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금동-372화 (372/463)

372화: 굼벵이의 구르는 재주

“무슨 말인지 알아. 우리가 남녀유별 같은 속된 예법에 구애받지 않는다고 해도, 아무렇지 않게 만나는 건 그렇지. 하지만, 잊지 마. 네 할아버님은 계 공자의 시험관이야. 다른 가문과 달라. 그런 건 넌 상관하지 말고 마음 놓아. 내게 방법이 있어. 완벽하게 해낼게. 우린 친자매보다 가까운 사이야. 무슨 일이 있어도 네가 안 좋은 사람과 혼인해서 평생 울적하게 사는 건 두고 볼 수가 없어.”

“알았어. 네 일 처리야 내가 믿지. 다만…… 어쨌든 무슨 일이 있어도, 차라리 묻지 않으면 모를까, 내가 부탁한 걸 알게 해선 안 돼.”

초 삼낭자는 재삼 주저하다가 다시 당부했다.

“걱정하지 마!”

해 이낭자는 지장만 찍지 않았지, 장담하며 약속했다.

“하지만…….”

초 삼낭자가 여전히 망설이면서 말을 끝내기도 전에, 조 구낭자가 해 삼낭자를 잡아끌고 그쪽으로 다가갔다.

“둘이 여기에 있었구나? 한참 동안 찾았잖아! 무슨 비밀 이야기해? 우리도 좀 듣자.”

“별거 아니야. 꽃이 참 예쁘단 이야기 하고 있었어.”

초 삼낭자가 얼른 화제를 돌렸다. 하지만 화제를 돌리는 기색이 역력했다. 해 이낭자가 얼른 웃으며 대답했다.

“나랑 삼낭자는 계속 여기에 있었는걸. 오히려 너희 둘이 어디에 다녀왔는데?”

“화원을 둘러보고 왔지.”

조 구낭자가 초 삼낭자 옆에 앉으며 말했다.

“화원이 크진 않은데 화초가 아름다워. 저쪽에 목단도 있는데 잎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꽃이 피었어. 그리고 불주금을 석가산에 심었는데 키워냈을 뿐만 아니라 아주 예쁘기까지 해. 석가산에서 드리워진 불주금이 알알이 푸른 것이 얼마나 예쁜지 몰라.”

“화초가 잘 피면 집안도 흥할 징조랬어.”

해 이낭자는 대충 대답하고는 눈동자를 굴리며 일어섰다.

“우리도 좀 둘러볼까?”

“좋지.”

조 구낭자는 바로 대답했고 초 삼낭자는 망설이고는 그냥 앉아 있었다.

“난 여기 있을래. 다녀 와.”

지금 그녀는 아무것도 할 생각이 들지 않았다.

“그럼…….”

조 구낭자가 망설이자 해 이낭자가 방긋 웃으며 말했다.

“구 낭자는 삼낭자랑 이야기하고 있어. 난 셋째랑 좀 걸을게.”

“그래!”

조 구낭자가 대답하자 해 삼낭자가 일어서서 이낭자와 함께 밖으로 나갔다.

모퉁이를 한 번 돌고 또 한 번 돈 다음, 해 이낭자가 걸음을 멈추고 사촌 동생을 바라봤다.

“너 먼저 돌아가. 나 혼자 좀 걷고 싶어.”

“응.”

사촌 언니를 거역하는 법이 없는 해 삼낭자는 갈림길로 들어서서 화청으로 돌아갔다.

해 이낭자는 걸음을 늦추고 주변을 살피면서 걷다가 화청과 멀리 떨어진 곳에서 근처에 공손히 서 있는 시녀를 불러 웃으며 물었다.

“내가 여기에 있다는 걸 다른 사람에게 알리려면 뭐라고 해야 하지?”

“아룁니다, 낭자. 이 금목서는 백 년 넘은 것으로 이 화원에서 가장 오래된 나무랍니다. 오래된 금목서 동쪽이라고 하면 됩니다.”

시녀가 잎이 무성한 금목서를 가리키며 대답했다. 해 이낭자는 아, 하고 대답하고는 오래된 금목서를 올려다보며 다시 물었다.

“너 계 공자가 어느 분인지 알지?”

“탐화랑 말씀이신가요?”

시녀가 신중하게 되묻자, 해 이낭자가 고개를 끄덕이며 웃어 보였다.

“맞아. 안다니, 네가 다녀와 주렴. 계 탐화에게 가서 오래된 금목서 동쪽으로 오라고 말씀드려.”

해 이낭자가 말을 멈췄다가 다시 보탰다.

“초 삼낭자가 긴히 할 말이 있어서 찾는다고 전해.”

“예, 소인 화원을 둘러서 가야 하니 한참 기다리셔야 할 거예요.”

“괜찮아. 여기서 기다릴게.”

시녀가 예를 갖추고 물러나서 돌아서려는데 해 이낭자가 다시 그녀를 불렀다.

“혹시 내가 없으면 계 공자에게 여기에서 잠시 기다리시라고 하고 초 삼낭자를 모셔오렴.”

