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25화: 방정맞은 입
영원은 아연하고 어이없는 얼굴로 이동을 빤히 봤다.
“누구? 무슨 생각을 하는 겁니까! 그냥 한번 물어봤을 뿐인데! 난 한 번도 해가 이낭자를 만난 적이 없어요. 설사 만났더라도 내 눈에 찰 리가 없고. 물론 상대도 내가 눈에 차지 않을 것이고. 이상한 생각하지 말아요! 내 말 들어 봐요. 내가 해 이낭자라는 사람을 아는 건, 경성 규수 이야기가 나오면 꼭 이야기가 나와서입니다. 경성의 재원, 미인 이야기가 나오면 어질고, 현숙하고 대범하니 어쩌니 하면서 꼭 그 해 이낭자 이야기가 나와서 아는 겁니다. 잘 들어요, 난 이 해 낭자에게 다른 뜻 없습니다. 해가 사내 중엔 뛰어나다는 평판이 있는 사람이 없는데 오히려 그 규수를 다들 침이 마르게 칭찬하길래 해가도 몰락했구나, 하는 생각이 들어서 물은 거지 정말로 다른 뜻은 없습니다. 내가 해 이낭자를 점찍을 리가 있나!”
“해 이낭자를 만난 적은 한 번밖에 없는데, 당신 말대로 칭찬하는 건 자주 들었어요.”
해 이낭자를 떠올린 이동의 입가에 언뜻언뜻 미소가 피었다. 영원과 혼인하면 전생처럼 평생 외롭게 살지 않아도 되는 거 아닐까?
“해 이낭자는 지극히 총명하고 선량하고 대범하대요. 항상 남 생각부터 한다네요. 시류에 따라 지아비를 잘 내조하고 아이를 키울 사람이에요. 집안을 일으키고 혼자 힘으로도 안팎을 잘 맡을 만한 보기 드문 사람이에요. 글공부도 했고, 가문도 좋고, 외모도 훌륭하고. 경성 규수 중엔 그야말로 손꼽히죠. 해가의 가풍은 또 얼마나 훌륭해요. 정말로 좋은 혼처예요.”
영원은 눈을 부릅뜨고 이동이 한마디 할 때마다 고개를 저었다.
“너무 뛰어납니다. 나는 감당 못 합니다. 절대로 오해하지 말아요. 난 그 해 이낭자를……. 아까는 그냥 입방정 떤 겁니다. 한 번도 만난 적 없고 다 소문으로 들은 겁니다. 아니, 소문도 딱히 들은 게 없어요. 그냥 해 상서 때문에, 해 상서가 손녀를 제일 총애한다기에 자연스럽게 나온 이야기입니다. 입방정이라고요. 난 다 좋은데 가끔 이렇게 입이 말썽입니다. 제 발목을 제가 잡아요. 못 들은 것으로 합시다. 난 아무 말도 안 했습니다. 해 이낭자를 점찍은 거 아닙니다! 이상한 생각하지 말아요! 절대로!”
이동은 고개를 갸웃하고 속으로 쉴 새 없이 가늠하느라 영원의 다급한 해명이 전혀 들리지 않았다.
영원이 변수인 걸 거의 확신했다. 전생에 영원은 경성에 오지 않았는데 이번엔 왔다. 그녀가 강가를 벗어난 건 영원이라는 변수 덕분이었다. 주 귀비의 갑작스러운 죽음 역시 영원이라는 변수 덕이었다. 장공주가 다시 경성으로 돌아와 다시 보록궁에 들어가서 세상일에 손대게 된 것도 따지고 보면 영원이라는 변수 덕이었다.
어쩌면 그가 모든 것을 바꾼 근원인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해 이낭자가 그와 혼인한다면 험난했던 인생도 분명 완전히 달라질 것이다. 자신처럼.
게다가 해 이낭자의 재능, 인품, 충분히 영원과 어울린다.
한 손가락으로 턱을 받치고 영원을 바라보는 이동의 미소가 갈수록 짙어졌다. 영원은 그런 그녀의 미소에 살이 파르르 떨렸다.
“……왜 그렇게 웃습니까? 그렇게 웃지 말아요. 말했잖습니까, 난 해 이낭자를 점찍지 않았어요! 요, 요, 망할 입! 멀쩡히 해 이낭자 이야기는 뭐 하러 해! 다른 댁 낭자 이야기를 왜 꺼내!”
“나도 해 이낭자가 좋아요.”
이동은 해 이낭자가 전생처럼 고달프지 않아도 된다는 생각에 기분이 매우 좋았다.
“‘도’라니? ‘도’라니! 당신이 좋아하면 좋아하는 거지, 난 좋아하지 않는다고!”
영원은 얼굴을 철썩 때렸다. 요 입, 입!
영원의 모습에 이동은 웃음을 터트렸다.
“뭐 하는 거예요. 좋아하지 않으면 않는 거지, 이럴 거 있어요?”
“앞으로 다시는 해 이인지 해 삼인지 이야기하지 말아요. 됐어요. 그 얘긴 그만합시다.
아라, 알지요?”
