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금동-344화 (344/463)

344화: 큰일

예상하지 못한 영원은 식겁해서 비틀거리다가 문 이야인 걸 보고 눈을 부릅떴다. 한순간 무슨 말을 해야 좋을지 몰랐다.

“도착하자마자 칠야가 나타나시다니요. 제가 시각을 참 잘 쟀군요.”

문 이야가 의미 모를 미소를 빙그레 지었다.

“마침 지나던 길에…….”

영원은 그렇게 이야기하다 말고 뒷말을 꿀꺽 삼켰다. 됐다. 해명은 무슨.

“날 기다렸다니, 무슨 일 있는가?”

“물론입니다.”

문 이야가 주변을 둘러보고는 손짓하자 영원이 성큼성큼 다가가 활짝 핀 동백꽃 나무 그림자 아래로 숨어 문 이야 곁에 딱 붙었다.

“큰일은 아니고요. 오늘 여 승상부에서 열린 문회가 아주 떠들썩했다던데, 칠야, 오황자를 모시고 가시지 그러셨습니까.”

인사치레할 상황도 때도 아닌지라, 문 이야는 곧장 본론에 돌입했다.

“음?”

영원이 눈살을 찌푸렸다.

“다행히 문회가 여 승상부에서 한 번 열리고 말 것이 아니더군요. 계 노승상은 천하 문인의 우두머리라고 칭송받는 분이니, 며칠 뒤에 계가에서 열리는 문회는 분명 여 승상부의 문회보다 뛰어날 것입니다. 오황자를 모시고 구경하러 가셔야지요. 식견도 넓힐 겸.”

영원은 문 이야를 빤히 보다가 잠시 후 느릿느릿 대답했다.

“음, 알겠네.”

“아셨으면 됐습니다. 됐어요.”

문 이야는 나지막이 허허 웃으며 말을 이었다.

“그럼 방해하지 않고 저는 이만 가보겠습니다. 칠야, 곧 폭우가 내릴 것 같은 이런 날씨에도……. 허허.”

문 이야가 또 한 번 허허 웃었다.

“우리 낭자가 보통 사람이 아니라는 걸 칠야의 혜안으로 알아보셨군요. 귀한 일입니다. 귀한 일이에요!”

영원은 그를 한참 흘겨보다가 상대하지 않고 돌아섰다.

하늘에서 천둥소리가 들리고 빗방울이 떨어지기 시작했을 때, 영원은 벌써 이동 상방 회랑에 서서 곧 큰 비가 쏟아질 것 같은 하늘을 올려다보며 길게 숨을 내쉬었다. 오늘 운이 참 좋군!

천둥소리가 지나자마자 창문을 톡톡 두드리는 소리가 들리자, 창을 등진 채 심지를 자르던 녹매가 놀라서 부르르 떨었다. 수련은 진정하라고 얼른 손가락을 들어 보이고는 자기가 창가로 다급히 다가갔다.

“분명 또 그거지!”

수련이 녹매를 지나치며 꿍얼거리는 말을 들은 녹매도 곧장 알아듣고는 등불을 들고 수련 뒤를 따라갔다. 수련이 창문을 열자 녹매가 등불을 높이 치켜들었다.

“너희 대낭자는? 아직 시간이 이른데?”

창문이 열리자 영원이 머리를 내밀고 고개를 쭉 뻗어 좌우를 살폈다.

“서재에서 장부 맞추세요. 낭자께 고하고 올 테니 잠시 기다리세요.”

“그래, 그래. 얼른 가라.”

영원은 목을 움츠리고 손사래 치며 한마디 하고는 서쪽 곁채의 서재 쪽으로 향했다. 이미 익숙할 대로 익숙한 길이었다.

실내 쪽으로 서재에 들어간 수련이 말을 다 끝내기도 전에 문 쪽에서 지극히 가볍게 똑똑 두드리는 소리가 금세 울렸다. 이동이 재빠르게 주판을 튕기면서 고개를 끄덕이자, 수련이 뜻을 알아듣고 다가가 문을 열었다.

“일단 들어와서 앉아 계세요. 낭자 장부부터 맞추시고요.”

영원은 발끝을 세우고 수련보다 더 조심스러운 얼굴로 살금살금 들어가 늘 앉는 의자에 앉았다. 자리에 앉아서 몇 번 방향을 틀더니, 어느 쪽으로 앉아도 이동을 보려면 고개를 틀고 봐야 하자 다시 살금살금 일어나서 의자를 이동 맞은편으로 옮겨놓고 다시 앉았다. 그러고는 의자에 깊이 앉아서 자세를 몇 번 바꾸고는 다리를 틀고 고개를 꺾어서, 밖에 내리는 폭우보다 더 급하게 타닥타닥 주판을 튕기는 이동을 바라봤다.

주판 소리가 가끔 멎을 때마다 이동은 글 한 줄씩 썼다. 이어서 이각 정도 주판 소리가 이어진 후에 이동이 드디어 주판을 밀어놓고 글을 쓰고 장부를 덮었다.

