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22화: 도와줄 사람
“고 이낭! 어딜 가는 거예요! 아이고, 난 고 이낭이 자는 줄 알았지…….”
왕 어멈은 누가 죽이려고 뒤쫓아 오는 듯이 빠르게 달려가는 고 이낭을 바라보며 까치발을 하고 손수건을 흔들며 뒤에서 꽥꽥 고함쳤다.
“고 이낭! 이러면 안 되지요!”
“쯧! 단물이 생겼다고 저렇게 빨리 달려가는 것 좀 봐! 이 세상에 어떻게 저렇게 염치없는 물건이 다 있지!”
청서는 화가 나서 어쩔 줄 몰랐다.
“고가 집구석을 못 본 것도 아니고, 뭘 그래요. 고가 저것이라고 다르겠어요?”
왕 어멈은 즐겁기 짝이 없는 듯 손뼉을 짝짝 쳤다.
“아까 한 말, 진짜야?”
청서가 왕 어멈을 붙잡고 물었다.
“반은 진짜, 반은 가짜예요.”
왕 어멈과 청서 모두 강가 가노이고 식구끼리 사이도 좋은 편이었다. 고 이낭과 비교하면 둘은 그래도 같은 편인 셈이었다.
“대내내가 이가아를 이 거처에서 데리고 갈 생각이긴 해요. 그런데 부인 밑에서 키우는 게 아니라 대내내 밑에서 키울 거예요.”
왕 어멈의 목소리에 고소한 기색이 가득했다. 청서는 기겁하고 몸을 부르르 떨었다.
“그럼 이제 이가아는 죽는 거 아니야?”
“무슨 말을 그렇게 해요. 대내내는 적모예요. 죽긴 뭘 죽어요. 게다가 세자야의 보물인데. 대내내가 세자야의 마음을 좀 잡아 보려고 데리고 가려는 걸 수도 있지요. 그건 우리가 알 바 아니고요. 고 이낭이 정말로 이가아를 데리고 여기서 나가게 되면, 청서 이낭은 앞으로 조용히 삼가아 키우면 되겠네요. 그리고 대가아도.”
청서가 왕 어멈을 살짝 잡아당겼다.
“어멈, 지금 내가 하는 이야기, 다른 사람한테 절대로 하면 안 돼.”
“그건 걱정하지 말아요. 무슨 일인데요? 어서 이야기해요!”
왕 어멈은 순간 들떴다. 수녕백부 윗전이든 아랫전 할 것 없이 거의 모든 이가 남 이야기를 하고 듣는 걸 좋아했다.
“대가아 말이야……. 어멈, 들어와 봐.”
청서는 아이를 안은 채 왕 어멈을 안으로 데리고 들어가서 너무 말라서 눈이 유난히 커 보이는 대가아를 가리켰다.
“어멈, 봐봐. 이 아이 누구 닮았어? 볼수록 고 이낭 닮지 않았어? 저 눈 좀 봐. 고가 식구는 하나같이 불여우 같은 도화눈이잖아. 고가 대야와 고가 노야가 같이 묵란을 거둔 걸 모르는 사람이 있어? 이 아이 좀 봐. 고가 씨야!”
한참 유심히 바라보던 왕 어멈이 헛웃음 쳤다.
“허, 정말 그러네! 이런 일이 다 있네! 정말이지……. 이러니까 묵란이 아이를 낳았다는 말에 세자야가 곧바로 자기 아이가 아니라고 했지. 정말이지…….”
왕 어멈은 생각할수록 즐거워졌다. 청서는 눈살을 단단히 찌푸렸다.
“어멈, 웃음이 나와? 얼마나 큰일인데! 남의 씨를 기르게 됐잖아. 대체 이게 뭐야. 게다가 장자의 명분을 차지했어!”
왕 어멈이 청서의 말을 가로막았다.
