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63화: 배불리 먹고 따듯이 입으면 된다
“첫째, 장공주는 태자를 버렸습니다. 이제 남은 건 둘, 진왕과 오황자뿐입니다.”
이동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건 그녀도 짐작했다.
“둘째, 고서강이 후회하고 있습니다.”
그 말을 마친 문 이야의 얼굴에 뭐라고 말해야 좋을지 모를 표정과 착잡한 미소가 떠올랐다.
“게다가 고서강이 후회한다는 걸 장공주가 아신 겁니다.”
“고서강이 장공주를 찾아갔을까요?”
“꼭 그렇게 볼 순 없습니다. 모든 사소한 일로도 형세를 짐작하는 영리한 분이라 굳이 대놓고 말할 필요도 없지요. 고자의가 진왕부 장사가 된다면 고서강은 바라마지 않겠지요. 태자는…….”
문 이야가 피식 웃으며 말을 이었다.
“태자도 마찬가지로 바라마지 않을 겁니다. 진왕 곁에 제 이목을 둔 것으로 여길 겁니다. 휴! 어찌 됐든 제 핏줄이니 장공주는 각 가문을 한데 엮으려는 겁니다. 대놓고 싸우지 못하도록요. 마지막에 적어도 목숨은 부지하겠지요.”
이동은 그 말에 마음이 동해 탕 오낭자와 묵 칠소야의 일을 간단히 이야기했다.
“이야, 이 일도 가능성이 조금은 있을까요?”
문 이야는 수염을 쓰다듬으며 웃었다.
“재미있군요. 그건 묵 칠소야에게 달렸습니다. 묵가가 서생 가문이라지만, 칠소야는 서생이라고 보기 힘들지요. 그러니 걸맞은 집안도 아니지만, 걸맞지 않다고 볼 수도 없지요.”
“저도 그렇게 생각해요.”
이동은 명 삼낭자를 떠올렸다. 명 삼낭자와 묵칠도 문 이야의 말대로 걸맞은 집안도 아니고 걸맞지 않은 집안도 아니었다.
“이야의 생질 문제도 손을 써야 하는 거 아닐까요?”
잠시 이런저런 이야기를 한 후에 이동이 나지막이 묻자 문 이야가 고개를 저었다.
“말을 들을 거였으면 이 지경까지 왔겠습니까. 그놈의 안위와 장래가 6할은 제게 달렸다면 나머지 4할은 자신이 알아서 할 겁니다. 내가 어쩔 수도 없고요. 다행히 문씨 가문도 나와 그놈 대에서 끝납니다. 그놈 아이들은 다 자질이 무난해서 말입니다. 휴, 알아서 하라지요.”
문 이야는 한숨을 내쉬고 또 내쉬다가 인사하고 물러나서 어슬렁어슬렁 큰 부엌으로 향했다. 바쁘게 움직이는 사람들을 바라보며 느긋하게 술을 홀짝였다. 그는 그렇게 자기가 가장 좋아하는 이런 세속의 떠들썩함과 바쁜 모습을 지켜보며 옛 기억이 불러일으킨 처량함을 조금씩 씻어내렸다.
주육은 대전 밖에 서서 고개를 내밀고 안을 들여다봤다. 대전 안, 태자가 제 아비 주 추밀부사를 비롯한 사람들과 정무를 논의 중이었다. 주육은 옆으로 비켜나서 잠시 기다리다가 또 고개를 들이밀었다. 드디어 대신들이 모두 물러나자, 주육은 내시 뒤에 숨어서 아비가 멀리 사라지는 걸 보고는 쪼르르 달려 들어가서 막 붓을 내려놓고 일어서려던 태자 앞으로 단숨에 다가갔다.
“태자 전하!”
주육은 무릎 꿇고 고개를 조아렸다가 다시 일어나기까지 재빠르고 민첩하게 움직였다.
“이틀만이구나.”
“역시 영명하십니다, 태자 전하. 꼬박 이틀입니다!”
주육은 손가락 두 개를 내밀었다.
“태자 전하, 대전 밖에서 두 시진 동안 기다렸습니다.”
“긴한 일이 있느냐?”
태자가 다급히 물었다. 주육의 긴한 일은 보통 즐거운 일이었다. 주육은 미간을 찡그리며 고뇌하는 표정이었다.
“중요한 일인지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전하, 연향루의 아라를 기억하시지요?”
“당연하지!”
주육이 아라를 거론하자 태자는 순간 그리운 마음이 들었다. 최근 후원에 새로운 미인을 많이 들였다. 하나같이 아리땁고 분별 있고 눈치 빠른 여인들이라 그 즐거움이 아라에 못지 않았지만, 아라의 그 느낌을 주진 못했다.
“태자 전하, 한동안 연향루에 가지 않으셨지요?”
태자의 말투에 주육은 조마조마하던 마음을 거의 내려놓았다.
“이런 다사다망한 때에 고가 그럴 겨를이 어디에 있느냐!”
