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금동-357화 (357/463)

357화: 교자 먹을 테야

원하는 대답을 듣지 못한 태자는 울화가 치밀었다.

“흥! 영 황후? 장식 같은 것이 감히 망상을 품어? 지금은 군신의 명분이 다 정해진 때, 이런 망상을 품은 것도 반역이다! 어느 날 이 몸이 백릉을 내릴까 두렵지도 않다더냐?”

고 사사는 침을 꿀꺽 삼켰다. 이 태자는 자기가 태자가 되었다고 황상과 다름없다고 생각한다. 태자도 얼마든지 폐위될 수 있다는 생각은 전혀 하지 않는다. 그런 일이 있더라도 자기와는 상관없는 일로 여긴다.

고 사사는 깊은 근심을 도저히 입에 올릴 수가 없었다. 태자 앞에서, 금세 폐위되어 대황자처럼 위리안치될 가능성이 있다고 말하거나 대황자보다 못한 처지가 되어 독주 한 잔에……. 그렇게 말하면 태자가 어떤 반응을 보일까. 고 사사는 이런 생각을 얼마나 많이 했는지 모른다. 생각할수록 입에 올릴 엄두가 나지 않았다.

“이런 하늘 무서운지 모르는 무지렁이들! 외숙, 연경궁에 다녀오세요. 고 대신 소오를 잘 훈계하란 말입니다. 앞으로 고의 허락 없이는 함부로 나가지 말라고 하세요. 연경궁에서 글공부나 착실히 하라고 하세요!”

태자가 매섭게 주 추밀부사에게 분부했다. 고 사사는 멍하니 태자를 바라봤다. 한참 동안 아무런 말도 하지 못했다.

고 사사는 멍하니 태자 거처에서 나와 관아가 아니라 저택으로 곧장 돌아갔다. 공무 처리할 마음이 조금도 들지 않았다.

고 사사는 뒷짐을 지고 고개 숙인 채 중문으로 들어가다가 걸음을 멈추고 사환에게 분부했다.

“다섯째가 돌아왔는지, 가 보아라. 돌아왔거든 서재로 오라고 해라.”

분부를 마친 고 사사는 고개를 숙인 채 힘없이 서재로 들어가 팔걸이의자에 털썩 주저앉았다. 뒤로 기대서 한참 있다가 고개를 들고 천천히 차를 내려서 무슨 맛인지도 모르고 홀짝였다. 그러고는 찻잔을 내려놓고 일어서서 뒷짐 진 채 망연한 걸음으로 서재 안을 서성거렸다.

고자의가 들어갔을 때, 서성이다 지친 고 사사는 아들이 들어오는 걸 보고 팔걸이의자를 짚고 다시 앉으면서 아들에게도 앉으라고 눈짓했다.

“돌아왔느냐. 앉아라.”

“아버지, 무슨 일이십니까?”

고자의는 기운 없고 온몸이 우울해 보이는 아버지를 보자 덜컥 걱정부터 들었다.

“편찮으십니까? 태의를 불러서 보이셨습니까?”

“나는 괜찮다. 앉아라. 물어볼 것이 있다.”

고 사사가 괜찮다고 해도 고자의는 고 사사 곁에 앉아 마음 놓이지 않는 듯 부친을 바라봤다.

“오늘 오황자도 왔었다고?”

고 사사가 나긋나긋한 목소리로 물었다.

“예. 영 칠야와 함께 왔습니다.”

고자의는 입술을 달싹이다가 그냥 삼켰다.

“말해 보아라.”

고 사사는 등받이에 기댄 채 눈을 감은 듯 만 듯, 매우 피곤해 보이는 모습으로 말했다.

“예. 영 칠야는 오황자의 신분을 밝히지 않고 그저 오소야라고만 했습니다. 하지만 감출 생각도 없는 듯했습니다. 제 생각엔 다들 그 오소야가 누군지 알아봤을 겁니다. 주육 그놈만 빼고요. 그놈은 정말 안타까울 정도로 어리석습니다.”

주육은 오황자가 돌아가고 모두 흩어질 때까지 오소야가 누구인지 깨닫지 못했고, 무슨 일인지는 더더욱 의식하지 못했다. 그런 주육을 생각만 하면 웃음이 나올 것만 같았다. 그 지경으로 어리석다니, 그것 역시 하늘의 조화였다.

“오황자는 생김새며 기품이며 모두 뛰어났습니다. 딱 봐도 호락호락하지 않았습니다. 아직 앳된 모습을 벗지 못했지만, 지극히 영특했습니다. 오황자는 우선 진안방을 보고 책론을 읽었다며 모르는 곳이 있다고 물었습니다. 모두 실무였습니다. 나중엔 유의경의 책론이 훌륭하다고 칭찬하셨습니다. 다만 유의경의 책론 내용이 염법이라 알아보지 못했다고 몇 마디 물었습니다. 오황자의 말씀을 그대로 읊어보면…….”

고자의는 잠시 생각하다가 토씨 하나 빠뜨리지 않고, 심지어 말투까지 흉내내며 반복했다.

