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29화: 계획
“용문이 열린다!”
누군가 고함치자, 주변이 순간 술렁였다. 계소영은 이동 뒤로 몰리는 인파를 막으려고 무심결에 팔을 내밀다가 퍼뜩 정신이 들어서 얼른 거둔 다음 당황해서 돌아섰다.
“이쪽입니다!”
계가와 여 승상부의 종복들, 그리고 영해가 함께 고함쳤다.
“이만 돌아가세요!”
이신은 이동과 문 이야를 향해 손을 휘젓고는 돌아서서 다소 긴장한 표정을 지었다. 이동은 몇 걸음 만에 인파에 묻힌 이신을 까치발을 들고 바라봤다. 두근거리는 이 마음은 아마도 오라버니가 고사장에서 나오고 방이 붙어야 편안해지리라.
이동과 문 이야가 마차가 있는 곳까지 돌아와서 반 시진 정도 기다렸을 때, 영해가 청평과 사환을 데리고 돌아왔다.
“어찌 됐어?”
영해가 제대로 서기도 전에 문 이야가 바로 물었다. 영해가 땀을 훔치며 대답했다.
“순조롭습니다! 일찍 가서 줄도 꽤 앞에 선 편입니다. 나리들이 들어간 다음에 청평에게 업혀서 잠시 더 지켜봤는데, 몸 검사는 금방 끝났습니다. 그 후로 사람들이 와서 상자를 들고 간 다음엔 보이지 않았습니다.”
“걱정하지 마라. 분명 순조로울 것이다. 좋은 성적을 거둘 것이고. 됐다. 우린 이만 돌아가자.”
문 이야는 걱정하지 말라고 하지만, 그다지 마음 놓이지 않는 얼굴이었다.
자기도 이런 고사장을 두 번 겪은 적 있어서 마음이 놓이지 않는 것이다.
용문을 잠그면 아흐레 후에야 문이 다시 열리고 수험생이 나온다. 그 아흐레 동안, 수험생들은 그 비좁은 방 안에서 먹고 자고 싸고 잔다. 날도 추운데 비라도 왔다가는…….
문 이야는 하늘을 올려다봤다.
복 받은 사람은 하늘이 돌본다고 했지. 게다가 이신은 추시를 보았으니, 추시와 비교하면 춘시는 덥지 않아서 냄새도 덜 나지. 됐다, 그만 생각하자. 더 생각하다간, 불이 난 일까지 떠오르겠다.
해 질 무렵, 환가아가 간식을 잔뜩 껴안고 와서 코를 킁킁대며 웃는 얼굴로 말했다.
“이야, 소유 누님이 환영회를 열어 준다고 저녁에 시간 있는지 여쭤보라던데요.”
“있지, 있지. 꼭 간다고 전해라.”
문 이야가 얼른 대답하자 환가아는 아쉬운 듯 간식을 내려놓고 나갔다.
문 이야는 저녁을 먹지 않고 큰 주방 정리가 끝났을 때쯤을 가늠하고 어슬렁어슬렁 큰 주방으로 향했다.
큰 주방의 상방에 불이 환하게 켜져 있었다. 문 이야가 주방 마당으로 들어가자마자 추미와 하섬이 같이 상방에서 나왔다.
“이야, 오셨어요!”
녹매를 비롯한 시녀들도 우르르 나왔다. 맨 앞에 서 있던 추미는 무릎을 구부리는 둥 마는 둥 예를 갖추고 다가와 문 이야의 팔짱을 끼었다. 하섬은 다른 쪽 팔짱을 끼었고 녹매와 시녀들이 주변을 에워쌌다. 문 이야는 재잘재잘 웃는 처자들에게 에워싸인 채 껄껄 웃으면서 상방 안으로 들어갔다.
상방은 이미 다 정리가 되어서, 추미와 하섬은 문 이야를 항상 앉는 자리에 앉혔다. 청국이 뜨거운 수건을 올리고 동유가 차를 올렸다. 문 이야는 웃으며 손사래 쳤다.
“됐다, 됐다. 요 녀석들, 내가 이렇게 보고 싶었다고?”
“그럼요! 우리만 그런 게 아니에요. 문 이야가 얼른 돌아오길 온 저택 사람이 기다린걸요. 이번에 반년 동안 집을 비우셔서 놓친 혼사가 몇인데요!”
반응도 빠르고 말도 빠른 추미가 옥 쟁반에 구슬 굴러가듯 까르르 웃었다.
“반년은 무슨.”
“저는 반년도 더 된 것 같은걸요! 소유 언니는?”
녹매가 접시를 놓으며 두리번거렸다.
“솥 하나가 더 남았어.”
진주가 대답했다. 양손을 팔걸이의자에 올린 문 이야는 떠들썩한 분위기에 흠뻑 빠져서 눈을 가늘게 뜨고 웃었다.
소유가 솥 하나를 내오고 모든 게 준비되자 모두가 문 이야에게 술을 한 잔씩 올렸다.
추미가 상반신을 꼿꼿이 세우고 한 손을 높이 들었다.
“그리고 나도! 나도! 다들 나도 축하해줘야지.”
