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43화: 봄바람과 시달림
이신이 저택으로 돌아왔을 때, 문 이야는 제철 요리 몇 가지와 양고기가 가득한 탕을 차린 상 앞에 주전자 하나 술잔 두 개 놓고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이신은 손을 닦고 문 이야 맞은편에 앉았다. 문 이야는 술을 따라주고 젓가락을 들며 눈짓했다.
“일단 좀 들게. 문회 시간이 길어졌는데, 배고프겠군.”
“그러게요. 배가 고프네요.”
이신은 파와 향채가 담긴 그릇을 들어 올려 보글보글 끓는 양고기 탕부터 한 그릇 떠서 식히면서 춘병을 집어 콩나물, 호박 채, 목이버섯, 닭고기 채를 말아 연달아 두 개 먹은 다음 양고기 탕도 마시고 길게 숨을 내뱉었다. 배불리 먹으니 참으로 편안했다.
“오늘 문회에서 어떤 재미난 일이 있었는지 이야기해보게.”
문 이야는 이신이 배불리 먹은 걸 보고 술잔을 들어 올리면서 웃으며 물었다.
“꽤 있었습니다. 주 육소야가 전에 계 대랑과 내기 하나를 했는데 말입니다.”
이신이 술을 홀짝이며 하는 말에 문 이야는 얼떨떨해졌다.
“무슨 내기?”
“저도 잊었고, 계 대랑이 자기도 잊었다고 하더군요. 계 대랑이 어떤 위인인지 선생도 아시겠지만, 그 엄정한 사람이 잊었다고 하는 걸 보면 정말로 잊은 겁니다.”
“아.”
이신이 여기까지 말하고서야 문 이야도 무슨 내기인지 떠올렸다.
“주 육소야가 먼저 찾아와 사과하면서 내기 이야기를 꺼냈습니다. 계 대랑은 매우 의외라고 생각했지요. 전에 주 육소야를 얕잡아 봤다고, 적어도 신용 있는 사람이라고 몇 번이나 감탄하던걸요.”
이신이 웃음을 터트렸다.
“여 대랑도 감탄했어요. 자기도 사람을 잘못 봤다고요. 계 대랑이 그 내기로 찾아가도 주육은 깔끔하게 발뺌할 줄 알았다고요.”
“주 육소야 자기 뜻이 아닐 듯하이.”
문 이야가 느릿느릿 하는 말에 이신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 뒤에 이런 일이 있었습니다.”
이신은 고자의가 물고 늘어지자 영원이 말을 꺼낸 일, 영원이 화살 한 발에 해당화 나무를 맞춘 일, 퉁소, 피리 분 일, 그리고 그가 했던 말을 하나도 빠짐없이 말했다.
“수완이 대단하군.”
문 이야는 잠시 곱씹어 보고는 손뼉 치며 감탄했다.
“음. 이 일을 빌려 수완을 부린 건 알지만, 시종일관 싫은 느낌은 하나 없고 오히려 존경스러웠습니다. 저는 그 점이 제일 대단하게 느껴집니다.”
이신은 영원이 대수롭지 않게 쏜 활, 했던 말, 그리고 느긋하게 퉁소, 피리를 불던 걸 떠올렸다. 단지 잘생겨서 멋져 보인 게 아니지 않은가.
“그가 부린 수완에 진실이 있고 진의가 있네.”
문 이야는 대수롭지 않게 한마디 하고는 양손을 맞잡고 빠르게 두 엄지를 마주쳤다.
“진왕이 오늘 선덕문으로 입궁해서 동화문으로 나왔네. 보록궁에 들른 거겠지.”
문 이야가 화제를 돌리듯 하는 말에 이신이 눈살을 살며시 찌푸렸다. 잠시 후 문 이야가 돌연 물었다.
“진왕이 요즘 제법 절도 있게 움직이고 있네. 자네는 어떻게 생각하나?”
“저는 막 서길사 시험을 본지라, 당분간은 아직 오황자를 가르칠 자격이 없을 겁니다.”
