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금동-339화 (339/463)

339화: 자등병

호수 맞은편에서 작은 배가 이쪽으로 다가오고 있었다. 정자 안에 있던 낭자들은 서로 흔들어대느라 말하는 것도 잊고 놀란 얼굴로 작은 배와 작은 배에 탄 사람들을 바라봤다.

배가 가까워지니 배에 갖가지 악기를 안고 탄 여인들이 보였다. 옷차림을 보니 여 승상부 시녀 같진 않았다.

“기녀 같은데. 맨 앞에, 운수 같아!”

식견 넓은 해 이낭자가 가장 먼저 놀라 고함쳤다.

“운수 맞아. 뭐 하려는 거지?”

운수의 창을 들어본 적 있는 묵 육낭자도 그녀를 알아봤다. 묵 육낭자의 말이 끝나자마자 운수가 정자를 향해 다가온 배 위에 서서 깊이 무릎을 구부렸다.

“나리들의 분부로 운수가 노래를 바치러 왔습니다. 아까 화살에 낭자들이 놀라셨을 거라고, 제가 명을 받고 노래로 사과하러 왔어요.”

말이 끝나기도 전에 작은 배가 어느새 정자 가까운 곳에 멈추더니 금소리부터 울렸다. 운수는 지금 가장 유행하는 우아한 곡조를 노래했다.

노래 한 곡조가 끝나자 해 이낭자가 난간에 엎드린 채 웃으며 물었다.

“이 곡을 네가 고른 거냐, 아니면 저쪽에 있는 어느 나리가 이 곡으로 하라고 정해준 거냐?”

“계 공자가 분부하셨어요.”

운수가 생글생글 웃으며 공손하게 대답했다.

“그렇겠지. 정말 고상하고 우아하네.”

초 삼낭자가 툭 칭찬하자 해 이낭자가 힐끔 돌아보고는 눈을 깜빡였다. 초 삼낭자는 순간 얼굴이 붉어졌다.

명 삼낭자는 아직도 곡조에 취해서 살며시 한숨 쉬면서 묵 육낭자와 나직이 말했다.

“제일 좋아하는 시야. 청아하면서 발랄하고. 저 기녀, 참 잘 부르네.”

이동은 아경의에 몸을 틀고 앉아서 턱을 괴고 기분 좋게 들었다. 계 공자가 이렇게 봄기운이 가득한, 즐겁고 발랄한 곡으로 고르다니. 심경이 예전과 크게 달라진 듯했다.

이동의 입가에 미소가 서서히 번졌다.

“그럼 다음 곡은? 누가 골랐지? 어떤 곡이야?”

해 이낭자가 이어서 묻자 운수가 무릎을 구부리며 대답했다.

“낭자들이 분부해 주세요.”

“계 탐화만 골랐단 말이야? 여 장원은 사과의 뜻으로 한 곡 고르지 않았고? 장원이자 오늘 연회 주인인데, 여 장원이야말로 한 곡 골라서 사과해야 하는 것 아닌가. 어서 가서 이 말 전하렴. 아무런 표시도 없어서 우리가 다 불만이라고.”

“그러게! 얼른 가서 전하렴!”

조 구낭자가 덩달아 시끄럽게 외치자 운수가 빙그레 웃으며 배를 돌리라고 눈짓했다.

“난 불만은 없어. 하지만…… 됐다. 네가 불만이라면 나도 불만인 거지.”

초 삼낭자는 입을 비죽이다가 이내 내려놓았다. 해 이낭자가 이런 성격이지. 됐다, 됐어.

묵 육낭자는 미안한 듯 명 삼낭자에게 나지막이 설명했다.

“해 낭자가 성격이 저래. 나서는 걸 좋아해. 다 같이 나가면, 자기가 좋으면 다들 좋아한다고 말하고, 자기가 언짢으면 남들도 다 언짢다고 해. 우린 다 성격을 알아서 신경 쓰지 않아.”