“짠 무 먹으면서 싱거울까 봐 걱정한다더니, 이런 걸 보고 걱정을 사서 한다고 하는 거예요. 어차피 저 아이가 장자 명분을 가져가지 않았다고 해도 삼가아에게 가는 것도 아니잖아요. 괜히 고씨만 좋은 일 시키지.”
“그건 그렇지.”
청서는 순간 화가 가라앉았다. 고 이낭 좋은 일 시키느니 차라리 남 좋은 일 시키는 게 나았다. 그게 누구 씨인지 모를 잡종이라도.
“자기 씨가 아니라는 걸 세자야가 모르겠어요? 알면서도 키우는 거예요. 쯧쯧. 고 이낭에 대한 대야의 진심, 정말이지……. 고가 아들을 대신 키우다니요. 오 어멈이 떠나기 전에 세자야가 오통신이 씌었다고 하더니, 틀린 말이 아니네요.”
“고 이낭이 돌아오지 않으면 저 잡것을 나 혼자 떠맡아야 해. 세자야가 고가 천것을 떠받드느라 누굴 키우든 상관없는데, 왜 내 심혈로 키워야 하는데?”
청서가 툴툴거렸다. 왕 어멈이라고 무슨 방법이 있을까. 눈살을 찌푸리고 한참 생각해도 뾰족한 수가 없었다.
“어려운 일이네요, 어려운 일이야. 젖이 많이 나오는 것도 아니고. 어려운 일이야. 알아서 방법을 잘 생각해 봐요. 아이고, 주방에 할 일이 태산이라 이만 가 봐야겠어요. 저녁에 뭐 먹고 싶은 거 있어요? 만들어서 보내줄게.”
“특별한 건 없고, 생선이 먹고 싶은데. 어탕이면 더 좋고. 며칠 전부터 새로운 게 먹고 싶더라고.”
청서는 대답하고는 아이를 안고 왕 어멈을 배웅하러 나갔다.
“아이고, 하필 요즘 생선이 말도 안 될 정도로 비싸서, 한두 마리밖에 없는데 다 대내내 드실 어단(魚團)을 만들어야 해요. 나중에 값이 내리면 내가 꼭 제대로 어탕 끓여줄게요.”
왕 어멈은 청서의 요구를 완곡하게 거절했다. 청서는 얼굴이 굳어서 억지로 웃어 보일 뿐 다른 걸 요구하지 않았다.
예전엔 왕 어멈이 그녀에게 잘 보이려 했지만, 지금은 그녀가 왕 어멈에게 잘 보여야 했다. 사람 처지 변하는 건 참 한순간이었다.
밤이 되자 영원은 익숙하게 이가 후원을 지나쳐서 이동의 뜨락으로 직행했다. 각문 자물쇠를 따서 열고 안으로 들어간 다음에 다시 돌아서서 잠그고는 팔을 휘두르며 어슬렁어슬렁 회랑을 지났다. 그리고 상방에 도착해서 창문을 톡톡 두드리고는 대답도 기다리지 않고 곧장 서쪽 곁채로 향했다.
녹매가 휘장을 젖히고 밖을 내다보다가 서쪽 곁채로 곧장 가는 영원의 뒷모습을 봤다.
녹매가 휘장을 내려놓고 고했다.
“낭자, 그 칠야, 또 왔어요.”
“낭자, 그 칠야, 정말이지 호색한 아니고 뭐예요!”
수련은 영원이 이렇게 허물없이 툭하면 찾아오는 것에 반감과 분노를 느낄 수밖에 없었다.
“저 사람은 보고 들은 것이 많아서 미인도 수도 없이 봐 왔어. 여인을 밝히는 건 아니고 그냥 지나치게 편하게 굴어서 그래.”
이동은 화항에서 내려가 서쪽 곁채로 향했다.
“낭자는 자각이 없어서 그렇게 생각하시는 거예요.”
수련이 뒤를 따르며 꿍얼거리고는 문죽과 청국도 불러오라고 녹매를 보냈다. 낭자가 뭐라고 하든 자기는 영 칠야를 매우, 매우 경계해야만 했다.