이신이 주저하다 하는 말에 문 이야가 고개를 끄덕였다. 무슨 말인지 알아들었다. 아직 오황자를 만나지 못해서, 오황자를 파악하지 못했다는 말이었다.
문 이야는 잠시 침묵하다가 상반신을 살짝 기울였다.
“방법이 하나 있지. 계가에서 여는 문회에 오황자가 참석해도 되지 않겠나.”
이신은 멈칫하다가 미간을 찌푸렸다.
“오황자가 계가에 가면 너무 눈에 띄지 않을까요? 어찌 됐든 영 황후와 오황자는 이제 막 경성으로 돌아왔고, 황상은…….”
황상이 영 황후와 오황자를 어떻게 생각하는지 아직은 알 수 없었다. 다른 사람은 몰라도 행여 황상을 거스르게 되면…….
“진왕이 요즘 갈수록 두각을 드러내네. 초 승상이 입각한 것도 조정 사람 눈엔 계 천관 혼자 힘으로 여기겠지. 지금 조정은 태평하기만 하네. 진왕과 계 천관은 예전에도 조용하고 겸손해 왔지만, 지금은 전보다 더 조용하고 겸손히 지내지. 태자의 안목으로는 지금 이런 상태의 위기를 읽지 못할 걸세. 조금 안목이 있는 고 사사는 응어리가 생겨서 온 신경을 형국공과 수국공에 쏟고 있을 걸세.”
문 이야는 매우 느리게 말을 이었다.
“태자 눈엔 안 보이고, 고 사사는 형국공, 수국공과 엉겨 싸우느라 당분간 신경 쓸 겨를이 없네. 오황자가 계속 조용히 지내기만 한다면, 그러는 사이에 진왕은 계 천관의 지도하에 낙숫물이 돌을 뚫듯이 조금씩 조정 사람의 신임을 얻을 걸세. 어찌 됐든 장성한 황자니까.”
이신의 표정이 갈수록 냉엄해졌다.
“진왕은 별문제만 없으면 태평한 왕야, 태평한 천자 역할은 꽤 그럴싸하게 할 사람이네. 내 생각엔 영 칠야가 이 위기를 읽어내고 돌연 활시위를 당긴 걸세. 오황자를 계가로 데리고 가 얼굴 내밀게 하는 일, 아마 기꺼이 원할 걸세.”
문 이야의 눈이 가늘어졌다. 그는 정말로 영원을 좋게 봤다. 지음이라는 느낌도 들고.
“만일 태자가 오황자를 주목한다면…….”
이신은 거기에서 입을 다물었다. 만일 태자와 오황자, 영원이 맞서서 양쪽이 파멸한다면 진왕은 그야말로 어부지리를 얻게 된다.
문 이야가 빙그레 웃었다.
“왕야 한 분 더 있는 걸 잊지 말게. 위리안치되었다고는 하나, 위리안치되었다가 일대 성군이 된 천자도 있네. 담장 안에 계신 그분은 주제 파악이 무엇인지 모르는 분이거든. 영 칠야는 흙탕물 휘젓는 데 천재일세.”
이신은 웃음을 터트렸다. 맞는 말이었다. 시시비비를 일으켜서 멀쩡한 국면을 엉망으로 만들고 엉망인 형국을 되살리는 데에 영원은 확실히 천부적인 재능이 있었다.
대상국사의 가장 구석 깊은 곳에 있는 허름하고 낡은 뜨락 계단 위, 강환장이 안을 바라보며 문 앞에 앉아 있었다. 너무 피로해서 얼굴이 다 누렇게 떴다. 눈은 퀭하고 입술은 다 터진 것이 수행 중인 승려 같은 모습이었다.
