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금동-371화 (371/463)

371화: 심계

장공주가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휴, 형제 둘이 속셈도 없고 학식도 없고. 휴, 선량함도 없어.”

“황상은 아무 말씀 없으시지요?”

이동은 장공주의 한탄에 대답하지 않고 모호하게 물었다. 장공주가 힐끔 그녀를 바라봤다.

“뭐라고 하겠어? 넷째를 달래고, 그 서신에 감동해서 첫째가 어떻게 지내는지, 종복들은 성심껏 잘 보시는지 살펴보고 오라고 수국공에게 명했지. 흥!”

이동도 한숨을 내쉬었다. 수국공을 대황자에게 보내다니. 대황자의 망상을 더 자극하고 격려할 뿐이다. 다음에 또 무슨 일이 벌어질지 누가 알까.

이동은 조금 주저하다가 나직이 물었다.

“황상을 설득해 보실 거예요?”

“어머니는 줄곧 내 걱정을 하셨어. 그리고 눈 감기 전엔 무슨 일이 있어도 정치에 간섭하지 않겠다는 독한 맹세를 하게 하셨지.”

한참 침묵하던 장공주가 조금 버석한 목소리로 그렇게 말했다. 이동은 입을 다물었다.

“황가에서 가장 값어치 없고 대수롭지 않은 게 맹세야.”

장공주는 무대에서 간드러지게 노래하는 놀이패를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

“아버지가 눈 감기 전에, 난 아버지 앞에서 임가를 수호하겠다고 맹세했어. 황상은 내가 평생 편안하게 살 수 있도록 보살피겠다고 맹세했고. 어머니 눈 감기 전엔 난 절대로 정치에 간섭하지 않겠다고 맹세했고, 황상은 반드시 주씨 혈통 태자를 세우겠다고, 반드시 나를 시집보내 평생 행복하게 살게 해주겠다고 맹세했어.”

장공주가 피식 웃었다. 이동은 대답하지 않았다. 대답할 수 없는 말이었다.

“재미없는 이야기하지 말자. 할 말이 하나 더 있어. 얼마 전에 강환장을 위남 지현으로 보내겠다고 했던 일, 계 천관이 막았어. 셋째가 그 일 때문에 일부러 나를 찾아왔더라고. 내가 강환장부터 해친 다음 자기를 해치기라도 할 듯이 말이야. 큰일도 아니라서, 경성에 있고 싶다니 그렇게 해주었어.”

“네.”

이동이 살짝 눈살을 찌푸렸다. 진왕이 강환장을 경성에 두려는 건 이해할 수 있지만, 계 천관은 왜 막았을까. 무슨 말을 한 건 아니겠지…….

이동, 장공주와 그리 멀지 않은 곳에서 해 이낭자는 두 사람을 계속 주시하면서 마음이 붕 뜬 채 초 삼낭자가 하는 말을 들었다. 하지만 붕 뜬 마음은 초 삼낭자의 이야기 몇 마디 만에 날아가고 곧바로 초 삼낭자의 이야기에 집중했다.

“어머니에게 물어봤는데, 어머니는 그런 일 없다고 하셔. 하지만 내가 똑똑히 들었는걸. 묵 부인이 분명 말했어. 여 승상부 원 부인의 부탁으로 온 거라고. 우리 집안에서 그럴 생각만 있다면, 우리 집안에서 괜찮다고 생각하면 곧바로 매파를 보내 혼담을 넣겠다고. 어머니는 인정하지 않고 오히려 나를 혼내셨어. 얘, 어쩌면 좋아. 어머니와 아버지가 상의를 끝내면 난 어쩌면 좋아. 그렇다고…….”

그렇다고 계 공자와 혼인하고 싶다고 말할 수는 없지 않은가.

“정말로 똑똑히 들었어? 묵 부인이 원 부인의 부탁을 받고 혼담을 넣으러 온 거 맞아?”

해 이낭자는 귀를 의심할 지경이었다. 할머님이 벌써 여 승상부로 사람을 보냈다. 그런데 아직 회신이 없다. 묵 부인이 부탁받고 초 승상부에 간 건 할머님이 사람을 보내기 전일까, 그 뒤일까?

“너까지 그렇게 물으면 어떡해! 똑똑히 들었어!”

초 삼낭자는 조바심이 났다.

“알았어, 알았다고.”

해 이낭자는 마음이 혼란해졌다.

“묵 부인이 어떤 사람인지 너도 알잖아. 지나칠 정도로 열정적이야. 어쩌면 자기 생각일지도 몰라…….”

“소가가 아니었어! 자기 아들 이야기가 아니었다고! 내가 똑똑히 들었어!”

초 삼낭자는 화도 나고 다급하기도 했다.

“그런 뜻이 아니야. 너와 여씨 가문을 이어주려고 하는 거, 원 부인의 생각이 아니라 묵 부인 혼자만의 생각일지도 모른다고.”

