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금동-335화 (335/463)

335화: 차마

원 부인은 순간 조마조마해졌다. 하긴, 가문은 괜찮았다. 이 대랑이 전려로 급제했고 한림원에 들어갔으니 미래가 창창할 것이다. 또 이가는 큰 부자고.

하지만…… 내가 이런 생각을 왜 하나! 이가 낭자는 혼인했었는데! 강가에서 버림받은 며느리인데. 아무리 그래도 내 아들이 한 번 다녀온 여인과 혼인할 이유는 없지.

무슨 일이 있어도 동의하지 않을 것이다!

그래, 지나친 생각이겠지.

원 부인은 양손으로 가슴을 누르고 깊이 숨을 들이마시고 내쉬었다.

분명 괜한 생각일 것이다. 이 대랑과 친분이 깊어서 와서 당부한 것이리라. 이 대랑의 모친과 누이가 처음으로 이런 집안에 오는 건 맞으니까…….

하지만 만일 정말이라면? 만일 염가아가 이가 낭자를 점찍었다면? 한 번 다녀온 그 여인을 점찍었다면 어떡하나.

원 부인은 매우 혼란스러운 마음으로 이리저리 고민했다.

장 태태는 조금 이르게 도착한 무리에 들지만 또 지나치게 이르지 않을 시간을 가늠해서 이동을 데리고 여 승상부에 도착했다.

여가는 여 승상 대부터 가문을 일으킨지라, 식솔이 단출했고 원 부인과 함께 여식솔을 접대할 만한 사람이 없었다. 여염의 누이 여 이낭자 말고 다른 두 사람은 안원후부 직계 중에 여씨 가문과 친밀하게 왕래하던 두 젊은 부인이었다.

장 태태가 마차에서 내리자 원 부인이 벌써 다가와 맞이했다.

“지난번에 만났을 때가 작년 봄, 장공주의 법회 때였지요? 진작 집으로 모셔서 차 한잔하고 싶었는데 지난 한 해가 참…… 시간이 없어서…….”

지난번에 두 사람이 만난 건 영원이 막 경성에 들어와서 일당백으로 주육과 묵칠 일행을 호되게 두들겨 팬 그때였다. 하지만 그때 만난 걸 만남으로 칠 수가 있나?

“그러게 말입니다. 한 해 동안 일이 잇달아 일어났지요. 지금은 다 좋아져서 다행입니다. 이분이 이낭자인가요?”

장 태태가 체면 차리며 대답한 다음 여 이낭자를 바라보며 물었다. 홀로 오랜 시간 가문을 관리하고 거대한 장사를 도맡아서 한 사람이라 승상부라 해도 그렇게 거북해하지 않았다.

여 이낭자가 대범하게 나와서 예를 갖추자 장 태태는 이동이 건넨 비취 팔찌를 받아서 여 이낭자의 손목에 끼워주었다.

“이낭자의 영리함이 여 장원과 비교해도 손색이 없군요. 여씨 가문은 온 가문이 출중하다더니 과연 명불허전입니다. 이 팔찌는 올해 새로 만든 양식입니다. 별것 아니지만 받아주세요.”

여 이낭자는 원 부인을 한 번 돌아보고 나서야 팔찌를 쓰다듬으며 장 태태에게 예를 갖추고 받았다.

원 부인은 한눈에 보기에도 지극히 귀해 보이는 복록수(福祿壽: 행복과 부귀와 장수) 삼색 팔찌를 보고 살짝 긴장하면서 이동을 향해 웃어 보였다.

“이 낭자, 어째서 오늘도 이렇게 소박한 차림인가. 지난번에 봤을 때 말인데…….”

원 부인은 도와주러 온 안원후부의 두 젊은 부인을 돌아보며 말을 이었다.

“이 낭자가 장공주와 함께 앉아 있었는데, 장공주랑 똑같이 회색 옷을 입고 있었단다. 이렇게 훌륭한 아이가 하필……. 됐다, 됐어. 네가 이낭자와 함께 들어가서 묵 이내내에게 이낭자를 잘 돌봐 달라고 말씀드려라.”

이동이 미소 지으며 살짝 허리를 숙였다.

“괜찮습니다. 어머니랑 있으면 돼요. 이제 사람이 많이 올 시간인데 어머니랑 알아서 들어갈게요. 부인과 언니, 그리고 동생에게 수고 끼치지 않아도 됩니다.”

원 부인의 태도에서 이동은 자신을 향한 명확한 거부감과 적의를 은근히 느낄 수밖에 없었다. 대체 그 거부감과 적의가 어디에서 온 건지는 도저히 알 수 없었지만.

장 태태는 이동보다 더 민감한 사람인지라, 이동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먼저 웃으며 사양하고는 이동의 팔짱을 끼고 어멈의 안내를 받아서 화원으로 들어갔다.

몇 걸음 가다가 장 태태가 이동의 손을 잡으며 뼈 있는 말을 나직이 속삭였다.

