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36화: 봄날의 연꽃
“이 한림은 거인이 된 후로 몇 년 동안 세상을 돌며 견문을 넓히다가 춘시를 본 거라면서요?”
명 삼낭자가 이동을 바라보며 물었다.
“맞아요. 추시 전엔 줄곧 글공부를 열심히 했고, 추시 뒤에 서책은 충분히 읽었으니 길에서 배워야겠다고 생각하고 몇 년 동안 견문을 넓혔어요.”
이동은 조금 의아해하며 대답했다. 어떻게 알았지?
“할아버지가 이 한림의 책론을 보고 바로 아시더라고요. 주, 현의 실정을 잘 알고 쓴 거라고요. 대단하다고도 하셨어요.”
묵 육낭자가 이어서 하는 말에 이동은 깨달았다. 춘시는 원래 하룻밤 사이에 온 세상에 이름이 알려지는 일이다. 오라버니가 올해 4등이 되었으니 오라버니와 집안일, 과거사 모두 샅샅이 소문이 퍼졌을 것이다.
“왜 여기에 숨어 있어?”
맑고 유쾌한 목소리가 들리더니 해 이낭자가 초 삼낭자의 손을 잡고, 뒤엔 조가 구낭자가 따라서 함께 다가왔다.
“나랑 삼낭자, 구낭자가 너희를 한참 찾아다녔어. 이런 곳에 숨어 있었구나?”
탕 오낭자가 먼저 일어섰다. 자신은 해 이낭자, 초 삼낭자, 그리고 조 구낭자를 알지만, 상대가 자기를 아는지 모르는지 알지 못했다.
초 삼낭자는 탕 오낭자를 살피고는 명 삼낭자를 힐끔 보고 묵 육낭자를 향해 의아한 듯, 또 조금 신중한 느낌으로 두 사람이 누군지 물었다.
“여기는 명 삼낭자. 우리 고모부 질녀. 여기는 탕 오낭자. 탕 오낭자의 오라버니도 신진 진사래.”
묵 육낭자가 서둘러 일어나서 소개했다.
“응? 이 댁에서 오늘 모든 신진 진사를 모신 거야?”
조 구낭자가 놀라서 하는 말에 탕 오낭자의 얼굴이 붉어졌다.
“고 사사 댁 삼내내가 오낭자의 친언니예요.”
이동이 대답하며 조 구낭자를 바라봤다. 웃지 않을 수가 없었다. 예전에 조 구낭자는 고 사사의 막내 고자의와 혼인했다. 조 구낭자의 친정 조 시랑부와 시댁 고 사사부 모두 사황자에 의탁했었다. 진왕이 태자가 된 후 조가는 금방 무너졌고, 고자의는 눈치 빠르게 병을 빙자해 은퇴해서 산서로 돌아갔다. 그 후로 산서 지방 장궤가 이런저런 이야기 하는 걸 들었는데, 고 사사가 세상을 떠난 후로 고가도 금세 몰락했다고 한다. 조 구낭자와 고자의는 탕 삼내내와 탕가를 매우 떠받들었다고.
해 이낭자가 다가가 탕 오낭자의 손을 잡았다.
“다 아는 사이니까 소개할 것도 없어요. 지난번에 궁에서 오낭자를 봤을 때부터 좋아서 이야기하고 싶었는데, 그러지 못했어요. 다행히 우리가 인연이 있나 보네요. 오늘 만났잖아요.”
초 삼낭자는 탕 오낭자의 손을 붙잡고 다정하게 끊임없이 이야기하는 해 이낭자는 아예 상대하지 않고 살짝 고개를 기울이면서 이동을 바라봤다. 이동은 그녀의 시선에 생글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예전엔 여 승상과 자기 집의 옛일을 전혀 알지 못했고 여 승상부와도 거의 왕래가 없었는데, 이번에 다시 초 삼낭자를 만나니, 앞으로 그녀가 여염과 혼인할 걸 생각하면 아주 친근한 느낌이 들었다.
초 삼낭자는 이동의 따듯한 눈빛이 의아한 가운데 저도 모르게 따스한 마음이 들어서 살짝 웃으며 눈을 내리깔고 답례했다.