“어머니에게 드리렴.”

이동은 멀쩡한데, 영원이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아이고, 힘들어라. 장부는 다 맞췄고요?”

“나한테 보내는 건 다 맞출 수 있는 거예요. 뭐 했길래 힘드세요?”

이동이 일어서서 굳은 목과 팔을 풀 겸 차를 직접 내리러 갔다.

“나도 한 잔 줘요. 낭자가 장부 맞추는 걸 봐서 그렇지. 타닥타닥 주판 튕기는 것만 봐도 내가 다 힘들구만.”

영원이 한 손을 뻗더니 허공에서 바람이라도 일으킬 듯이 흔들었다. 이동은 그런 그를 흘겨보고는 다른 찻잔에 차 가루를 넣으려던 손을 멈추고 자기 차만 내린 다음 녹매를 바라봤다.

“영 칠야에게 차 내려드리렴.”

녹매는 영원이 휘적거리는 걸 보며 웃음을 참으면서 다가가 차를 내렸다. 확실하진 않지만, 어쩐지 이 영 칠야만 오면 대낭자가 평소보다 훨씬 활발해 보였다. 강가에서 넘어진 후로 대낭자는 예전과 다르게 칠, 팔십 먹은 할머니처럼 침울했었는데.

“참 존경스럽단 말이지.”

영원이 차를 받으며 과장된 표정으로 이동을 바라보며 칭찬했다. 이동은 눈살을 찌푸리고 그를 바라봤다. 이어서 하려는 말, 분명 좋은 말이 아니겠지.

“내가 이렇게 빤히 보는데, 아무도 없는 듯이 장부만 맞추다니, 대단해. 나라면 절대로 안 되지. 내가 무술 수련할 때 당신이 옆에서 이렇게 보고만 있어도 엉망진창이 되었을 텐데. 호흡도 흐트러지고.”

영원은 살짝 숨을 죽이고 이동을 빤히 보며 반응을 기다렸다. 이동은 아예 상대하지 않고 영원 맞은편 폭신폭신한 팔걸이의자에 앉아서 차를 마시며 영원을 바라봤다.

“또 무슨 일인가요.”

“낭자를 만나러 왔지.”

영원의 눈빛에 살짝 실망한 기색이 스치다가 금세 사라졌다.

“볼일 없으면 오면 안 되나?”

“볼일 없으면 여기서 함께 잡담하지 않을래요. 며칠 뒤에 우리 집에서 문회, 꽃 연회를 열어야 해요. 처음 하는 일이라 할 일이 많아요.”

이동은 찻잔을 내려놓더니 돌려보낼 듯이 자리에서 일었다.

“볼일 있소, 있어!”

영원이 다급하게 고함쳤다.

“낭자도 참. 그냥 해본 말인데 진짜로 여기지 맙시다. 볼일 없이 찾아올 리가 있나. 당연히 볼일이 있지. 큰일이!”

이동은 다시 자리에 앉아서 어이없는 듯 영원을 바라봤다. 녹매는 영원을 힐끔 보고 또 이동을 바라보고는 조용히 물러나서 옆방으로 들어가 대기했다.

“무슨 일이에요. 말해요.”

녹매가 나간 걸 보고 이동이 물었다.

“명가 그 낭자, 오늘 만났습니까?”

영원이 몸을 조금 일으키고 어깨를 몇 번 으쓱이며 단정하게 앉아서 진지한 얼굴로 물었다.

“네. 영리하고 냉철하고 우아하고 활달했어요. 글공부를 많이 했고요.”

이동은 명 삼낭자 이야기가 나오자 조금 씁쓸해졌다. 묵칠은 확실히 그녀와 어울리지 않았다. 그녀와 묵칠은 기껏해야 깍듯한 사이나 될까, 마주 앉아 할 말이 없을 듯했다.

“묵칠과 어울릴 것 같습니까?”

영원이 이동의 안색을 바짝 살피며 물었다.

“묵칠 상대로는 조금 아까워요.”

잠시 침묵하다가 이동이 살며시 한숨을 내쉬며 대답했다.

“그럼 묵칠에게 어울릴 만한 낭자는 찾았고?”

아깝다는 이동의 말에 영원은 즐거운 듯 손가락을 튕기며 이어서 물었다. 이동은 잠시 생각했다.

“오늘 여 승상부에 온 낭자 중에…… 해 이낭자는 분명 묵칠이 눈에 안 찰 거고, 조 구낭자도 분명 그럴 거예요. 초 삼낭자는 더 말할 것도 없고. 주 팔낭자는 생각이 너무 단순하고, 또 형국공부 낭자라서 안 되고. 해 삼낭자는 말수가 너무 적은 데다가 너무 잘 참아요. 모든 걸 가슴에 쌓아둘 거예요. 큰일이든 작은 일이든 입을 열고 나서는 법이 없는데, 묵칠 같은 그 무법천지인 분이랑 어떻게 살지 정말 모르겠네요. 탕 오낭자는 가문이 묵 승상댁과 너무 차이가 나요. 경성에 온 지도 얼마 되지 않았고요. 오늘 온 낭자는 이게 다예요.”

