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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동-361화 (361/463)

361화: 버티지 못해

이신의 분노한 표정이 차츰 사그라졌지만 미간은 더 단단히 좁혀졌다.

“이야의 말이 사실이라면……. 이건 너무…….”

“인연이라는 말은 참으로 현묘한 것일세. 영 칠야는 말일세, 문무를 겸비한 뛰어난 인재인 건 우리가 말할 것도 없지만, 그보다 나는 모든 법도와 예법을 경시하는 그 태도를 가장 높이 사네. 그 점이 제일 마음에 들어. 세인의 한담, 평가를 전혀 아랑곳하지 않고 온 세상과 적이 되는 것도 마다하지 않는 심성, 이렇게 당당하게 제 갈 길을 가는 사람은 내가 봐 온 중에 첫 번째로 손꼽히네. 나는 거기에 비교하면, 에휴!”

문 이야는 연신 한숨을 내쉬었다.

“도저히 따라잡을 수가 없네. 마음은 있어도 그럴 능력과 배포가 없어.”

“결국 무법무천, 법도도 없고 하늘 무서운지도 모른다는 말 아닙니까!”

이신이 콧방귀를 뀌었다.

“그래, 맞네, 맞아. 무법무천이지!”

문 이야가 껄껄 웃었다.

“이렇게 무법무천, 세속을 벗어난 사람이 가문, 신분을 연연하겠나? 초혼, 재가를 따지겠나? 자기 마음에 든 것으로 충분하네.”

이신은 입을 꾹 다물고 침묵했다. 문 이야가 빙그레 웃으며 그를 바라봤다.

“자네를 불러서 보라고 한 것은…….”

문 이야가 말꼬리를 길게 늘였다.

“슬슬 때가 된 것 같아서네. 보게. 영 칠야는 처음에 두어 달에 한 번 왔었지. 영 칠야가 들르기 전후로 분명 큰 사건이 있었고. 나중에 간격이 짧아졌네. 한 달에 한 번은 왔어. 그렇게 들렀다 가면, 큰일은 아니라고 해도 무언가 일이 터졌네. 우리가 경성으로 옮겨 온 후에는 그 간격이 열흘로 좁아졌지. 들른 후에도 별일이 없었고. 최근엔 사흘돌이로 찾아오네. 내 생각엔 말일세, 날마다 담을 넘게 되면 혼담을 넣으러 올 날이 다가온 걸세. 귀댁의 막료인 내가 혼담이 들어온 후에야 자네에게 알릴 순 없지 않은가.”

이신이 피식 웃었다.

“이야, 정말 좋은 쪽으로만 생각하시는군요!”

문 이야는 실실 웃고는 꿍얼거리듯 한마디 했다.

“그럼 두고 보자고.”

“어머니는 아십니까?”

이신이 침묵하다가 묻는 말에 문 이야가 그를 흘겨봤다.

“자네 생각엔? 이 저택에 태태가 모르는 일이 있나? 대낭자도 태태에게 감출 생각은 없네. 다만 다들 훤히 알고 있는 건 알고 있는 거고, 자네가 얼마 전엔 춘시 일에 집중해야 할 때라, 이런 작은 일을 자네에게 알리지 않은 걸세.”

“이건 큰일입니다!”

이신의 말투가 심각해졌다.

“그래, 그래. 큰일이지. 하지만 태태가 알아서 할 큰일일세. 문회에 누굴 초청할지, 정했나? 장공주도 오시는 연회일세.”

문 이야가 화제를 돌렸다.

“이건 문회입니다. 글도 모르는 무인을 초대할 필요 없지요!”

이신의 동문서답에 문 이야는 하, 하고 웃고는 또 웃다가 나중엔 하하하 웃었다.

“마음대로 하게. 하지만 자네가 초대하지 않는다고 오지 않으리란 법은 없네. 어차피 영 칠야가 자네를 보러 오는 것도 아니고, 자네가 초대하든 말든…….”