해 이낭자는 사실 초 삼낭자보다 더 초조하고 화가 났다. 이게 무슨 일이야? 할머님이 부탁한 사람이 미적거리며 아직 여 승상부에 말을 떠보러 가지 않은 걸까?

아니면 이미 말을 전했는데 원 부인이 일단 초가 의중부터 떠보려는 걸까. 초가에서 고개를 끄덕이면 나를 거절하고, 초가에서 거절하면 나를 받아주려고?

초 삼낭자의 부친은 이미 승상이 되었는데 자기 부친이나 숙부 대 중에 제대로 된 인물이 하나도 없다. 조부는 또 나이가 너무 많고.

해 이낭자는 생각할수록 가슴이 서늘해졌다. 아무리 자기가 뛰어나도 원 부인 눈엔 한창 기세등등한 상공 부친이 있는 초 삼낭자가 더 들어올 것이다.

“진정해. 만회할 수 없는 지경까지 온 건 아니야. 생각 좀 하게 일단 조용히 있어 봐.”

해 이낭자는 어렵다고 물러서는 사람이 아니었다. 그녀는 모든 일은 하기 나름이라고 믿었다.

“계가에선 소식 없어?”

해 이낭자가 주판을 튕기며 물었다. 초 삼낭자는 도리질 쳤다.

“있으면 좋게.”

“네가 모르는 걸지도 모르잖아. 묵 부인이 온 날 마침 네가 어머니 거처에 있다가, 이상한 걸 깨닫고 엿들어서 알게 된 거잖아. 어쩌면 계가에서도 사람을 보냈을 수도 있지. 네가 마주치지 않아서 모르는 걸 수도 있잖아. 네 어머니는 우리 할머님처럼 이런 일을 너랑 상의하는 분도 아니고.”

해 이낭자는 그새 방도를 찾았다. 초 삼낭자는 곰곰이 생각해 보고 살짝 안도했다.

“음. 네 말이 옳아. 하지만 어떻게 해야 계…… 그쪽에서 말을 떠보러 왔는지 아닌지 알아내? 어머니한테 묻는 건 소용 없어. 여씨 가문 일도 내가 다 듣고 물었는데도 한사코 아니라고 하시잖아.”

“네 어머니는 집안을 엄하게 단속하시니까 종복 쪽으로 알아봐도 헛수고일 거야. 생각 좀 해 보자.”

해 이낭자는 관자놀이를 두드리며 눈살을 찌푸린 채 한참 생각하다가 입을 열었다.

“있어, 방법이 있어. 물어보면 바로 알 수 있어.”

“무슨 방법?”

초 삼낭자의 눈이 반짝였다.

“계 공자한테 물어보면 바로 알잖아.”

해 이낭자는 초 삼낭자의 표정을 살피며 말했다. 초 삼낭자의 표정이 순간 어두워졌다.

“계 공자에게 물어? 말이 돼? 백 노부인이 사람을 보냈는지 아닌지, 계 공자도 모를 텐데? 형편없는 방법이야!”

초 삼낭자는 언제나 생각한 대로 말을 내뱉었다.

“사내는 우리랑 달라. 우리 오라버니들도 그랬어. 혼담이 오기 전에 어른들이 미리 오라버니들 뜻부터 물었어. 고개를 끄덕여야 혼담이 오간다고. 게다가 백 노부인은 예법에 얽매이는 분이 아니야. 자식 손자 생각부터 하시는 분이라고. 말을 넣기 전에 분명 계 공자 의중부터 물었을 거야. 계 공자가 고개를 끄덕여야 부탁했을 거라고. 행여 계 공자가 마음에 들어 하지 않으면 얼마나 난감해지겠어? 백 노부인은 그런 일을 하실 분이 아니야.”

해 이낭자는 초 삼낭자에게 틈이 보이자 얼른 다시 설득했다. 초 삼낭자는 주저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일리 있는 말이었다. 어머니와 다른 사람이 이야기를 나누는 걸 들은 적 있었다. 계가 혼사는 분명 일단 계 공자가 마음에 들어 해야 진행될 거라고.

“오늘 마침 기회야. 계 공자가 바로 저기에 있어.”

해 이낭자는 단숨에 일을 해치우려 했다.

“생각 좀 하자. 무슨 핑계가 제일 좋을까. 우리가 같이 불러서, 그냥 물어보는 거야. 음, 적당한 곳도 찾아야 해. 생각해 보자.”

해 이낭자가 사방을 두리번거렸다.

초 삼낭자는 갈등이 되는 듯 손수건을 비틀었다. 확실히 물어보면 바로 명백해지는 건 맞다. 하지만 어린 낭자가 계 공자를 불러서 이런 걸 묻다니. 어떻게 물을지는 둘째치고 계 공자가 자신을 뭐라고 생각할까. 경솔하고 무례하다고 생각하지 않을까? 수치심도 없다고 생각하지 않을까? 품행에 문제 있다고 생각하지 않을까?

