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60화: 보이지 않는 밝은 달
영원이 진지한 얼굴로 이동을 빤히 봤다. 이동은 고개를 삐딱하게 그를 바라보면서 그와 마찬가지로 진지하게 건의했다.
“어서 혼인하세요. 그래야 매일 이렇게 어미 없는 자식처럼 여기저기 하소연하지 않죠.”
“나도 그러고 싶지! 아침에도 생각하고, 저녁에도 생각하고. 하지만 다 괜한 생각인걸요. 나 혼자 허튼 생각만 하는걸요. 휴!”
이동의 그 말에 영원은 불만이 터졌다.
“나 혼자 생각하면 뭐 합니까? 아이고, 내 팔자야!”
“어느 댁 낭자가 마음에 들었는데요?”
영원의 말에 속뜻이 있는 것 같다는 생각에 이동이 답답해하며 물었다.
“그건 아니고.”
영원은 길게 한숨을 내쉬면서 기운 빠진 얼굴로 몸까지 힘이 빠진 듯 축 처졌다.
“그냥 생각만 한 겁니다. 휴, 내 팔자야!”
영원이 또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정말로 제 팔자가 고되다고 생각했다.
이동은 답답한 듯이 그를 바라보다가 잠시 후 시선을 떼고 웃음을 터트렸다.
“왜 웃습니까?”
영원이 몸을 앞으로 숙이며 이동을 빤히 보고 물었다.
“당신 때문에 웃어요.”
이동은 생각하니 또 웃음이 나왔다.
“우리 찬모, 소유가 자주 밖에 재료를 사러 가요. 골목골목 돌아다니는데 요즘은 경성 낭자들이 가장 바라는 신랑감 이야기가 자주 들린대요. 그게 누구게요? 춘시 방이 붙은 다음엔 경성 낭자들이 가장 혼인하고 싶은 사람은 여염이 됐어요. 그 전엔 당신이었거든요.”
이동은 어깨를 들썩이며 웃었다.
“칠야가 혼사 때문에 신세타령하는 걸 낭자들이 알면……. 정말이지, 다들 울다가 기절하겠네요.”
“온 경성의 어린 낭자는 그저 내 생김새만 보고 그러는걸요.”
영원이 손가락 하나를 세워 귀밑머리를 슬쩍 넘기면서 교만한 얼굴로 턱을 살짝 치켜들었다. 이동은 눈이 휘둥그레졌다가 곧 팔걸이를 붙잡고 웃어댔다. 얼마나 요염한 손짓, 턱짓인지.
“웃기는! 그 낭자들은 다 내 생김새만 보고 그런다는 걸, 나도 압니다. 내가 여인처럼 꾸미면 날 따라잡을 여인도 몇 없습니다. 또 하나, 나는 황후의 아우, 정북후부 소공자입니다. 그 낭자들이 생각한 건 결국 이 두 가지입니다. 시시하죠.”
영원은 크게 웃는 이동을 향해 연신 코웃음 쳤다. 이동은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맞는 말이에요. 당신은 시시하다지만, 사내도 그 두 가지를 보고 혼담을 넣는 것 아닌가요? 매파들이 혼담을 넣을 때도 걸맞은 집안이냐 아니냐부터 따져요. 이 집 가문은 어떤지, 조부, 조상이 무슨 관직에 있었는지, 저 집은 또 어떤지. 가문이 걸맞으면 이제 혼수를 보죠. 이 집에서는 어떤 빙례(聘禮: 신랑 측에서 신부 측에 주는 돈, 예물)를 주는지, 저 집에서는 혼수를 얼마나 내놓을 건지. 제대로 이야기 끝낼 뿐만 아니라 글로도 남기죠. 가문, 예물, 혼수, 이 과정을 다 넘기고 선을 볼 때 사내 측에서 고개를 끄덕이지 않는 게 과연 상대의 품행이 문제일까요? 마음이 안 맞아서일까요? 탁자 사이에 두고 많은 이가 보는 앞에서 만나서 품행이 어떤지, 마음이 맞는지 어떻게 바로 알겠어요.”