“여긴 볼 게 별로 없어요. 우리 호숫가로 가요.”
해 이낭자는 탕 오낭자의 손을 놓고 이동의 팔짱을 끼며 즐거운 목소리로 모두를 불렀다.
다 함께 화청에서 나간 다음 해 이낭자는 이동의 팔을 풀고 싹싹하게 모두를 챙겼다. 낭자들은 웃고 떠들면서 호숫가와 그리 멀지 않은 너른 호중정으로 들어갔다.
벌써 4월 초, 1년 중 가장 아름다운 계절이라 호수에 연꽃이 푸르렀다. 정자에 가까워지자 어느새 수면 위로 올라온 이르게 핀 연꽃과 꽃봉오리에서 풍기는 향기가 바람을 타고 날아왔다. 기분 좋고 편안한 꽃내음이었다.
이동은 물가 평대(平臺)로 다가가 허리 숙여 맑은 호수에 손을 집어넣고 물을 떠서 연잎에 부었다.
얼굴에 불어오는 포근한 바람, 맑게 찰랑이는 호수, 뾰족하게 피기 시작한 연꽃, 푸르게 펼쳐진 연꽃잎, 연꽃잎 아래 헤엄치는 물고기를 바라보고 있으니 돌연 요원하고 낯설기만 했던 어떤 느낌이 마음속 깊은 곳에서 요동쳤다. 자기도 이 봄바람, 봄의 호수, 봄날의 연꽃처럼 한창때, 청춘이라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이동은 고개를 숙이고 물에 비친 자신을 바라봤다. 연꽃처럼 보드라운 얼굴, 맑은 눈, 새카맣고 반지르르한 머리카락과 머리카락 사이에 빛나는 진주 머리 장식. 이동은 자기 손을 내려다보며 천천히 일어나서 미색 주름치마를 내려다보다가 치맛자락을 잡아당겼다. 그리고 한 손을 천천히 들어서 가녀린 허리에 올리고 산들산들 불어오는 생기 가득한 바람을 마주했다. 눈물이 날 것만 같았다.
그녀는 그야말로 이 봄바람, 봄의 호수, 봄날의 연꽃처럼 한창때 청춘이었다.
여 승상부는 그렇게 큰 편이 아니었는데, 호수를 사이에 두고 그리 떨어지지 않은 대청 안이 한창 떠들썩했다. 그 떠들썩한 중심에 여염 등 신진 진사를 제외하고 영원, 주육과 묵칠도 있었다.
주육은 혼란한 틈에 살며시 계소영 곁으로 다가가 그를 잡아끌고 조용히 상의했다.
“계 탐화, 자네는 진정한 대재자지. 대재자는 다 너그럽지? 저기, 우리가 한 내기, 이 연회에서 자네가 하라는 대로 할 테니, 그 3년 안에 성과 어쩌고 하는 건 어떻게 안 되겠냐? 그러니까, 없던 일로?”
계소영이 뭐라고 하기도 전에 고자의가 고개를 내밀었다.
“아, 네가 이야기하지 않았으면 나도 잊을 뻔했군.”
“나도 진작 잊었네.”
계소영이 웃으며 대답했다. 정말로 잊어버렸던 그는 주육이 그 일을 꺼내자 그날 일이 떠올라서 저도 모르게 웃음이 나왔다.
“자네가 이긴 내기잖아! 자네는 잊어도 나는 못 잊지!”
주육이 울상으로 말했다. 원 형님이 한 말이었다. 내기했으면 인정하라고. 내기는 져도 기세는 지면 안 된다고.
주육의 그 말에 계소영은 그를 새롭게 봤다.
“다 같이 재미로 한 것 아닌가. 진짜로 여길 것까지야…….”
계소영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고자의가 입을 틀어막았다.
“진 건 진 거지. 당연히 진짜로 여겨야 하네. 내가 증인인걸. 영 칠야도 있고. 그렇지, 영 칠야? 자네가 진짜로 여기지 않는 건 육랑을 무시하는 걸세. 안 그런가, 자네들.”
고자의가 목소리 높여 모두의 시선을 이쪽으로 끌었다. 고자의는 계소영을 흔들었다.
