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58화: 벌서기 전문
“틀렸다. 궁에 들어가면 반드시 적게 듣고 적게 보고 말은 하지 말아야 한다.”
문 이야가 진지하게 당부했다. 두 사람 모두 노비였다. 신분도 비천하고 목숨도 비천한 노비지만 일이 생기면 안 된다.
녹매와 소유가 고개를 끄덕였다. 문 이야가 끼얹은 찬물에 흥분은 사라지고 아까보다 긴장도 풀린 것 같았다.
마차는 대교가 몰았다. 보록궁에 자주 가 본 대교는 능숙하게 보록궁 문 앞으로 마차를 몰았다. 도착해서 발 받침대를 놓아주고는 두 사람이 마차에서 내리자 나지막이 당부했다.
“내가 여기에서 기다릴게요. 나오면 바로 보이도록요. 걱정하지 말아요. 무서워하지도 말고.”
두 사람은 감사 인사하고 돌아서서 안으로 향했다. 소유는 난생처음 황궁에 들어가는 것이라 긴장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너무 긴장해서 걸음걸이가 다 어색할 지경이었다.
이동과 두어 번 궁에 온 적 있는 녹매는 소유가 너무 긴장한 것 같자 다가가 잡아주며 나직이 소개했다.
“저 앞에 보이는 둥근 문을 들어가면 장공주께서 사는 곳이에요. 담장 너머는 보록궁 정전인가 뭔가라던데, 듣자 하니 지금은 사람이 살지 않는대요.”
소유는 녹매가 가리키는 쪽을 바라보고는 또 좌우를 둘러봤다. 원래 배포가 큰 사람인지라 한순간 긴장이 좀 풀렸다. 한시름 놓고 나니 문 이야가 했던 말이 곧바로 떠올랐다.
“쉿, 이야가 그랬잖아. 적게 듣고 적게 보고 말하지 말라고!”
녹매는 눈을 까뒤집을 뻔했다. 너무 긴장했길래 긴장 풀라고 몇 마디 한 걸 가지고!
이야기 나누는 사이 두 사람은 둥근 문 앞에 당도했다. 곧바로 들어가면 되는지, 아니면 이름을 보고하거나 해야 하는지 주춤하고 있는데 녹운이 서쪽 회랑 아래서 살짝 몸을 내밀고 들어오라는 듯 손짓했다.
녹매는 소유를 안으로 끌고 들어가며 거의 들리지 않을 목소리로 소개했다.
“장공주를 모시는 대시녀예요. 녹운이라고.”
녹운은 회랑 아래 서 있다가 두 사람이 다가가자 살짝 허리를 숙였다.
“두 분 수고해 주세요. 이쪽으로 오세요.”
녹매와 소유 모두 영리한 사람이었다. 두 사람은 녹운보다 먼저 허리를 숙이고 무릎을 구부려 예를 갖췄고 일어나서도 고개를 숙이고 공손하고 단정하게 녹운의 뒤를 따라 맨 뒤쪽에 있는 주방으로 들어갔다.
복안 장공주는 서쪽 곁채 화항 위에 앉아 새로 단 은홍색 그물 너머로 녹매와 소유가 그쪽으로 가는 걸 지켜보다가 차를 홀짝이며 시녀에게 분부했다.
“연경궁에 다녀오렴. 오가아가 저녁 먹었는지 물어봐. 안 먹었다고 하면, 이가의 찬모가 야채 교자를 만들 건데 와서 먹을 건지도 물어보고.”
시녀가 공손히 나간 지 그리 오래 지나지 않아 오황자가 시녀를 따라 서쪽 곁채로 들어왔다. 위봉낭은 뜨락 문 앞까지 배웅한 뒤 한 발짝도 들어오지 않고 줄레줄레 궁문 쪽으로 물러났다. 그녀는 한 바퀴 휘이 돌다가 마침 말을 빗기고 마차를 정리하는 대교를 발견하고는 어슬렁어슬렁 다가가 수다를 떨었다.