“진사들은 모두 학식이 깊고 식견이 넓은 재자라고 어머니가 말씀하셨다, 일갑은 더더욱 천하에 드문 영재라고 하셨다, 고 하셨습니다.”

“정말로 그리 말씀하셨다고?”

고 사사가 번쩍 눈을 뜨고 아들을 빤히 보며 물었다.

“예, 바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토씨 하나 틀리지 않습니다. 너무 멋진 말이라 똑똑히 기억합니다.”

고 사사는 살며시 숨을 들이켜고 잠시 가만히 있다가 손을 휘둘렀다.

“계속해라.”

“예. 나중에 다른 진사에게도 말을 거셨습니다. 모두 책론에서 거론한 실무를 물으셨고요. 오황자가 말씀하시길, 일갑과 이갑의 책론을 여러 번 읽었다 하셨습니다. 삼갑도 읽었다고요. 다만 두 번밖에 읽지 못했고 모르는 곳도 많다고, 앞으로 잘 가르쳐주길 바란다고 하셨습니다.”

고 사사가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보아하니 계 대랑은 오황자가 오는 걸 진작 알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 아마 여 대랑과 이신도 알고 있었을 겁니다. 오황자가 대청에 들어와 떠나실 때까지 여 대랑과 이신이 좌우에서 한 발짝도 떨어지지 않고 모셨습니다.”

고자의는 부친을 바라보며 목소리를 낮췄다.

“소자가 보기에 오황자는 태자, 그리고 예전의 대왕야와 그야말로 천지 차이가 납니다. 진왕야와도 차이가 크게 납니다. 따라잡을 수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겁니다, 아버지.”

고자의가 마지막에 ‘아버지’ 하고 부른 말이 의미심장했다.

“휴.”

고 사사는 또 한숨을 내쉬었다. 그러고 한참 만에 나직이 입을 열었다.

“소오야, 솔직히 말하마. 이 아비, 지금 매우 후회한다.”

고 사사는 팔걸이를 탁탁 내리쳤다. 마음이 매우 아팠다. 한 번 실수로 천추의 한을 남겼음을 이제야 뼈저리게 실감했다.

고자의는 망연하게 부친을 바라봤다. 고 사사는 한참 넋을 잃고 있다가 계속했다.

“네 형은 모두 자질이 평범하다. 형제 중에 내가 기대를 건 것은 너뿐이다. 그동안 줄곧 네가 아직 어리다고만 여겼었다. 아직은 많은 걸 상의할 수 없다고 여겼지…….”

고 사사는 또 말을 멈추고 한참 만에 헛웃음 지으며 말했을 이었다.

“네 아비는 항상 자부심이 높았다. 오늘에서야 내가 부족한 점이 많다는 걸 깨달았다. 보아라. 영원은 너와 비슷한 나이다. 어린 나이에 홀로 경성에 와서 오황자를 위해 대업을 짊어지고 보위를 노리고 있다. 그런데 나는 네가 아직 어리다고만 여기고 이런 이야기를 처음 하는구나.”

“아버지?”

고 사사가 평소와 달리 자책하며 탄식하는 모습을 본 고자의는 은근히 두려웠다. 아버지가 왜 이러시는 걸까. 무슨 일이 생긴 걸까.

“소오야, 이 아비가 틀렸다. 애초에 태자에게 의탁하는 게 아니었다. 아비가 안목이 어두웠구나. 황위 문제를 대왕야와 사왕야 두 사람이 승부를 겨루는 싸움이라고만 생각했었다. 대왕야와 비교하면 사왕야가 조금은 나았으니까. 이제야 똑똑히 보이는구나. 네 황자 모두 황위에 오를 자격이 있지만, 그 의자에 앉아선 절대로 안 될 사람은 첫째로 대왕야, 둘째가 바로 태자다. 태자는 이 위기가 가득한 상황에서도 아무런 자각을 하지 못한다. 아비는 위기를 느꼈지만, 이제는 어쩔 도리가 없구나.”

고 사사가 연신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아버지, 왜 그런 말씀을 하십니까. 태자는 아직 태자라서 아버지가 혹시라도…….”

고자의는 정말로 두려워졌다.

“아비가 태자와 한배를 탄 걸 모르는 사람이 없다. 태자가 위급해졌는데 아비가 그를 버린다면, 소오야, 이건 두 주군을 섬기는 이신(貳臣)이나 마찬가지다. 사서에도 기록될 것이다. 아비가 이신이 된다면 온 고가는 대대로 멸시당할 것이다. 고개를 들 수가 없어. 일이 이렇게 된 이상 아비는 설사 잘못임을 알아도 이를 악물고 끝까지 갈 수밖에 없다.”

얼굴을 가린 고 사사의 손가락 사이로 눈물이 흘러내렸다.

“아버지!”

고자의가 고 사사 앞에 털썩 무릎을 꿇었다. 다급하고 마음 아프고, 뭐라고 해야 좋을지 몰랐다.

“일어나라.”

고 사사가 얼굴을 문지르고 고자의에게 손짓했다.