“이건 자네 혼자 일이 아니네. 그때 뭐라고 했더라? 사흘 동안 술 사겠다고 했던가? 그리고 그 절묘한 문장도 있지! 사흘 술 사는 건 문제도 아니지. 우리 육소야가 그 정도 돈도 없을까. 그 문장은 바로 오늘 하세. 지필묵은? 자자, 내가 읊을 테니 네가 써라. 다 쓰면 아예 곡을 붙여서 운수에게 노래하라 하자!”
이 자리에 있는 대부분 모두 그날 그 자리에 있었고, 문장을 떠올리고는 난처해서 어쩔 줄 모르는 주육을 바라보며 웃음을 터트렸다.
여염이 나서서 분위기를 풀었다.
“창은 됐네. 적은 다음에 육공자가 한 번 낭독하고 치우세. 우리 저택이 좁아서 호수 너머로 소리가 퍼질 걸세. 호수 너머엔 다 여인들인데 혹시 들리면…….”
“그럼 더 불러야지!”
고자의가 손뼉 치며 크게 웃었다. 조명헌과 손방서 무리는 주육을 놀리는 게 익숙해서 뒤에서 덩달아 좋다고 외치며 소란 피웠다.
“불러야지! 당연히 불러야지!”
“역시 창으로 듣는 게 좋지!”
묵칠이 뒤에서 칼 하나를 더 보탰다.
계소영은 뒤로 한 걸음 물러서서 고자의 무리가 농담하는 걸 느긋하게 바라봤다. 계소영과 나란히 선 이신은 조마조마해졌다. 그는 고자의가 붙들고 놓지 않는 주육의 표정을 살피며 곁눈으로 영원을 흘깃 보고는 나가서 분위기 풀 준비를 했다. 이들은 죄다 책임은 안 질 인물들이었다. 오늘은 여 승상부 연회인데 분위기가 어색해지면 곤란한 건 여염과 여 승상부였다.
여염이 주육 뒤에 서서 웃으며 말했다.
“압운(押韻)도 없는 문장인데 어찌 창을 부르겠나. 이건 육소야가 아니라 운수 소저가 난처한 일이네!”
주육이 성질이 거칠긴 해도 그래도 못 말리는 막무가내는 아니었다. 고자의와 조명헌 무리에게 붙들려서 난처해하면서도 화를 내진 못하다가 여염이 그렇게 말하자 얼른 고함쳤다.
“내 말이, 내 말이! 창을 할 수가 없어! 문장은 됐고, 내가 술 몇 잔 더 사면 어떻겠나? 엿새? 아님 아흐레? 열흘도 좋네. 창이 무슨 재미있어서. 술을 사는 게 좋지.”
이런 모임에 처음 참석하는 진안방은 조금 떨어진 곳에 서서 무리를 지켜봤다. 한데 엉킨 고자의와 주육, 주변에서 발 구르고 손뼉 쳐 부추기는 모두를 보고 있으니 저도 모르게 웃음이 나왔다.
참으로 놀 줄 아는 자들이군!
“내기했으면 인정할 줄도 알아야지. 부르라면 불러라!”
영원은 팔걸이의자에 널브러져서 긴 다리를 뻗어 발끝으로 주육을 걷어찼다.
“형님!”
주육은 똥줄이 탔다. 그 창을 온 화원 사람이 들었다가는……. 맞은편엔 어머니와 누이, 그리고 각 가문 여자 식솔도 있다. 어린 낭자들도 많은데 얼굴을 어떻게 들라고!
“다만 내가 궁리해 봤는데, 3년 성과 없고, 하는 부분은 도저히 부를 수가 없더구나. 이렇게 하자. 소육, 양일필인가 뭔가를 주소육으로 바꾸고 모두 앞에서 한 번 읽어라. 그런 다음에 소곡으로 고쳐서 노래 불러라. 퉁소 가져오너라. 내가 가락 맞춰주마.”
“내가 부르라고?”
주육이 눈을 휘둥그레 뜨고 제 코를 가리켰다.
