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30화: 신임하는 사람
“계속해라.”
영원은 속이 답답해졌다. 아라와 태자, 정말 망할 한 쌍이었다.
“아라 소저 말이, 태자가 크게 화를 내면서 산서 손님을 아래층으로 걷어찼답니다. 계단에서요!”
영원이 눈을 치켜뜨는 걸 본 대웅이 얼른 덧붙였다. 영원의 눈썹이 다시 내려오자 대웅이 말을 이었다.
“손님이 심하게 다친 건 아니지만, 혹시 몰라서 두 행수가 만 냥을 돌려주었답니다. 받을 수가 없어서요. 태자의 발길질에 괜히 만 냥을 손해 봤답니다.”
“급한 일이라는 게 그 만 냥이냐?”
영원이 머리끝까지 화가 난 것 같자 대웅이 얼른 덧붙였다.
“그건 아닙니다. 태자가 성질을 잔뜩 부리고 돌아가기 전에 다시는 손님을 받지 말라고 했답니다. 사람을 불러 연향루 대문을 못 박아버리겠다고까지 했답니다. 아라 소저가 태자를 붙들고, 온 연향루 사람이 굶어 죽는다고 사정했답니다.”
영원이 차를 저 멀리까지 내뿜었다. 태자가 아라를 걷어차지 않은 게 용했다.
“태자가 매달 천 냥을 보낼 테니 연향루를 닫으라고 했답니다.”
대웅의 말이 뚝 그치자 영원이 얼떨떨하게 물었다.
“그래서 급한 일은? 급한 일이 있다고 하지 않았어.”
“아라 소저가 주절주절 이야기했는데, 소인 생각에…… 중점은 두 가지입니다. 하나, 문을 닫으면 매일 다다와 마주 보며 뭘 하며 사느냐고, 또 하나는 한 달에 천 냥으로 부족하답니다.”
영원이 끙 소리를 냈다. 대웅의 결론이 맞을 것이다.
“가서 전해라. 첫째, 내가 한 달에 천 냥 더 보태준다고, 그래도 부족하면 아껴 쓰라고 해라. 둘째, 한동안 문은 닫아야 한다. 심지어 몇 년 걸릴 수도 있으니 참으라 해라. 다다와 마주 보며 서책이나 읽으며 소양을 닦으라 해라. 살고 싶으면 그게 유일한 방법이다.”
“예.”
대웅이 대답하고 뒷걸음쳐서 밖으로 나가려는데 영원이 한마디 더 보탰다.
“조용히 지내라고 해라. 여기서 또 사고 치면 아무도 감싸주지 못한다. 두 행수에게도 똑같이 전하고.”
“예!”
대웅은 다시 대답하고 공손히 서 있다가 영원이 더 분부하지 않자 물러나서 연향루로 직행했다.
장 태태는 이신이 고사장에 들어가 있는 아흐레 내내 작은 불당에 가서 반 시진 동안 기도했고 이동은 언제나 그랬듯이 보록궁에 가서 장공주와 차를 마셨다.
이동이 보록궁 문 앞에서 내려 녹매를 데리고 뜨락으로 들어갔더니 상방 회랑에 복안 장공주와 영 황후가 마주 앉아 바둑을 두고 있었다.
뜨락 앞에서 이동은 서쪽으로 돌아갔고 녹매는 익숙하게 동쪽으로 돌아가서 녹운 무리와 이야기하며 기다렸다.
이동이 서쪽 곁방 문 앞으로 다가가자 복안 장공주가 고개도 들지 않고 분부했다.
“오가아가 안에서 글씨 쓰고 있어. 들어가 보렴.”
이동이 돌아서서 안으로 들어갔더니 오황자가 창가에서 탁자 앞으로 돌아가고 있었다. 오가아가 활짝 웃으면서 손짓했다.
“글은 다 쓰셨어요?”
이동은 화항 자락에 몸을 틀고 앉아서 고개를 내밀고 오황자의 글씨를 바라봤다. 오황자는 쓰다만 글자를 뿌듯한 얼굴로 이동 앞으로 슬쩍 밀었다.