“일어나거라. 소오야, 잘 들어라. 앞으로 고가는 네가 지탱해야 한다. 강해져야 한다. 아무리 힘겨워도 견뎌내야 한다.”

“아버지.”

고자의는 두렵고 당황스러웠다.

“겁먹을 것 없다.”

고 사사는 당황하고 두려워서 불안해하는 아들을 바라보며 한숨을 또 내쉬었다. 자식을 가르치는 면에서는 정북후와 비교할 수가 없었다.

“아직은 수습할 수 없는 지경은 아니다. 아비가 심각한 쪽으로 이야기한 것이니 너무 걱정하지 말아라. 잘 생각해 보아야겠구나. 방도를 생각해낼 수 있을 것이다. 걱정하지 말아라.”

“예.”

부친의 말에 고자의는 순간 마음이 훨씬 놓였다.

“아버지, 그럼 저는…… 저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고 사사는 한참 생각하다가 다정하게 말했다.

“너도 생각해 보아라. 이 가문은 언젠간 이 아비의 손에서 네게로 넘어갈 것이다. 예전엔 아비가 생각이 부족하여 항상 널 어린애라고만 여겼었다. 휴. 큰일을 진작 너와 도모했어야 했다. 태자는 어리석기 짝이 없는 데다가 오만하고 거만하다. 거기에 성격도 포악하지. 태자 자리에 오래 있지 못할 것이다. 아비가 어떻게 해야 하겠느냐. 너는 또 어떻게 해야 하겠느냐. 어떻게 해야 너를 보전하고 우리 고가를 보전할 수 있을지, 너도 생각해 보아라. 잘 생각해 보고 떠오르는 게 있으면 그게 무엇이든 아비를 찾아와라. 이 서재에 언제든지 와도 좋다. 서재 안에 있는 것도 최대한 많이 읽고.”

고 사사는 끊임없이 말했고 고자의는 끊임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고 사사는 또 고자의에게 주절주절 사소한 일을 당부한 후에야 돌아가라고 분부했다. 거처로 돌아간 고자의는 처음으로 새벽까지 뒤척이다가 겨우 잠이 들었다.

이동이 집으로 돌아갔을 때, 복안 장공주가 보록궁에서 사람을 보냈다. 지난번에 이야기했었던 야채 교자를 먹고 싶다고, 그 야채 교자를 만들 줄 아는 찬모를 빌리고 싶다고 했다. 지금 바로 와서 교자를 만들어 달라고.

이동은 눈을 깜빡이며 잠시 생각한 후에야 그 야채 교자가 무엇인지 떠올렸다. 오황자를 데리고 진하 부두에 갔을 때 배에서 먹었던 그 교자 말이잖아!

장공주가 정말로 그 야채 교자가 먹고 싶어 한다고? 이렇게까지 해서 먹을 정도로?

이동도 보록궁의 요리사가 만든 교자를 여러 번 먹어 봤었다. 소유가 만든 것과 비교해도 나으면 더 나았지, 떨어지지 않는 맛이었다.

무슨 생각일까?

이동은 의아하지만 지체할 수 없어서 서둘러 소유에게 사람을 보냈다. 그리고 잠시 더 생각하다가 녹매도 따라가서 조수든 뭐든 도와주라고 분부했다.

소유와 녹매가 필요할지도 모르는 물건을 떠오르는 대로 담아서 커다란 찬합 두 개를 들고 나서는데 이동이 또 사람을 보내서 아무것도 가지고 갈 필요 없고 몸만 가면 된다고 분부했다. 궁의 법도가 그랬다.

소유와 녹매는 찬합을 내려놓고 허둥지둥 밖으로 달려갔다. 중문에 가기도 전에 문 이야가 헐레벌떡 나타나서 다급하게 손짓했다.

“잠깐!”

문 이야는 두 사람 앞에 후다닥 나타나서 한 손을 허리춤에 올리고 다른 손으로 두 사람을 향해 손가락 하나를 치켜들고 헐떡였다.

“한마디, 한마디만 듣고 가라……. 나, 우선…… 숨 좀 돌리자. 됐다. 들어라. 장공주께 가면 다른 건 신경 쓸 것 없다. 낭자 모시듯이 장공주를 모시면 된다. 다만 한 가지, 본 적 있는 사람을 만나도, 그게 누구든 그런 적 없는 척해야 한다. 알았느냐?”

“한마디가 아닌걸요.”

소유가 꿍얼거렸다. 안 그래도 긴장되어 죽겠는데 문 이야의 말을 들으니 더 긴장됐다.

“명심했어요. 안심하세요, 이야.”

녹매가 짚이는 게 있는 듯이 얼른 대답했다. 문 이야는 최근에 몇 가닥 정도 늘어난 것 같은 수염을 쓰다듬으며 칭찬하는 눈빛으로 녹매를 바라봤다.

“영리한 녀석. 거기 가면 음식 같은 건 모두 소유에게 맡기고, 다른 건 네가 유의해라. 마음 쓰고.”

“예. 많이 듣고 많이 보고 말은 많이 하지 말고요.”

녹매가 웃으며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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