“좋은 일 있어? 혼인하냐? 아니면 월전 올랐어?”
진주가 웃으며 물었다. 추미는 주전자를 들고 와서 우선 문 이야의 잔을 채웠다.
“그게 무슨 좋은 일이야! 우리 외사촌 오라비가 올해 현시(縣試)에서 3등 했어. 4월에 열리는 부시(府試)도 문제없을 거래. 그런데도 축하해 주지 않을 거야?”
문 이야는 웃음이 조금 흐려진 얼굴로 녹매를 바라봤다. 녹매는 그런 문 이야의 시선에 웃으며 대답했다.
“걱정하지 마세요. 추미 오라비는 이미 정혼했어요. 적금 머리 장식도 맞춰서 선물한걸요. 도가 낭자도 답신을 보냈어요. 마음 놓으세요, 이야.”
“우리 오라버니가 그러는데 올해 가을에 꼭 추시를 볼 거래요. 그래서 대야의 춘시 끝나면 오라버니 문장 좀 봐달라고 말씀드려 달라고 낭자께 부탁드렸어요. 우리 오라버니도 진사가 되면 내가 모두한테……. 그러니까……. 됐다, 됐어. 모두한테 술 한 잔씩 돌릴게. 다른 건 해줄 수도 없다.”
추미가 떠듬떠듬하다가 손을 흔들자, 소유가 웃으며 탁자를 두드렸다.
“계집애, 술 한 잔 돌리는 것도 돌리는 거니?”
“추미는 앞으로 어쩔 계획이냐?”
문 이야는 술을 마시면서 추미를 향해 싱글벙글 물었다.
“아직 모르겠어요. 계획이랄 게 없네요. 마침 물으시니 잘됐네요. 저도 이야께 여쭤보려 했거든요. 혼인할 생각은 없고, 원래는 낭자를 평생 모시려고 했는데, 얼마 전에 낭자가 어쩔 계획이냐고 물으시더라고요.”
추미는 한숨을 내쉬었다. 한창 기뻐하던 추미 얼굴에 수심이 서렸다.
청국을 비롯한 모두가 입을 다물고 문 이야의 말을 기다리며 바라봤다.
“소유에게 물어보자. 음식 솜씨가 그렇게 좋은데, 언제쯤 점포를 낼 생각이냐?”
“멀었어요. 5년? 아니면 10년?”
문 이야가 묻는 말에 소유가 대수롭지 않게 대답했다.
“봐라. 계획이란 저런 것이다.”
문 이야가 추미를 돌아보며 말하는데, 추미는 더 걱정스러운 표정이었다.
“하지만 난 솜씨랄 게 없는걸요. 바느질을 십수 년 배웠는데 지금도 신발 하나 지어도 삐뚤삐뚤해요. 음식 솜씨도 없고. 저도 그래서 고민하는 거예요. 솜씨가 있으면 걱정 안 하죠.”
“솜씨라는 게 바느질, 음식 솜씨밖에 없는 게 아니다. 나가서 둘러보아라. 경성에 얼마나 장삿거리가 많으냐. 설령 평생 낭자 곁에 있더라도 재주 하나는 있어야 평생 시중들지. 녹매에게 물어 봐라. 낭자 곁에 있는 시녀 중에 글공부 안 한 아이가 있나. 다 글 쓰고, 장부 보고, 저마다 재주가 있다. 내 보기에, 넌 돌아온 후에도 아무런 계획이 없는 것 같구나.”
문 이야의 말투는 온화했지만 내용은 가차 없었다. 추미의 얼굴이 발그레해졌다.
“그건 저도…….”
“사람이 먼일을 대비하지 않으면 곧 큰 우환이 닥친다. 혼인할 생각이라면 또 모른다. 저택의 다른 시녀들처럼 적당한 사람 골라서 혼인하면, 지아비 버는 돈으로 충분하면 집에서 아이 낳고 살림하고, 지아비 버는 돈이 부족하면 만 어멈에게 부탁해서 저택에서 할 만한 일거리를 받으면 되니까. 그런데 너는 혼인할 생각이 없지 않으냐. 그럼 계획을 세워야지. 첫째, 먹고살 돈은 벌어야 한다. 지금도 번단 소리는 하지 말아라. 한 달에 월전을 두 냥씩 받지만, 그 돈을 받을 만한 일은 하지 않지 않느냐.”
문 이야의 목소리는 더 온화해지고 내용도 더 가차 없어졌다.
추미는 멈칫하다가 공기 빠진 공처럼 어깨가 축 처졌다.
“이야의 말씀이 옳아요. 저도 생각했어요. 그런데 정말로 어떻게 해야 할지, 뭘 해야 할지 모르겠어요. 전 할 줄 아는 게 아무것도 없어요.”
“타고 난 사람은 없어. 전에 뭘 배워 본 적도 없잖아. 서두르지 마. 서둘러서 될 일도 아니야. 내일 같이 잘 의논하고 잘 계획해 보자.”
진주가 추미를 흔들며 나긋나긋 위로했다.
“진주의 말이 옳다. 너도 안다니 그럼 되었다. 넌 영리한 아이라 뭐든 쉽게 배울 것이다.”