“난 괜찮아. 이게 뭐라고. 네가 미안할 일도 아니잖아. 너도 참. 생각이 너무 많아.”

명 삼낭자도 나지막이 대답했다. 묵 육낭자가 웃으며 한숨을 내쉬었다.

“에휴. 내가 이래. 여기서는 괜찮은데, 우리 저택 연회였다면 한 사람이라도 언짢으면 너무 미안해. 오늘 언니는 나랑 온 거니까, 언니가 언짢으면 내 잘못이잖아. 내가 언니를 잘 돌보지 못한 거고.”

“이게 왜 네 탓이야. 이런 식이면 얼마나 피곤하겠어!”

명 삼낭자는 기도 차고 우습기도 했다.

“응. 할머니도 자주 그렇게 말씀하셔. 마음을 이렇게 써서, 나중에 혼인해서 며느리가 되면 얼마나 고생하겠냐고.”

묵 육낭자가 웃으며 이야기했다.

이동은 정신이 딴 데 팔린 듯이 조 구낭자와 이야기하면서 수시로 호수 너머를 힐끔 보는 해 이낭자를 바라보며 눈살을 찌푸렸다.

어쩐지 눈앞에 있는 해 이낭자와 예전의 해 대내내가 자꾸 다르게 느껴졌다. 지아비를 잃고 집안이 몰락한 변화를 겪어서 다르게 느껴지는 게 아니었다. 뼛속에서, 본성에서 느껴지는 다름이었다.

그런데 다른 것 같긴 한데, 어디가 다른지 콕 집어 말할 수는 없었다.

운수의 작은 배는 곧 돌아왔고 운수가 뱃머리에 서서 대답했다.

“낭자들, 여 공자가 갑자기 생각하려고 하니 좋은 곡이 떠오르지 않으신대요. 그랬더니 영 칠야가, 소인이 창하는 것으로 사과하는 건 예의에도 어긋나고 성의가 없다고 하셨어요. 여 공자와 나리들이 상의한 끝에 말씀 전하라고 하셨어요. 여 공자와 영 칠야, 그리고 계 공자, 이 대야, 진 대야, 묵 칠소야와 주 육소야, 또 나머지 나리들이 같이 한 곡 연주해서 사과드리겠답니다.”

정자 안이 순간 떠들썩해졌다. 해 이낭자는 얼굴이 발그레해지고 두 눈이 반짝였다.

이건 나를 존중해주는 의미지?

“다 금을 탄대? 영 칠야는?”

주 팔낭자가 얼른 묻자 운수가 웃으며 대답했다.

“소인이 말씀 전하려고 배를 탔을 때 나리들은 한창 왁자지껄 떠들 뿐, 어떤 악기를 쓸지 결정하지 않으셨어요.”

“칠 오라버니는 장구 칠 줄밖에 몰라.”

온 정자가 웃고 떠드는 가운데 묵 육낭자가 속삭이는 말에 명 삼낭자의 미소가 굳고 짙게 실망하는 기색이 스쳤다.

“다들 어떤 악기를 쓰는지, 네가 다시 한번 다녀오렴. 틀리면 우리가 바로 안다고 전해!”

해 이낭자가 다시 분부하자 운수가 명을 받고 돌아갔다.

이동은 몸을 틀고 앉아서 찻잔을 든 채 영원은 무슨 악기를 쓸지 가늠했다.

영원 같은 사내는 북이 가장 알맞지 않을까.

운수가 또 다녀와서 작은 배가 정자에 멈추자 호수 맞은편에서 음악 소리가 울렸다.

예를 올리고 막 입을 열려던 운수가 입을 닫자 해 이낭자가 음악을 들으면서 운수에게 말했다.

“이야기하렴.”

“예. 초미금은 여 공자, 퉁소는 계 공자, 영 칠야는 피리, 이 대야는 이호(二胡: 호금胡琴의 일종으로, 현弦이 둘이고 음이 낮은 악기), 진 대야도 금, 주 육소야는 비파, 묵 칠소야는 장구, 고 공자, 조 공자와 손 공자도 모두 금입니다.”