“난 당신이 말한 그런 속세 필부가 아닙니다. 내가 혼인할 때는 매파도 필요 없고, 가문, 조상을 볼 필요도 없어요. 난 단 하나, 사람을 봅니다. 선볼 때 보는 그런 거 말고요. 난 이야기 나눠 보고 시간을 보내봐야 합니다. 반드시 말이 통하고 같이 있을 때 즐거워야 해요. 그것만 맞으면 다른 건 다 따지지 않습니다.”
드물게 진지하고 엄숙한 영원의 모습에 이동은 웃고 고개를 끄덕이며 이야기를 들었다.
“맞아요. 당신은 확실히 남달라요. 보기 드물죠, 드물어요. 안타깝네요. 경성 낭자들이 당신이 이렇게 속되지 않은 남다른 점이 있다는 걸 알면 좋을 텐데. 승상부 공자인 여 공자가 장원 급제까지 했어도 분명 당신을 이기지 못하겠어요. 당신은 반드시 당신처럼 속되지 않은 남다른 낭자를 만나야 해요.”
“됐습니다. 그냥 소처럼 아둔한 여인을 고르는 게 좋겠습니다!”
영원이 이를 갈며 대답하자 이동이 더 배를 잡고 웃었다.
“그럼 당신이 억울하잖아요. 하긴, 당신처럼 똑똑하고, 또 자기가 똑똑한 걸 아는 사람은 이 세상 어느 여인을 봐도 소처럼 아둔해 보이겠네요. 그렇다면 소처럼 아둔한 여인하고 혼인해야 한다는 말도 맞네요.”
“휴. 내 마음은 밝은 달을 향해 있는데, 밝은 달은 도랑……. 크흠, 이 문장은 듣기 좋지 않군. 밝은 달이 보이지 않으면 내가 밝은 달이 되리. 휴, 인생은 십중팔구가 뜻대로 되지 않는다더니.”
(※내 마음은 밝은 달을 향해 있건만, 어찌하여 밝은 달은 도랑을 비추는가. 중국 원말 명초의 희곡작가 고명의 희곡 《비파기琵琶記》 중에서)
영원은 울적해져서 허튼소리를 하며 탄식했다.
“탄식하지 말아요. 늦었어요. 돌아가세요. 나도 쉬어야겠어요. 내일도 일이 많아요.”
이동은 구석에 물시계를 힐끔 보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럽시다.”
영원은 미적미적 일어나서 발을 구르다가 갑자기 ‘무릎이 아직 아픈 걸’ 떠올리고는 들어 올리던 다리를 얼른 살짝 내려놓았다. 그러고는 허리를 숙이고 무릎을 쓰다듬으며 눈썹을 찌푸리고 앓는 소리를 냈다.
“내 다리!”
“수련에게 배웅하라고 할게요.”
영원이 진짜로 아픈 듯하자, 이동은 눈살을 찌푸리면서 수련을 불렀다. 영원은 또 앓는 소리를 내다가 얼른 상체를 세우며 손사래 쳤다.
“됐습니다. 누가 보면 어쩌려고요. 참아 보겠습니다. 괜찮아요. 이게 뭐라고. 조금 다친 겁니다. 홀로 밖에 있는 몸인데, 심하게 다쳤대도 혼자 견뎌야지, 암.”
이동은 잠깐 생각하다가 고개를 끄덕이고는 수련을 바라봤다.
“후각문까지 모셔드려. 그럼 조심히 가세요. 돌아가서 시녀에게 잘 문질러 달라고 하고요.”
“난 시녀 없습니다.”
영원이 엄숙한 얼굴로 돌아보며 해명했다.
“내 시중은 다 대영과 사환들이 듭니다. 그러니까 대영에게 잘 문질러 달라고 하라고 해야 옳습니다. 그런데 대영은 아귀힘도 세고 사람도 거칠어서, 휴, 나도 참 불쌍하지!”
