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59화: 다리가 아파
이동의 작은 뜨락으로 들어간 영원은 몇 걸음 만에 회랑 계단으로 훌쩍 뛰어올라서 두 걸음 걷더니 주춤주춤 앞으로 걸었다. 두 다리가 왠지 불편해 보였다.
노련하게 다가가 창문을 두드리자 수련이 창을 열고 영원을 보고는 ‘크흠!’ 소리를 내더니 안을 돌아보며 고했다.
“또 오셨어요!”
영원도 창밖에서 소리를 질렀다.
또 왔다니! 무슨 말을 그렇게 해! 됐다. 대인배는 대인배의 아량이 있어야지.
영원은 뒷짐을 지고 눈에 띄게 다리를 절면서 천천히 서쪽 곁채로 다가가서 체면도 차리지 않고 직접 문을 밀고 안으로 들어갔다.
상방에서 곁채로 향하는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오던 이동은 영원이 다리를 절며 매우 힘겹게 의자로 다가가 앉는 걸 보고는 의아해하며 물었다.
“다리는 어쩌다가 다쳤어요?”
영원이 무릎을 문지르며 대답했다.
“다친 게 아닙니다. 무릎을 꿇어서요. 연고 있습니까? 어혈을 제거해서 혈행을 뚫는 거면 뭐든 됩니다……. 아니다, 됐다. 감싸고 있게 탕파자(湯婆子: 뜨거운 물을 넣어서 몸을 따뜻하게 하는 기구. 온열 주머니) 하나 줘요. 약은 돌아가서 바르면 됩니다.”
연고는 안 되지. 무릎에 멍이 안 들고 멀쩡하면 말 꺼내기 쉽지 않지.
이동은 수련에게 분부하고 영원을 바라보며 물었다.
“어디에서 벌을 받았길래요. 또 황상이 벌을 주셨나요? 아니면 태자?”
이동은 그가 오황자를 데리고 계가에 간 일을 떠올렸다. 그 일로 언짢아하고 화를 낼 만한 사람이라면 그 두 사람을 가장 먼저 꼽아야 하니까.
“장공주입니다.”
영원은 아픈 듯이 두 손으로 무릎을 문질렀고 이동은 아연실색했다.
“장공주요?”
“네, 내가 소오를 잘못 가르쳤다고 말입니다.”
영원이 연달아 한숨을 내쉬었다.
“뭘 잘못 가르쳤기에요?”
이동은 무슨 일이 있었기에 영원이 오황자를 잘못 가르쳤다는 소리를 들은 것인지 짐작이 가지 않았다. 영원이라면 오황자를 최고로 가르치려고 할 텐데, 잘못 가르쳤다니 무슨 일일까.
“내가 압니까? 불려갔더니 한마디도 없이 뜨락 문 앞에서 무릎 꿇고 반성하라고 하지 않겠습니까. 무슨 잘못을 했는지도 모르는데 반성을 어떻게 합니까?”
영원의 얼굴에 억울함이 바다보다 더 깊어 보였다.
“정말 모른다고요?”
이동은 그 말을 그다지 믿지 않았다. 모른다는 건 말이 안 된다. 모른다는 건 말하고 싶지 않은 것이다.
“장공주의 속셈이 얼마나 깊습니까. 내가 어찌 알아요……. 내 말은, 내가 뭘 잘못했는지 알려주지도 않았다는 겁니다. 얼굴도 못 봤어요. 시녀를 시켜서 한마디 툭, 소오를 잘못 가르쳐 놨으니 무릎 꿇고 제대로 반성하랍니다. 이것저것 반성하긴 했습니다. 다만 제대로 반성한 건 맞는지 알게 뭡니까.”
영원은 당당하게 말했지만, 이동은 그 당당한 태도 가운데 뜨끔함을 감지했다.
“그럼 어떤 점을 반성했는지 말해 봐요.”
이동이 가차 없이 말했다. 영원은 어색하게 몸을 꿈틀거렸다.
“잘못한 게 있어야지요. 이리저리 생각해 보니, 소오를 계가에 데리고 갔다가 돌아와서 바로 벌을 받았잖습니까. 그럼 분명 그 일 때문이겠지. 그렇지요?”
영원은 말을 멈추고 이동을 바라봤다. 이동은 담담하게 차를 홀짝이며 계속해 보라는 듯 눈짓했다.
“소오를 잘못 가르쳤다는 말은 계가에 데리고 간 건 아닐 겁니다. 계가에 데리고 간 거였다면 잘못 가르친 게 아니라 잘못 물들였다고 했겠지. 그러니 가르친 거라면…….”
영원이 말꼬리를 길게 늘였다.
“가기 전에 한마디 하긴 했어요. 계가 문회엔 문인들이 가득할 거고 문인들은 서로 무시하면서 남이 칭찬하는 건 좋아하니까, 문인을 상대하려면 칭찬해야 한다고 말했지요. 미친 듯이 칭찬해야 한다. 마구마구 칭찬해야 한다. 이 말도 틀리지 않았잖습니까. 그렇지요?”