문 이야가 말꼬리를 늘였다.

“그래, 그래. 마음대로 하게!”

영원의 마차는 곧장 정북후부 중문으로 들어갔다. 영원은 마차가 멈추자 뛰어내려서 하품하며 안으로 들어가려는데 대영이 한숨을 내쉬었다.

“칠야, 저기…….”

대영이 가리키는 쪽에 아라가 다다와 딱 붙어 서 있었다. 다다는 아라 뒤에서 머리만 내밀고 있었고 둘 다 긴장한 얼굴로 영원을 바라보고 있었다.

“어째서 안으로 들인 것이냐?”

영원의 눈이 다 휘둥그레졌다. 내 저택이 언제 이리 법도 없는 곳이 되었어!

“위봉낭의 친척이라고, 칠야를 뵙겠다고, 뵙지 못하면 돌아가지 않겠다고 했답니다. 복 총관이 들어와서 기다리라고 했습니다.”

뒤따라온 문지기 우두머리가 얼른 해명했다. 복 총관이 한 말이니 잘못했더라도 자기들 잘못이 아니었다. 칠야가 함부로 벌하는 사람도 아니고.

영원은 시선을 피하며 달달 떠는 아라를 삐딱하게 바라보며 콧방귀를 뀌었다. 정자 쪽으로 다가가 안으로 들어가서 아경의에 털썩 앉아서 아라를 가리켰다.

“무슨 일로 왔느냐? 말해라.”

“칠야, 연향루는 지금까지 문을 닫고 있어요. 태자는 한 번도 오지 않았고, 아무도 오지 않아요. 매일 저랑 다다 둘이서 얼굴을 마주 보고 있답니다. 대체 이런 날이 언제 끝나나요?”

아라가 용기 내서 물었다.

“이런 날이 언제 끝나냐니? 문 닫은 지 며칠이나 됐다고. 문 닫은 지 5년, 10년 되었으면 이해하겠다만.”

“5년, 10년이요?”

아라가 놀라 고함쳤다.

다다도 얼이 빠졌다. 그럼 소저는…… 노소저가 되게!

“칠야, 우리 같은 사람은 좋은 시절이 고작 몇 년입니다. 5년은 말할 것도 없고 3년도 지체하면 안 됩니다. 1년도 안 돼요…….”

아라는 갈수록 다급해졌고 영원은 들을수록 어이가 없었다.

“네가 아직도 경성의 이름난 명기인 줄 알고? 태자 줄을 잡고 또 내 아래로 들어와서는…….”

“칠야 밑에 먼저 들어갔고, 칠야가 태자 줄을 잡으라고 한 거지요!”

아라가 얼른 영원의 말을 고쳐주었다. 이건, 순서와 인과를 틀릴 일이 아니지!

영원은 골치 아파지기 시작했다.

“그래, 그래! 내 아래 들어왔고, 태자 줄을 잡았는데 네가 온 경성의 다른 기녀와 같을 줄 알았느냐? 매일 어떻게 손님 환심 살지 고민하고, 어떻게 한몫 잡아 반년 먹고살지 고민하는 기녀와 같을 줄 알았느냔 말이다. 그러지 말고 입궁할 고민이나 하는 게 좋을 것이다.”

아라는 얼이 빠졌다.

“예? 그건 안 돼요! 칠야, 제가 칠야에게 의탁했을 때 약속하셨잖아요. 전 그저 문 안으로 들이고 싶은 사람만 안으로 들이는 거, 그거 하나 바랐습니다. 싫은 사람은 안 들이고 싶었어요. 칠야, 이렇게 약속을 지키지 않으시면 안 되지요. 칠야…….”

“이제 내 탓을 하는 게냐? 말해보아라, 양 구야를 건드려서 홀딱 벗고 거리를 뛰어다니도록 조롱한 짓, 누가 일으킨 일이지? 온 집안 여식솔 중에 진심은 아무도 없다고, 오로지 너만 진심이라고 태자에게 속삭인 사람이 누구지? 내가 시킨 일이더냐? 그리고…….”