“여 승상부의 경치가 그렇게 좋다고들 하던데, 정말이로구나. 우리 모녀, 오늘 제대로 이 경치를 감상해야겠다. 무슨 일이 있어도 경치 감상하는 걸 놓치면 안 되겠구나.”

“네, 저도 그렇게 생각해요.”

어머니가 지금은 많이 생각할 때가 아니니까 무슨 일이 생겨도 그저 보고 듣기만 하라고 당부하는 것임을 이동도 알아들었다.

화청 앞에 당도하자마자 탕 오낭자가 제 모친을 붙들고 거의 뛰쳐나오듯 나와서 두 사람을 맞이했다.

“언니! 태태!”

소리를 낮추어 인사를 건네는 탕 오낭자의 목소리에 기쁨과 안도감이 가득했다.

드디어 아는 사람이 왔구나! 게다가 분명 내게 우호적인 사람이야!

“장 태태, 오랜만이군요.”

상 대내내가 싱글벙글 웃으며 장 태태와 인사했다.

“그러게 말입니다. 상 대내내, 잘 지내셨지요? 경성에 오셨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환영회를 마련했어야 하는데, 춘시가 있어서 방해될까 봐 찾아뵙지 못했답니다.”

장 태태가 웃으며 인사치레했다. 상 대내내와 그녀는 오랜만이 아니라 처음 만나는 것이었다. 그러나 그건 중요하지 않았다. 지금 중요한 건 두 사람 모두 어려운 자리라는 점이었다.

“저도 태태 댁 대가아 춘시를 방해할까 봐 찾아뵙지 못했어요. 경성에 온 날 바로 찾아뵙고 싶었지만, 그럴 수가 없었지요!”

상 대내내는 시원시원한 성격이라 처음 만난 사람도 거리 두지 않고 친숙하게 대했다. 몇 마디 주고받은 장 태태와 어릴 때부터 함께 자란 벗처럼 친밀하게 굴었다.

“이분이 대낭자군요. 보세요, 이 두 사람, 친자매 같군요!”

상 대내내는 친밀하기 짝이 없이 이동의 팔짱을 낀 탕 오낭자를 예뻐 죽겠다는 듯 바라봤다.

“대낭자, 정말 아름답네요. 얼마 전에 오저아가 돌아와서는 내내 이가 언니가 얼마나 예쁘고 분위기는 얼마나 좋은지 모른다고 재잘재잘 대지 뭡니까. 난 또 너무 좋아서 과장한 줄 알았더니, 웬걸, 오저아가 말한 것보다 훨씬 아리땁습니다.”

말솜씨를 따지면 상 대내내가 장 태태보다 훨씬 말을 잘했다.

상 대내내에겐 같이 있을 장 태태가 있고, 장 태태에겐 대화 나눌 상 대내내가 있어서, 두 사람 모두 처음으로 경성 귀부인 모임에 들어와서 이야기 상대가 없는 어색함을 면하게 되었다. 탕 오낭자도 이동을 붙잡고 있으니 조마조마하던 마음이 완전히 진정되었다. 지난번에 궁에서 장공주의 위엄, 모든 것을 위에서 내려다보는 듯한 분위기가 너무 강렬해서 장공주와 딱 붙어 있던 이동에게서도 그런 느낌을 받았었다. 오늘 이렇게 이동의 팔짱을 끼고 있으니 이가 언니와 함께 있으면 모든 걸 손에 잡을 수 있을 것 같은 느낌이었다.

오늘 온 규수 중에, 지난번 궁에서 만남을 제외하면 이동과 일면식 있는 건 묵 육낭자뿐이었다. 이동은 오늘 이 꽃 연회에서 따로 누군가와 교제할 생각은 없고 조용히 앉아서 경치 감상이나 할 생각이었다.

전생에 무수한 꽃 연회에 참석도 하고 자신이 직접 여러 번 연회를 주최했던 이동은 슬쩍 전체 장내를 훑어보고는 곧바로 눈에 띄지 않으면서 자기는 사람과 경치를 잘 볼 수 있는 장소를 찾아냈다. 그녀는 탕 오낭자를 데리고 그쪽으로 가서 앉았다.

막 앉아서 차를 마시기 시작했는데 묵 육낭자가 열일고여덟쯤 된 미간이 화사하고 우아해 보이는 여자를 데리고 다가왔다.

“대낭자, 여기 있었네요. 금방 찾았어요.”

이동은 일어서서 묵 육낭자와 인사했다. 맞은편에 있는 명 삼낭자를 바라보니 순간 아련한 마음이 들었다. 이토록 밝은 표정인 명 칠내내는 처음이었다. 그녀 기억 속 명 칠내내는 언제나 찌푸린 미간에 고민과 절망, 서글픔을 담고 있었다.

“강남 명가 삼낭자예요.”

묵 육낭자가 웃으며 소개하고는 명 삼낭자에게 탕 오낭자를 소개했다. 상 대내내의 말발을 물려받은 탕 오낭자는 명 삼낭자를 보자마자 혀를 내두르며 감탄했다.