“난 세 살부터 글씨를 배웠어. 오늘 쓸 건 다 못 썼지. 주 한림이 서책을 베끼라고 하면서, 백 번 베끼면 가슴 깊이 새길 수 있다고 하셨어.”
이동은 종이를 들어 올려 들여다봤다.
“뭘 베끼신 거예요? 벌써 성현의 말씀을 배우시는 거예요?”
“주 한림이 나는 시, 부(賦)를 지을 필요 없고 심신을 닦는 일에 힘쓰라 하셨어. 경서를 배워야 한다고 해서 이제 두 번째 문장을 썼지.”
오황자는 이동 손에서 종이를 가지고 가서 붓을 들고 먹을 묻혀 계속 문장을 베꼈다.
“백 번이나요?”
이동이 살짝 얼굴을 찌푸렸다.
“오늘은 다섯 번. 이게 세 번째.”
오황자는 반듯반듯 글자를 써 내려갔다. 손놀림이 그리 빠르지 않은 것이 게으름 부리는 기색이 역력했다.
“누이, 누이는 어릴 때 무슨 공부 했지?”
“저는 잡학을 배웠어요. 저는 과거 볼 필요가 없는걸요.”
이동은 느릿느릿 책을 베끼는 오황자의 모습이 자꾸 어딘가 어색해 보였다.
“나도 과거 볼 필요 없는데. 그렇지?”
오황자는 아예 붓을 내려놓았다.
“오늘 아침 수업 때 손 학사와 조 한림이 말다툼했어. 손 학사는 조 한림이 사서(史書)를 가르치는 것이 옳지 않다고 하더군. 정도(正道)가 아니라고. 조 한림은 나를 어떻게 서생의 정도로 가르치냐고 하며 마땅히 사서 위주로 배워야 한다고 했고. 조 한림의 의도가 불순하다고 손 학사가 버럭 화를 내던데. 내 앞에서 그렇게 말다툼하지 뭐야.”
오황자가 빙긋 웃으며 하는 말에 이동은 마음이 움직여서 웃으며 오황자를 바라봤다.
“그럼 왕야는 누가 옳다고 생각하세요? 둘 다 잘못했나요? 아니면 둘 다 옳아요?”
“나는 조 한림이 좋아. 누이도 알지? 두 사람이 각각 다른 걸 가르쳐. 왕 학림도 있는데 그자는 시와 그림을 가르쳐. 시에 그림이 있고, 그림에 시가 있다나?”
오황자가 입을 비죽였다.
“그야말로 날 멍청이로 보는 것이지.”
“저마다 생각이 다르니까요. 왕야에게 좋은지 아닌지는 본심을 봐야 해요.”
이동의 말은 매우 모호했다. 참으로 어려운 문제들이었다.
“어머니도 그렇게 말씀하셨어. 가르치는 대로 배우라고. 뭐든 배우는 건 좋은 일이라고. 누이, 역시 별궁보다 여기가 좋은 것 같아. 누이, 언제 진하 부두에 날 데리고 가줄 거지? 지난번에 다음에 데리고 가 준다고 했잖아.”
오황자는 이동이 쥐여 준 붓을 받아서 이야기하며 미적미적 글을 썼다.
“무술 수련은 어때요?”
이동은 오황자의 물음에 대답할 수가 없어서 아예 화제를 돌렸다. 오황자의 얼굴이 금세 울상이 되었다.
“별로야! 외숙은 매일 달리라고 하고 기마 자세를 시키고. 기마 자세할 때는 궁둥이 아래 뾰족한 침을 둔다니까! 개를 풀어 뒤쫓기도 하고…….”
“개를 풀어요?”
이동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뛰는 게 느리다고 말이야. 내가 개를 무서워하거든.”
오황자가 울상 짓자 이동은 안 됐다는 듯 그를 토닥였다.
“뛰기 전에 뭐 드시지 마세요. 뛰기 전에 뭐 먹으면 배 아파요.”
