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54화: 망가뜨리다
계소영은 잠시 주저하다가 조용히 이신 뒤로 가서 살짝 끌어당겨 뒤로 물러난 뒤 관사에게 들은 이야기를 해주었다. 불필요한 부분은 건너뛰고 간략하게 이야기했고, 이야기를 들은 이신도 눈이 휘둥그레졌다가 얼굴을 문질렀다. 세상에. 동저아가 한 번 혼인한 그 가문, 대체 어떤 가문인가!
“확인했는데, 대낭자는 진작 피하고 그 자리에 없었다고 하네. 멀찍이 있었다고 하는군.”
계소영이 한마디 더 덧붙였다. 이신이 나지막이 감사 인사했다.
“고맙네.”
“고맙긴.”
계소영은 주변을 둘러보고 옆으로 자리를 옮겨서 다른 손님과 담소를 나눴다.
소자람은 묵칠과 딱 붙어서서, 오황자 곁에서 앞다투듯 말을 거는 재자들, 그리고 각자 이런저런 모습으로 여기저기 흩어져 있는 더 많은 재자들을 바라봤다. 그러다가 오황자에게서 눈을 떼지 않고 지켜보는 영원을 무심결에 발견했다. 갈수록 마음이 조마조마해졌다.
지금은 아주 민감한 때였다. 행여 조금이라도 적절하지 못한 일이 일어난다면……. 몇 달 갇혀 있다가 방금에야 자유로워진 소자람은 솥뚜껑만 봐도 질겁할 때라서 점점 더 겁이 났다.
“소칠, 내 보기에 잘못하면 시시비비가 일어나겠다. 우린 피하는 게 좋겠다.”
“응?”
소자람이 쿡쿡 찌르며 나지막이 하는 말에 묵칠이 얼떨떨하게 돌아봤다. 묵칠은 한창 넋을 놓고 오황자를 바라보고 있었다. 아버지가 그린 오황자는 너무 엄숙하게 그려서 못나 보였었는데, 눈앞에 있는 오황자는 정말 잘생겼다. 이런데도 칠 형님이 어릴 때는 오황자보다 훨씬 예쁘장했다니. 그러니 누구나 오냐오냐할밖에. 자기였대도 차마 혼내지 못했으리라.
“피해? 누굴? 우리 형제가…….”
한동안 소자람의 단속에서 벗어난 묵칠은 주육과 몰려다니면서 ‘우리 형제’라는 말이 그새 입에 익었다.
“가자! 저쪽 구경하러 가자고.”
묵칠의 꼴을 본 소자람은 당장 결단을 내리고 묵칠을 대청 밖으로 밀고 나갔다.
소칠이 하는 짓을 보니 이따 행여 무슨 일이라도 생기면 두 사람도 같이 말려 들어갈 것 같았다. 무슨 문제가 생길 때마다 혼나는 건 번번이 자기였다. 소칠보다 아주 조금 더 총명하고 철이 든 걸 어쩌나.
소자람이 조금이라도 따지면 어머니는 늘 같은 소리를 했다.
‘묵칠 그 얼뜨기와 널 비교하는 것이냐? 그래서 그 얼뜨기를 지켜보라고 한 것 아니냐!’
정말이지, 화를 낼 기운도 없었다.
“어디로 거닐 건데?”
묵칠은 성격이 좋고 또 소자람에게 여기저기 끌려다니는 것에 익숙해서 나가자고 하니 또 순순히 응했다. 두 사람이 나와서 대청에서 멀어진 뒤 묵칠이 소자람을 돌아보며 물었다. 소자람도 자주 오진 않아서 계가 저택을 잘 아는 게 아니었다.
“일단 둘러보자.”
소자람이 주변을 둘러보며 말을 이었다.
“저기 호숫가로 가 보자. 연꽃이 피었을 시기다.”
“그렇게 하지 뭐.”
묵칠은 하품하며 따분한 듯 쥘부채를 돌리면서 소자람과 함께 호숫가를 거닐었다.
