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7화: 제 꾀에 넘어가다
이때 주 추밀부사도 저택에 있었다. 하 십일낭이 황상의 눈길을 받고 주유해 처 하씨가 직접 하가로 하 십일낭을 데리고 돌아간 소식을 수국공 부자보다 조금 늦었을 뿐 거의 비슷하게 들었다.
주 추밀부사는 즉시 말을 내오라고 해서 태자부로 달려가다가 말머리를 돌려 고서강 저택으로 달려갔다. 일단 고 사사와 상의해서 정한 다음에 같이 태자를 찾아가야 할 일이었다.
주 추밀부사는 고 사사 저택이 있는 골목에서 고 사사와 마주쳤다. 말을 타고 가던 고 사사는 주 추밀부사를 보고는 마차를 내오라고 해서 같이 마차에 올라 오늘 일을 상의하면서 태자부로 향했다.
“자네 집안도 참…….”
고 사사는 화가 나서 어쩔 줄 몰랐다.
“휴!”
주 추밀부사가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형님에 관해서는 정말이지 할 말이 없었다. 일을 성사하기에 부족하고 망치는 덴 선수였다. 그리고 조카도 아비와 똑같이 어리석고.
고 사사는 매서운 표정으로 주 추밀부사를 바라봤다.
“나는 하 십일낭 일의 배후가 단순하지 않을까 걱정이네. 자네 형님, 정말로 태자 쪽으로 마음을 돌린 건가. 아니면 겉으로 그러는 척하고 아직 대왕야를 염두에 둔 건가. 곰곰이 생각해 보게. 왜 굳이 하가 낭자를 입궁시키려고 했겠나.”
“형님이 그런 수완이 있을 리가 있나.”
주 추밀부사가 엉겁결에 내뱉은 말에 고 사사가 냉소했다.
“그런 수완이야 없겠지. 하면 묻겠네, 예전에 대왕야 곁에 있던 장 선생은 어떻게 됐는가? 장 선생이 하는 말이라면 대왕야가 뭐든 듣지 않았나. 지금 어디에 있지? 같이 갇혔다는 말은 하지 말게. 두 번이나 자세히 조사했네. 높은 담장 안에 그는 없었네. 어디로 갔나?”
주 추밀부사는 멍해졌다. 골골거리던 장 선생 생각은 정말이지 조금도 하지 않았다. 형님이 데리고 나왔나? 담장을 쌓으러 형님이 갔었다. 그때 사람을 데리고 나오는 건 식은 죽 먹기다. 그 생각에 주 추밀부사의 얼굴이 퍼레졌다.
장 선생, 그자는 누가 뭐래도 단호한 대왕야파인데!
고 사사는 안색이 변하는 주 추밀부사의 모습에 코웃음 몇 번 칠 뿐, 장 선생이 어디에 있는지는 물고 늘어지지 않았다.
주 추밀부사가 다소 굽실거리면서 말했다.
“하가 낭자가 마마와 닮았다고는 하나 그저 조금 닮았을 뿐이네. 마마와 황상의 정은 어릴 때부터 청매죽마로 키우고 몇십 년 동안 의지하며 쌓은 정이네. 아무리 그래도 두 번째 마마는 나오지 않아. 장 선생은 골골거리던 사람이라 몇 년 전부터 오래 살지 못할 거라고 했었네.”
고 사사는 주 추밀부사가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건지 알면서도 빤히 바라볼 뿐 대답하지 않았다.
“형님은 수완도 없고 배포도 없네. 이따 태자를 만나면 잘 부탁하네, 고 형.”
주 추밀부사는 눈 딱 감고 다시 입을 열어 하고픈 말을 끝까지 했다. 형님을 위해 하는 말이 아니었다. 형님의 장방이 즉시 없어지면 홀가분해진다. 하지만 그는 생각이 조금은 있는 사람이었고 지금의 형세가 잘 보였다. 귀비 마마가 세상을 떠나서 주가 가장 큰 뒷배가 사라졌다. 형님과 화목하진 않아도 같은 배에 타고 있는데, 수국공부가 무너지면 신진 형국공부 홀로서기가 어려워진다. 홀로 선다고 해도 거기까지다. 사방 하나뿐으로는 주가의 세력이 너무 약해진다.
형님이 하가 낭자를 궁으로 보낸 걸 전혀 모르진 않았다. 하가 낭자가 입궁해서 총애받는 건 적어도 주가에게 나쁜 일이 아님을 자세히 저울질한 끝에 모른 척한 것뿐이었다.
고 사사는 싸늘하게 비웃을 뿐 입을 열지 않았다. 주 추밀부사는 고개를 돌려 흔들리는 휘장을 바라보다가 고 사사를 돌아봤다.