이동이 고개를 끄덕이자 영원이 싱긋 웃었다.
“대단한 계집애예요. 넷째가 태자가 되었다고 덩달아 유세를 부립니다. 은자가 부족하면 만나주지도 않아요. 은자가 충분해도 꼭 만나주는 것도 아닙니다. 정말로 제가 뒤늦게 빛 발한 보물인 줄 알아요. 기화가거(奇貨可居)!”
(※기화가거: 진기한 물건이나 사람은 당장 쓸 곳이 없다 하여도 훗날을 위하여 잘 간직하는 것이 옳다는 말. 전국시대 한[韓] 나라 상인 여불위가 조나라에 볼모로 가 있던 진나라 왕족 영이인을 발견하고 앞으로 크게 될 인물로 여기고 뒷받침하여 진나라 왕으로 만든 일화에서 유래. 영이인의 아들 영정은 후에 전국시대를 통일하고 중국 최초의 통일 국가를 세운 시황제, 진시황이다. 여불위의 아들이라는 일설도 있음.)
이동도 아라의 몸값이 훌쩍 뛰었다는 말을 들었다.
“기화가거 맞죠. 단지 말 몇 마디 나눈대도 기꺼이 은자를 쓸 사람이 널렸을 거예요. 색으로 시중드는 일을 하는데 얼른 돈을 모아야지, 늙으면 어쩌게요. 똑똑한 거죠.”
“똑똑? 하! 똑똑한 건 모르겠고, 사고 치는 데는 일가견 있습니다. 모처럼 한동안 조용히 지냈는데, 이렇게 거들먹거리다가 또 무슨 사고를 칠지 어찌 압니까!”
“누군가 속셈을 품고 이용하지 않는 이상 큰 사고는 안 칠 거예요.”
예전의 아라를 떠올린 이동은 양 구야를 떠올렸다.
“양 구야는 요즘 어떻게 지내나요? 한동안 소식이 없네요.”
“좋은 아내를 구했으니까요. 아내가 양 구야와 양씨 가문을 반듯하게 잘 다스리고 있답니다. 예전과 비교하면 그야말로 하늘과 땅 차이라던데요.”
“양 구야가 황당하긴 해도 나쁜 사람은 아니니까요.”
이동은 양 구야를 눈치 없는 좋은 사람이라고 줄곧 여겼다.
“눈치가 있어야 나쁜 짓도 하는데 그럴 눈치가 있어야 말이지요. 어찌 됐든 낭자의 말도 맞습니다. 본성이 악하진 않아요. 양가 노태태도 분별 있고. 오씨를 점찍은 사람이 양가 노태태입니다. 오씨가 과분한 며느리라고까지 말합니다. 그 정도 분별 있는 건 대단한 일입니다.”
이동은 영원이 하는 말을 들으며 양빈을 떠올렸다. 십여 년 동안 양 태후를 봤지만, 줄곧 그녀가 어떤 사람인지 파악하지 못했다. 대체 선한 걸까 아닌 걸까.
양빈에 대해 백 노부인이 했었던 몇 마디가 토막토막 떠올랐다. 대놓고 말한 건 아니지만 양 태후는 못된 게 아니라 어리석다는 속뜻이었다.
“양빈을 본 적 있습니까?”
영원이 바라보며 묻는 말에 이동이 고개를 끄덕였다.
“지금은 양 숙비죠.”
“어떻든가요?”
영원이 궁금한 듯 물었다.
“그런 건 누님에게 물어야죠.”
“누님은 이런 한담을 하지 않아요. 나에게 하지 않는 것일 수도 있고요. 우리 둘, 난 낭자에게 못 하는 말이 없지만, 누님하고 이야기할 땐 그러지 못합니다. 양 숙비, 어떤 것 같습니까?”
영원이 대수롭지 않게 하는 말에 이동은 어쩐지 이상하면서도 맞는 말 같아서 잠시 생각하다가 웃으며 대답했다.
“뭐랄까, 양 구야보다는 분명 똑똑해요. 본인도 자기가 똑똑한 걸 알고요.”
“잘난 줄 안다?”
영원의 말에 이동은 고개를 갸웃하고 생각했다.
“잘 모르겠어요. 굽실거릴 줄 알거든요. 예전에 시녀의 예로 주 귀비를 대했고, 지금은 황후마마도 그렇게 대하는 것 같아요.”
“윗사람에게 알랑거리는 사람은 아랫사람은 핍박하기 마련이지.”
“장공주도 그렇게 말씀하셨어요.”
“그렇다면…….”
영원이 말꼬리를 길게 늘였다.
“어쩌면 누님이 양 숙비에게 후궁을 맡길 수도 있겠군. 윗사람에게 알랑거리면서 반드시 아랫사람을 핍박할 테니.”
이동은 말없이 영원을 바라봤다. 그렇게 된다면 너무 좋은 일이다. 장공주처럼 똑똑한 사람은 많은 걸 알아볼 것이다. 보다 보면 본성을 알아볼 것이고.
“늦었어요.”
이동이 구석에 있는 모래시계를 힐끔 봤다. 정말로 늦었다.