복안 장공주의 주방은 서쪽 곁채보다 훨씬 넓고 마당에 깔린 청석 벽돌까지 먼지 한 톨 없이 깨끗했다. 주방 안에 모든 것이 갖춰져 있고, 대여섯 가지 야채를 야들야들한 부분만 남겨서 깨끗이 씻어둔 상태였다. 소유와 녹매는 여러 번 손을 씻은 다음 얼른 소를 만들고 밀가루를 반죽해 교자를 빚기 시작했다.
요리사 몇 명이 허리를 숙이고 옆에 서서 매우 유심히 지켜봤다. 그런데 잠시도 눈을 떼지 않고 지켜봐도 색다른 점이 없었다. 아무래도 소를 만들 때 넣는 조미료가 비법인 것 같았다. 요리사들은 머뭇거리다가 한참 만에 교자를 똑같이 만들 수 있을지 시도해 보고 싶다고, 익히지 않은 소를 조금 남겨두고 갈 순 없는지 부탁했다.
소유는 얼떨떨해하다가 뒤늦게 반응했다. 이게 뭐 부탁까지 할 일이라고. 소가 이렇게 많은데. 통이 큰 소유는 그 자리에서 큰 그릇으로 소를 덜어주었다.
소유가 돌아간 후, 요리사들은 밤새 바삐 움직인 끝에 소유가 빚은 것과 겉으로 봐도 맛을 봐도 전혀 다르지 않은 교자를 빚어냈다. 그런데 다음 날 교자를 올렸을 때, 장공주는 한입 맛보고는 바로 역시 동동네 야채 교자가 맛있다고 탄식했다.
야채 교자는 빚는 것도 빠르고 쪄내는 것도 빨랐다.
소유와 녹매는 막 찜통에서 꺼낸 교자를 들고 서쪽 곁채로 향했다. 두 사람은 문 이야의 신신당부대로 적게 보고 적게 들으려고 가는 내내 눈길 한 번 다른 곳으로 두지 않았고 곁채에 들어가서도 오로지 탁자만 바라봤다.
“녹매 누이, 소유 누이!”
두 사람을 알아본 오황자가 기쁘게 인사했다. 녹매는 그래도 들어올 때 벌써 슬쩍 실내를 둘러보고 오황자를 발견했는데, 소유는 고지식하게 눈도 돌리지 않고 있다가 오황자가 ‘소유 누이’ 하고 부르는 소리에 너무 놀라서 하마터면 잠요(蘸料: 찍어 먹는 소스)를 쏟을 뻔했다.
복안 장공주는 그런 소유를 힐끔 보고는 뒤로 기대며 깔깔 웃었다.
“누가 뭐라고 했길래 그렇게 기겁해? 동저아는 그럴 리가 없고, 문도 그치겠지. 문도가 뭐라고 했기에?”
녹매가 입을 떼려 하자 복안 장공주가 손사래 치며 소유를 바라봤다.
“이 애에게 물었다.”
“문도가 누구입니까?”
오황자의 ‘소유 누이’ 소리에 아직도 정신을 못 차리던 소유는 장공주가 깔깔 웃어대는 바람에 혼이 쏙 빠진 상태였다. 장공주가 크게 웃으며 녹매를 가리켰다.
“그럼 너는 문도가 누군지 알아?”
“문 이야 말씀하시는 거야.”
녹매가 얼른 소유를 쿡쿡 찔렀다.
“아, 예. 이야가 적게 보고 적게 듣고 말하지 말라고 했습니다.”
소유가 얼른 대답했다.
“또?”
장공주가 빙그레 웃으며 다시 물었다.
“또…… 혹시 전에 봤던 사람이 있어도 못 본 체하라고 했습니다. 그게 누구든지요.”
