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31화: 꽃은 누구에게로
꼬박 하루 자고 일어난 이신이 며칠 몸조리하고 기력을 회복했을 때, 고사장 밖에 방이 붙었다. 계소영, 여염과 이신의 이름 모두 앞에 나열되었고 계소영의 친척 형님 셋 중 하나는 붙고 둘이 낙방했다. 계가 네 사람 중에 둘이 붙고 계소영의 이름이 앞에 나열된 것만 해도 대단한 일이었다.
탕가 대소야 탕호우와 고서강 가문 다섯째 고자의, 그리고 예부 조 시랑 막내 조명헌도 방에 있었다. 손 학사의 장손 손방서는 낙방했지만, 나이가 어리고 첫 번째 춘시라서 조금 거북해하긴 해도 아주 많이 연연해하진 않았다.
사람을 시켜 적어온 방을 살펴본 이동은 계소영과 여염 사이에 있는 진안방의 이름을 바로 발견했다. 지난 생에 장원이었는데 올해도 장원이 될까.
방이 붙은 지 며칠 지나서 전시(殿試: 궁에서 열리는 과거 시험 마지막 관문)가 열렸다. 전시는 작은 책상이 가지런히 놓인 문덕전 안에서 열렸는데, 시험에서는 책론 하나만 봤다. 시제가 공표되자, 단정하게 앉은 시험생 대부분이 빠르게 붓을 놀렸다.
황상은 태자를 데리고 책상 사이를 지나치며 느긋하게 한 사람씩 들여다봤다. 사람도 보고 글자도 보고, 매우 흥미로운 모습이었다. 황상을 뒤따르던 태자는 고자의 곁에 다가갔을 때 고개를 틀고 한참 들여다본 후에야 걸음을 옮겼다.
전시가 끝난 뒤, 답안지를 걷어간 다음 시험생들은 순서대로 공손하게 물러나서 내시를 따라 궁에서 나갔다. 해 상서를 비롯한 시험관은 답안지를 걷어서 대전 안에서 바로 읽기 시작했다. 책론 한 편이라 심사는 매우 빠르게 끝났고, 해 상서는 부 시험관을 거느리고 이미 순서를 나열한 시험지를 들고 자극전으로 들어갔다.
“황상, 경하드립니다. 이번 전시는 모든 문장이 걸작입니다. 신들이 재삼 고려하여 일갑이 될 만한 책론 네 편을 골랐습니다. 결정 내려 주십시오, 황상.”
해 상서는 활짝 웃는 얼굴로 책론 네 편을 양손으로 바치며 황상이 천하의 인재를 조정에 더 들인 것을 축하했다.
황상이 책론을 받아들고 눈을 찌푸리고 꼼꼼히 살펴보자 태자도 덩달아 고개를 내밀고 들여다봤다. 황상은 내용을 보고 태자는 문장에 적힌 이름을 봤다.
“고자의의 책론은?”
태자는 뒤로 넘겨 봐도 고자의의 이름이 없는 걸 보고 해 상서를 돌아보며 물었다. 해 상서는 안색 하나 변하지 않고 돌아서서 부 시험관이 든 시험지 중에 고자의의 책론을 찾아서 태자에게 바쳤다. 태자는 받아서 노루글로 읽으면서 황상 앞 탁자에 내려놓고는 해 상서를 향해 말했다.
“고의 눈엔 고자의의 책론이 지극히 우수하네. 자네들이 이 좋은 문장을 놓쳤군.”
부 시험관들의 안색이 살짝 변했다. 해 상서는 여전히 미소 띤 얼굴로 고개를 끄덕이지도 변명도 하지 않고 오로지 황상이 책론을 다 읽길 기다렸다.
황상은 느긋하게 읽었지만, 전시 책론은 모두 짧아서 일각 남짓 만에 해 상서가 고른 네 편과 태자가 끼워 넣은 고자의의 책론까지 모두 읽었다.
