따라 괴롭고. 웃는 얼굴 하나 보면 하늘에 오른 듯이 기쁘고. 휴. 마음이 찢어지든, 하늘에 오른 듯이 기쁘든, 다 내 마음 깊숙한 곳에 숨겨 둘 수밖에 없네. 조금이라도 들켰다가는 다시는 만나지 못할까 두려워서 말이지.”

계소영은 몹시 씁쓸해졌다. 자기 이야기였다.

“칠야, 어째서 혼담을 넣지 않나? 설마 그 사람이…….”

혼인할 수 없는 사람인가.

“그녀는 남다른 여인일세. 본인이 고개를 끄덕이지 않는 이상 무턱대고 움직일 수 없네. 그랬다가 만회할 수 없는 지경이 되면, 앞으로 나는 어찌 살라고.”

영원은 한숨을 쉬고 또 쉬었고, 계소영도 공감하며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역시 계 형 같은 처지가 좋군. 마음에 품은 사람이 없으니 웃어른이 정해주는 대로 상관없지 않은가.”

영원은 화제를 다시 계소영에게 돌렸다.

“누가 상관없다고 하나.”

계소영은 저도 모르게 툭 말했다. 그동안 이 모호한, 누구에게 말할 수 없는, 본인조차 곰곰이 들여다볼 엄두가 나지 않아서 꾹꾹 눌러 온 그 감정이 지금이라도 터져 나올 것만 같았다. 영원 같은 특이한 놈 앞에 있으니 잠재적인 도덕 관념이 저도 모르게 느슨해진 데다가 영원이 자기 일을 먼저 꺼내자 마음을 털어놓지 않고는 못 견딜 것 같았다.

“응? 그럼 계 형…… 웃어른 마음에 든 사람이 계 형 마음속 사람이 아니란 말인가?”

“어르신들이 어느 댁 낭자를 점찍었는지 모르지만, 분명 그 여인은 아니네.”

계소영은 마음이 착잡하고 욱신욱신 쑤시는 것만 같았다. 그는 고개를 푹 숙이고 방향도 모른 체 무턱대고 앞으로 걸었다. 영원은 뒤를 바짝 쫓으며 그가 가는 대로 따라갈 뿐 길을 막지 않았다.

영원은 가장 큰 가능성을 떠올렸다.

“걸맞지 않은 집안인 건가? 솔직히 말해서, 계 형, 난 함부로 인연 맺어주는 사람이 가장 통한스럽다네. 만약 계 형이 마음에 담은 낭자가 있다면, 생사가 갈라지지 않은 이상, 혹은 그 낭자가 죽으면 죽었지 계 형과 혼인하지 않겠다고 하지 않는 이상, 내가 반드시 계 형의 뜻을 이뤄줄 수 있네. 나 영원, 글공부는 많이 하지 않았지만, 이 정도 사소한 일은 아무것도 아니네.”

계소영은 걸음을 살짝 늦추고 영원을 돌아봤다. 잠시 바라보다가 다시 되돌아서 고개 숙인 채 한참 가다가 살며시 한숨을 내쉬었다.

계소영이 매우 힘겹게 말을 이었다.

“영 칠야의 호의는……. 내 고민은 영 칠야가 말한 것처럼 심각한 건 아니네. 일단 그 여인의 의중을 모르네. 모른다고 해도…… 아니, 사실 모른다고 할 수도 없지. 그녀는 내게 마음이 없네.”

“확실한가? 어린 낭자는 마음에 없는 말을 잘한다네.”

그건 영원도 경험한 일이었다.

“그녀는 그럴 사람이 아니네. 이야기를 많이 하지도 않았지만, 나를 보는 눈빛이 이 세상 아무나 보는 눈빛과 전혀 다름없었네. 특별한 것이 하나도 없었어.”

계소영은 매우 서글픈 듯 그렇게 말했다. 그 점은 매우 확신했다.

“고요한 밤이 되면 몇 번이나 생각했는지 모르네. 그녀가 내게, 내 마음의 백 분의 일이라도 마음이 있다면 나는 반드시 최선을 다해 그녀와 혼인할 걸세. 반드시 혼인하려고 마음먹으면 나도 못 할 것이 없네.”

계소영은 영원을 돌아보며 그렇게 말했다. 아까 영원의 말에 대답한 것이었다. 계씨 일족 미래의 가주인 자신의 능력도 영원보다 떨어지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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