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52화: 넋이 나가 지켜보다
계소영은 예를 갖추고 몇 마디 인사치레하고는 살짝 몸을 숙이며 영안백부 사람들이 있는 쪽으로 그를 안내했다. 대대로 친분이 있는 영안백부 말고 수녕백부가 다른 집안 어디와 친분이 있는지 한순간 떠오르지 않았다.
하지만 강환장은 사람들 무리 중간에서 고자의와 이야기 중인 이신을 노려보더니, 갑자기 목소리 높여 인사하면서 계소영을 비롯한 신진 진사 무리로 비집고 들어갔다.
전생에 몇십 년 동안 높은 자리에 있을 때, 끝도 없이 아부하고 알랑거리는 사람들에게 익숙해진 터라 자신감과 오만이 뼈에 박혀 있었다. 아픔을 겪고 각성하긴 했지만, 골수에 박힌 것들이 어디 갈까. 예를 들면 남이 이래라저래라하는 것은 절대 용납할 수가 없었다. 게다가 계소영, 평생의 숙적이 그러는 것은 더더욱. 특히나 이신을 피하게 하려는 것은.
계소영은 얼떨떨해하다가 금세 걸음을 멈추고 사촌 형님 계소명을 향해 눈짓하여 눈빛으로 강환장을 사촌 형님에게 맡기고 돌아섰다.
계소영이 돌아서서 몇 걸음 내디뎠을 때 주육이 그를 향해 손짓했다.
“계 탐화! 자네 소칠을 안 불렀나? 청첩을 보낼 때 소칠을 빼먹었어?”
그 말에 계소영이 어이없는 듯 웃었다.
“허튼소리! 다른 사람은 다 빼더라도 자네와 칠소야는 빼면 안 되지. 자네 둘을 빼놓았다가 내가 경성에서 어찌 살겠나.”
“하하하, 맞는 말이지! 그런데 소칠은 왜 코빼기도 안 보이는 거지? 그리고 원 형님도?”
“영 칠야는 기별을 보냈네. 우선 입궁해서 오황자의 무술 수련부터 하고 오겠다는군. 지난번에 여 대랑의 연회 때문에 수련을 한 번 빼먹었다가 황후마마께서 한 시진 동안 벌 세우셨다는군.”
계소영의 설명이 끝나기도 전에 주육이 발을 구르며 웃었다.
“원 형님이 무릎 꿇기 전문가인데 벌이 무서울까. 한 시진이 뭐라고. 지금은 나도 두어 시진은 아무렇지 않아!”
사람들이 웃음을 터트렸고, 막 찻잔을 들어 올리던 고자의는 찻물이 든 채로 잔을 바닥에 떨어뜨리고 말았다.
“하하하! 계 형, 이 차, 그리고 찻잔, 주육 저놈에게 배상받게.”
계소영은 웃음을 참으며 사환을 불렀다. 묵 승상부에 다녀오라고 막 분부하려는데 저 멀리 묵칠과 소자람이 나란히 걸어오는 것이 보였다.
“왔군.”
계소영이 두 사람을 가리키자 주육이 까치발을 들고 바라봤다.
“응? 자람, 저 녀석도 돌아왔군.”
사람들은 늦게 온 묵칠, 특히 오랜만에 보는 소자람에게 우르르 달려가 안부를 물었다. 그 틈에 여염은 이신을 쿡쿡 찌르고 함께 옆으로 몇 걸음 걸어갔다. 모두와 조금 멀어진 곳에서 여염이 다시 이신을 향해 저쪽을 보라고 눈짓했다.
“보아하니 강 장사가 저들하고 가까운 모양일세.”
여염이 나직이 말했다. 이신은 신진 진사들 사이에서 담소를 나누며 소탈하게 행동하는 강환장을 바라보며 눈살을 찌푸렸다.
“언제부터 저들과 알고 지낸 것이지.”
“작년부터. 강 장사가 문회에 두루두루 참석하면서 사람들을 꽤 사귀고 다녔네.”
여염의 담담한 말에 담긴 속뜻이 참으로 무궁무진했다.
“속셈이 참 대단하군. 저건 크흠 ……을 위해서 뒤를 마련해주는 것 아닌가.”
이신이 말을 얼버무리자 여염이 피식 웃었다.
“계 천관이 있는데…….”
여염은 거기서 말을 멈췄지만, 이신은 똑똑히 알아들었다. 계 천관, 계 노승상의 외아들이 있는데 강환장이 나서서 서생들의 마음을 포섭하는 건 사족이란 말이었다.
“어찌 됐든 친분이 있고 없고는 차이가 있겠지.”
잠시 후 이신이 나지막이 말했다.
“잘 지켜보게.”
여염이 이신을 잡아끌어 함께 자리를 옮겼다. 두 사람은 높이 걸린 불주금 화분 뒤로 가서 폭포처럼 드리운 불주금 틈으로 강환장을 유심히 살폈다. 여염이 웃으며 한숨을 내쉬었다.
