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금동-362화 (362/463)

362화: 너무 많은 비밀

복안 장공주는 툴툴거리면서도 화가 난 것 같진 않았다. 이동은 빙그레 웃으며 그녀를 바라봤다.

“장공주의 친조카인데 아둔해 봐야 얼마나 아둔하겠어요. 제 오라버니도 그 나이 때부터 글을 배우고 책을 읽었어요. 게다가 여기 이렇게 좋은 스승이 있잖아요. 앞으로 분명 비범해질 거예요.”

“알랑거리지 마.”

장공주가 등 받침에 기대며 말했다.

“재미있는 일이 있어. 오늘 오후에 태자비 정씨가 찾아왔었어. 주절주절 딴소리하더니 영 황후의 분부로 궁 곳곳을 살피고 있대. 수리할 곳은 없는지, 여름에 비가 오기 전에 얼른 수리해야 한다고. 별원은 어쩔 건지 묻더라고. 자기가 사람을 보내서 살펴볼지, 아니면 내가 사람을 보낼 건지. 얼른 고쳐야 내가 돌아갈 때까지 끝낼 수 있다나.”

이동은 멍하니 있다가 할 말을 잃고 쓴웃음을 지었다.

“장공주를 성 밖으로 내쫓으려는 건 아마도 태자의 뜻이겠죠.”

“당연하지. 정씨 일가는 온 신경이 측비 손씨에게 있어. 여유가 있더라도 내게 쓰진 않겠지. 정말이지…….”

복안 장공주는 길게 말꼬리를 늘이다가 코웃음 쳤다.

“장공주가 오황자를 가르쳐서겠죠?”

이동이 살며시 물었다.

“흥.”

복안 장공주는 한참 만에 뜻 모를 코웃음을 쳤다.

“예전부터 태자는 오로지 안온을 바라고, 안온하게 즉위한 다음에 그때부터 손을 휘둘렀지.”

“태자 때부터 손을 휘두르는 사람도 있어요.”

“있지. 후손이 하나뿐이고, 부자 사이에 의심이 없을 때.”

복안 장공주가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이런 이야기는 그만하자. 사소한 일이야. 청첩 주러 왔지?”

“예.”

이동은 정말로 금박 대홍 청첩을 꺼냈다. 복안 장공주는 받아서 처음부터 끝까지 살펴보고는 덮어서 이리저리 또 살펴본 후에 청첩을 흔들며 웃어 보였다.

“처음으로 받은 청첩이야.”

이동은 멈칫하다가 헛웃음 지었다. 출가하지 않은 황실 공주를 꽃 연회에 초대하는 건 처음 있는 일이긴 했다.

“겸사겸사 가지고 온 거예요. 어머니가 그날 어떻게 준비했는지 장공주께 말씀드리라고 해서 왔어요. 저희가 제대로 고려하지 못한 게 있는지, 적절하지 못한 건 있는지 한번 봐 주세요. 저희 집안에서 처음으로 문회, 꽃 연회를 여는데 하필 그 첫 번째에 장공주께서 왕림하시잖아요. 온 집안이 방향을 잃고 허둥대고 있어요.”

이동은 솔직히 말해서 어려웠다. 이번 연회를 안 열 수도 없고, 그렇다고 어떻게 열어야 할지가 문제였다.

“좋은 방도 알려줄게.”

복안 장공주가 눈동자를 천천히 굴리면서 빙그레 웃었다.

“이따 계가에 들러. 백 노부인을 만나서 지금 네가 한 말 그대로 해. 너희 가문을 위해서 한번 나서 달라고 부탁해.”

이동은 어안이 벙벙해졌다. 백 노부인의 도움을 청하라니. 무슨 생각이지.

“계 천관이 또 선봉에 서서 오가아의 봉호를 청하는 상주서를 올렸어. 새해가 된 이래 황상의 맥이 계속 좋지 않은데 마음 편하게 보내도록 애쓰지 못할망정, 하나같이! 황상이 몸을 돌볼 시간을 주면 안 된대? 하나같이 지나치게들 영리하지!”

복안 장공주의 말투가 상당히 안 좋았다.

“황상의 몸이 좋아지기 전엔 아무도 문제 일으킬 생각하지 말아야 해. 내가 시키는 대로 해. 백 노부인이 나서줘야 내가 안심한다고 전해. 너도 어떻게 하면 좋을지 몰라서 난처하잖아. 네 작은 고민도 함께 해결하고 좋잖아.”

이동은 곧바로 고개를 끄덕였다. 선봉이라. 사실 그녀는 이미 선봉에 나섰다. 오라버니도 그렇고. 그녀 일가가 다 그랬다.

“또 하나. 강환장을 위남(渭南) 지현으로 보내버릴 생각이야. 그놈을 셋째 곁에서 떼어내고 진왕부 장사 자리엔 고자의를 보낼 거야.”

이동은 더더욱 어안이 벙벙해져서 관자놀이를 눌렀다. 무슨 일인지 이해할 수 없어졌다.