태자가 언짢은 듯 주육을 흘겨봤다.
“전하, 그러지 말고 방도를 생각해서 아라를 궁으로 들이고 치우십시오.”
주육은 매우 책임 없이 제안했다.
“무슨 일이냐? 연향루에 무슨 일이 생겼어?”
주육의 상대로는 태자도 꽤 똑똑한 편이었다.
“일이 난 건 아니고요. 이렇게 바쁘셔서 들르실 틈이 없으니 말입니다. 아라 그것이 매일 간절하게 기다리고만 있습니다. 하루를 기다려도 바쁘시고, 이틀을 기다려도 바쁘시고. 한 달 내내 찾지 않으니 애가 타서 며칠 전에 영 칠야에게 찾아갔답니다. 어제는 또 저를 찾아와서 어찌나 우는지……. 휴. 그 눈물이 천군만마를 익사시킬 정도였습니다.”
주육은 한숨을 푹푹 내쉬었다.
“전하, 아라를 그렇게 내버려 두는 것도 수는 아닙니다. 길게 이럴 일이 아닙니다. 어찌 됐든 살길을 마련해 주셔야지요. 제 생각입니다만, 궁으로 들이고 치우십시오. 명분 같은 걸 줄 것도 없습니다. 시녀로 들여서 곁에 두십시오. 정 안 되면 빈 거처 하나 주면 됩니다. 그렇지요?”
태자는 턱을 문지르다가 한참 만에 고개를 끄덕였다. 옳은 말이었다. 그렇게 내버려 두는 것도 수는 아니었다. 그런데 궁으로 들인다? 궁으로 들인다는 생각만 해도 속이 거북했다. 아라가 괜찮긴 해도, 그 몸을 품은 사내가 얼마나 많은가…….
“법도에 맞지 않는 일이다!”
태자는 금세 결정 내렸다. 여인이 없을까. 아라 같은 여인을 궁에 들여서 제 속 뒤집을 일이 전혀 없다.
“그럼 어찌합니까.”
주육은 고민되기 시작했다. 어제 아라 앞에서 큰소리 땅땅 쳤었는데. 휴. 태자 전하도 참. 전엔 그렇게 아라를 좋아하시더니. 어떻게 이렇게 변하시나.
“여인은 모름지기 조용히 수절해야 한다고 전해라. 연향루 기녀지만 지킬 법도는 지켜야 한다고 해! 평생 먹고살 걱정 없이 해주었거늘. 뭘 더 어쩌란 말이냐! 만날 때가 되면 자연히 갈 것이니, 그렇지 않을 때는 고분고분 있으라고 전해라!”
태자는 잔뜩 얼굴을 구기고 말했다. 생각할수록 말 같지 않은 일이었다.
“너를 다 찾아가다니. 게다가 영원까지! 체통을 지켜야지! 다음에 또 이런 일이 있으면 절대로 용서하지 않을 것이라고 전해라! 이번 일은 따지지 않겠다. 이번엔 여계(女戒)를 천 번 베끼라고 해라. 다음엔 절대로 용서하지 않을 것이다!”
“예.”
태자가 정말로 화가 난 것 같자, 주육은 식겁해서 숨도 쉬지 못하고 태자가 말하는 대로 ‘예, 예’ 하고 대답했다.
“너도 그렇지! 큰일이 얼마나 많은데, 큰일을 하지 않고서 허구한 날 이런 일에나 신경 써! 다음에 또 이런 일을 전하러 오기만 해 봐라! 가만히 두지 않을 것이다!”
태자는 아라부터 시작해 주육까지 훈계했다. 주육은 숨도 크게 쉬지 못하고 공손히 고개를 숙였다.
풀이 죽어서 궁에서 나온 주육은 선덕문 밖에서 말을 타고 가다가 금세 말머리를 돌려 경부 관아로 향했다. 이런 일을 상의할 사람은 원 형님밖에 없었다.
살짝 고개를 숙이고 안으로 들어오는 계 천관의 안색이 별로 좋지 않았다. 진왕은 강환장과 마주 앉아 이야기 나누다가 계 천관이 들어오는 걸 보고 살짝 허리를 숙였다. 강환장은 서둘러 일어나 장읍하며 예를 갖추고는 계 천관이 자리에 앉은 후에 다시 앉았다.
“장공주께서 오황자를 가르친다는 것, 들으셨습니까?”
계 천관이 곧바로 진왕에게 물었다.
“들었습니다. 마침 소화와 그 이야기를 하던 참이었습니다. 고모님이 그 나이에 외롭게 홀로 지내니 어린아이를 좋아하는 것도 인지상정입니다.”
진왕의 태연한 얼굴에 계 천관은 곧바로 미간을 찌푸리며 가차 없이 말했다.
“장공주는 혼인을 못 하는 게 아니라 혼인하고 싶지 않아서 혼자 지내는 것입니다. 외롭지도 않고 아이를 좋아하지도 않습니다!”