“봤는가? 강 장사, 저 사람, 참 모를 사람일세. 저 태도 좀 보게. 태자 전하, 아니 적어도 진왕야, 혹은 묵상이 이런 태도를 보인다면 칭송받겠지. 현명한 서생들을 대접하는 것이니까. 하지만 자기가…….”
여염은 자기가 무슨 자격으로 현명한 서생들을 대접하느냐고까지 입에 올리진 않았다.
잠시 침묵하던 이신이 나직이 입을 열었다.
“강환장이 자등 산장에 한 번 다녀간 적 있네. 내 누이가 만났지. 나중에 시녀들이 투덜거리는 걸 들었는데, 주인처럼 굴더라고 하더군. 자기가 자등 산장 주인이고 내 누이야말로 객인 것처럼 대하더래.”
“그것참 재미있는 사람일세.”
여염은 놀라서 눈썹을 치켜뜨다가 한참 만에 실소했다.
“강가에서 다들 강환장을 오통신이라고 쑥덕댄다더군.”
이신은 피식 웃다가 사레가 걸렸다.
“쿨럭쿨럭! 강부 종복들이…….”
“종복들은 눈이 매섭지. 다만, 그렇다고 강환장을 만만하게 보면 안 되네. 세상 사람 눈에 괴상한 사람 10명 중 아홉은 괴상한 사람인데, 남은 하나가 기인이라고 할아버님이 말씀하셨네. 강환장이 기인인지 아닌지는 찬찬히 두고 보세.
참, 강가 여식솔도 왔던데……. 자네 누이가 허허. 그…….”
“누이는 벌써 다른 쪽으로 피했네. 아무 일도 없을 걸세. 내 누이, 다른 건 몰라도 마음가짐, 그리고 안목은 내가 한참 못 미치네.”
“누구 이야긴가? 이 형이 못 미치는 사람이 다 있나?”
계소영의 목소리가 두 사람 뒤에서 들렸다.
“대랑이 지금 자기 누이를 칭찬하고 있었네.”
여염이 돌아보며 웃는 얼굴로 말하자, 계소영의 얼굴이 눈에 띄지 않게 살짝 굳었다가 이내 웃음 지었다.
“대랑, 걱정하지 말게. 영매 쪽은 내가 형님을 통해 형수에게 당부해 두었네.”
“여 형도 그 이야기 중이었네. 그래서 내 누이의 마음가짐, 안목을 내가 따라잡을 수 없다고 한 걸세. 그래서 걱정할 것 없다고 했는데 자네까지 그랬나.”
이신이 계소영의 설명을 자르며 웃어 보였다.
“그야 그렇겠지. 장공주와 대화하고 경을 논하는 사람인데, 마음가짐이 부족해서야 어디 장공주 눈에 들겠나.”
여염이 농담 반 진담 반 추켜세웠다.
“그 말이 나와서 말인데, 누이가 몇 번 이야기하더군. 장공주와는 그냥 성격이 맞은 거지, 마음가짐 같은 건 아무런 상관없다고. 둘이 이야기하는 것도 다 갖가지 괴상한 일, 재미있는 일, 대부분 여인네가 자주 하는 한담이라고 하더군.”
이신이 활짝 웃으며 말하자 계소영이 대답했다.
“그것이야말로 진정한 소탈함이지. 하고 싶은 이야기를 마음껏 하는 것 말이야.”
계소영의 말에 여염이 껄껄 웃었고 이신도 피식 웃으며 계소영의 등을 두드렸다.
“이 고상한 사람아! 자네가 남을 추켜세우니, 추켜세우는 말도 참 듣기 좋군.”
계소영이 어깨를 으쓱했다.
“솔직한 말인걸. 자네들도 참. 이 형의 누이는 내가 봐 온 여인 중에 가장…… 가장 보기 드문 여인일세. 자네 누이를 고상하니 속되니 평가하면 안 되네. 무례한 일이네.”
“계 형의 칭찬 감사하네. 자네가 한 말 반드시 누이에게 전하겠네. 계 탐화의 이런 칭찬을 듣다니, 누이도 분명 지극히 영광으로 여길 걸세.”
이신이 진지한 얼굴로 공수하자, 계소영이 어색하게 웃으면서 뭐라고 중얼거렸다. 뭐라고 한 거냐고 여염이 묻기도 전에 계소영이 얼른 화제를 돌렸다.
“참, 아까 영 칠야가 기별을 보냈네. 이따 오황자를 모시고 온다더군. 내기에 져서 할 수 없다고.”
여염은 멈칫했고 이신은 그날 문 이야가 했던 말을 떠올렸다. 문 이야의 생각인 걸까, 아니면 영 황후 곁에 문 이야와 같은 생각을 하는 사람이 있는 걸까.
“그럼 저택에 호위를……. 오황자는 진왕야가 아닐세! 이만저만한 일이 아니야!”
정신을 차린 여염이 바로 물었다.
계소영은 고개를 저었다.
“걱정할 것 없네. 영 칠야가 그것 때문에 기별을 보낸 걸세. 따로 준비할 필요 없다더군. 알아서 사람을 보낼 테니 조용히 저택 곳곳에 배치하면 된다고 말일세. 아버지가 벌써 처리했네. 우린 그냥 하던 대로 하면 되네. 오황자의 신분을 밝힐 것도 없어.”