호숫가를 따라 걷기 시작했는데 여자들이 웃고 떠드는 소리가 바람을 타고 들렸다. 두 사람은 화들짝 놀라서 후다닥 방향을 틀어서 왔던 길로 내달렸다.
두 사람은 단숨에 반 리 길은 달렸다. 웃음소리가 더는 들리지 않은 곳까지 간 후에야 길게 안도하며 호숫가 긴 의자에 철퍼덕 주저앉았다.
“계 대랑도 참. 어떻게 여식솔과 이렇게 가깝게 배치했지. 저기, 그야말로 바로 옆이잖아!”
묵칠이 대청 방향, 그리고 아까 웃음소리가 들렸던 방향을 가리키며 투덜거렸다. 소자람은 그런 그를 상대하지 않고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뭘 찾아?”
묵칠은 소자람을 따라 두리번거리다가 답답한 듯 물었다.
“목이 좀 말라서.”
소자람은 조금 겸연쩍어졌다. 자기가 나오자고 하고, 나오자마자 목이 마르다고 하다니. 정말이지…… 돌아가자는 말은 정말 아닌데.
묵칠은 주변을 두리번거리다가 아예 일어섰다.
“음, 보자. 쉴 곳을 마련해둔 장소엔 차 시중을 들 사람을 다 배치해 두어야 하는데. 칠 형님은 매번 그랬거든. 여기저기 다 쉴 곳, 먹을거리가 있어서 편안한데……. 저기다! 저쪽으로 가 보자. 저기 분명 차 시중드는 사람이 있을 거다!”
묵칠이 호수를 끼고 있는 수사(水榭: 물가에 지은 정자)를 가리켰다. 소자람도 그 수사를 발견했다. 차 시중드는 사람을 두지 않았더라도 종복은 있을 것이다.
“가자.”
소자람도 자리에서 일어났다. 한 사람은 목이 마르고 한 사람은 얼른 쉴 곳을 찾고 싶어서 모두 빠르게 걸었다. 두 사람은 금세 수사 계단 아래 당도했다.
막 계단을 올라가려고 하는데 수사 안쪽에서 웃음소리가 들렸다.
“그런 거 아니야!”
두 사람은 화들짝 놀랐다. 소자람이 돌아서서 달려가려는데 묵칠이 대뜸 그를 잡았다.
“쉿, 육누이야. 괜찮아.”
“그래도 안 되지!”
소자람은 묵칠의 귓가에 대답하고는 그를 끌고 가려고 했다. 그런데 묵칠이 다시 잡아끌었다.
“나도 목마르다고. 소리 들어 봐. 저 안쪽에 있어. 아까 이 정자에 차가 있는 걸 봤다. 형님은 여기서 기다려. 내가 주전자를 가지고 나올 테니 얼른 마시고 가자. 나도 목마르단 말이다.”
“그냥 가자…….”
소자람이 다시 묵칠을 잡아끌자 묵칠이 또 안으로 잡아끌었다.
“안 돼. 목말라. 내가 간다니까. 형님은 여기서 기다려, 내가 갈게! 걱정하지 마라. 이런 일엔 내가 고수야!”
묵칠은 소자람을 뿌리치고 고양이처럼 웅크려서 계단 위로 올라갔다. 살짝 고개를 들고 내다봤더니 역시나, 정자 안쪽 둥근 탁자에 묵록색 융단이 깔려 있고 그 위에 차와 간식이 놓여 있었다. 옆엔 조그마한 홍니로도 있고 홍니로 위에 은주전자가 보글보글 즐겁게 끓고 있었다.
묵칠은 조금 더 허리를 숙이고 앞으로 한 걸음씩 떼며 탁자 곁으로 옮겨갔다. 탁자를 중심으로 왼쪽으로 고개를 돌려 정자 깊숙이 내다보고 또 오른쪽으로 깊숙이 내다봐도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묵칠은 안도하며 탁자 아래로 큰 몸을 감추고는 손을 들어 올려 더듬더듬 차와 간식을 찾았다. 막 찻잔이 손에 닿아 팔을 더 뻗으려는데 날카로운 고함이 들렸다.