문 이야의 말이 끝나자마자 하섬이 문 이야의 옷자락을 흔들었다.
“그럼 저는요? 이야, 저는 어떡해요? 저도 지금 한 달에 두 냥 받는데 제대로 하는 일이 없는걸요. 그리고 동유도요.”
진주가 한숨을 내쉬었다.
“이왕 말 나온 거, 이야기할게. 태태가 손 어멈, 만 어멈하고 이야기하는 거 들었어. 춘시 방이 붙은 다음에 대야를 모실 사람, 그리고 낭자가 데리고 돌아온 사람, 모두 다시 배치하신대. 이가는 일 안 하는 사람을 먹여 살리지 않아.”
“대야를 모실 사람을 고르는 거야?”
“대야 모실 사람을 골라도 우린 아니야. 소문나면 얼마나 듣기 거북해. 넌 어떻게 그런 생각을 품니.”
동유가 눈을 빛내며 묻자, 추미가 쌀쌀맞게 받아쳤다.
“너희 대야가 혼인하기 전에 거처에 사람을 들이지 않을 것이다. 설사 혼인한 후에도 아마 들이지 않을 게다.”
문 이야도 한마디 덧붙이며 동유의 생각의 싹을 잘랐다. 그녀에게도 좋은 일이었다.
“음, 태태가 만 어멈에게 말씀하시는 거 들었어요. 나리들이 첩, 통방을 들이지 못하는 가법을 세우실 거래요. 자식이 없어도 안 된대요.”
장 태태의 수석 대시녀인 진주는 보통 식견이 넓고 영리한 게 아니라서 문 이야의 생각을 바로 읽고 얼른 덧붙였다.
“아이고, 내가 무슨 다른 속셈이 있겠어.”
동유가 한숨을 내쉬었다. 실망하진 않았다. 그런 좋은 일이 생기리라고 정말로 깊게 생각할 엄두는 나지 않았다.
“손 어멈과 만 어멈을 찾아가서 일거리가 없는지 알아보아라. 아니면 무슨 수가 없는지. 그쪽으로는 어멈들이 나보다 낫다. 두 어멈 모두 바른 사람이니 말 잘해서 부탁해 보아라.”
문 이야도 잠시 고민해 봤지만, 그 방법밖에 없었다. 사내라면 몰라도 여인은 혼인 말고 무슨 활로가 더 있겠나. 정말로 떠오르는 좋은 수가 없었다.
고사장을 걸어 잠그고 과거 시험을 보는 동안 온 경성에도 자물쇠가 채워진 듯했다. 평소에 사람이 바글바글하고 소란스러운 마행가조차 다소 조용해진 듯했다.
영원이 동화문에서 나오자 사환 대웅이 달려와 영원이 말에 오르는 걸 시중들면서 보고했다.
“칠야, 아까 연향루 심부름꾼이 찾아왔습니다. 아라 소저가 급한 일로 칠야를 뵙길 청한답니다.”
영원은 눈살을 찌푸렸다. 어제 태자가 별안간 연향루를 찾았었는데.
“무슨 일인지 네가 다녀오너라. 다른 사람 모르게 조용히 다녀와야 한다.”
영원은 대웅에게 그렇게 분부했다. 태자가 어제 연향루에 들렀는데 오늘 그가 가는 건 적절하지 않았다. 게다가 아라의 성격으로 보아 급하다는 그 일이 무슨 일일지 모를 일이었다.
대웅은 말을 대영에게 넘겨주고 홀로 인파로 들어가 빙빙 돌아서 연향루로 향했다.
영원이 정북후부로 돌아간 지 얼마 되지 않아서 대웅이 금세 돌아왔다.
“무슨 급한 일이더냐?”
대웅은 뭐라고 설명해야 좋을지 모를 표정을 지었다.
“어제 산서에서 온 손님이 찾아왔는데, 몇 마디 하기도 전에 태자가 별안간 쳐들어왔답니다. 태자가 올라오자마자 크게 화를 냈답니다.”
“산서에서 온 손님? 은자를 얼마나 냈다더냐?”
산서란 말을 들은 영원은 조금 민감해졌다.
“예, 산서에서 온 부잣집 자제랍니다. 아라가 그러는데, 고작 스물 남짓이고 꽤 준수하게 생겼답니다. 들어오자마자 두 행수에게 만 냥을 내더랍니다.”
“만 냥! 간도 참 크다! 태자가 올라갔을 때 그 산서 젊은이랑 뒹굴고 있었다더냐? 다다가 문 앞에서 지키지 않았고?”
영원의 말이 매우 가차 없었다. 아라 때문에 정말로 골치가 좀 아파왔다.
“뒹군 건 아니고, 산서 손님이 진주 목걸이를 선물해서 어울리는지 아닌지 목에 걸어보던 참이었답니다.”
대웅도 나름 식견 있는 사람이지만, 그 이야기할 때는 어깨를 으쓱했다. 목걸이, 비녀를 걸어 보는 방법은 다양하다지만, 진주 목걸이는 어떻게 걸어 보는지 알게 뭐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