“해 경, 자네 생각은 어떤가.”
해 상서는 예전에 황상에게 시경을 가르친 적이 있었다. 황상은 그 시절 해 상서의 둥글둥글하고 익살맞은 성격을 지금껏 좋게 기억하고 줄곧 그를 예우해 왔다.
“계소영, 진안방, 여염과 이신의 책론 모두 실행 가능성이 크고 논리가 명백하고 견해가 독특한 백중지세라고 생각합니다. 영재가 이토록 많다니, 경하드립니다, 황상.”
해 상서는 고자의의 책론은 입에 올리지 않고 다시 축하했다.
“고자의의 책론은?”
황상이 고자의의 책론을 들어 올리며 물었다.
“고자의의 책론은 이론이 명백하고 문장이 비범합니다. 다만 실무적으로 다소 비현실적입니다. 신이 보기엔 계소영, 진안방, 여염과 이신 네 사람과 비교하면 조금 아쉽습니다.”
해 상서는 태자의 분노한 시선을 못 본 체하며 살짝 허리 숙여 대답했다.
황상은 문장 다섯 편을 서안에 늘어놓았다.
“음, 짐도 그리 생각하네. 그럼 해 경은 이 네 편 중에 어느 것이 으뜸이라고 생각하는가.”
“아룁니다, 황상. 신, 이 네 편을 골라놓고 지금까지 고민해도 결론을 짓기가 어렵습니다. 모두 으뜸으로 손색없습니다.”
해 상서가 기쁜 가운데 괴로운 표정을 짓자 황상이 껄껄 웃음 지었다.
“또 가장 어려운 일을 짐에게 미루는군!”
“고자의의 책론이 어째서 현실과 동떨어졌다는 건가?”
“해 경이 말이 옳다.”
태자가 다소 난폭하게 참견하자 해 상서가 대답하기 전에 황상이 대답했다.
“고자의의 책론의 어느 부분이 현실과 맞지 않는지는 짐이 숙제로 내주마. 너도 정무를 단련해야지.”
“예.”
태자는 내키지 않지만 어쩔 수 없이 기꺼이 받아들이는 척하며 허리를 숙이고 대답했다. 몸을 일으키면서 해 상서를 매섭게 노려봤다.
“그럼 이 준재 중에 누구를 으뜸으로 뽑아야 할까.”
고자의의 책론을 태자에게 건넨 다음 서안에 놓인 네 책론을 들여다보는 황상의 미간이 갈수록 찌푸려졌다.
“계 천관이 장원 출신인데 부자 모두 장원이 되면 역사상 보기 드문 미담이 될 겁니다.”
계소영을 첫 번째 장원 후보로 꼽은 해 상서는 황상의 주저하는 모습에 슬쩍 부추겼다. 황상은 계소영의 문장을 들어 올려서 들여다봤다.
“음, 계 노승상도 일갑 출신이었지?”
“예. 일갑 3등이었습니다. 준수한 인물에 재주가 넘치는 탐화랑(探花郎: 전시에서 일갑 중 3등으로 합격한 진사)으로 모두가 주목했었지요.”
해 상서는 서운해하다가 곧바로 내려놓았다. 장원이란 원래 그가 결정 지을 일이 아니었다. 그저 조금 계소영 쪽으로 기울었을 뿐이었다.
“짐이 보기에 계소영은 계 노승상의 면모를 매우 닮았네. 탐화랑으로 하지.”
황상은 계소영의 시험지를 내려놓았다.
“영명하십니다, 황상.”
해 상서는 싱글벙글 웃으며 얼른 칭송했다. 탐화랑이면 묻힌 건 아니었다.
황상은 한 손에 여염의 문장, 다른 손에 진안방의 문장을 들고 번갈아 보며 한참 끙끙대며 고민했다.