이동은 ‘아이고’ 소리를 내고는 무슨 말을 해야 좋을지 몰라 입을 벌리고 있다가 한참 만에 겨우 한마디 했다.
“그렇게 가르치면 어떡해요. 오가아가…….”
이동은 나중에 오가아가 정말 보위에 오르기라도 하면, 이렇게 가르쳤다가 서생을 어떻게 생각하겠냐는 말을 이을 수가 없었다.
“무슨 말인지 압니다. 하지만 내가 한 말, 듣기에 거북하겠지만 모두 사실입니다. 사실을 소오에게 말해주는 사람도 있어야지요.”
영원은 매우 진지했다.
“조금은 일리 있네요. 하지만 첫째, 소오는 아직 어려요. 아무리 철이 들었대도 아직 어린애예요. 둘째, 당신이 이렇게 가르치면, 누가 제대로 가르쳐요? 한림들이? 황후마마께서요?”
“전에는 없었지만, 이젠 있습니다.”
영원은 다리를 꼬고 보란 듯이 흔들기 시작하다가 얼른 다시 내려놓았다. 나 지금 다리 아픈 사람이지!
“장공주가 오늘부터 소오더러 매일 반 시진씩 거처로 오라고 했습니다. 직접 가르치신다고요.”
“속셈이 그거였군요?”
이동이 반사적으로 툭 내뱉었다.
“제가 감히요? 뜻밖의 수확입니다.”
영원은 태연하게 대답하고는 헤헤 웃으며 이동 쪽으로 몸을 기울이고 속삭였다.
“장공주의 약점이 뭔지 압니까?”
이동이 아무런 말 없이 흘겨보자 영원이 또 헤헤 웃었다.
“임가를 끼고 돈다는 거. 안 봤으면 모를까, 본 이상 남이 임가 사람을 다치게 하는 걸 보고만 있진 않아요. 소오를 이상한 쪽으로 가르치는 건 두고 못 보죠. 사실 내가 소오에게 그렇게 말한 건 소오에겐 좋은 겁니다. 장점밖에 없어요.”
이동은 한참 만에 천천히 한숨을 내쉬었다. 어찌 감히 속셈을 부리겠냐고 하지만, 그에게 이 세상에 ‘감히’라고 할 만한 일이 뭐가 있을까. 이번에도 속셈을 부려서 원하는 걸 얻지 않았나. 그의 말이 맞다. 몰랐으면 모를까, 안 이상 장공주는 누군가 임가 자손을 다치게 하는 걸 가만히 보고 있을 사람이 아니었다.
“이 정도 꿇은 거로 끝나다니, 장공주가 요즘 자비로워지셨네요.”
이동이 영원 무릎 위 탕파자를 바라보며 하는 말에 영원이 얼른 괴로움을 호소했다.
“족히 두 시진입니다! 감각이 없을 정도로 꿇고 있었는걸요. 말도 탈 수 없어서 마차를 타고 왔습니다. 대영이 오는 내내 주물렀다고요. 두 시진이요!”
영원이 손가락 두 개를 치켜들었다.
“그 큰 이득을 봤잖아요. 그러니까 ‘두 시진밖에’라고 해야죠.”
“그건 그렇지. 아 참, 강가에서 벌어진 일, 들었습니까?”
영원은 너무나 자연스럽게 화제를 돌렸다.
“무슨 일이요?”
“모를 줄 알았지!”
이동이 멈칫하며 묻는 말에 영원은 신이 나서 팔걸이를 두드리며 강녕과 강완이 어떻게 조롱당했는지, 강녕이 어떻게 해 이낭자를 때렸는지, 그리고 강환장이 어떻게 모질게 강녕을 채찍질했는지, 해 상서부에 사과는 어떻게 하러 갔는지에 대해서 다채롭게 이야기해 주었다.
“강가 이낭자가 꽤 심하게 다쳤는데 아직 의원을 부르지도 않았어요. 연약한 어린 낭자가 그렇게 다쳤으니……. 뭐 그렇다고 정말 심하게 다친 건 아닐 겁니다. 강환장은 기운이 없으니 채찍질해댔어도 그냥 겉상처겠지. 문제는 흉이 남을 거라는 겁니다. 쯧, 강환장, 어떻게 그렇게 모진답니까. 자기 누이에게 정말로 무슨 일이라도 나면 어떻게 될지 생각도 안 하는지. 제 누이에게 무슨 일이 생기면 그것도 결국 해 이낭자 책임을 벗지 못하게 됩니다. 해 이낭자가 강가를 군색하다고 놀리고, 남의 잘못을 들쑤시기는 했어요. 잘한 일은 아닙니다. 하지만 큰일은 아니지요. 젊을 때 몹쓸 행동 몇 번 안 하는 사람이 어디에 있습니까. 지나가면 다 잊습니다. 하지만 지금 보세요, 이런 일을 어떻게 잊습니까. 강 이낭자가 피를 철철 흘렸는데, 이런 일을 어떻게 그냥 넘기냐고요. 못 넘기지!”
강가 이야기가 나오면 영원은 싱글벙글 희색이 감돌았다.