계소영은 시끌벅적한 대청을 둘러보며 말을 이었다.
“오황자는 긴 세월 은거해서 알아보는 사람이 거의 없네. 오황자를 알아볼 만한 사람이라면 지극히 사리에 밝은 사람일 테고. 오황자가 먼저 말하지 않는 이상 먼저 밝힐 정도는 아닐 걸세.”
이신이 자신과 여염을 가리키며 물었다.
“그럼 우리는? 우리는 뭘 해야 하지?”
“두 사람이 신경 좀 써주게. 누군가 무례한 말을 하지 않는지 잘 지켜봐 주고. 오늘 다들 기쁜 날이라 풀어지는 사람이 있을지도 모르네.”
계소영이 가차 없이 하는 말에 이신과 여염이 함께 고개를 끄덕였다.
세 사람은 잠시 수군수군 상의하다가 다시 무리 속으로 돌아갔다. 가벼운 이야기를 몇 마디 주고받는데 영원이 저쪽에서 여덟 살쯤 된 작은 사내아이 손을 잡고 느긋하게 들어오는 것이 보였다.
계소영이 여염과 이신을 돌아보자 두 사람 모두 살짝 눈을 내리깔았다. 계소영은 돌아서서 웃으며 두 사람을 맞이했다.
“칠야, 늦었군. 벌주를 마셔야지! 이분은…….”
계소영이 목소리를 높이면서 오황자를 향해 눈인사했다. 오황자는 그를 올려다보며 눈을 깜빡였다. 뜻밖의 그 눈짓에 계소영의 눈썹이 치켜 올라갔다.
“그냥 성가신 꼬마일세. 소오라고 부르면 되네, 예의 차릴 것 없어.”
영원이 태연하게 손사래 쳤다.
“오소야(五少爷)!”
계소영의 인사가 제대로 끝나기도 전에 주육이 후다닥 달려왔다.
“형님! 왜 이제 오는 거요. 재미있는 걸 많이 놓쳤다고! 조금 전에, 형님은 모르겠지만, 자의 저놈이 자기를 돼지에 비유해서…….”
계소영은 그야말로 제 얼굴을 가리고 싶었다. 주육, 창피한 짓 할 땐 정말로 창피하게 하는군!
묵칠도 성큼성큼 다가와 활짝 웃는 낯으로 칠 형님, 하고 부르고는 곧바로 오황자를 발견하고 멈칫했다. 목을 빼고 유심히 들여다보고는 더 넋이 나갔다.
묵칠이 오황자를 만난 적은 없지만, 어리벙벙한 제 자식놈이 눈 밖에 나선 안 될 사람을 거스를까 봐 묵 이야가 진작 오황자의 초상화를 여러 장 그려서 묵칠에게 얼굴을 익히게 했었다. 묵 이야는 단청 고수였다. 묵칠은 오황자를 보자마자 부친이 그려서 보여줬던, 절대로 눈 밖에 나선 안 될 사람임을 곧바로 알아봤다.
영원의 눈빛에 아연한 기색이 스쳤다. 묵칠이 소오를 알아본 것 같은데? 소오를 언제 만나서? 제대로 붙들고 물어봐야겠다. 이건 큰일이다.
“오소야일세.”
계소영 역시 묵칠이 이상한 걸 알아채고 얼른 나서서 넌지시 눈짓을 보냈다. 묵칠의 저 얼굴! 사람이면 무슨 의미인지 알아볼 얼굴 아닌가.
“아! 역시…… 아, 오소야였군.”
가끔은 꽤 영리해지는 묵칠은 즉시 알아듣고 오황자를 가리키려다가 얼른 손을 거두고 옷을 쓸어내렸다.
손가락으로 오황자를 가리키다니. 안 되지, 안 돼! 대불경이다!
“오소야? 어느 집 오소야? 처음 보는 꼬마인데? 너 몇 살이냐?”
주육도 그제야 오황자를 보고는 허리를 숙여 상하좌우로 오황자를 살폈다.
“이 꼬맹이, 잘생겼군. 원 형님하고 비교해도 조금 아래일 정도군. 얼굴 작은 것 좀 보게!”
주육은 대뜸 손을 내밀어 오황자의 얼굴을 꼬집었다. 그 손짓에 계소영과 묵칠은 심장이 오그라드는 기분이었다. 묵칠은 얼굴이 다 새파래져서 무심결에 영원을 힐끔거리며 주육을 잡아끌었다.
“그 손 좀……. 얼굴 망가질라, 꼬집지 말아라.”
오황자가 까르륵 웃었다.
“내 얼굴이 반죽도 아니고 꼬집는다고 망가질 리가 있나요.”
계소영은 크게 안도했고 주육은 하하 웃었다.
“녀석! 너, 이 형님 마음에 든다! 너희 좀 봐라. 꼬맹이만도 못하구나. 살짝 꼬집었다고 얼굴이 망가지겠냐? 반죽 인간도 아니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