“이 두 편은 백중을 가리기 어렵군. 진안방은 민간 출신이지. 빈한한 가문에서 장원이 나면 좋지……. 다만.”
황상은 여염의 시험지를 바라봤다.
“여염의 책론은 전체적인 국면을 실로 너무 잘 고려했네. 아무래도 승상 가문 출신이라 배포가 대단해. 기세도 있고. 진안방, 흠……. 여 승상이 수십 년 동안 고생한 노고도 있으니 여염을 으뜸으로 뽑고 진안방을 방안(榜眼: 전시 일갑 중 2등으로 합격한 진사)로 하지.”
“영명하십니다, 황상!”
해 상서의 얼굴에 희색이 가득했다. 이 결과에 매우 흡족했다.
“이 문장도 매우 뛰어나나 다른 세 편과 비교하면 다소 부족하군. 이갑 1등으로 하지.”
황상은 이신의 시험지를 들고 웃으며 말했다.
“나머지는 경들의 정한 순위대로 하게.”
“예!”
해 상서와 나머지 부 시험관은 엎드려서 고개를 조아리고 그 자리에서 순위를 정해 황상에게 보이고 사인(私印)을 찍고 당직 한림을 불러 방을 적었다.
금방(金榜)이 붙은 후 경성은 순간 술렁술렁 떠들썩해졌다.
여염은 자기가 장원이 될 거라고는 상상도 하지 않았다. 문장이며 재능이며, 계소영에 못 미치고 이신하고 비교해도 꼭 뛰어나다고 할 수는 없었다. 그 점은 스스로 잘 알고 있었다. 실무와 식견을 따지면 이신보다 못했다. 그런데 금방에서 계소영과 이신을 누르고 으뜸을 차지할 줄이야. 재능과 실무는 뒤떨어지지만, 운은 두 사람보다 좋은 듯했다.
여 승상 역시 여염이 장원이 될 줄은 몰랐다. 희소식을 들은 여 승상은 이신과 계소영의 순위를 묻고 마음이 금세 밝아졌다. 자기 가문도 금상첨화, 다른 가문도 희색만면할 일이었다. 시작이 매우 좋았다.
여염의 부친, 형부 원외랑 여백안은 심신수양 따위는 잊고 껄껄 웃기부터 했다. 내가 바로 부친은 여 승상이요, 아들은 장원이다! 승상의 아들이요, 장원랑의 아비는 고금 이래 드문 큰 복을 받은 사람이지.
여염의 모친 원씨는 더더욱 좋아서 말도 못 할 지경이었다. 미리 준비해둔 길한 장식품은 눈 깜짝할 사이에 떨어져서, 아예 동전을 광주리째 들고나와서 온 천지에 뿌렸다.
계소영이 탐화랑이 되었다는 희소식을 들은 백 노부인은 한순간 희비가 교차하고 생각이 많아졌다. 영감이 전에 탐화랑이었는데 이제 손자가 탐화랑이 되었다. 손자는 예전부터 아들보다 영감을 더 닮았고. 계가에 더할 나위 없는 좋은 징조였다.
들뜬 마음이 가라앉은 백 노부인은 갈수록 기뻐져서 온 저택 안팎에 큰 상을 주었다.
희소식을 들은 계 천관은 엄숙하고 냉랭하던 평소와 달리 종일 웃음을 감추지 못했다.
오라버니가 이갑 1등을 차지했다는 소식을 들은 이동은 놀라고 들떴다가 일갑엔 누가 들었는지 물었다. 여염이 장원, 진안방이 방안, 계소영이 탐화랑이라는 소식을 듣고 잠시 멍하니 있다가 돌연 얼굴을 가리고 기쁨의 눈물을 터트렸다.
변했다! 모든 것이 변했다! 너무 잘 되었어!
장 태태는 기쁨을 어떻게 표현해야 좋을지 몰랐다. 낙방하지 않고 동진사(同進士: 과거 시험에서 삼갑)에만 드는 것이 가장 큰 바람이었는데 이갑 1등이 될 줄 몰랐다. 기쁜 마음이 순간 몇 배가 되었다.