“예.”

해 이낭자는 시녀가 빠른 걸음으로 멀어진 후에 나무 아래 잠시 서 있다가 계속해서 앞으로 걸어갔다.

시녀는 빙 둘러 나온 뒤 곧장 청국을 찾아가서 해 이낭자가 시킨 일을 낱낱이 말했다. 청국은 심장 박동이 어긋나는 기분이었다.

해 이낭자가 초 삼낭자의 이름으로 계 공자를 불러서 무얼 하려는 걸까?

“넌 좀 피해 있어. 내가 낭자에게 여쭤보고 올게.”

청국은 시녀에게 당부하고 서둘러 이동을 찾으러 갔다. 장공주와 이동에게 예를 갖추고 이동에게 눈짓하는데 이동이 대답하기 전에 장공주가 먼저 보고 물었다.

“무슨 일인데? 나도 듣게 이야기해 보렴.”

이동이 고개를 끄덕이자 청국은 해 이낭자가 초 삼낭자의 이름으로 계 공자를 금목서 동쪽으로 부른 일을 이야기했다. 장공주의 눈썹이 높이 올라갔다.

“무슨 생각이야? 밀회? 아니면 초 삼낭자에게 오명을 씌우려고? 해가와 초가는 친분이 두터운 사이인데?”

이동은 돌아서서 초 삼낭자를 바라봤다. 초 삼낭자는 어딘가 울적해 보이는 모습으로 우두커니 앉아서 찻잔을 들고 밖을 바라보고 있었다. 이동이 해 이낭자를 찾으려고 두리번거리자, 장공주가 나른한 목소리로 말했다.

“찾을 것 없어. 여기에 없어.”

청국이 나지막이 이동을 불렀다.

“낭자, 소엽이 아직 기다리고 있어요. 뭐라고 대답하라고 할까요?”

이동이 장공주를 바라보자 장공주가 손사래 쳤다.

“너희 집안일이야. 난 이런 게 제일 성가셔, 알아서 해.”

“돌아가서 하던 일 하라고 해. 해 이낭자가 물으면 전했다고 하고, 다른 걸 물으면 모른다고 하라고 해.”

이동이 분부하자 장공주가 고개를 끄덕였다.

“모르쇠 작전. 음, 좋은 방법이지.”

청국이 물러간 후에 이동은 잠시 생각하다가 녹매를 불러 나직이 분부했다.

“영 칠야를 찾아서 이 일을 알려드려. 그리고 어떻게든 계 공자가 해 이낭자와 초 삼낭자를 어떻게 생각하는지 넌지시 떠보라고 하고.”

녹매가 조용히 물러간 다음 장공주가 눈살을 찌푸린 채 이동을 삐딱하게 바라봤다.

“무슨 생각이야? 어떻게 생각하는지라니, 그게 무슨 소리야?”

“저 어린 낭자가 계 공자를 불렀어요. 어린 낭자들의 심사야 빤하죠. 다만 누가 누구를 마음에 들어 하는 건지, 일을 망치려는 수작인지 아니면 성사하려는 건지 모를 뿐이에요. 뭐가 됐든 계 공자의 생각부터 알아야죠. 그래서 혹시 떠볼 수 있는지 영 칠야에게 부탁하려는 거예요.”

“아.”

이동이 설명하자 장공주는 울적해하는 초 삼낭자를 턱을 괴고 흥미진진한 얼굴로 바라봤다.

“어린 낭자의 작은 심사라. 꽤 재미있네. 계가는 뒤이을 만한 사람이 없어. 해씨 일족에도 손꼽히는 인재가 없고. 계가와 혼사가 성사된다면, 음, 괜찮지. 그리고 초가는…….”

장공주는 잠시 침묵하다가 말을 이었다.

“계 천관은 신중하지 말아야 할 때도 신중한 성격이니 이리저리 재겠지. 계가, 초가의 혼인이라…….”

장공주는 눈을 가늘게 떴다. 이동은 할 말을 잃은 듯 그런 그녀를 바라봤다. 자기는 선남선녀가 서로 마음이 맞는 건지 알고 싶은 것인데, 장공주는 모든 일을 조정과 연결 지어서 생각하고 있었다.

“됐다, 됐어.”

장공주는 손사래 치고는 눈을 살짝 치켜뜨고 빙그레 웃으며 이동을 바라봤다.

“말해 봐. 네 오라비에게 물어보라고 해야 하는 거 아냐? 가까운 네 오라비를 두고 왜 영원 그놈한테 부탁해?”

“오라버니가 묻기 적합하지 않은 일이에요.”

이동은 깊이 생각하지 않고 곧바로 대답했다.

“아.”

장공주가 말꼬리를 길게 늘였다.

“그렇긴 하네. 너도 참 영원 그놈을 믿는구나. 영원도 너를 믿는 것 같고. 음, 재미있어!”

“뭐가 잘못됐나요?”

이동이 되물었다.

“아니.”

장공주가 빤히 바라보자 이동은 그 시선을 마주하며 방긋 웃었다.