“강환장은 인품이 저열하고 비뚤어졌어. 셋째가 본성은 나쁘지 않은데 물들면 안 돼.”

복안 장공주가 단도직입적으로 말했다.

“그럼 고자의는요?”

이동은 저도 모르게 툭 물었다. 고서강은 태자 사람 중에 가장 쓸모있는 사람이었다. 고서강이 가장 사랑하고 또 고가 다음 대에서 가장 출중한 고자의를 진왕 곁 장사로 보낼 생각이라니!

복안 장공주는 고개를 틀고 이동을 바라보며 눈썹을 까딱였다가 천천히 내렸다. 얼굴에 미소가 서서히 피어났다.

“안 알려줘. 돌아가서 잘 생각해 보렴. 정 모르겠으면 문도에게 물어봐. 문도는 지난번에 언제 집에 들렀지? 집에 좀 가 보라고 해. 이 세상에 가족이라고는 누님 하나인데, 사흘돌이는 아니더라도 1년에 두어 번은 들러야 하지 않겠어?”

복안 장공주의 말에 이동은 순간 야단났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야, 또 장공주 눈 밖에 난 건가요?

이동은 집으로 돌아와서 문 이야를 찾아갔다. 강환장과 고자의의 이야기를 하기 전에 복안 장공주가 한 마지막 말을 했더니 문 이야의 안색이 바로 변해서 길게 말할 겨를도 없이 말을 준비시켜서 여복과 환가아 등 종복을 데리고 상원현으로 달려갔다.

그리고 다음 날, 동이 트자마자 바로 돌아왔다. 식사하고 조금 쉰 다음에 이동이 만나러 왔는데 안색이 나쁘진 않았다. 다만 은근히 갈등이 있는 듯하고 의기소침한 기색이 느껴졌다.

“무슨 일인가요?”

이동은 걱정이 되어 먼저 물었다. 문 이야는 쓴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저었다.

“뭐라고 해야 하나. 휴. 처음부터 말씀드리지요. 그래야 확실히 설명하지요.”

이동은 일어서서 직접 문 이야에게 차를 내려주었다.

“낭자도 저희 가문 일을 다 아시지요. 저희 문씨 가문에 살아남은 사람이 저와 누님 말고 사실 하나 더 있습니다. 어릴 때부터 숙부를 모시던 시녀가 낳은 아이입니다. 숙부는 하고 싶은 일을 마음껏 하고자, 홀로 살겠다고 작정했었습니다. 그런데 시녀가 아이를 가지니, 숙부 역시 속세의 모든 정을 끊어내지 못했지요. 배가 많이 불러오기 전에 핑계를 대고 시녀를 내보냈습니다. 사실 몰래 사람을 시켜 고향인 상원현으로 보낸 겁니다.”

이동은 아연해 져서 이마를 짚었다. 어제부터 지금까지 놀랄 일이 너무나 많았다.

“그때, 누님이 막 혼인했을 때인데 회임하고 3개월 되기 전에 아이를 잃었습니다. 그 사실을 숨기고, 그 시녀가 낳은 아이를 데리고 와서 큰아들로 키웠습니다. 숙부가 임종 전에 제게 당부했지요. 문씨로 키울 것 없고, 그저 목숨 부지해서 아들딸 낳고 잘 살게만 해주라고요. 긴 세월 동안 누님과 자형은 친아들처럼 그 아이를 키웠습니다. 나도 그 생질이 사실은 사촌 아우라는 사실을 잊고 살았습니다.”

숙부와 부친의 억울한 참변을 떠올린 문 이야의 얼굴에 서글픈 기색이 떠올랐다. 한참 만에 그의 말이 이어졌다.

“이 비밀을 아는 사람은 나와 누님, 자형을 제외하고 이 세상에 아무도 없다고 여겼었는데……. 휴! 정말이지 세상에 비밀은 없는 모양입니다.”

“장공주가 어떻게 아셨어요?”

이동은 가슴이 서늘해졌다. 어떻게 알았을까? 이런 비밀을 또 얼마나 더 알고 있을까.

“모르지요. 제 그…….”

문 이야가 말을 멈췄다가 이었다.

“생질은 문씨 가문 성격을 이어받았습니다. 어릴 때부터 다른 아이들과 달랐어요. 매우 영특했지요. 너무 영특해서, 글공부 몇 년 시키다가 누님이 절 찾아와서 상의했지요. 상의 끝에 글공부를 더 시키지 않고 약방에 보내기로 했습니다. 약방에서 몇 년 배우다가, 그놈이 부모와 나를 속이고 끽소리도 없이 소리(小吏)에 붙었습니다. 휴!”

문 이야가 연신 쓴웃음 지었다.

“보십시오. 우리 문씨 가문의 혈통이 이렇습니다. 조용히 지내는 인간이 없어요.”

이동이 눈썹이 치켜올라갔다. 뭐라고 해야 좋을지 몰랐다. 포부를 품은 사람이 또 여기 있다고 해야 하나.