이동이 서쪽 곁채에 들어갔을 때 영원은 벌써 두봉을 벗고 제가 몇 번 앉았었던 팔걸이의자에 편안하게 앉아 있었다. 이동이 들어오는 걸 보자, 이동 뒤에서 들어오는 수련을 향해 활짝 웃으며 분부했다.
“뇌차(擂茶: 생강, 땅콩[화생], 생찻잎을 갈아서 만드는 차. 삼생탕[三生湯]이라고도 부른다.) 한잔 다오. 생강즙은 조금만 넣고 깨랑 땅콩은 많이 넣어서. 잘게 갈고.”
수련은 이동을 바라보다가 이동이 고개를 끄덕이자 그제야 공손하게 영 칠야의 뇌차를 내리러 나갔다.
“당신 시녀, 좋은 아이긴 한데 성질이 좀 있군.”
영원은 매우 눈치 빠른 사람이었다.
“사람은 누구나 성질이 있죠. 왜 왔어요?”
수련이 사라진 쪽을 보며 영원이 하는 말에 이동은 그의 맞은편에 앉으며 대답하고는 곧바로 용건을 물었다.
“오늘 장공주가 바둑에 진 거, 정말로 일부러 그런 게 아닙니다.”
영원이 입을 열자마자 하는 말에 이동은 울지도 웃지도 못했다.
“이번엔 그 말 하려고 온 거예요? 그럴 거면 장공주를 뵈러 가서 직접 해명하고 사과했어야죠. 나한테 말해도 아무런 소용 없어요.”
“난 장공주가 어떻게 생각하든 상관없는걸. 나는 낭자에게 해명하러 온 겁니다. 일부러 그런 것도 아니고, 장공주 말처럼 누님과 손잡고 그런 것도 아닙니다. 바둑 한판에 손은 무슨.”
“장공주가 그냥 대수롭지 않게 한 말인데. 이렇게 세심할 줄 몰랐네요.”
이동이 영원을 위아래로 훑어봤다.
“나도 그냥 하는 이야기지. 참, 오늘 떠들썩했겠군요. 별일은 없었고?”
“무슨 일이요. 무슨 일이 있어야 할 것 같은데요?”
영원이 화제를 돌리자 이동은 궁에서 열린 연회 이야기임을 알아듣고 되물었다.
“황상이 하가 십일낭을 마음에 들어 했다면서요. 주육한테 들었습니다.”
영원이 즐거운 듯 다리를 흔들면서 환하게 웃었다.
“주가도 참……. 쯧쯧. 그것 말고 다른 재미있는 이야기는 없고요? 예를 들면 누구 댁에서 누구를 마음에 들어 했다던가.”
“황후마마가 당신 짝으로 누굴 마음에 들어 했는지 물어보는 거예요?”
이동이 대놓고 되묻는 말에 영원이 얼른 손사래 쳤다.
“정말 아닙니다. 누님 성격은 내가 알아요. 일찍 출가했지만, 그래도 성격은 알지. 누님이 누굴 점찍었다고 해도 낭자는 분명 모를 겁니다. 누굴 점찍었든지 내가 고개를 끄덕이기 전엔 티 내지 않을 거라서.”
“그럼 누가 궁금한 건데요.”
“강남 명씨 가문, 들어 봤습니까?”
“물론이죠.”
이동이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 안다. 묵 승상 막내딸이 강남 명가 장방 차남, 미래의 공부상서 명철, 명 상서와 혼인했다. 명 상서는 고상하고 온화하기로 유명했고, 온 조정을 통틀어 흠잡을 것이 가장 없는 사람이었다.
명철의 친누이 명 삼낭자가 묵칠과 혼인했다.