이동은 강완과 강녕이 예전에 했던 짓을 생각하면 강녕이 해 이낭자를 때린 일이 조금도 뜻밖으로 느껴지지 않았다. 하지만 강환장이 강녕을 피범벅으로 때린 일은 매우 의외였다. 예전에 그는 언제나 그녀의 출신, 품행을 타박하고 사람은 덕으로 복종시켜야 하는데 그녀는 그러지 못한다고 나무랐었다.
영원은 싱글벙글 이야기하면서도 수시로 이동의 표정을 살폈고 이동이 살짝 넋이 나가서 안색이 갈수록 어두워지는 걸 보고 얼른 화제를 돌렸다.
“나도 참. 우리 둘이 이야기하는데 강가 이야기는 왜 해. ‘강’자 만 나와도 김빠지는 것을. 내 잘못입니다. 그만할게요. 다른 이야기 합시다. 참, 경성엔 봄나들이가 유행이라지? 아직 성 밖으로 봄나들이 가지 않았지요? 어디로 갈 계획입니까? 예전엔 어디로 갔었죠?”
“올해 그럴 겨를이 어디에 있어요. 계가 다음엔 우리가 연회를 열어야 하는 걸요. 장공주가 오신대서 할 일이 태산이에요. 그럴 겨를이 어디에 있어요.”
이동은 예전의 암울한 것들을 털어내려는 듯 무심결에 손을 휘저었다.
“날짜는 정했나? 내게도 꼭 청첩을 보내요. 청첩이 없어도 꼭 올 거지만, 그래도 청첩이 있으면 보기 좋지.”
영원은 이가 연회 이야기를 늘어놓기 시작했다.
“이 저택의 화원이 작은 편이니 잘 준비해야 할 겁니다. 아니면 인사하려고 고개 숙이다가 머리를 박아요.”
사실 준비는 거의 다 끝났다. 이런 문회니 꽃 연회는 하도 자주 열어서 익숙했다. 인사하려고 고개 숙이다가 머리를 박는다는 영원의 말에 상의하려던 큰일이 떠올랐다.
“있잖아요…….”
이동은 묵칠이 차와 간식을 몰래 가져가려다가 탕 오낭자와 부딪쳐서 간식으로 머리를 두들겨 맞은 일을 대충 이야기하고는 웃으며 영원을 바라봤다.
“탕 오낭자는 마음씨 곱고 성격 좋은 사람이에요. 천진난만하고 또 영리하고. 두 사람이 꽤 어울리는 것 같아요. 둘이 서로를 마음에 들어할지는 모르겠지만.”
영원이 빠르게 대답했다.
“그야 쉽지! 기회를 만들어서 둘이 이야기하게 해주면 맞는지 아닌지 알 수 있지 않습니까. 내가 준비하지요. 봄나들이 한 번 합시다. 당신이 탕 오낭자를 데리고 가고 나는 소칠을 데리고 가고. 쉽지, 쉬워!”
영원은 무슨 생각을 했는지 활짝 웃었다.
“그런데 가문이 너무 차이 나요. 탕가는 또 고가의 사돈이고. 그냥 떠오르는 대로 해본 말이에요.”
두 가문의 차이를 떠올린 이동은 마음이 무거워졌다. 전 노부인의 마음에 든 상대는 명가와 같은 오랜 서생 명문가인데, 그런 전 노부인과 묵 승상의 눈에 탕가가 들 리가 있을까.
“그건 걱정하지 말고, 내게 맡겨요!”
영원이 가슴을 두드리며 호언장담했다.
“두 사람만 마음에 들어 하면 다른 게 무슨 문젤까. 내겐 아무것도 아닙니다.”
이동은 잠시 그를 노려보다가 상대하지 않고 고개를 돌렸다.
말을 이렇게 하는 사람치고 믿을 만한 사람을 못 봤지!
“허허, 믿으라니까. 들어 봐요…….”
영원은 이동이 상대하지 않는 걸 보고 설명하려는데 이동이 손사래 쳤다.
“아직 그런 이야기할 때가 아니에요.”
“흠, 그러지. 그럼 봄나들이 계획이나 세웁시다. 멀리 갈 것도 없고, 내가 내일 바로 적당한…….”
영원이 재빨리 말을 돌리자 이동이 다시 무질렀다.
“그 이야기는 더더욱 할 때가 아니고요. 당장 해야 하는 일도 아니고요. 우리 집 연회가 끝나고 다시 이야기해요.”
“그건 그렇지. 그게 제일 중요한 일이지. 장공주가 온다면 경성에 노부인, 부인, 거동할 수 있는 사람은 분명 다 올 테지. 당신이 고생해야겠군요. 고생해요.”
영원은 진심으로 우러나서 그렇게 말했다. 하지만 이동은 하마터면 켁 소리를 낼 뻔했다. 우리 집 일인데, 자기가 무슨 상관이라고? 고생하라는 말을 왜 자기가 해? 정말 갈수록 엉뚱해진다니까!
“낭자가 지쳐서 몸져눕기라도 하면, 내가…… 사는 게 재미없어지니까 그렇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