영원은 온몸으로 슬픔과 가련함을 표현했다. 아닌 게 아니라 진짜로 조금은 마음 아프고 기운 빠지고 슬펐다.
“그래요. 그럼.”
이동은 못 말린다는 듯 말꼬리를 늘였다.
“그럼 대영에게 잘 문질러 달라고 하세요. 됐어요. 어서 가세요!”
“휴. 참으로 불쌍한 나는…….”
영원은 앓는 소리 하며 길게 한숨을 내쉬고 뒷짐을 진 채 허리를 구부리고 다리를 질질 끌며 각문으로 향했다.
이동의 거처와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세운 높은 난각 안.
문 이야와 이신이 나란히 창가에 서서 창문 너머로, 난각 밖 등불이 비친 곳을 지나가는 영원을 바라봤다.
이신은 안색이 매우 안 좋았고, 문 이야는 숨을 죽이고 바라보다가 영원이 사라진 후에도 한참 있다가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우리 화원이 작지만 저분 발걸음도 빨라서 화원에서 나가면 들리지 않을 거네.”
이신은 창을 닫고 불씨를 꺼내 등을 켰다. 문 이야는 자리에 앉아서 이신의 안색을 살피다가 웃음 지었다.
“표정 좀 보게. 어찌? 아직도 언짢은가?”
“그럼 기뻐할 일입니까?”
이신이 퉁명스럽게 되물었다.
“당연히 기뻐해야지!”
문 이야가 눈썹을 치켜올렸다. 정말로 매우 기쁜 듯했다.
“흥!”
이신의 콧소리에는 분노가 가득했다.
“어차피 이야의 누이가 아니라는 것이지요? 주인과 가족은 당연히 다를 수밖에요!”
“그런 말은 내 앞에서나 하게. 다른 막료였다면……. 흠, 다른 막료 앞이었다면 자네 말이 맞긴 하겠군.”
문 이야는 다리를 흔들면서 변함없이 싱글벙글 웃었다.
“어찌? 자네 누이가 이 집에서 평생 홀로 갇혀 살았으면 좋겠나?”
“이야, 영원이 어떤 사람입니까? 가문, 생김새, 재능, 어느 것 하나 최고로 손꼽히지 않는 것이 있습니까? 동저아가 어떻다는 게 아니라, 이게……. 정말로 동저아를 마음에 두었다면 당당하게 정식으로 혼담을 넣어야지요. 이렇게 밤마다 담을 넘을 게 아니라! 동저아 줄을 잡고 장공주에게 잘 보여서 장공주 배에 타려고 이러는 겁니다!”
이신은 말을 할수록 화가 났다.
문 이야는 이신을 흘겨보다가 마구 흔들어대던 오래된 쥘부채를 접어서 이신의 어깨를 쿡쿡 찔렀다.
“자네 좀 보게. 태산처럼 진중해야 한다고, 내가 몇 번 말했나. 태산처럼 진중한 것이 무엇인지 모르는가! 자네 꼴 좀 보게!”
“집안일을 어떻게 태산처럼 진중하게 대합니까.”
이신이 문 이야의 말을 되받아쳤다. 문 이야는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그 말도 맞네. 그럼 말해 보게. 영원이 정말로 혼담을 넣으러 오면, 허락할 것이지?”
“어!”
이신이 멈칫했다. 생각하지도 않은 일이었다. 영원이 정말로 혼담을 넣으러 온다? 뭔가 노리는 게 있을지도 모르는데?
“누이를 노리고 온다고 생각하는 것이지? 그렇지?”
문 이야가 대신 대답하자 이신이 문 이야를 흘겨봤다.
“그럼 아닙니까?”
“맞긴 하지.”
문 이야가 피식 웃었다.
“그럼 장 태태는?”
이신은 잠시 생각해 봤다. 어쩐지 자신이 없었다. 요즘 갈수록 이 집안에서 생각이 가장 짧은 사람이 자기라는 생각이 들었다.