“도둑이야!”
비명이 끝나기도 전에 간식 접시가 연달아 묵칠의 머리 위로 떨어졌고, 묵칠은 처참하게 고함쳤다. 광풍처럼 간식과 간식 접시가 떨어지더니, 잠시 틈도 없이 찻물이 조르륵 얼굴로 흘러내렸다. 이어서 한 주전자나 되는 찻물이 줄줄 흘러내렸다.
“뜨겁다! 뜨거워!”
묵칠은 머리를 감싸고 괴성을 질러댔다. 시녀들이 다 알맞게 식혀둔 차라서 차갑진 않아도 뜨거울 정도는 아니었다. 묵칠도 뜨겁다고 외치긴 해도 사실 뜨겁진 않았다.
수사 저쪽에 앉아 이야기하던 이동, 묵 육낭자, 명 삼낭자가 기척을 듣고 달려왔다. 소자람도 앞뒤 가릴 겨를 없이 계단으로 올라갔다. 바로 그때 탕 오낭자가 한 주전자 찻물을 모두 쏟아붓고는 양손으로 주전자를 들고 묵칠의 머리통을 내리치려고 겨누고 있었다.
“안 돼!”
이동의 모습이 보이기 전에 목소리부터 들렸고, 탕 오낭자는 그 소리에 지극히 민첩하게 반응했다. 거의 손에서 떨어지던 주전자가 다시 탕 오낭자의 품으로 들어갔다.
“자람 오라버니!”
한눈에 소자람을 발견한 묵 육낭자는 야단 났다 싶어서 후다닥 달려왔다. 곤죽이 된 간식이 끈적하게 머리에 붙어 있고 이마는 살짝 붉어진 채 방향을 잃고 허둥거리는 묵칠이 보였다.
“칠 오라버니!”
“어?”
와장창!
넋이 나간 탕 오낭자가 품에 안고 있던 자사호 주전자를 놓치고 말았다.
나, 육낭자의 오라버니, 묵 승상가 보물 손자를 망가뜨렸어?
이동은 탕 오낭자, 텅 빈 탁자, 간식과 접시로 난장판이 된 바닥, 피 흘리는 손으로 머리를 끌어안은 채 온몸에 끈적한 간식을 달고 목 놓아 우는 묵칠을 번갈아 보다가 무심결에 명 삼낭자를 돌아봤다. 명 삼낭자도 거의 동시에 그녀를 바라봤다. 두 사람은 또 동시에 눈을 동그랗게 뜨고 탕 오낭자를 바라봤다.
“눈 깜짝할 사이에, 이렇게 다 때려 부순 거야?”
명 삼낭자는 저도 모르게 툭 물으며 탁자를 가리켰다.
탕 오낭자, 손이 빨라도 너무 빠르잖아!
탕 오낭자는 어깨를 움츠리고 양손으로 손수건을 비틀면서 달달 떨었다.
“나는…… 그게……. 나는…….”
“네 탓이 아니야. 나라도 기겁했을 거야. 손에 잡히는 건 다 던졌을걸.”
탕 오낭자가 겁에 질린 걸 보고 이동이 얼른 나가서 어깨를 안아주며 위로했다.
“맞아. 네 탓이 아니야. 나라면 탁자를 다 엎었겠지.”
명 삼낭자도 얼른 대답했다. 탁자를 엎고, 묵칠 저 머저리를 두들겨 패고 싶어서 이가 갈렸다.
“소생과 아우가 신중하지 못했습니다.”
소자람이 묵칠을 일으키고는 얼른 사과했다. 묵 육낭자는 손수건으로 묵칠을 대충 닦아 주었다. 당직 어멈, 시녀들이 벌써 허둥지둥 뜨거운 물, 수건, 주전자 같은 걸 들고 온 덕에 묵칠은 적어도 얼굴은 깨끗해졌다.