수준은 그리 높지 않으나 격식은 높은 이 연주를 낭자들이 감상하는 데 방해되지 않도록, 운수는 간결하고 빠르게 대답했다.

“금이 뭐 그리 많아!”

해 이낭자는 매우 불만스러워 보였다. 이 많은 금 소리 중에 누가 누군지 어찌 알아들어!

“피리 소리가 제일 좋네.”

주 팔낭자는 귀를 기울이고 열심히 들었다.

“나도 피리 소리가 제일 좋아요.”

탕 오낭자가 살며시 말을 이었다. 명 삼낭자는 잠시 듣다가 피식 웃었다.

“음이 다 제각각이야!”

묵 육낭자는 오라버니 묵칠처럼 음률에는 전혀 정통하지 않았다.

“좋기만 한데. 난 모르겠어.”

“넌 이런 거 좋아하지 않잖아. 내가 꽃이나 풀이 뭐가 다른지 모르는 것처럼.”

명 삼낭자가 웃으며 대답했다.

초 삼낭자는 몸을 살짝 내밀고 열심히 들었다. 음악 속에 퉁소가 가장 두드러졌다.

조 구낭자는 해 이낭자 곁에 붙어 서서 어렴풋이 들리는 이호 소리를 들으며 살짝 눈살을 찌푸렸다. 왜 이호처럼 우아한 축에 끼지도 못하는 악기를 배웠을까.

“응?”

명 삼낭자가 나직하게 ‘응?’ 소리를 내자 배 위에 있는 운수가 고개를 돌리고 맞은편을 바라봤다. 이어서 장구 소리가 또 한 번 들렸다. 이번엔 거의 모두가 장구 박자가 틀린 걸 알아들었다.

또 한 번 장구 소리가 나더니 비파 소리가 멎었다. 이어서 이호가 멎고 퉁소도 멎었다. 잠시 후 맞은편의 음악 소리 대신 우하하 웃는 소리가 들리고 묵칠의 목소리도 들렸다.

“틀렸네!”

묵 육낭자가 가슴을 두드렸다.

“드디어 틀렸어. 한참 동안 조마조마했는데.”

“이제야 틀리다니. 칠 오라버니도 이번엔 꽤 했네.”

명 삼낭자가 피식 웃다가 미소가 제대로 퍼지기도 전에 그대로 굳고 말았다. 저 사람이 집에서 점찍은 지아비라니…….

명 삼낭자를 살짝 살펴보던 이동은 그녀가 멍하니 맞은편을 바라보다가 눈을 내리까는 걸 보고 내심 안도했다. 명 삼낭자가 느끼는 바가 있는 것 같으니 일이 쉬워진다.

“잘 듣고 있었는데 하필 틀렸어! 묵 육낭자, 돌아가서 오라버니에게 제대로 이야기 좀 하렴. 너무하잖아.”

해 이낭자가 돌아서서 묵 육낭자를 향해 웃으며 나무랐다.

“정말 아깝네. 다음엔 언제 다시 들으려나.”

초 삼낭자도 매우 아쉬워했다. 그러자 조 구낭자가 웃으며 말했다.

“간단해. 다음번 연회는 계부에서 열린다던데, 그때 다시 연주하라고 하면 되지.”

초 삼낭자는 조 구낭자를 흘겨봤다. 상대하기도 싫었다. 할머니는 왜 이런 아이를 초씨 집안 며느리로 골랐을까.

“연주하다만 이 곡은 무효라고 여 공자에게 말씀드리렴. 이 빚을 잘 기억해 두라고 말이야.”

해 이낭자가 난간에 엎드려서 해사하게 웃으며 운수에게 분부했다. 운수가 대답하자 어멈이 노를 저어 맞은편으로 돌아갔다.