차츰 혼이 돌아온 소유는 무심결에 오황자를 힐끔 봤다. 오황자는 눈을 휘둥그렇게 뜨고 눈빛을 반짝이며 녹매와 소유, 그리고 장공주를 번갈아 보고 있었다.
“나 말이냐?”
오황자가 제 코끝을 가리키며 물었다. 녹매와 소유는 서로 얼굴을 번갈아 볼 뿐, 아무도 대답하지 못했다. 이 대답을 어떻게 하나.
“됐어. 두 사람은 돌아가렴. 너희 낭자에게 내 말을 전해. 너희 둘이 일을 잘했으니 대신 오십 냥씩 상을 주라더라고 전하렴. 그리고 문도에게 전해. 쓸데없는 꼼수 쓰지 말고 그럴 여력 있으면 일이나 제대로 하라고 말이야. 다음에 또 소인배의 마음으로 쓸데없는 추측 하면 가만히 두지 않겠다고 전해!”
복안 장공주가 분부하자 녹매와 소유는 연신 대답하고 공손하게 물러났다. 마당에서 나와 마차에 올라타고 마차가 동화문을 나온 후에야 두 사람은 길게 숨을 내뱉었다. 소유가 가슴을 쓸어내렸다.
“녹매야. 우리 둘, 이 심부름 망친 거 아닐까?”
“나도 모르겠어요. 돌아가서 낭자에게 여쭤봐야겠어요. 이번 일만큼은 문 이야가 믿음직하지 않은 것 같아.”
녹매가 모르겠다는 듯이 하는 말에 소유가 연거푸 고개를 끄덕였다.
“믿음직하지 않기만 해? 문 이야 때문에 우린 생으로 파묻힐 뻔했어!”
보록궁 안, 연달아 교자 대여섯 개를 먹은 오황자는 지극히 만족한 표정이었다.
“야채 교자는 역시 소유 누이가 만든 것이 제일 맛있습니다!”
“오늘 밖에 나갔었다고?”
교자를 두 개 먹고 젓가락을 내려놓은 복안 장공주는 오황자가 웬만큼 먹은 걸 보고 그제야 물었다.
“네, 칠 외숙이 계가 문회에 데리고 갔었어요.”
“진사들의 책론, 한림원 학사들이 보여준 것이냐?”
오황자가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하자 복안 장공주가 계속 물었다. 오황자는 고개를 들고 장공주를 바라봤다.
“아닙니다. 칠 외숙이 보여줬어요. 제대로 읽고, 어느 문장을 누가 쓴 것인지, 내용이 무엇인지 잘 기억하라고 했어요. 혹시 이해하지 못해도 한림원 선생에게 물을 것 없다고 했어요. 아무에게도 묻지 말고, 일단 기억해 두었다가 나중에 그 문장을 쓴 사람을 만나면 곧바로 가르침 청하라고요.”
복안 장공주는 눈을 가늘게 떴다가 다시 제대로 떴다.
“이런 말을 다른 사람에게 말하면 안 된다고 네 외숙이 당부하진 않았고?”
오황자가 고개를 끄덕였다.
“했어요. 어머니, 고모님, 그리고 이가 누님 세 사람 말고 다른 사람에겐 아무에게도 이야기하면 안 된다고 했어요.”
복안 장공주는 멈칫하다가 ‘하!’ 소리를 냈다. 영원 이놈! 고모의 자비심을 정확히 파악한 거네? 조금씩 나를 판으로 끌어들이려고?
“진사들은 모두 학식이 깊고 식견이 넓은 재자고 일갑은 더더욱 천하에 드문 영재라고 했다며? 그 말도 네 칠 외숙이 가르친 것이냐?”
복안 장공주가 다시 묻는 말에 오황자가 고개를 저었다.