“태자가 나를 승상으로 천거하려고 한다는 걸 어제 들었네. 말도 안 되는 소리지. 진작 고 형과 끝낸 이야기 아닌가. 음서 출신인 내가 입각한다는 건 깜짝 놀랄 일이네. 이 뜬소문이 진짜든 가짜든, 이따 나는 고 형이 입각해야 한다고 태자에게 말할 걸세. 고 형이 입각해야 태자의 진정한 조력자가 된다고.”
고 사사의 얼굴이 순간 겨울에서 봄으로 변했다.
“나도 그 소문을 들었네. 주 형은 재능과 덕 모두 갖춘 사람이니 입각은 당연하고 수석 수상도 능히 감당할 사람이지. 그렇게 말하는 건 지나친 겸손이네, 주 형.”
“고 형, 농담하지 말게. 다른 건 몰라도 내 출신으로 추밀부사까지 된 것이 이미 최선이네. 양방 출신(两榜: 과거에서 향시鄕試 거인擧人과 회시會試 진사進士에 급제한 사람)은 입각하기 적당하지 않다지만, 반드시 그런 건 아니네. 그 규칙도 일종의 오래된 관습일 뿐이네. 태자는 아직은 모든 게 끝난 게 아니네. 지금 내가 입각하면 괜히 문제를 일으키는 것이 아니고 무엇이겠나.”
주 추밀부사는 성심성의껏 그렇게 말했다.
“입각하더라도 나중에 태자가 천하에 군림한 후에 고 형의 짐을 함께 덜어주면 모를까, 지금은 고 형 말고 적임이 없네. 고 형, 그만 놀리게.”
“주 형은 똑똑한 사람이지.”
고 사사의 그 말은 7할 정도는 진심이었다. 지금 형세가 확실히 그랬다.
“주 형, 걱정하지 말게. 자네 형님이 어리석…… 휴, 아우인 자네가 손윗사람처럼 노심초사하다니. 걱정하지 말게. 이번 일은 어떻게든 무마해 보겠네.”
“고맙네, 고 형.”
고 사사가 승낙하자 주 추밀부사는 안도하며 공수했다.
주유해는 고 사사, 그리고 주 추밀부사와 거의 한 발짝 차이로 태자부에 도착해 뵙길 청했다. 문 앞에서 가로막혀 밖에서 기다리던 주유해는 고 사사의 마차와 넷째 숙부의 시종, 사환을 발견했고, 태자가 고 사사, 넷째 숙부와 이야기하는 걸 알았지만 끈기 있게 문간방에서 기다렸다. 오늘 무슨 일이 있어도 태자를 만나야만 했다.
반 시진쯤 지났을까, 목이 빠지게 기다리던 주유해는 안에서 나오는 고 사사와 숙부를 발견했다. 그는 머뭇거리다가 일어서서 문간방으로 몸을 숨겼다. 장방과 사방은 물과 기름 같은 사이라 자신이 태자를 찾아온 일을 숙부는 모르는 게 나았다. 아니면 괜히 일을 망치게 되고.
주유해는 고 사사와 숙부가 마차에 올라 멀어진 다음에야 문간방에서 나와 다시 사람을 보내 뵙길 청했다. 이번엔 들어오라는 분부가 돌아왔다.
주유해는 조마조마한 마음으로 안으로 들어가자마자 고개를 조아렸다. 일어나라는 태자의 말에 그제야 어깨를 움츠리고 공손하게 일어서서 태자를 힐끔 살폈다. 태자의 기분이 상당히 좋아 보이는 걸 보고 순간 조마조마한 마음을 진정시켰다. 운이 나쁘지 않은 듯했다.
설마 아까 숙부가 하가 낭자 일을 미처 이야기하지 못했나? 음, 그런 것이 분명하군. 운이 나쁘지 않아!
“할 말 있으면 어서 해라. 고는 매우 바쁘다.”
태자는 주유해를 그다지 좋아하지 않았다.
“예! 태자 전하는 지금 주군이나 마찬가지십니다. 황상의 몸도 좋지 않아서 천하 만백성이 모두 전하의 어깨에 있습니다. 부디 몸조심하십시오.”
주유해는 더 공손하게 얼른 아부부터 했다.
“그 정도 마음은 있구나.”
기분이 좋아진 태자는 목소리가 금세 부드러워졌다.
“무슨 일이냐? 말해라. 듣고 있다.”
태자의 목소리가 아까보다 부드러워진 듯하자 주유해는 조금 더 마음을 놓았다.
“예, 하가 낭자의 일입니다.”
하가라는 말을 들은 태자의 눈빛에 분노가 스쳤다. 태자가 콧방귀 뀌는 소리에 주유해의 마음이 또 두근거렸다.
“전하, 신의 아비가 하가 낭자를 입궁시키는 것은 다 효심에서입니다. 황상께서 마마를 지나치게 그리워하다가 몸이 상할까 봐 걱정입니다. 하가 낭자를 궁에 보낸 것도 그저 낭자가 황상의 기분을 풀고 옥체를 강녕하게 보존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함입니다.”