“누이, 언제 놀러 데리고 가 줄 거지? 봐라, 내가 얼마나 불쌍하냐.”
오황자가 고개를 들고 불쌍한 얼굴로 이동을 바라봤다.
“지금은 예전과 달라서 함부로 모시고 나갈 수가 없어요. 아니면 외숙에게 부탁해 보세요. 무술 실력도 뛰어나고 민첩해서 외숙이 함께 가야 안전해요.”
“부탁했었지. 개랑 달리는 속도가 비슷해지면 데리고 나가주신단다.”
오황자는 낙담한 표정을 지었다.
“그러려면 언제 가요.”
이동은 영원의 세견을 본 적 있었다. 말보다 더 빠른 개인데, 사람이 어떻게 그런 속도로 달릴까.
“나도 모르지! 휴.”
오황자는 턱을 괴고 이동을 바라보며 앓는 소리를 냈다. 이동은 도와줄 수도 없고 그저 같이 한숨을 쉴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어서 계속 글을 쓰라고 먹을 갈아 주었다.
문밖 회랑, 복안 장공주가 고개를 들고 영 황후를 바라봤다. 그녀는 아무것도 못 들은 것 같은 영 황후를 힐끔 보고는 나른한 목소리로 나직이 물었다.
“저런 이야기, 아무 데서나 해도 되나요?”
“여기는 아무 데가 아니니까요.”
영 황후는 바둑판을 뚫어져라 바라보며 대수롭지 않은 듯 대답했다.
“저 아이를 그렇게 믿어요?”
복안 장공주가 실내를 힐끔 바라봤다.
“음, 장공주가 믿는 사람이니 당연히 나도 믿습니다.”
영 황후가 돌을 내려놓으며 하는 말에 복안 장공주는 한참 동안 영 황후를 흘겨보다가 들릴 듯 말 듯 콧방귀를 뀌고는 돌을 놓았다.
고사장 밖의 사람들은 그다지 힘들지 않게 아흐레를 보냈다.
마지막 날, 용문 밖은 마중 나온 사람들로 붐볐다. 물론 아흐레 전 입장할 때보다는 사람이 훨씬 적어서 마차도 고사장 근처까지 들어갈 수 있었다.
이동과 문 이야는 용문 밖에 서서 서서히 열리는 용문을 조바심 내며 바라봤다. 영해는 청평과 수희를 데리고 용문에 딱 붙어서 셋이서 여섯 개의 눈동자를 떼지 않고 문 안쪽을 지켜봤다. 대야가 분명 지칠 대로 지쳤을 테니 보이자마자 얼른 달려가서 부축하라고 문 이야가 분부했다.
용문 안에서 나온 서생은 하나같이 봉두난발에 창백한 얼굴이었다. 옷은 주름지고 꼬질꼬질한 것이, 문 이야가 말한 대로 감옥에서 나온 사람보다 못한 모습이었다.
사람이 반쯤 나왔을 때, 드디어 이신을 본 영해가 날렵하게 몸을 틀며 주변을 비집고 그쪽으로 달려갔다. 주위에 막 고사장에서 나온 서생을 조금이라도 건드릴까 봐 걱정이었다. 살짝만 부딪쳐도 다들 쓰러질 것 같은 모습이었으니까.
영해와 청평, 수희가 날렵하게 이신 곁으로 다가가 이신을 부축했다. 이신은 얼떨떨해하다가 겨우 영해인 걸 알아보고 손가락으로 저쪽을 가리켰다. 이신이 가리키는 쪽을 바라본 영해는 보고 또 본 후에야 곁에 있는 여염, 여염과 조금 떨어져서 선 계소영을 알아봤다. 세 사람은 서둘러 한 사람씩 부축했다. 제대로 붙들기도 전에 여가와 계가 관사, 사환들이 후다닥 달려와서 제 주인을 부축해서 허둥지둥 마차에 태웠다. 다들 그 일에 정통한 듯했다.