“음, 아니면 내가 불러도 된다. 네가 퉁소를 불어라. 군자의 육예(六藝)가 있지 않으냐. 우리가 글은 잘 못 지어도 군자는 군자지. 육예 정도는 아무것도 아니다.”
영원이 대수롭지 않게 하는 말이 끝나자마자 여염이 얼른 웃으며 말했다.
“칠야의 말이 맞네. 조정 연회였다면 다들 노래하고 춤을 췄어야 마땅하지. 초미금을 가지고 오너라. 칠야, 어떤 곡으로 할 텐가. 내가 금으로 켤 수 있을지 없을지 봐야 하는데.”
“나는 장구 칠 줄 안다!”
묵칠이 찻잔을 들고 주변을 두리번거리다가 잡히는 대로 붓을 잡고서 찻잔을 두드렸다. 그 모습에 고자의가 혀를 끌끌 찼다.
“쉽게 넘어가게 되었구나! 칠야가 널 참 잘 감싸주는구나. 칠야가 그렇게 하자고 하니 그렇게 하자. 지필묵을 가지고 오너라. 됐다. 내가 대신 쓰마.”
고자의는 붓을 받아서 날 듯이 붓을 놀려 그 절묘한 문장을 써 내려가고는 먹이 마르기도 전에 들어 올려 주육에게 건넸다.
“어서 읽어라, 어서. 목소리 크게!”
호수 저쪽까지 들리게 노래할 필요 없이 그저 한 번 읽기만 하면 된다는 생각에 주육은 순간 큰 이득 봤다 싶어 얼른 종이를 받고서 목을 가다듬었다.
“주소육, 글을 배우기 시작했으나, 3년 동안 급제하지 못하여……. 내가 글공부한 게 고작 3년도 아니고, 급제하지 못한 것도 아니지! 나는 수재다! 그러니까 ‘초시는 합격했으나, 공부가 재미없어 그만두었다!’라고 해야지!”
그 자리에 있던 모두가 웃음을 터트렸고 고자의는 웃느라 목소리도 변했다.
“마음대로 고치지 말고 어서 읽어라!”
“틀렸으니 당연히 고쳐야지. 그리고 이 뒤에, 북 치는 관리를 맞혔다는 부분도 말이 안 돼. 내 화살 솜씨는 원 형님보단 못해도 표적은 당연히 맞힌다. 이것도 고쳐야 한다.”
주육은 뻔뻔하게 굴기 시작하니 한정 없이 뻔뻔해져서 종이를 흔들며 이건 안 되니 고쳐야 한다고 우겼다. 다들 더 심하게 웃었고 여염은 한 손으로 팔걸이를 잡고 한 손으로 주육을 손가락질하며 웃느라 말도 못 했다. 계소영은 웃느라 의자에 털썩 주저앉았고 이신은 눈물이 다 나왔다. 묵칠은 웃으며 주육을 두드려댔고 진안방은 숨도 제대로 쉬지 못하고 웃었다. 영원은 의자에 널브러져서 주육을 흘겨보며 싱글벙글 웃었다.
“네가 맞힌다면 맞히는 거냐?”
고자의는 그렇게 웃으면서도 말하는 걸 보면 참으로 대단했다.
“당연히 표적을 맞히지! 아니면 보여줄까? 표적을 맞히지 못하면……. 그럴 리가 있나. 분명 맞힌다.”
주육은 여 승상부에 활이 있을 리 없음을 노리고 가슴을 두드리며 장담했다. 하지만 맞히지 못하면 어쩌겠다는 말은 역시 함부로 할 수 없었다.
“장원랑! 어서 활을 가지고 나오게!”
오로지 구경하는 재미가 줄까 봐 걱정인 무리가 너도나도 한마디 하며 외치자 여염이 어깨를 으쓱했다.
“우리 집에 활이 있을 리가 있나.”
주육이 보란 듯이 웃음을 터트리자마자 영원이 느긋하게 말을 꺼냈다.
“내게 있다. 대영 있느냐? 가서 내 활을 가져오너라.”
“원 형님!”
“응? 반년 넘게 단련하지 않았냐. 아무리 그래도 표적을 못 맞히진 않을 거다. 몇 발 쏘아서 보여주어라.”
영원이 자신만만하게 손을 휘둘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