명 칠내내를 떠올린 이동은 씁쓸하고 처연해졌다. 명 칠내내는 서른을 넘기고 죽었는데 아무래도 울결(鬱結: 우울증)로 죽은 것 같았다. 죽기 전에 그녀를 몇 번 만나러 갔었는데 죽음을 기다리는 그녀의 모습에 놀라면서도 묘하게 친근하고 이해가 됐다. 그때 이동은 자기가 죽음을 맞이할 때도 그럴 것으로 생각했었다. 자기도 죽음이 오길 기다리고, 타의로 인한 해탈을 기대할 거라고.
“묵칠 말이 묵칠 할머님이 명가 삼낭자를 점찍었답니다. 진작 점찍었대요. 며칠 전에 명가 삼낭자가 어머니와 함께 경성에 왔답니다. 삼낭자와 묵칠의 혼사 때문에요.”
이동은 움찔하면서 내심 한숨을 내쉬었다. 이번에도 예전대로 그렇게 되는구나.
“묵칠은 명 삼낭자와 혼인하고 싶지 않답니다.”
“왜요?”
이동은 얼떨떨해져서 저도 모르게 툭 물었다. 묵칠이 명 삼낭자와 혼인하고 싶지 않았구나! 이번에 그런 걸까, 전생에도 그랬던 걸까?
“명가가 계가보다 더 문아(文雅: 고상하고 우아하고 점잖다.)하다면서요?”
영원이 묻는 말에 이동이 고개를 끄덕였다.
“계가보다 더 문아한지는 모르겠지만, 명가와 계가 모두 문아한 것으로 유명하죠. 우리 집안에 강남과 태평부에 그 두 가문과 왕래하는 장궤를 특별히 두었는데 다들 글공부한 수재 출신이었어요. 명가는 시녀와 사환을 고를 때도 얼마나 배웠는지 시험한대요. 시 짓기 같은 것으로요.”
“정말 문아한 게 맞군.”
영원이 혀를 내두르며 고개를 저었다.
“지나치게 문아해서 싫은 거였어! 묵칠은 묵씨지만 그야말로 얼뜨기라 대구(對句: 시의 글귀를 짝 맞추는 것) 맞추기도 많아야 세 번입니다. 그러니 명가 삼낭자하고야, 쯧.
그야말로 웃긴 얘기죠. 묵칠이 그러는데, 명가 삼낭자와 누이인 묵 칠낭자는 이야기 나눌 때 시를 섞거나 아니면 서책에서 읽은 글귀, 그것도 아니면 고전을 인용한답니다. 그래놓고 서로 마주 보며 생긋 웃는답니다. 묵칠 저는 글자를 따로는 알아듣는데 무슨 말인지 전혀 모르겠대요.”
이동이 피식 웃음을 터트렸다.
“누가 그런 아내를 맞고 싶겠습니까. 대화거리가 없는 건 둘째치고, 얼굴을 들 수 있겠냐고요.”
영원이 어깨를 으쓱하며 하는 말에 이동이 한숨을 쉬었다. 보아하니 전생에도 묵칠은 명 삼낭자와 혼인하길 바라지 않았을 듯했다.
“명 삼낭자와 혼인하고 싶지 않다고 날 찾아와서 혼인하지 않을 방법이 없겠냐고 묻더군요. 안돼 보여서 알겠다고 했지요. 나중에 생각해 보니 참 난감한 일이라 낭자를 만나러 온 겁니다.”
영원의 말에 이동은 또 목이 막힐 뻔했다. 이런 일도 받아준다고? 그래놓고 어려워지니까 날 찾아와?
“당신 오라버니도 나이가 찼는데, 당신 어머님이 점찍은 낭자는 없고요?”
영원의 화제가 순간 이신으로 넘어갔다.
“없어요.”
이동은 영원을 흘겨봤다. 묵칠 이야기하다가 오라버니 이야기는 또 왜? 무슨 생각이지?
“당신 오라버니 상대로 내가 점찍은 좋은 혼처가 있는데, 어느 가문일지 맞혀 봐요.”
영원이 상반신을 수그리고는 의자를 앞으로 바짝 당겨 앉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