이동이 하나하나 싹 이야기하자 영원은 감탄한 얼굴로 그녀를 바라봤다.

“잠깐 사이에 모든 이의 성품, 성격을 이렇게까지 꿰뚫어 봤습니까? 안목이 정말 대단합니다!”

영원은 이동을 향해 엄지를 치켜들었다.

“그럼 그 해가 삼낭자, 주가 소육하고는 어떨 것 같습니까? 해 삼낭자가 해 상서의 친손녀는 아니라지만, 어릴 때부터 친손녀와 함께 자라서 친손녀와 비슷하지 않습니다. 주택헌은 해 상서와 사돈을 맺는다면 바라 마지않을 텐데요.”

이동이 고개를 저었다.

“제 생각엔 인품을 따지면 주 육소야는 묵 칠소야보다 더 못해요. 해 삼낭자가 주가에 들어가면…….”

이동은 잠시 말을 멈췄다가 다시 이었다.

“주가는 평온한 가문이 아닌데, 해 삼낭자의 성격이라면 무슨 일이든 꾹 삼키고 참을 거예요. 몇 년이나 참을 수 있겠어요.”

“고서강이 그 탕가 오낭자를 어느 가문과 엮으려고 할지 모르겠군.”

영원이 턱을 문질렀다.

이동은 어머니가 했던 말을 떠올리며 잠시 침묵하다가 나직이 말했다.

“탕 오낭자의 어머니 상 대내내는 오낭자의 혼사를 어머니에게 맡기고 싶어 해요.”

이동은 상 대내내의 어려움을 나지막이 이야기했다.

“제 모친이 원래 마음이 여린 데다 제가 작년에 겪은 일도 있어서 약속하셨대요. 기회가 있을지 저와 상의해 보겠다고요.”

“그야 쉽지. 그쪽에서 마음에 든 혼처가 있으면 낭자가 장공주에게 부탁해서 중매서게 하면 됩니다. 장공주는 사실 이런 떠들썩한 일을 좋아해요.”

영원이 피식 웃자 이동이 그를 흘겨봤다.

“지금 어떤 상황인지 모르는 것도 아니면서. 탕 오낭자 뒤에 고가가 얽힌 게 아니면 어려울 일도 없어요. 하지만 뒤에 고가가 있고, 태자가 있어요. 장공주한테 부탁하라니, 얼마나 난처해지라고요.”

“깊게 생각할 것 없어요. 장공주 같은 분은 아무리 봐도 뭘 두려워할 사람 같지 않은걸요. 오히려 무슨 일이 있길 찾고 싶어서 눈이 반짝일 텐데……. 예, 예. 낭자 말이 맞습니다. 내가 잘못했어요. 다 내가 헛소리한 겁니다.”

영원은 말하다 말고 이동의 화난 눈빛을 보고 얼른 말을 바꾸고 잘못을 인정했다.

“장공주 생각하면 당연히 그래야지요. 내가 잘못했습니다. 낭자는 너그러운 사람이니 이런 걸로 따지지 맙시다. 그냥 헛소리했거니 합시다. 그럼 이렇게 합시다. 탕가는 상인 가문이지요? 상 대내내가 마음에 든 집안이 있으면 나에게 말해요. 내가 중매 서겠습니다. 어때요? 내가 사과하는 뜻으로 말입니다.”

“중매요? 당신이요? 일 망치는 재주는 있지만 성사는 그저 그렇던걸요.”

이동이 코웃음 쳤다.

“그럼 이렇게 합시다. 탕가와 고가에서 거론하는 혼처, 상 대내내가 고개를 끄덕이지 않은 이상 망칩시다. 이건 되겠지요? 일 망치는 내 재주를 발휘해서 말이지.”

영원이 이때다 싶어 다시 알랑거리자 이동은 헛웃음이 나와서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이 영 칠야, 능청 떠는 재주 정말 감탄이 나온다니까.

“그럼 내 혼사는요? 내 상대로 마음에 든 낭자는 없고요? 미리 말해두는데, 해가 이낭자 어쩌고는 내가 이미 수소문했습니다. 속셈이 너무 많고 지나치게 영리해요. 아니지, 자기가 조금 총명한 걸 알고 너무 거들먹거려요. 세상이 손바닥에 있고 온 경성 사람을 제 바둑돌로 굴릴 수 있다고 생각해요. 정말 멍청하지. 그런 사람을 내게 들이밀 생각은 하지도 말아요. 다른 사람, 누구 마음에 든 사람은 없고?”

영원은 조마조마한 마음으로 이동을 빤히 바라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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