“이제 막 앉았는데 늦었다고요?”
영원은 믿을 수 없다는 얼굴로 모래시계를 보고는, 팔걸이를 붙들고 살짝 일어나서 또 고개를 빼고 바라보고 한숨을 내쉬었다.
“말도 안 돼! 알았습니다. 쉬어요. 시간 나면 다시 오지요.”
영원은 내키지 않는 듯 일어서서 팔을 높이 들어 올리며 기지개를 켰다.
“배웅할 것 없어요. 알아서 가면 됩니다.”
영원이 손사래 치며 하는 말에 이동이 뒤에서 흘겨봤다. 언제는 배웅했나?
하 십일낭의 입궁 성지가 금세 떨어졌다. 며칠 후 하 십일낭은 궁에 새로운 후궁, 하 부인(夫人: 후궁 품계 중 하나)이 되어 그리 작지 않은 소교(小轎: 가마. 네 사람 이상이 매는 가마는 大轎라고 한다.)를 타고 궁으로 들어갔고, 자극전과 그리 멀지 않은 아담한 뜰에 묵게 되었다.
성지가 내려온 날, 영원은 하 십일낭이 부인이 되어 궁으로 들어간 사실을 위리안치된 대황자에게 알렸다.
대황자가 위리안치된 이래 밖에서 들어온 첫 번째 소식이었다.
소식을 전하러 온 잡역을 내보낸 대황자는 단걸음에 후원 구석의 두 칸짜리 낮은 집으로 달려 들어갔다.
장 선생이 바로 그곳에서 살고 있었다.
“하가에서…… 궁에 들어갔다. 부인으로 봉해졌어!”
나지막한 집으로 달려 들어온 대황자는 두 뺨이 발그레하고 두려울 정도로 눈빛이 빛났다.
“하가요?”
장 선생은 천천히 붓을 내려놓고 고개 들어 대황자를 바라봤다.
“하가 십일낭이라더군. 오늘 성지가 떨어져서 입궁하여 부인으로 봉해졌다! 하가가!”
대황자는 장 선생의 어깨를 붙들고 흔들다가 손을 놓고 흥분한 듯 웃음을 터트렸다.
“외숙이다! 틀림없어. 외숙이 하가 낭자를 궁으로 들인 것이야. 나를 위해서. 나를 위해서!”
“누가 소식을 전한 겁니까?”
장 선생이 무표정한 얼굴로 느릿느릿 물었다.
“잡역이다. 봄이 되면 비가 많이 온다고, 새는 곳이 없는지 보러 왔다고 하더군. 그건 핑계지!”
대황자는 다시 촉촉해진 환혼초(還魂草: 부처손)처럼 활기찼다.
“내 왕부는 새 저택인데 물 새는 곳이 어디 있어서. 잡역이 몰래 와서 이 중요한 말을 전했는데, 외숙이 아니면 누구겠느냐. 이럴 줄 알았다. 외숙은 오로지 내게 충성한다.”
“잡역이 물 새는 곳을 확인하러 왔다고요?”
장 선생이 살며시 눈살을 찌푸렸다.
“아니, 관사였다. 공부 사람이겠지. 아니면 궁 안 사람이거나. 수염이 있는 걸 보면 공부겠구나. 하급 관리가 잡역 몇을 데리고 왔는데 그중 하나가……. 외숙이 어디까지 준비했는지 모르겠군. 언제쯤이면 나를 구하려나. 서신을 보내 제대로 물어봐야겠다!”
대황자는 너무 들떠서 횡설수설했다.
“대왕야, 진정하세요.”
장 선생은 붓을 필세에 천천히 헹구고 붓걸이에 걸었다.
“하가 낭자가 입궁한 일이 대왕야에게 도움 될 일인지는 더 두고 봐야 합니다. 이 전갈을 국공이 전한 건지도 두고 봐야 하고요.”
“두고 볼 것이 뭐가 있어.”
대황자가 눈썹을 치켜떴다.
장 선생은 그를 거들떠보지도 않았고, 목소리도 아까보다 싸늘해졌다.
“황상은 불과 마흔 몇, 한창때입니다. 이런 때에 하씨를 궁으로 들이면, 두어 해 뒤엔 황자 아니면 공주가 태어날 수도 있지요. 1, 2년 안에 황자가 태어나서 여남은 살이 되어도 황상은 고작 예순입니다. 하씨에게 황자가 생기면, 자기 아들이 아니라 대왕야 앞날을 생각할 것 같습니까? 대왕야가 기뻐할 일이 무엇입니까?”
“웃기는 소리! 궁에 십수 년 동안 아이가 태어난 일이 없다!”
대황자의 목소리가 날카로웠다.
“그건 마마가 계셨으니까요. 하지만 지금은 마마가 안 계십니다!”
장 선생은 넌더리 난다는 듯 대황자를 바라봤다. 대왕야가 제 어미를 죽였다. 이 세상에 가장 큰 울타리를. 그러고도 아직도 어머니가 세상을 떠난 날부터 자기 곁에 아무도 남지 않았다는 사실을 전혀 깨닫지 못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