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65화: 병이 나면
대황자는 아침부터 새벽까지, 장 선생의 두 칸짜리 작은 집채 앞을 막고 서 있다가 드디어 뒷짐 지고 지척지척 돌아오는 장 선생을 만났다.
“선생, 더는 기다릴 수가 없다! 방법을 생각해내라! 무슨 일이 있어도 들어오게 해야 한다!”
장 선생을 만난 대황자는 종일 자신을 기다리게 한 그를 질타할 겨를도 없이 달려가서 부탁했다.
“누구를 말입니까?”
장 선생은 대황자를 지나쳐 안으로 들어가서 불씨를 켜고 등불을 붙였다.
“누구든 상관없다. 밖에서 사람이 들어오기만 하면 소식을 내보낼 수 있다. 한 달이나 지났는데 어째서 소식 하나 없는지, 외숙에게 물어봐야겠다.”
대황자가 탁자를 쿵쿵 내리쳤다.
“위리안치되면 십수 년 만에 나가는 사람도 얼마든지 많습니다. 대왕야, 이러시지 말고 예전처럼 술이나 드시고 경서나 베끼면서 수신부터 하시지요.”
장 선생은 그래도 한마디 설득했다.
“흥!”
대황자가 장 선생의 고리타분한 잔소리를 아랑곳할 리가 있나. 오로지 재촉하기만 했다.
“어서 방법을 생각해라! 무슨 일이 있어도 하루 이틀 안에 소식을 내보내야 한다. 밖에 큰일이 얼마나 많이 일어났겠느냐!”
장 선생은 대황자를 힐끔 보고는 한참 있다가 겨우 입을 열었다.
“황상은 대왕야를 매우 너그럽게 대하십니다. 이 높은 담장은…….”
장 선생은 다시 대황자를 바라봤다. 이 담장 밖으로 나가지 못할 뿐, 황상은 다른 부분에서 전혀 그를 박대하지 않았다. 그런데 대황자는 천륜을 거스르는 큰 잘못을 저지르고도 전혀 뉘우치지 않은 듯했다. 아마도 아무런 잘못이 없다고 생각해서겠지. 그래서 이렇게 난리를 더 부리려는 것이겠지. 진정으로 위리안치되고 죽느니만 못하게 되어야 포기하겠지!
“너그러워?”
대황자가 싸늘하게 웃었다.
황상이 너그러워? 너그러운데 넷째를 태자로 세워?
“쓸데없는 소리는 듣고 싶지 않다. 어서 방도를 생각해라. 소식을 내보내야 한다. 무슨 일이 있어도 소식을 내보내야 해!”
“황상이 대왕야를 너그럽게 대하시니, 쉽게 사람을 불러들일 수 있습니다. 생각해 보세요. 밖에서 반드시 사람이 들어오려면, 이 저택에 무슨 일이 생겨야겠습니까?”
“사람이 죽으면?”
“흥. 대왕야가 죽지 않는 이상, 누가 죽든 몰래 내보내면 그만입니다. 사람이 들어 올 필요가 없습니다.”
“그럼 또 뭐가 있단 말이냐!”
대황자가 짜증 가득한 목소리로 되물었다. 장 선생이 이런 식으로 말하는 것에 진절머리가 났다. 우물쭈물, 대단한 것이라도 있는 척!
“병입니다. 대왕야가 병이 나면 태의가 들어올 수밖에 없지요!”
장 선생은 피로하고 신물 난 표정으로 말했다.
“나?”
대황자가 자기를 가리키다가 눈살을 찌푸렸다. 내가 병이 나? 병이 어떻게? 병이 날 리가 있나. 일부러 병이 나게 했다가 금방 낫지 못하면? 설령 금방 낫더라도 아픔은 겪어야 하지 않나. 괴롭게 병에 걸리고 싶지 않았다. 대황자는 얼른 머리를 굴렸다.
“그럼…… 왕비가 병이 나면?”
장 선생은 마음이 더 서늘해져서 대황자를 바라봤다.
“모르겠습니다. 아마도 태의가 들어오겠지요.”
“그럼 됐다!”