“아닙니다. 칠 외숙은 세상에 무서운 것이 세 가지 있는데, 무사의 칼끝, 문사의 붓끝, 변사의 혀끝이라고 했습니다. 무사의 칼끝이 제일 간단하다고요. 곧장 싸워서 눕히면 되니까요. 문사의 붓끝과 변사의 혀끝은 골치 아프니 반드시 피해야 한다고 했습니다. 붓끝과 혀끝을 피하는 가장 좋은 방법은 문사와 변사 모두에게 나를 좋은 사람으로 보게 하는 거라고요. 계가 뜨락엔 문사 아니면 변사뿐이니까 잘 보이라고 했습니다.”
복안 장공주는 두 눈이 다 휘둥그레졌다. 영원 이 무지렁이가, 대체 무슨 엉뚱한 소리를 하는 거야!
“칠 외숙이 문인은 모두 위선적이라고 했습니다. 서로 알랑거리는 걸 좋아하고, 재능이 뛰어나고 학식 있다고, 세상에서 가장 뛰어나다고 칭찬 받는 걸 제일 좋아한다고요. 그러니까 그들과 이야기할 땐 무조건 칭찬하라고 했어요. 정신 못 차리게 칭찬하는 게 제일 좋다고요. 그래서 진사들은 세상에서 가장 뛰어난 사람이라고 어머니가 이야기했던 게 떠올라서 이야기했어요. 다들 기뻐했어요. 티가 났어요.”
복안 장공주는 조금 뿌듯해 보이는 오황자를 빤히 바라봤다. 영원을 직접 목 졸라 죽여 버리고 싶은 충동이 일었다. 이렇게 가르치면, 오가아가 앞으로 이 세상의 서생을 어떻게 생각하라고!
“네 칠 외숙이…….”
복안 장공주는 거기까지 말하곤 말문이 막혔다. 영원이 가르침이 틀렸다고 하자니, 그건 아닌 것 같았다. 그렇다고 가르침이 옳다고 하는 건 더 아니었다. 그럼 어떻게 해야 옳으냐고 묻는다면, 또 옳고 그름이 없었다. 제대로 설명하려니…… 설명할 길이 없었다.
한참 말문이 막혔던 장공주가 길게 한숨을 내쉬며 오황자를 손가락질하며 분부했다.
“내일부터 하루에 반 시진씩 여기 와서 공부해! 내가 이치를 가르쳐줄 테니! 영원 그 고얀 놈이 네게 준 책론을 가지고 오고!”
“예?”
오황자는 어안이 벙벙하다가 금세 고개를 끄덕였다.
“예. 가르쳐 주셔서 감사합니다, 고모님.”
“고맙긴…….”
복안 장공주는 혀끝에 맴도는 ‘개뿔’이라는 말을 억지로 삼키고는 목이 막혀 가슴을 두드렸다.
“돌아가.”
복안 장공주는 돌아가라고 해놓고 이를 갈며 잇새로 ‘영원!’ 두 글자를 뱉었다. 오황자는 일어서다가 겁먹은 듯 장공주를 힐끔 봤다.
“고모님, 칠 외숙을 혼내지 마세요. 칠 외숙은…….”
“네가 지금 칠 외숙을 걱정할 때인 줄 알아? 대답해 봐. 몰래 궁 밖으로 나간 데다가 소란까지 일으켰어. 네 태자 형님이 분명 화가 잔뜩 났을 거란 말이다. 태자 형님이 널 싫어할까 봐 걱정되지 않아?”
“이 일이 없더라도 형님은 절 좋아하지 않는걸요.”
오황자가 작고 낮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복안 장공주의 눈썹이 까닥 올라갔다.
“하, 됐다. 돌아가라. 내일 한림원 공부가 끝나면 이리로 오고.”
“예.”
오황자는 조금 걱정되는 듯 물러갔다.
복안 장공주는 천천히 차를 반 잔 마시고는 녹운에게 분부했다.
“영원을 불러. 뜨락 문 앞에서 무릎 꿇으라고 해!”
녹운은 고분고분 대답하고는 나가서 기별을 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