지객승 무지는 팔짱을 낀 채 고민 가득한 얼굴로 강환장의 뒷모습을 바라보고 있었다. 이번 달로 들어서자마자 강환장이 여기서 이러고 있었다. 이 뜨락에 오랜 시간 폐관한 고승이 곧 출관한다나. 그 고승과 인연이 있어서 꼭 만나야 한다고. 오랫동안 비어있던 이 낡은 뜨락에 무슨 고승이 있다는 건지.
전에도 이상해 보였는데 이제 보니 거의 미쳐가는 듯했다.
무지는 한참 들여다보다가 한숨을 내쉬고 눈 질끈 감고 앞으로 다가갔다. 몇 번째인지 모르지만, 아무튼 또 그를 달랬다.
“강 장사, 안색이 안 좋습니다. 돌아가세요. 이렇게 시달려서 어찌 버티시려고요. 이 뜨락은 비었습니다. 강 장사도 들어가서 보셨잖습니까. 돌아가세요.”
강환장은 들리지 않는 듯했고, 무지는 길게 한숨을 내쉬고 곁에 웅크리고 앉아서 계속 설득했다.
“강 장사, 대체 무슨 응어리가 진 건지 소승은 모르지만, 계속 여기 앉아 있어도 아무런 소용이 없습니다. 돌아가세요. 하늘 좀 보세요. 밤에 분명 비가 내릴 겁니다. 거참. 이렇게 시달렸는데 밤에 비라도 맞으면 분명 병이 듭니다. 정말 빈 뜨락입니다. 몇십 년 비어있었어요. 전엔 어느 고승이 한동안 살았다고는 하는데, 예전에 작고하셨습니다. 이 뜨락엔 정말 사람이 없어요. 강 장사, 돌아가세요. 무슨 일이 생긴 건지 모르지만, 이런 식으로 스스로 괴롭히는 건 아닙니다.”
강환장이 그제야 꽉 잠긴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설득할 것 없습니다. 이 뜨락, 스님은 지금 무슨 일인지 모르지만, 나는 압니다. 무슨 일이 있어도 한 번 만나야 합니다. 반드시 만나야 합니다!”
강환장의 지극히 단호한 말에 무지는 반질반질한 머리를 쓰다듬었다. 이분이 정말 미치셨나!
무지는 일어서서 강환장을 내려다보며 연거푸 한숨을 내쉬고는 돌아서서 방장실로 향했다.
기별하고 안으로 들어갔더니 방석에 정좌한 청공 큰스님이 눈을 뜨고 온화하고 맑은 눈빛으로 무지를 바라봤다.
“저마다 겪어야 하는 업이 있다. 슬퍼하지 말아라.”
“예.”
무지는 깊이 숨을 들이마셨다. 순간 마음이 훨씬 홀가분해졌다.
“따뜻한 탕을 보내주어라. 화로를 가지고 가서 차 한 주전자 끓여주고. 밤에 비가 올 듯하니 사형 몇 명과 함께 비 피할 천막 하나 쳐주고.”
청공 큰스님이 온화하게 분부했다.
“예.”
무지는 공손하게 대답하고 물러가려다가 갑자기 물었다.
“스님, 그 뜨락에 정말로 폐관하는 사람이 있습니까?”
청공은 그를 향해 빙그레 미소 지어 보였다.
“늦었다. 어서 가 보아라. 비 맞지 않게 천막 잘 쳐주고.”
무지는 멈칫하다가 방장실에서 나왔다. 밖으로 나가서 잠시 더 멍하니 있다가 탕과 밥을 가지러 부엌으로 향했다.
영원과 묵칠, 주육은 여 승상부에서 나와서 적당한 곳을 찾아 또 한바탕 먹고 마신 후에 하늘이 뉘엿뉘엿 기울 때 각자 저택으로 돌아갔다.
영원은 우선 경부 관아에 들러 동화문을 통해 궁으로 들어가서 주변을 휘이 둘러 본 후에야 정북후부로 향했다.
막 저택으로 들어가자 유월이 마중 나와서 영원의 뒤를 따라 영원의 거처로 향하며 오늘 일어난 크고 작은 일을 고했다.