태자는 안색이 변해서 어두운 얼굴로 주유해를 빤히 봤다. 이 자리에서 잘근잘근 밟아 죽이지 못함이 한스러웠다. 옥체 강녕이라니. 옥체가 줄곧 강녕하면, 태자인 자신은 언제 빛을 본단 말인가.
게다가 그의 마음속 응어리는, 황상이 마마를 따라 떠나고 그 자리에 자신이 앉아야만 풀 수 있었다. 그때가 되어야 더는 두려워하지 않을 수 있는 응어리였다.
“대단한 효심이구나!”
태자는 거의 잇새로 쥐어짜듯 그 말을 내뱉었다. 주유해는 가슴이 또 철렁했다. 너무 놀란 가운데 머리가 휙휙 돌아갔다. 순간 문제를 깨달았다. 태자로서 황상의 옥체가 강녕하길 바라지 않을 것이다!
“태자 전하!”
주유해는 순간 겁에 질려 식은땀이 흘렀다. 어떻게 이렇게 어리석은 소리를! 이 정도도 고려하지 못했다니. 어떻게 만회한다?
“태자 전하, 황상의 옥체는…… 옥체는…….”
주유해는 놀라고 겁에 질려서 머릿속이 엉망이 됐다. 다급해서 눈앞에 별이 보이고, 다급할수록 머리가 돌아가지 않았다.
“하가는 언제나 불충한 마음을 품고 있었지. 너와 네 아비는 그걸 정말로 전혀 몰랐느냐? 감히 하가 여식을 궁에 보내? 너와 네 아비, 황상을 해칠 생각이냐? 그러고도 옥체 강녕을 위한 일이라는 헛소리를 입에 올리느냐? 퉤!”
태자는 생각할수록 화가 나서 상반신을 숙여서 주유해의 얼굴에 침을 뱉었다. 주유해는 침이 잔뜩 튄 얼굴로 연거푸 고개를 조아렸다.
“태자 전하, 소신과 부친이 어찌 감히……. 소신과 부친은 태자 전하께 충성합니다. 오로지 태자 전하께 충성합니다. 전하, 굽어살피시옵소서.”
“꺼져라!”
태자가 버럭 고함쳤다. 생각할수록 화가 치밀어서 얼굴을 잔뜩 구기고 꺼지라고 외쳤다. 주유해는 끽소리도 더할 엄두를 내지 못하고 허둥지둥 뒤로 물러나서 밖으로 나와 달아났다.
태자부에서 나온 주유해는 쏜살같이 앞으로 달려 나갔다. 양쪽에서 의아한 듯 바라보는 시선에 조금은 정신을 차리고는 걸음을 멈췄다. 잠시 멍하니 서 있다가 사환의 어깨를 짚고 말에 올랐다. 말을 타고 가는 동안 두려움이 서서히 잦아들면서 강렬한 슬픔이 몰려왔다. 고모님이 세상을 떠나고 대왕야가 위리안치된 후로 하늘이 무너진 기분이었다. 게다가 그 하늘은 돌아오지 못할 것 같은 기분이었다. 다시는 돌아오지 못할 것이다.
수녕백부 진 부인은 마차에 올라 휘장을 내리기 전부터 눈물을 뚝뚝 흘렸다. 곡 대내내가 그녀 뒤를 따라 마차에 오르고 강완과 강녕도 끼어서 탔다.
수녕백부엔 마차라곤 하나뿐이었다. 다행히 체면을 세울 만큼 마차가 화려했다. 또 다행히 매우 넓어서 넷이 같이 타도 비좁지 않았다. 이가의 마차는 넓고 쾌적하기로 흠잡을 곳이 없었다.
곡 대내내가 한쪽에 앉았고, 강완과 강녕은 마차에 올라서 곡 대내내를 흘겨보며 진 부인 곁에 찰싹 달라붙어 앉고는 수시로 곡 대내내를 노려봤다. 곡 대내내가 칼을 휘두르며 수녕백부를 휘어잡은 후로 강완과 강녕은 뼛속까지 그녀를 두려워했다.
진 부인은 눈물을 뚝뚝 흘리면서도, 막 궁에서 나왔고 아직은 밖이라 소리를 낼 수가 없어서 손수건으로 입을 틀어막았다. 소리 없이 눈물을 흘리는 모습이 평소에 울고불고 눈물을 흘리는 것보다 오히려 더 슬퍼 보였다.
진 부인은 한참 동안 소리 없이 통곡했고 모친의 우는 모습에 익숙한 강완, 강녕은 아무런 느낌 없이 딱 붙어서 들뜬 얼굴로 소곤소곤 오늘 크게 안목을 넓힌 일을 이야기했다. 진 부인과 비스듬히 맞은편에 앉은 곡 대내내는 살짝 고개를 틀어 느긋하게 진 부인의 우는 모습을 바라봤다. 언제까지 저렇게 울 건지 두고 보고 싶었다. 눈물이 마르지도 않는 건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