대황자는 그렇게 말하고 곧장 돌아섰다. 장 선생은 대황자의 뒷모습을 멍하니 바라보다가 별안간 죄책감이 들었다.
곽 왕비를 해치게 되었구나. 하지만 작정한 것이 아니었다. 대황자가 자기 말을 듣고 이런 수를 생각해 낼 줄은 자신도 몰랐다.
대황자는 성큼성큼 곽씨의 정원으로 달려 들어갔다.
그때 곽씨는 이미 잠자리에 들었다. 위리안치된 후로 곽씨의 일상은 매우 규칙적이었다. 나이 든 농부처럼 해가 뜨면 일어나고 해가 지면 잠자리에 들었다.
대황자가 뛰쳐 들어오자 바깥채에서 당직 서는 두 시녀가 문을 열었다. 채 불을 켜기도 전에 대황자가 어느새 내실로 달려 들어갔다. 시녀들이 허둥지둥 불을 들고 따라갔다. 곽씨 침상 앞 받침대에서 잠들었던 도요도 재빠르게 눈을 떴다. 기척을 듣고 허둥지둥 일어나서 휘장을 걷어 올리면서 다급하게 곽씨를 깨웠다.
“왕비! 왕비, 일어나 보세요. 왕야가 오셨습니다!”
대황자는 곽씨 침상 앞에 서서, 비몽사몽 눈 뜨는 곽씨를 눈살을 찌푸린 채 바라보다가 성큼성큼 다가가 곽씨를 밖으로 끌고 나갔다.
도요는 넋이 나가서 대황자가 곽씨를 내실 입구까지 끌고 갔을 때야 정신을 차리고 후다닥 달려가서 애원했다.
“왕야, 왕비는 아직 편찮으십니다. 왕야, 왕비가 무슨 잘못을 했나요. 왕야…….”
“꺼져라! 내가 하는 일에 어디 감히 입을 대느냐!”
대황자는 단번에 도요를 걷어차고 힘을 주어 곽씨를 상방 문 앞까지 끌고 갔다. 계단에서 내려가 곽씨를 마당에 던지고는 허리를 숙여 곽씨의 옷을 더듬었다.
막 잠이 깨서 비몽사몽 하던 곽씨는 갑자기 끌려 나와서 정신을 못 차리다가 마당에 던져진 후에야 무슨 일이 벌어진 건지 깨달았다.
“왕야, 왜 이러세요……. 제가 무슨 잘못을 했습니까.”
곽씨의 말에 은근히 분노가 느껴졌다.
“당신이 병이 좀 나야겠소.”
대황자의 말은 지극히 간결했다. 그 말이 끝나기도 전에 대황자가 힘을 주어 곽씨의 홑옷을 벗겼다. 가리개만 남은 곽씨는 양손으로 가슴을 꼭 끌어안고 날카롭게 고함쳤다.
도요가 허둥지둥 두꺼운 두봉을 찾아서 달려 나왔다. 곽씨 곁에 다가가 입혀주려는데 대황자가 그걸 보고 두봉을 잡아당겨 한쪽으로 내던지고 도요를 걷어찼다.
“꺼져라! 감히 또 나서면 죽여 버릴 테다!”
도요는 더는 움직일 엄두를 내지 못했다. 거의 벌거벗은 모습으로 마당에 꿇은 곽 왕비를 두려움이 가득한 얼굴로 바라봤다. 우리 낭자, 무슨 업을 지었기에!
대황자는 손을 내밀어 곽씨의 어깨를 쓰다듬었다. 그렇게 추운 것 같지 않았다. 벌써 4월이라 옷을 입지 않아도 얼 일이 없었다.
대황자는 제자리에서 빙빙 돌다가 마당 구석에 물이 가득 찬 큰 항아리를 보고 눈이 번뜩 뜨였다. 방법이 생각나자 후다닥 다가가다가 급하게 걸음을 멈추고 획 돌아서서 다수간(茶水間)으로 들어갔다. 다수간 안을 휙 둘러보고 짚이는 대로 작은 나무통을 들고나와서 큰 항아리 앞으로 달려가 나무통에 물을 가득 담았다. 들어 올릴 때 처음에 휘청이며 제대로 들지 못하다가 다시 시도하고서야 제대로 들어 올렸다.