“진왕야가 오늘 보록궁에 들렀습니다. 사시 정각에 들어갔다가 일각에 나왔습니다. 연경궁을 지날 때 당직 내시를 불러 오황자의 생활이 어떤지 물으며 관심 보였습니다.”
영원이 살짝 서늘한 얼굴로 코웃음 쳤다.
“강환장은 오늘도 대상국사에 있습니다. 밤에 비가 올 것 같다고 청공 큰스님이 천막을 쳐주라고 분부했답니다. 이미 꼴이 말이 아니랍니다.”
영원이 곧바로 걸음을 멈추고 잠시 침묵하다가 입을 열었다.
“그 뜨락에 이상한 점이 대체 있는 거냐 없는 거냐? 아직도 별다른 소식이 없고?”
유월은 자책하는 가운데 은근히 불안했다.
“쓸 만한 것이 없습니다. 소인이 오늘 대상국사 뒷골목의 다포 몇 군데에서 두어 시진 소문을 캐고 대상국사 뒷문을 지키고 있었습니다. 사찰 안으로 물건 가지고 들어가는 사람을 보면 다 붙잡고 말을 붙여 봤는데, 그 뜨락에 관해 아는 사람이 거의 없었습니다. 몇몇 아는 사람도 줄곧 빈 뜨락이라고 합니다. 대상국사에 이렇게 빈 뜨락이 여러 곳 있답니다. 뜨락이 외진 곳에 있으니 빈 것이 당연하답니다.”
영원이 정신을 집중하고 듣고 있자, 유월도 쓸모 있든 없든 몽땅 보고했다.
“그나마 뭐라도 들은 건 절에 꽃을 넣는 어멈인데, 첫마디가 자기 나이가 일흔이고 그 뜨락에 꽃을 몇 번 넣은 적 있답니다. 그때 그 뜨락에 누가 살았는지, 언제 꽃을 넣었는지, 무슨 꽃을 넣었는지 물었더니 그건 또 우물우물 제대로 대답하지 못했습니다. 계속해서 자기 꽃이 좋다, 신선하다, 깨끗하다 이 말만 반복했습니다.”
“그 어멈을 찾아내서 무슨 수를 쓰든 제대로 알아내라. 언제 꽃을 넣었는지, 그때 누가 살고 있었는지, 무슨 꽃을 넣었는지, 왜 넣었는지, 자세할수록 좋다.”
영원이 분부하자 유월은 공손하게 뒷걸음쳐 밖으로 나갔다.
거처로 돌아간 영원은 옷을 갈아입고 후원에서 권법 수련하고 저녁 일과를 마친 후 돌아와서 목욕했다. 그러고는 고르고 또 고른 끝에 월백색 소주 장삼을 골라 입고 밖으로 나가려다가 밤에 비가 온다고 했던 유월의 말을 떠올리고 대영에게 분부해서 들고나온 두봉 중에 얇은 짙은 회색 직금 두봉을 걸치고 대영에게 마차를 준비시키고 각문에서 마차를 타고 이동의 저택으로 직행했다.
대영이 각문을 비틀어 열자, 영원이 재빠르게 뛰어 들어가서 주변을 살피고 빠른 걸음으로 곧장 이동의 거처로 향했다.
가는 길에 등롱을 든 어멈, 혹은 둘둘 짝지어 오가는 시녀들을 수시로 만날 때면, 영원은 경계하며 전후좌우를 살피며 이리저리 몸을 숨기며 직진했다. 성 밖 자등 산장이 그리웠다. 넓기도 하고 얼마나 좋은 장원이었나. 이 저택은 작아도 너무 작아서 수시로 사람과 마주치는 것을.
이동 거처 후각문이 가까워지자 영원은 살며시 숨을 내뱉으며 주위를 둘러보고 돌진하려고 하는데 바람에 나뭇잎이 살랑살랑 흔들리는 만개한 동백꽃 나무 뒤에서 문 이야가 빙그레 웃으며 나타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