정자 밖에서 어멈 여럿이 찬합을 들고 들어와 상 가득 간식을 늘어놓았다. 다들 배가 고파서 일어서서 자기가 좋아하는 걸 골랐다.

조 구낭자는 매화소(酥)를 집어 올려서 무심한 척 이동 곁에 앉아서 웃으며 그녀를 바라봤다.

“언니는 왜 안 먹어요? 좋아하는 거 없어요?”

“난 간식 잘 안 먹어요.”

이동이 웃으며 대답했다. 크게 병을 앓은 후로 위장이 매우 안 좋아져서 이런 간식을 끊은 지 십수 년 되었다.

“언니, 이것 좀 먹어 봐요. 이 자등병(紫藤餠), 달지도 않고 질리지도 않고 꽃내음이 가득해요. 이에 달라붙지도 않고요. 이렇게 맛있는 간식은 처음이에요.”

탕 오낭자가 한 손에는 한입 베어 문 자등병을 들고, 다른 손에 정교한 접시를 들고 있는데 그 위에 자등병이 놓여 있었다. 이동은 사양하려다가 탕 오낭자의 가늘고 뽀얀 손을 바라보고는 접시를 받아들었다. 지금은 간식을 먹어도 된다. 먹고 싶은 대로, 먹고 싶은 걸 마음껏 먹어도 된다.

“자등병은 역시 번루 것이 제일 좋아. 이 집 매화소는 그럭저럭이네.”

조 구낭자가 한마디 품평했다.

“번루 것보다 이게 맛있어요. 우리 집 것도 이것보다 못하고. 이거 맛있어요. 언니, 먹어 봐요.”

탕 오낭자는 어느새 자등병 하나를 다 먹고 자등병을 깨문 이동을 간절하게 바라보며 그녀의 평가를 기다렸다.

“그러네. 번루 것보다 맛있어. 피는 보통인데 소가 참 괜찮네.”

이동이 자등병을 한입 베어 물고 평가했다. 눈앞의 봄날이 아름다워서인지, 아니면 정말로 자등병이 맛있어서인지, 한입 베어 물었더니 향긋한 것이 입맛이 동해서 자등병 하나를 다 먹었다.

탕 오낭자는 이동이 좋아하는 걸 보고 화사하게 웃었다.

“아, 맞아! 반루에 몇 가지 간식이 있는데, 그것도 이 피처럼 바삭하고 느끼하지 않아요. 이에도 하나도 들러붙지 않고.”

“난 청평루 간식이 제일 좋은 것 같던데요.”

두 사람이 자기 의견을 거들떠보지 않자, 조 구낭자는 조금 언짢아졌다.

“청평루는 우리하고 상관없으니까요.”

탕 오낭자는 오늘 기분이 너무 좋았다. 너무 좋아서, 이 저택에 처음 들어왔을 때 조심스러움이 사라져서 조 구낭자가 아주 조금 언짢은 걸 알아채지 못했다.

물론 이동은 눈치챘다. 하지만 봄이 다시 찾아온 아름다운 느낌에 홀딱 빠져서, 알아챘지만 상대하고 싶지 않았다.

조 구낭자도 영특한 사람인지라 그 말에 내포된 특별한 점을 알아차렸다.

“우리랑 상관없어? 무슨 말이에요? 그럼 번루, 반루는 우리랑 상관있고?”

“언니, 몰라요? 번루는 우리 집안 장사고 반루는 언니네 집안 장사예요. 당연히 상관있죠.”

탕 오낭자가 까르르 웃었다. 경성 낭자들, 왜 이렇게 큰일도 모르는 거지?

조 구낭자의 두 눈이 순식간에 휘둥그레졌다.

“반루도 언니네 거라고요?”

장사가 잘되는 주루를 따지면, 반루는 다섯 손가락 안에 들지 못한대도 열 손가락 안엔 넉넉하게 들었다. 힐수방과 마찬가지로 나날이 커지는 장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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