대황자는 물통을 들고 곽씨에게 다가가 머리 위로 부었다. 곽씨는 비명을 질러댔고 도요는 겁에 질려 고함치려다가 양손으로 입을 꽉 틀어막았다.
곽씨는 차가운 물을 뒤집어쓰고 사시나무처럼 떨었다. 작년 섣달로 돌아가 차디찬 호숫물에 다시 빠진 듯한 기분이 들었다.
대황자가 연달아 네댓 통 부어 고인 물이 곽씨의 맨발을 뒤덮었다. 곽씨는 비틀거리며 머리를 바닥에 박고 쓰러졌다. 대황자는 물통을 내던지고 잠시 바라보다가 한 걸음 다가가 곽씨를 툭툭 찼다. 곽씨가 꿈쩍도 하지 않자 슬쩍 움직여서 발끝으로 곽씨의 턱을 차서 얼굴을 들어 올렸다. 핏기 하나 없이 파랗게 질린 곽씨 얼굴을 바라보다가 흡족한 듯 고개를 끄덕이고는 뒤로 물러나 도요에게 분부했다.
“왕비를 안으로 모셔라. 고열이 나면 즉시 고하고!”
분부를 마친 대황자는 손을 털며 사라졌다. 도요는 그가 수화문 밖으로 나가는 걸 멍하니 보다가 목구멍을 겨우 긁어서 그제야 고함쳐서 사람을 불러서 기절한 곽씨를 안으로 데리고 들어갔다.
도요와 배방 어멈들이 다급하게 화로를 피우면서 곽씨의 젖은 옷을 벗겨 물기를 깨끗이 닦아 내고 열심히 문질렀다. 몸이 빨개지고 뜨거워질 때까지 문지르다가 곽씨가 숨을 돌리자 부축해서 욕탕에 앉혔다. 시녀가 건네는 탕약을 도요가 받아서 곽씨 앞에 바쳤다.
“어서 탕약 드세요.”
곽씨는 탕약을 빤히 바라보다가 떨리는 손으로 밀어냈다.
“병이 나게 하려고 이러는 것이다. 아프라고 이러는 것인데 약은…….”
곽씨는 말을 끝내지도 못하고 목 놓아 울었다. 울면서 욕탕에서 일어나 옆에 포개둔 목욕 수건을 향해 손을 뻗었다.
“죽으라는 것이다. 필요 없다……. 다 필요 없어.”
“왕비!”
도요도 소리 없이 울기 시작했다. 대왕야의 뜻이 바로 그것이다. 왕비가 이번에 병이 나지 않으면 다시 이런 짓을 할 것이다. 다시 왕비를 벗겨서 마당에 던져 놓고 차가운 물을 퍼부을 것이다.
도요는 펑펑 울면서 큰 수건을 꺼내서 곽씨를 두르고 부축해서 실내로 들어갔다.
침상에 누운 곽씨는 이불을 밀치고 몸을 잔뜩 웅크린 채 눈물을 쏟았다. 도요는 침상 앞에 서서 얇은 내의만 입고 애간장이 끊어지게 우는 곽씨를 바라봤다. 눈물이 앞을 가렸다.
얼마나 울었을까. 도요는 뻣뻣해진 다리를 끌고 침상 앞 받침대 위에 털썩 무릎을 꿇었다. 온몸이 싸늘해진 곽씨를 더듬으며 통곡하고 싶은 마음을 억지로 억누르고 쉰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왕비, 이쯤 하면 됐어요. 이러시면…….”
“왕비라고 부르지 마라.”
곽씨가 쿨럭 기침했다. 섣달 그 일로 깊은 풍한이 들었고 다 낫기도 전에 이 높은 담장 안에 갇혔다. 몸이 싹 낫지도 않았는데 물을 뒤집어쓰고 상심하자 기침이 다시 나왔다. 한 번 터진 기침은 숨도 쉬지 못할 만큼 격렬하게 연달아 나왔다. 곽씨는 오장육부를 다 쏟아낼 듯이 몸을 비틀며 기침해댔다.