“나도 누님도 방도가 없어서 할 수 없이 사방으로 부탁해서 상원현 관아에 보냈습니다. 상원현 관아에서 문서(文書: 서기, 문서 담당자)가 되었지요. 누님은 또 서둘러 혼처도 찾아 주었습니다. 상원현에서 전량 담당 서반 가문 낭자였는데 본인도 매우 마음에 들어 했습니다. 혼인하고 다음 해에 아이도 태어났지요. 집안을 꾸린 후에 제가 여기로 오기 전까지 줄곧 조용하고 착실하게 잘 살았습니다.”

문 이야가 이마를 힘껏 누르며 한숨을 내쉬었다.

“휴! 어제 돌아갔더니, 누님과 자형이 날 찾아오려고 마차를 준비하던 참이었습니다. 제 생질이 지난달에 제 장인과 함께 전량을 맞추러 경성으로 왔다는군요.”

쓴웃음 짓는 문 이야의 얼굴에 은근히 뿌듯한 기색이 드러났다.

“결국은 문씨 가문 사람입니다. 천성적으로 전량, 형명에 재주가 있어요. 장인도 조상 대대로 전량을 맡은 사람인데 장인 대신 장부 몇 번 맞춰 보고는 장인보다 훨씬 정통했답니다. 몇 년 동안 장인이 경성으로 들어와 전량 장부를 맞출 때 그놈이 따라왔고요. 사실 그놈이 장인 대신 장부를 맞춘 것이지요.”

이동은 고개를 끄덕였다. 문 이야의 전량 방면 능력이 어떤지 두 눈으로 봤었다. 그 사촌 아우가 문 이야의 백 분의 일이라도 닮았다면 한 현의 전량은 손바닥 뒤집기만큼 쉽게 다루리라.

“그렇게 장부를 맞추러 왔다가, 이부에서 현승을 뽑는다는 소식을 어디에서 들었는지, 지난번에 소리 때처럼 말 한마디 없이 핑계 대고 경성에 며칠 더 머무르면서 조현(曹縣)의 현승 빈자리를 꿰찼답니다. 휴! 따로 배운 게 없으니 어찌 그리 공교롭게 그 자리가 제게 돌아갔는지 알아보지 못한 것이지요. 참으로 공교롭지 않습니까?”

문 이야는 연신 한숨을 내쉬었고 이동도 고개를 끄덕였다. 현승은 하급 관리와 상급 관리의 경계점이다. 소리로서 평생 가장 높이 오를 수 있는 자리, 혹은 큰 뜻을 품은 소리가 가장 중요한 목표로 삼을 그 자리를 이렇게 손쉽게 얻었다. 알아서 굴러온 떡은 종종 먹기에 크거나 작은 함정이 있기 마련이다.

“조현에 무슨 문제가 있나요?”

이동이 잠시 생각하다가 물었다.

“조현 지현은 주명일, 대황자비 곽씨 모친의 생질입니다. 대황자의 체면 덕에 조현 지현이 되었다고 볼 수 있지요. 주명일은 간이 작고 선량합니다. 속셈도 없고요.”

문 이야는 몇 마디로 주명일을 평가했다. 이동은 금세 이해했다. 문 이야 같은 현승이라면 이런 지현쯤은 눈 깜짝할 사이에 말 잘 듣는 허수아비로 만들 것이다.

“장공주가 손 썼다고 생각하세요?”

이동이 나직이 물었다.

“모릅니다. 오로지 장공주 한 사람의 계획은 아닐 수도 있지요. 다만 누구 계획이든, 지금으로서는 이 일은 장공주 손아귀에 있습니다.”

문 이야는 고개를 숙인 채 한참 만에 나지막이 대답했다.

“장공주를 건드리는 게 아니었습니다.”

“그런 건 아니에요. 장공주가 그렇게 쩨쩨한 사람이 아니고요.”

이동이 나긋하게 말했다.

“두 가지 일이 더 있어요. 어제 급하게 가셔서 미처 말씀드리지 못했어요. 강환장의 인품이 저열해서 진왕 곁에 두면 안 되겠다고 하셨어요. 위남현 지현으로 내보내고 고자의를 진왕부 장사로 보낼 생각이시래요.”

“뭐라고요?”

문 이야는 이동처럼 아연실색했다. 이동보다 더 놀랐다고 해야 할지도 모른다.

“강환장을 위남현으로 보내는 건 이해할 수 있어요. 장공주는 강환장이 진왕을 물들이는 걸 바라지 않으니까요. 팔은 안으로 굽는다잖아요. 하지만 고자의를 진왕부 장사로 보내는 건, 아무리 생각해도 모르겠어요. 정 모르겠으면 이야에게 가르침 청하라고 하시더라고요. 그러고 집에 돌아가 보라고 하라고 이야에게 전하라고 한 거고요.”

문 이야가 탁자를 탁, 내리쳤다.

“아이고! 그렇게 된 거였군! 아이고! 이제야 마음이 조금 놓입니다. 잠깐 정리 좀 하겠습니다.”

문 이야는 자리에서 일어나 서성거리기 시작했다. 반각 정도 흐른 후, 걸음을 멈추고 돌아서서 자리에 앉아 이동을 바라봤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