준비해둔 문방사우가 순식간에 사라지자, 곳간에 있는 금자, 은자를 다 꺼내서 뿌리라고 즉시 분부했다. 반 냥, 한 냥짜리 금자, 은자를 마구 뿌려대자 바깥이 순간 물을 부은 기름 솥처럼 들끓었다.
마음 놓고 금자, 은자를 뿌리라고 지휘하던 손 어멈과 만 어멈은 저녁이 되어 계산해 보고는 족히 만 오천, 육천 은자를 뿌린 걸 알고 화들짝 놀랐다. 저택 위아래가 기뻐서 정신이 나갔었다.
오히려 문 이야는 내내 담담했다. 심지어 조금 아쉬워했다. 이신이 일갑에 들 줄 알았는데 한 발 차이였다. 너무 아쉬웠다.
세심한 여염은 소식을 받고 선두 네 사람 중 세 사람이 지기인데, 모두와 낯선 진안방이 낀 데다가 타지 사람인 걸 보고 얼른 사환을 불러 계소영과 이신에게 진안방을 만나러 가자고 소식을 보내고 자기가 먼저 진가 저택으로 향했다.
진씨 가문 역시 서생 가문, 지방 명문가인데 다만 집안 중에 경성에서 관리 생활하는 사람이 말단 관리 두엇밖에 없었다. 진안방은 진가 직계 장방 자식이었고, 집안사람들이 경성에 살진 않지만 경성에 저택을 이미 마련해서 집안사람도 보내두었었다.
방안이 되었다는 희소식이 진가 저택에 도착했을 때, 이미 진가 저택으로 달려와 희소식을 기다리던 가문의 관리들은 순간 기뻐서 어쩔 줄을 몰랐다.
진씨 일가에 드디어 시운이 찾아왔다!
그들, 그리고 그들의 가족의 앞날이 이 희소식과 함께 찬란하게 밝아진 것이다.
서둘러 상을 내리고 돈을 뿌리던 진가 종친들은 장원이 여염, 탐화가 계소영이라는 소식을 듣고 더더욱 놀라움과 기쁨이 교차했다. 이런 동료가 있다니, 그야말로 금상첨화였다.
종친 어른인 숙부가 어서 장원을 만나러 가라고 재촉하자, 진안방은 옷을 갈아입고 사환, 종복에게 에워싸인 채 측문으로 슬그머니 빠져나왔다. 막 측문 골목을 돌자마자 참으로 공교롭게 여염과 마주쳤다. 자기를 만나러 가던 진안방을 만난 여염은 크게 웃음을 터트렸다.
두 사람은 몇 마디 인사를 나누다가 두 사람을 알아본 눈 밝은 사람이 몰려들 것 같은 낌새에 여염이 재빨리 주변을 둘러봤다. 그는 맞은편에 반루가 있는 걸 보고 얼른 진안방에게 눈짓했다.
“들어가서 이야기하세. 이러다가…….”
여염이 길게 말할 것도 없이 진안방도 눈치챘고 사람들이 몰려들기 전에 여염을 따라 성큼성큼 반루로 직행했다.
여염과 진안방이 막 반루로 들어가자마자 근처에 당도한 계소영과 이신도 상황을 눈치챘다. 인파가 몰려 있어서 너무나 쉽게 알 수 있었다.
“반루로 들어갔습니다!”
몇 사람을 붙들고 자초지종을 물은 영해가 자기네 주루를 가리키며 말도 못 할 정도로 환하게 웃었다. 이신도 피식 웃었다.
“가련한 여 형 같으니.”
계소영이 이신을 덥석 잡고 앞으로 내달렸다.
“우리도 얼른 들어가세. 서두르지 않으면 여 형이 우리를 놀릴 상황이 될 걸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