도요가 허둥지둥 이불을 덮어주고 미리 준비해둔 손난로를 품에 안겨 주었다. 곽씨가 손난로를 밀어냈다.
“필요 없다. 이불도 덮을 것 없어. 섣달 때 죽어야 했다. 필요 없다. 다 필요 없어. 살고 싶지 않아.”
“낭자!”
도요는 더는 참지 못하고 눈물을 줄줄 흘렸다.
“낭자, 이러지 마세요. 태태, 노태태 생각도 하셔야죠. 두 분이 낭자를 얼마나 아끼시는데요. 혹시 아시면…… 낭자가 이런 걸 아시면…….”
곽씨는 한바탕 격렬하게 기침을 하고는 잠시 헐떡이며 숨을 고르고는 살짝 몸을 움직이며 어두운 얼굴로 도요를 바라봤다.
“도요, 나도 살고 싶단다. 살고 싶으니까 그렇게…….”
살고 싶지 않았다면 섣달에 그런 모진 짓을 하지도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보렴, 살 수가 없단다. 도요, 나 후회해. 내 목을 조르고 싶을 정도로 후회한다. 그때 대체 뭐가 씌었던 걸까. 목숨 걸고 이 혼인을 하려고 하다니. 난 정말……. 자업자득이야!”
곽씨의 눈물이 또 흘러내렸다.
“위리안치되면 다 좋아질 줄 알았지. 안 되는 거였다. 역시 살길이 없어. 도요, 혹시 내가 죽으면 시신은 태워버리렴. 임가 묘지에 들어가고 싶지 않아. 태워버려. 활활…….”
도요는 소리 없이 어깨를 들썩였다.
“알았어요. 하지만 낭자, 좀 멀리 보세요.”
“도요, 멀리 보든 말든, 우린 오래 못 산다.”
또 기침이 나오려 했다. 이번엔 아까보다 더 심했다. 곽씨는 침상 자락에 엎드려서 곧 죽을 듯이 기침해댔다.
하늘이 어슴푸레 밝아 올 무렵, 곽씨는 열이 올라 인사불성이 되었다.
대황자는 내시가 그 작고 좁은 문을 힘껏 두드리는 걸 잠시 바라보다가 후다닥 달려가 내시를 걷어찼다. 그리고는 작지만 육중한 그 문을 갈수록 거세게 걷어차면서 고함을 질러댔다.
“문 열어라! 사람 없느냐! 왕비가 병이 났나! 이런 고얀 것들을 봤나! 문 열라지 않느냐! 왕비가 병이 났다! 문 열어라!”
너무 크게 고함친 바람에 옆구리가 결려서 크게 기침하다가 다시 문을 걷어차려는데 작은 문에 난 주먹 두 개만 한 구멍이 밖에서 열리더니 젊은 얼굴 하나가 나타났다. 화난 말투는 아니었지만, 온화한 말투도 아니었다.
“들었습니다! 들었다고 하잖습니까. 새벽이라 병에 걸린 게 누구든 통령이 오시길 기다려야 합니다! 통령에게 고해야 위로 보고하지요! 왕야, 잠시만 기다리십시오. 통령이 오기 전엔 걷어차느라 다리가 부러지고 목소리가 쉬어도 아무런 소용 없습니다!”
대황자가 뭐라고 고함치기 전에 탁 소리와 함께 작은 구멍의 문이 닫히고 젊은이의 얼굴이 사라졌다. 입을 벌리고 고함을 지르려던 대황자의 말도 그 소리와 함께 묻혔다.
대황자는 숨을 들이마시고 또 들이마신 후에 내시에게 분부했다.
“여기서 지켜보면서 일각마다 한 번씩 문을 두드리고 고함쳐라. 왕비가 병이 났다! 지체하면 죽게 된다!”
내시가 대답하자 대황자는 손을 휘두르며 돌아가서 정전에 정좌했다. 답답한 마음에 이가 부드득 갈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