초 삼낭자는 계 공자가 자기를 경멸할 것을 생각하니 심장이 오그라들었다. 이런 일로 계 공자가 경멸하게 되면 멀쩡한 일도 다 망치지 않을까?

그리고 계가에서 사람을 보낸 적이 없으면? 계가에서 그럴 생각이 없고 계 공자가 자신을 마음에 두지 않았다면?

계 공자가 자기를 전혀 마음에 두지 않았을 것을 생각하니 초 삼낭자는 피가 다 식는 느낌이었다. 그렇게 되면 어떻게 살아.

“됐어!”

초 삼낭자는 금세 결단을 내렸다. 계 공자가 경멸할 일을 하느니 혼자 갈등하고 고민하는 게 나았다.

“왜 그래?”

해 이낭자는 뜻밖이라는 듯 묻고는 금세 웃음 지었다.

“예법에 구애하는 속된 사람들처럼 머뭇거리려는 건 아니겠지? 시시하게.”

“좋은 생각이 아니야.”

초 삼낭자가 얼버무렸다.

“좋은 생각이 아닐 게 뭐가 있어. 그냥 에둘러서 물어보는 건데. 당당한 일이야. 넌 기품 넘치고 당당하고 고상한 사람이야. 세간 예법에 구애받지 않는 사람이잖아. 그런 사람이 막상 일이 생기니 기품과 당당함은 버리고 주저하는 건 아니겠지?”

해 이낭자가 매섭게 다그쳤다.

“아니야. 이곳은 적당하지 않아. 게다가, 그 사람이, 그 사람이 날 어떻게 생각하겠어.”

해 이낭자와 비교하면 초 삼낭자는 말주변이 좋지 않았다.

“그건 안심해. 계 공자는 속된 사람이 아니야. 이 일로 그런 생각을 하는 사람이거나, 이 일로 널 무시할 사람이면 너도 그 사람을 좋게 여기지 않았을 거야. 안심해. 내가 사람 보는 눈은 정확해. 계 공자는 우리 같은 사람이야. 우리가 대범하게 물으면 우리가 속되지 않다고 감탄할 사람이야.”

해 이낭자는 조금 다급해져서 설득했다. 그 말은 초 삼낭자를 설득하지 못하고 오히려 결심만 단호해지게 했다.

“안 돼! 물어보더라도 적당한 방법을 잘 생각한 다음에 해야 해. 됐어, 이 이야기는 그만하자. 네 할머님은 사람을 골랐어?”

“아이, 너도 참! 그럼 이렇게 하자. 내가 대신 물어볼게.”

초 삼낭자는 매우 울적한 듯 고개를 저었다.

“됐어. 물어보고 싶지 않아.”

“얘 좀 봐. 꼭 이런다니까. 이렇게 큰일을, 물어보지 않겠다니. 말이 돼? 대충 혼인해서 평생 시들하게 살 거야?”

해 이낭자는 초 삼낭자를 옆에 끌어당겨 앉혔다.

“우리한테 이것보다 더 큰 일이 있어? 괴롭다고 포기하면 안 돼!”

초 삼낭자는 아무 말 없이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내 말 들어. 이겨내야 해. 나도 네 생각을 알아. 만나서 실수할까 봐 무섭겠지. 그럴 만도 해. 또 아무리 우리가 당당하고 거리낌이 없다고 해도 남이 뭐라고 생각할지 모르니까. 계 공자는 속된 사람이 아니지만, 신중한 게 좋지.”

“내 말이 바로 그 말이야.”

초 삼낭자는 살짝 안도했다. 해 이낭자가 알아들었으니 되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우리 인생을 망칠 순 없어. 안 그래? 이렇게 하자.”

해 이낭자는 잠시 생각하다가 덧붙였다.

“넌 나서지 마. 내가 물어볼게.”

초 삼낭자가 입을 열려고 하자 해 이낭자가 웃으며 손을 들어 저지했다.

“알아. 안심해. 첫째, 절대로 네 이야기를 꺼내지 않아. 둘째, 설사 말이 나와도 너는 모르는 일로 할 거야. 그냥 내가 갑자기 생각나서 물어본 것으로 할게. 셋째, 내 일 처리가 어떤지, 네가 제일 잘 알잖아. 설마 날 못 믿어?”

초 삼낭자는 한참 주저하다가 가까스로 고개를 끄덕이고는 진지하게 당부했다.

“내 이야기를 하지 않고 물을 수는 없을 거야. 하지만, 절대로 내가 부탁해서 물어보는 거라고 해선 안 돼. 어찌 됐든 우린 여자야. 상대가 행여 마음이 없으면…… 설령 있다고 해도 그건 안 좋아.”

“걱정하지 마!”

해 이낭자가 호언장담했다.

“오늘은 적절하지 않아. 오늘은 됐어.”

초 삼낭자는 다시 생각해 봐도 그만두는 게 좋을 것 같았다. 출가하지 않은 어린 낭자가 계 공자를 찾아가는 것부터 옳지 않은 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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