영원이 계속해서 꼽으려는데 아라가 흔들리는 눈빛으로 얼른 말을 돌렸다.

“칠야, 우린 지금 앞으로의 일 이야기하는 거예요. 예전 일이 아니라……. 칠야, 이러시면 안 돼요. 절 내버려 두시면 저는 누굴 의지해요. 칠야!”

아라는 아예 바닥에 꿇어앉아 엉엉 울기 시작했다.

“일어나라!”

영원은 한 손가락으로 관자놀이를 꾹 눌렀다. 애초에 아라가 너무 어리석다고 위봉낭도 타박했었다. 한순간 귀신에 홀려서는……. 자기가 내린 망할 결정이니 책임질 수밖에 없었다.

“정 못 버티겠거든 방법은 하나다. 적당한 시신을 찾아서 네가 죽었다고 하고 멀리 보내주마.”

“싫어요. 경성보다 좋은 곳은 없어요. 게다가 죽은 척하고 이름 숨기고 살라니, 낯선 곳에서 어떻게 살아요. 안 가요!”

“그럼 견뎌라.”

영원이 쌀쌀맞게 말했다. 눈앞에 있는 물건 앞에서 한마디도 길게 말할 엄두가 나지 않았다.

견디거라. 반년, 1년 혹은 2년 견디는 것도 아라 성격에 안 좋을 것이 없다.

아라는 올 때보다 더 서러워져서 숨도 제대로 쉬지 못하고 훌쩍였다.

“착실하게 경서나 잘 베껴 써라. 그나마 그럴 수 있을 때 말이다. 앞으로는 어떻게 될지 아무도 모른다.”

영원이 싸늘하게 말하고는 대영에게 분부했다.

“사람을 보내 두 사람을 조용히 돌려보내라.”

대영이 다가가 아라와 다다에게 손짓했다. 아라는 내내 훌쩍이며 걸어갔고 다다는 아라를 부축한 건지 아니면 아라에게 기댄 건지, 아라가 훌쩍일 때마다 따라서 훌쩍이며 걸었다. 두 사람은 그렇게 한데 엉겨 같이 훌쩍이며 대영의 뒤를 따라 나갔다.

영원은 일어서다가 잠시 생각하고는 대웅을 불렀다.

“형국공부에 다녀오너라. 육소야를 찾아가서 태자가 오랫동안 연향루를 찾지 않는다고 아라가 날 찾아왔더라고 전해라.”

아라와 다다 이 두 사람, 돌아갈 때는 걱정할 것 없으나 오는 내내 얼마나 시선을 끌었을지 모를 일이었다. 아라가 왜 여기에 찾아왔는지 적당한 대답 거리를 만들어 두어야 했다.

대웅은 직접 형국공부에 말을 전하러 갔고 영원은 어슬렁어슬렁 안으로 들어갔다. 복백이 마중 나와 가까이 다가와서 나직이 고했다.

“집에서 기별이 왔습니다. 소 사야가 경성으로 출발했답니다.”

“뭐라고?”

영원은 너무 뜻밖이라 귀를 의심할 지경이었다. 기억이 있을 때부터 소 사야는 영가 사당, 그 좁은 별원에서 한 발짝도 나오지 않았다. 영원의 안색이 변했다.

“나왔다고? 강환장이 대상국사에 죽치고 있었던 일 때문에? 강환장이 그 스님인지 뭔지를 만난 걸까?”

“칠야가 보낸 그 소식, 후야가 몸소 소 사야에게 전했답니다. 후야 말씀이, 소 사야가 그 서신을 보고 안색이 크게 변하더니 그 자리에서 바로 경성으로 가겠다고 말했답니다. 마차, 후야가 짐과 사람을 준비해준다고 하셨는데 말이 끝나기도 전에 밖으로 나갔답니다. 혹시 몰라서 뒤쫓을 사람을 보내셨답니다. 다만 따라잡을 수 있을지 없을지 모를 일입니다.”