용문 밖에서 기다리던 문 이야는 매우 담담했고 이동도 그럭저럭 괜찮았다. 춘시 고사장에서 벌어지는 난감한 모습들이야 너무 많이 들어왔으니까. 하지만 이동과 딱 붙어선 수련은 눈을 휘둥그렇게 뜨고서 구역질을 참지 못하고 웩웩거렸다. 어쩌면 이렇게 하나같이 냄새가 나는지, 용문이 열리자마자 들이친 쉰내로 사람이 죽을 수도 있겠구나!
영해와 두 사람이 쉰내 폴폴 나는 이신을 부축해서 다가오자 문 이야도 코를 잡았다.
“오줌주머니는? 버렸느냐?”
“버렸습니다. 버렸어요.”
청평은 이쪽으로 달려오고 있는 수희를 가리켰다.
“오줌주머니가 뭐예요?”
수련이 이동을 잡아당기며 나지막이 물었다. 알 것 같긴 한데 믿을 수가 없었다. 이동은 참지 못하고 웃음을 흘렸다.
“오줌주머니가 뭐냐고? 고사장에서……. 묻지 마. 어찌 됐든 며칠 동안 쉽지 않았을 거야.”
“낭자는 마중 오지 말아야 했는데 말입니다.”
문 이야가 두 사람의 대화를 듣고 웃으며 한마디 했다.
영해와 두 사람이 이신을 부축하고, 일행은 서둘러 마차 있는 쪽으로 가서 길을 재촉해 집으로 돌아갔다.
중문에서 기다리던 장 태태는 영해와 사람들이 이신을 부축해서 데리고 들어오자 얼른 길을 내주고 빨리 들어가라고 손짓했다.
“예법 따질 것 없다. 어서 들어가라. 다 준비해두었다.”
이신이 몇 번이나 물을 새로 받아서 깨끗하게 씻고 옷을 갈아입고 나왔을 때 장 태태는 이미 상방에 밥을 차려놓았다. 다만 모두 맑은 죽에 담백한 찬으로 준비했다.
이신이 들어오자 장 태태가 서둘러 손짓했다.
“두 끼는 기름진 음식을 피하라고 주방에 분부했다. 닭탕으로 끓인 죽이다. 많이 먹지 말고 한 그릇만 먹어라.”
이신이 밥을 다 먹은 후에 장 태태가 다정하게 물었다.
“며칠 동안 별일 없었지? 중간에 비도 왔는데, 많이 온 건 아니다만, 많이 맞았느냐?”
“아닙니다. 어머니께 걱정 끼쳤습니다. 이번 시험은 시험장에 들어갈 때도 순조롭고, 번호도 아주 좋은 번호를 받아서 시험관과도 가깝고 여 대랑, 계 대랑과도 가까웠습니다. 반 시진, 한 시진 걸러 잡역들이 따듯한 물을 가져다주고 오줌통도 비워 주어서 고생도 하지 않았습니다.”
이번 시험은 추시 볼 때보다 얼마나 편했는지 모른다. 추시 때는 날도 더울 때인데 큰 오줌통과 가깝진 않아도 그리 멀지도 않은 방을 받았다. 뙤약볕에 파리가 윙윙거리는 소리가 귀를 찔렀고 중간에 비도 내려서 방에 비도 들이쳤다. 가림막이 있어서 그나마 다행이었다. 아흐레 동안 잡역이 한 번도 오지 않았었는데 이번엔 방도 큰 오줌통에서 멀고 잡역이 제때 시중들어서 지난번과 비교하면 정말로 편안했다.
이게 다 여러 사람들 덕뿐이리라.
“일단 푹 자라고 해야겠어요. 눈 좀 보세요. 푹 꺼졌어요.”
이동이 빙그레 웃으며 말했다. 이신의 몇 마디에 이미 궁금한 건 다 풀렸다.
“나 좀 보게. 어서 가서 쉬어라. 눈 떠질 때까지 푹 자고.”
장 태태는 청평을 불러 몇 마디 당부하고는 어서 쉬라고 이신을 내보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