벌써 누군가가 관사 어멈에게 보고했고, 관사 어멈은 대야의 새 옷을 내오라고 분부했다.
묵칠은 얼굴을 닦고 손에 고약을 바른 후 조금 정신이 돌아오자 끙끙대며 입을 열었다.
“목마르다. 일단 차를 다오.”
이동은 실소했고 묵 육낭자는 얼굴이 시뻘게졌다. 명 삼낭자는 묵칠을 잠시도 더 보기 싫은 듯 시선을 돌렸다. 탕 오낭자는 이동의 웃음소리를 들어서인지 아니면 재미있어서인지 풉 하고 웃음을 터트렸다.
묵칠은 연달아 차 서너 잔을 마신 후에 풀 죽은 듯 일어섰다.
“육누이, 절대로 할머님께 말씀드리지 마라. 나쁜 짓을 하려던 게 아니야. 그냥 목이 말랐다. 형님도 목마르다고 해서. 네 목소리가 들리길래……. 그래서…… 내 잘못이다. 육누이, 절대로 할머님께 말씀드리지 마라.”
사리 밝은 탕 오낭자는 한시름 놓은 후에 얼른 무릎을 구부리며 사과했다.
“제가 너무 경솔했어요. 정말 죄송해요. 칠소야, 너그럽게 용서해 주세요.”
“가당치 않아요, 가당치 않습니다. 내가 잘못했습니다. 난 원래 덤벙대는 사람이라……. 이렇게 접시를 많이 깨다니, 나 때문에 손이 아프셨겠습니다.”
묵칠이 쉴 새 없이 장읍하며 성의껏 사과했다. 자기 잘못이 맞다. 어린 낭자들은 다 가냘프고 나약한데, 분명 겁에 질렸겠지.
“제 잘못이에요. 제가 너무 호들갑을 떨었어요. 칠소야 손을 다치게 했어요. 칠소야, 제발 용서해 주세요.”
탕 오낭자가 다시 사과했다.
“아니, 아니, 내 잘못입니다! 다 내 잘못입니다! 놀라게 해서 미안합니다. 다시는 이런 일 없을 겁니다. 내 손은 괜찮습니다. 낭자가 다치지 않았길 바랄 뿐입니다.”
묵칠은 절구 찧듯 연신 장읍했다.
이동은 한 사람은 무릎을 구부려 예를 갖추고 또 한 사람은 장읍하며 서로 잘못했다고 사과하는 두 사람을 고개를 갸우뚱하고 쉴 새 없이 번갈아 봤다. 음? 꽤 재미있는 한 쌍이겠는데?
곡 대내내가 강완과 강녕을 데리고 수녕백부에 방금 도착해 중문 안에서 마차에서 내리기도 전에 강환장이 도착했다.
채찍을 들고 들어온 강환장은 중문으로 뛰쳐 들어와서 강녕을 보자마자 한마디도 없이 채찍을 들어 다짜고짜 휘둘렀다.
강완이 양손으로 얼굴을 감싸며 고함치는 소리에 귀가 찢어질 듯했다.
곡 대내내는 얼른 안전한 곳으로 피해서 두 눈을 휘둥그렇게 뜨고 강환장을 바라봤다. 정확하게 떨어지는 채찍질을 보고 있을수록 두 눈에 빛이 나고 흥분했다.
분노가 머리끝까지 치민 강환장이 몇 번이나 채찍을 휘둘렀는지 모른다. 강녕은 온몸에 선혈을 흘리며 바닥에 잔뜩 웅크리고서 끽소리도 내지 못했다.
처음엔 고함치던 강완은 강녕이 피를 흘리기 시작한 후엔 입을 꾹 다물고 발끝을 세워 뒷걸음질 쳤다. 마차 곁까지 물러나서 마차 바퀴에 딱 붙어서 바들바들 떨면서 바퀴 사이로, 처음엔 비명 지르며 울다가 나중엔 끽소리도 내지 않은 강녕을 바라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