“책에서 선녀 같은 사람 이야기하면 아무리 생각해도 사람이 어떻게 선녀 같을 수 있을지 상상되지 않았는데, 언니를 보니까 알겠네요. 언니, 이슬 마셔요?”

명 삼낭자는 얼떨떨해하다가 이내 헛웃음 쳤다.

“이슬은 무슨요. 이슬로 차를 내린 적은 있어요.”

네 사람은 다시 자리에 앉았다. 이동은 생각 많은 얼굴로 묵 육낭자와 명 삼낭자를 바라봤다.

지난번에 묵 육낭자를 만났을 땐 오늘 명 삼낭자를 만난 지금처럼 강렬한 느낌이 별로 없었는데 오늘 두 사람이 이렇게 앞에 앉아 있으니 생각이 많아졌다. 두 사람 모두 아름답고 생기발랄한, 이제 막 피어나려는 꽃봉오리였다. 예전에 그녀가 만난 묵 부인과 명 부인은 갈수록 메말라가서 곧 죽어갈 것 같은 바짝 시든 나뭇잎 같았다.

이렇게 아름답고 생기 가득한 이 두 사람이 서른 되기 전에 메말라 죽는 꼴을 차마 다시 못 볼 것 같았다.

“언니 축하해요. 언니의 오라버니가 이갑 1등으로 급제했다니. 정말 대단한 인재예요.”

이동의 맞은편에서 이동의 애틋한 눈빛을 마주한 명 삼낭자가 웃으며 축하했다.

“과찬이에요. 대단한 인재는요. 오라버니 말대로 그냥 운이 좋았어요. 학문으로 따지면 탕 오낭자의 오라버니도 우리 오라버니에 전혀 뒤지지 않아요.”

이동은 탕 오낭자의 오라비 탕 대소야 탕호우도 신진 진사라는 걸 티 나지 않게 암시했다.

“오낭자의 오라버니도 급제했어요? 축하해요!”

명 삼낭자와 묵 육낭자는 역시나 탕호우의 이름도 방에 있는 걸 알지 못했다. 눈앞에 있는 탕 오낭자가 탕호우의 여동생이라는 건 더더욱 몰랐고. 합격자 방에 이름 올리는 사람이 많지 않다고는 하나 그래도 이백여 명이니, 묵 육낭자와 명 삼낭자는 앞에 순위 몇 명과 친척, 벗의 이름을 유의했을 뿐이었다.

“대단하지 않아요.”

탕 오낭자는 기쁜 얼굴로 정중하게 말했다. 오라버니가 높은 순위로 진사가 되어 탕씨 일족 첫 번째 진사가 된 건 탕 오낭자 일가의 기쁨이라 도저히 감출 수가 없었다.

“우리 오라버니도 합격자 방에 이름을 올린 건 행운 두 글자였다고 했어요.”

“수재부터 줄곧 급제하는 건 부정 시험이 아닌 이상 하나같이 학문이 탄탄하고 큰 재주가 있는 사람이라고 아버지가 자주 말씀하셨어요. 춘시는 3년에 한 번 열리고, 한 번 열릴 때마다 불과 이삼 백 명이 급제하는데 모두 천하의 영재라고 해도 전혀 과언이 아니에요. 운도 중요하겠지만, 운만으로는 절대 안 되죠.”

명 삼낭자가 옥구슬 같은 목소리로 까르르 웃으며 말했다.

“동자시부터 줄곧 부정으로 춘시까지 급제하는 사람이 어디 있어. 그럴 재주가 있으면 아예 과거를 볼 필요도 없지.”

세심한 묵 육낭자는 행여 명 삼낭자의 부정 시험이라는 말이 누군가를 거스를까 봐 얼른 덧붙였다.

“부정을 저지를 수 있을 형편이면 좋겠네요.”

오늘 탕 오낭자는 지난번에 궁에 있던 탕 오낭자와 달리 말도 잘하고 웃기도 잘했다.

“우리 아버지는 추시, 춘시를 돈으로 살 수 있으면 좋겠다고 자주 말씀하세요. 은자는 얼마든지 있으니 아예 사는 게 낫다고요. 언니들은 모르겠지만, 우리 가문은 증조부 대부터 가장 큰 바람이 바로 집안에 진사가 나오는 거였어요. 올해까지 내내 바랐는데 드디어 나왔죠. 우리 오라버니는 탕씨 가문 첫 진사예요.”

묵 육낭자는 눈을 휘둥그렇게 뜨고 탕 오낭자의 말을 듣다가 피식 웃었다. 생각하는 대로 말하다니, 거짓 없는 솔직한 성격이 실로 귀하긴 했다.

“첫 번째가 나왔으니 앞으로는 어렵지 않을 거예요.”

명 삼낭자도 웃음을 터트렸다. 그녀도 조금 속물 같긴 해도 남에게 미움을 사지 않는 오낭자가 조금 마음에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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