“영원에게 부탁한 이유가 하나 더 있어요. 얼마 전에 영원이 절 찾아와서 전 노부인이 사돈댁인 명가 삼낭자를 묵칠의 상대로 점찍었다고 말해주더라고요. 그런데 묵칠은 그 혼사가 매우 내키지 않는대요. 명 삼낭자의 학식이 너무 깊어서 무슨 말을 하는지 못 알아듣는다고요. 묵칠이 영원을 찾아가서 불평했고, 영원이 날 찾아왔어요. 묵칠과 어울릴 만한 낭자가 경성에 없겠냐고요. 부부는 평생 마주 보고 살아야 하잖아요. 말도 통하지 않으면, 평생 공경하며 데면데면 사는 건 재미없잖아요.”

장공주가 고개를 끄덕이며 듣다가 한마디했다.

“널 찾아오다니……. 음. 그래, 말이 통해야지! 안 그러면 재미없지. 그럼 네 생각엔 저 두 아이 중에 누가 마음이 생긴 것 같지?”

장공주가 마침 초 삼낭자 쪽으로 다가가는 해 이낭자를 가리키며 물었다.

“초 삼낭자요.”

이동이 매우 단호하게 대답하자 장공주는 잠시 생각했다. 그럴싸한 답이 나오지 않았다. 이런 일에 신경 쓴 적도 없고, 어린 낭자의 작은 심사라는 게 뭔지도 전혀 모른다.

“말해 봐.”

“해 이낭자가 초 삼낭자의 이름으로 상대를 불렀다면, 삼낭자에게 그런 마음이 생겼다는 걸 아는 게 분명해요. 아니면 어찌 감히 그러겠어요?”

이동은 해 이낭자를 바라보며 마음이 착잡했다. 해 이낭자가 이런 사람이라니, 뒤통수를 단단히 맞은 기분이었다.

“그건 그렇군, 저 아이가 마음씨가 별로네.”

장공주는 금세 알아들었다.

“해가 낭자는 영리한 사람이에요. 이렇게 작정하고 초 삼낭자의 명성을 망칠 수 있는 일을 하는 건…… 아마도 초 삼낭자가 무언가에 방해가 된 거겠죠. 계 공자를 마음에 두었을지도 모르고요. 이런 말을 전해서 계 공자를 떠보려는 거예요. 계 공자가 응해서 나오면 계 공자의 의중을 알게 되는 거고, 나오지 않거나 하면 자기가 계 공자를 만나서 초가 낭자를 오해할 만한 말을 하겠죠. 그럼 기회가 올 테니까요. 그게 아니라면 초 삼낭자 혼담 중에 자기 마음에 드는 혼담이 있거나요. 이 두 사람을 이어주면 그 자리가 빌 테니까요.”

장공주는 눈이 다 휘둥그레졌다.

“이게 무슨 작은 심사야! 이건 조정 암투하고도 비견할 만한 쟁투잖아!”

“후택의 수단, 계산속은 원래 조정하고 비교해도 큰 차이 없어요.”

이동은 몇십 년 동안 겪은 모든 일을 떠올리고 생각이 많아졌다. 심지어 음험하고 악랄하기로 따지면 조정은 후택과 비교할 수가 없다고 생각했다.

장공주는 이동이 수녕백부에서 나온 다음에 벌어진 일들을 생각하며 쉴 새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조정 이야기가 나오자, 이동은 영원이 묵칠과 탕 오낭자를 맺어주는 일은 먼저 장공주에게 의견을 물어야 한다고 했던 걸 떠올렸다.

“석류홍 치마를 입은 사람이 탕가 오낭자예요.”

“고가 사돈? 번루 주인?”

장공주가 대수롭지 않게 묻자 이동이 고개를 끄덕였다.

“저 오낭자, 어쩌면 묵칠하고 잘 맞을지 몰라요.”

“영원의 생각이야?”

장공주의 반응은 매우 빨랐다. 이동은 고개를 저었다.

“제 생각이에요.”

“좋은 혼담이네. 다만 영원이 진행하게 해. 넌 나서지 말고.”

“예.”

이동은 문 이야와 함께 장공주의 계획이 무엇일지 여러 번 분석했었다. 장공주로서는 태자파, 진왕파, 그리고 오황자파가 선을 확실히 그을 수 없도록 뒤엉키는 게 제일 좋았다. 앞으로 누가 보위에 오르든, 조정에 지나친 피 바람이 불지 않도록. 게다가 다 얽혀 있으면 태자, 진왕, 그리고 오황자가 적어도 형제가 상잔하는 막다른 국면까지 치닫지 않을 수 있게 된다. 임씨 혈통을 최대한 보전할 수도 있고.

하지만 장공주의 그런 바람을 문 이야는 탐탁지 않게 여겼다. 태자는 순리대로 움직이는 사람이 아니니까. 게다가 위리안치된 대황자라고 본분을 지키며 조용히 살리란 법도 없었다. 지금도 그렇지 않은가. 대황자는 역시나 조용히 지내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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