계 천관은 그렇게 말하고는 강환장을 매섭게 노려봤다. 강환장은 계 천관의 시선에 순간 화가 치밀었다.
왜 나를 노려보는 것이야? 내가 한 말도 아니고! 장공주를 만만히 보면 안 된다고 말하고 있었거늘!
“장공주는 확실히 다른 공주와 다른 분입니다. 하지만 아무리 그래도 일개 여인이고 또 궁을 오랜 시간 떠나 있었습니다. 만만히 볼 일은 아니지만, 호들갑 떨 일도 아닙니다.”
강환장은 예전 같은 마음으로 사람을 대하고 일을 처리하면 안 된다는 걸 의식하긴 했다. 그러나 의식했을 뿐이었다. 혹은 의식했으니 고친 것으로 여긴다고 해야 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성격은 예전 그대로였다. 본인은 허리를 숙였다고 생각하지만, 사실은 다른 사람을 깔보고 함부로 대하지 않게 되었을 뿐이었다.
계 천관은 기가 차서 얼굴이 하얗게 질려 연신 냉소했다.
“일개 여인? 선황이 품에 안고 몸소 가르치시고 용상에 앉아 조정 일을 들으며 자란 장공주가 일개 여인?”
“그런들 무엇합니까? 선황이 개국 태조였다면 이렇게 몸소 가르친 사람이 갈수록 청출어람 했겠지요. 그랬다면 계 천관께서 이렇게 화를 낼만 합니다!”
강환장은 한마디도 물러서지 않았다. 대놓고 말하지 않았지만 매우 신랄한 말이다. 선황은 개국 태조처럼 대단한 인물이 아니다. 본인이 대단하지 않은데 몸소 가르친 사람인들 뭐가 그리 대단하랴. 더 나은 인물로 가르칠 수 있으랴? 설령 조금 더 낫다고 해도 대단한 인물이 아니지!
계 천관은 입을 꾹 다문 채 강환장을 향해 눈을 부릅떴다. 말이 나오지 않았다. 말로 사람 약을 올리는 덴 경험이 전혀 없어서 실력이 바닥에 가까웠다.
“왕야, 하관 터놓고 말씀드리겠습니다. 지금 형국으로 보위의 행방은 장공주의 일념에 달렸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장공주가 친히 오황자를 가르치는 일을 대수롭지 않게 보셔선 안 됩니다. 대수롭지 않게 보셔서 안 될뿐더러, 지극히 중요하게 여기셔야 합니다. 대책을 상의하려고 이렇게 찾아온 것입니다. 왕야, 이런 무지한 소인이 하는 오만한 말을 들으시면 안 됩니다. 왕야를 해칠 것입니다!”
계 천관은 너무 분노한 나머지 다소 말을 가리지 못한 감이 있었다. 강환장은 눈썹을 치켜떴다. 진왕은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계 천관을 향해 고개를 끄덕이고 또 강환장을 향해 손사래 쳤다.
“소화, 진정해라. 조심해서 잘못될 일은 없다. 만사를 심각하게 보는 것은 적어도 나쁜 일은 아니다.”
강환장은 심호흡하고 눈을 내리깔았다. 지금은 예전이 아니니 무슨 일이든, 무슨 말이든 참아야지. 참을 수 있지.
계 천관은 큰 치욕을 참는 듯한 강환장을 싸늘하게 바라봤다. 혐오감이 물씬 몰려왔다.
“참, 올해 춘시 이후 지방에 빈자리가 많이 생겼네. 초 승상이 강 장사를 매우 좋게 보고 강 장사를 위남현의 지현으로 추천했네. 강 상사, 축하하네.”
“뭐라고?”
강환장이 꽥 고함쳤다. 얼굴에 순간 핏기가 다 사라져서 손가락을 떨며 계 천관을 가리켰다.
“이런 소인배 같으니!”
“말조심하시게, 강 장사!”
강환장을 바라보는 계 천관의 눈빛에 혐오감이 더 짙어졌다. 정말이지 교양이라곤 눈곱만큼도 없는 소인배 중의 소인배 아닌가!
“왕야, 이건 좋은 일입니다. 과거 출신이 아닌 강 장사가 왕부 장사가 된 지 1년 만에 위남현 같은 중등 현의 지현으로 승진했습니다. 이런 승진 속도는 본 황조에서 손꼽히는 속도입니다. 강 장사가 승진한 후에 왕야께서 새 장사를 뽑게 되면 온 경성의 영재가 몰려들 것입니다.”
강환장이 뭐라고 하기 전에 계 천관이 지극히 빠른 속도로 진왕에게 말했다. 진왕은 조금 얼떨떨했다. 위남현 지현으로 승진한 것과 앞날이 사실 그리 밝지 않은 왕부의 큰일 거리 없는 장사로 있는 것, 아무리 생각해도 전자가 좋은 일이었다. 그런데 이렇게 좋은 일에 소화가 어찌 이토록 화를 낼까. 중간에 내가 모르는 중요한 무언가가 있는 것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