“장 태태는 분명 ‘이 일은 동저아의 생각을 따른다.’고 하실 걸세.”
문 이야는 이신을 난처하게 하지 않고 쥘부채를 두드리며 단호하게 말해주었다. 이신도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지. 어머니는 분명 그렇게 말씀하시겠지.
“그럼 대낭자는?”
문 이야가 다시 물었다. 이신은 더 자신이 없어졌다. 동저아와 내원, 외원으로 떨어져서 얼굴을 볼 기회가 많지도 않고 이런 이야기를 할 기회는 더더욱 없다. 자신이 어찌 알겠나.
“적어도 지금은, 분명 단칼에 거절하겠지!”
문 이야는 이신의 대답을 아예 기대하지 않는 듯했다.
“그래서 영 칠야가 혼담을 넣으러 오지 않는걸세. 자신이 없으니까. 혼담을 넣으면 오히려 낭자의 경계심만 불러일으킬 테니까.”
이신이 켁 소리를 냈다.
이야, 지금 누구 편이십니까?
“영원이 진심이라고 그렇게 확신하십니까? 이야, 너무 좋은 쪽으로 생각하시는 것 아닙니까!”
이신은 문 이야의 자신감에 답답해졌고 문 이야는 한숨을 내쉬었다.
“아이고! 사람 마음을 쥐락펴락하는 면에서 자네는 정말 누이보다 보통 뒤떨어진 게 아니군!”
문 이야는 일단 이신부터 무시했다. 이신은 할 말을 잃고 하늘을 올려다봤다. 문 이야는 툭 하면 그가 누이보다 못하다고 탄식했다.
“영 칠야가 처음에 담을 넘어왔을 때…….”
문 이야는 멈칫하고 얼른 덧붙였다.
“영 칠야가 담 넘어온 걸 내가 알게 된 그 날부터, 북부에 있는 장궤들에게 사람을 보내 영 칠야에 대해 수소문했네. 대소사를 막론하고, 진위를 막론하고 조금이라도 상관있는 건 몽땅 낱낱이 알아내라고 했지. 반년 동안 일고여덟 번은 보고가 들어왔네.”
이신이 눈살을 찌푸리고 바라보자 문 이야가 실실 웃으며 말을 이었다.
“자네는 춘시 중이라 바빴잖는가. 태태는 알고 계셨네. 수소문했더니, 정말로 꽤 많은 소식이 들어왔지. 그 소식을 토대로 영 칠야라는 사람을 알게 되었지. 영 칠야는 매우 교만하고 수단을 가리지 않은 것 같아도, 사실 격식을 가장 따지는 사람이네. 곁에 있는 위봉낭은 천하에 보기 드문 고수일세. 그런 사람이 허리를 숙이고 노비 노릇을 하지. 바로 영 칠야의 인품에 허리를 숙인 걸세. 아녀자와 아이를 괴롭히지 않는다고 하더니, 정말로 그런 적이 없네.”
이신은 말없이 침묵했다. 영원은 학식 없고 무지하고 포악한 무뢰배였다. 그러니 싫어해야 마땅한 사람인데 조금도 싫지 않았다. 자기뿐만 아니라, 계 대랑과 여 대랑도 그를 싫어하지 않았다. 오히려 꽤 좋게 생각한다.
“영 칠야가 장공주와 손잡고 싶어 하는 건 맞네. 다만 이익으로 유혹하고 자신의 위세로 핍박할 걸세. 대낭자의 귓속말 같은 건 바라지 않아. 절대로. 첫째, 대낭자는 그런 방법을 경멸하고, 둘째, 솔직히 말해서, 통하지도 않네. 대낭자의 마음가짐과 수행으로 그에게 현혹되거나 이용당할 리도 없고, 그를 위한 발판이 될 리도 없네. 장공주 쪽은 더 말할 것도 없지. 얄미울 정도로 영리한 사람인걸.”
문 이야는 소유가 전한 말을 떠올리고 연신 한숨을 내쉬었다.
사람이 너무 영리하면 미움받기 마련이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