복백은 매우 상세히 말했다. 매우 걱정이 되었다. 소 사야는 원래 허약한 데다가 외출한 적이 없었다.

“따라잡을 수 있을지 없을지는 소 사야가 잡힐 생각이 있는지 아닌지에 달렸겠지.”

영원은 한참 만에 나직이 말하고는 다시 잠시 침묵했다.

“최신에게 분부해서……. 됐다. 찾아올 때까지 기다리자.”

“소 사야의 움직임을 유의하시라고 후야가 당부하셨습니다.”

복백이 한숨을 내쉬었다. 소 사야가 나온 이상 다시는 돌아가지 않을 것만 같았다. 영원도 그렇게 생각했다. 뜨락 문 앞에 서 있는데 바람이 휘잉 불어왔다. 등 뒤가 서늘해지는 기분이었다.

소 사야가 떠났다. 그럼 영씨 가문은…….

영씨 가문은 실력으로 세운 가문이다!

영원은 무심결에 등을 꼿꼿이 세웠다.

“복백, 자네가 직접 최신에게 가서 전해. 최신 혼자 소 사야의 행방을 유의하고, 아랫사람에게 시킬 것 없다고.”

“예.”

복백은 직접 소식을 전하러 나갔다.

이동이 보록궁으로 들어가서 막 뜨락 문 앞에 도착했을 때 맞은편에서 오황자가 품에 서책과 두루마리를 끌어안고 문턱을 넘어 나왔다.

이동은 서둘러 옆으로 비켜서서 예를 갖췄다. 고개를 든 오황자의 울상이 금세 햇빛처럼 찬란해졌다.

“누이!”

“글공부 다 끝나셨어요?”

이동은 오황자가 품에 안은 서책과 두루마리를 힐끔 보고는 무심결에 뜨락 안을 바라봤다. 따라 나오는 사환이 없었다.

“사환은요?”

“고모님이 사환을 이 문 안으로 들이지 않으신다.”

오황자는 아마 여태껏 자신이 직접 무언가를 들어 본 적이 없을 것이다. 이동은 물건이 떨어질 것 같아서 서둘러 다가가 두루마리와 서책을 정리해서 다시 품에 안겨 주었다.

“이렇게 안으면 떨어지지 않아요. 다음엔 책보에 담으세요. 걸쳐 매면 돼요.”

“책보가 무엇이지? 누이 집에 있나?”

오황자가 올려다보며 물었다.

“있어요. 이따 보내드릴게요.”

“고맙다. 다음에 다시 이야기하자. 얼른 돌아가서 글공부해야 한다. 이것 좀 봐라. 이 서책 세 권, 다 읽어야 한다. 그리고 이것도. 고모님 말씀이, 설사 다 외우진 못하더라도 고모님이 위에 문장을 말씀하시면 아래 문장을 답할 수 있어야 한단다. 돌아가서 글공부해야겠다.”

오황자는 울상을 지은 채 품에 안은 물건을 꼭 끌어안고서 한숨을 내쉬었다.

이동은 오황자가 작은 걸음으로 보록궁 대문을 나서는 걸 지켜봤다. 위봉낭과 내시들이 다가와서 오황자를 에워싸는 걸 보고서야 돌아서 뜨락 안으로 들어갔다.

복안 장공주는 기분이 꽤 좋아 보였다.

“소오를 만났어?”

“예.”

이동은 두봉을 벗고 장공주 맞은편에 앉았다.

“왜? 힘들다고 하소연하든?”

“그건 아니고요. 서책과 두루마리를 엉망으로 안고 가길래, 나중에 책보를 보내드린다고 했어요.”

이동은 자기 차를 내리며 말했다.

“열 살 다 되어가는 아이가 이것도 모르고 저것도 모르고. 어미가 어떻게 가르친 건지 모르겠어. 안 그래도 아둔한데, 제대로 가르치지도 않았으니. 정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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