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금동-316화 (316/463)

316화: 하가 낭자

탕 삼내내는 숨을 죽이고 시어머니 거처에서 물러나 고개 숙이고 정원 문을 나와서 자기 거처 안으로 들어간 후에야 길게 숨을 내뱉었다. 긴장했던 겉가죽에 감췄던 기쁨이 한순간 퍼졌다. 다섯째 운이 정말 좋구나! 큰 재난을 무사히 넘긴 것 같아!

탕 삼내내는 방 안을 빠르게 서성거리다가 심복인 배가 어멈을 불러서 시어머니 유씨가 혼낸 것을 나직이 대충 설명하고는 간식 몇 가지 챙겨서 탕가에 가라고 분부했다.

마차에 오른 탕 오낭자는 혼자 돌아가라는 유씨의 명을 듣고는 조마조마하던 마음을 서서히 달랬다.

유씨가 화가 났다. 화 한 번 내고 끝낼 것인가, 아니면 다른 방법을 또 찾을 것인가.

탕 오낭자가 조마조마하며 집으로 돌아갔을 때, 딸이 돌아왔다는 소식을 들은 상 대내내가 허둥지둥 불전 앞에서 일어났다. 너무 급하게 일어나는 바람에 시녀가 재빨리 부축하지 않았다면 그대로 불전 앞에 꼬꾸라질 뻔했다.

딸이 나간 후로 줄곧 무릎 꿇고 일어나지도 않고 경을 외며 기도했었다.

탕 오낭자가 실내로 들어서자마자 상 대내내가 달려가 다급하게 물었다.

“어찌 됐느냐?”

탕 오낭자가 얼른 고개를 끄덕이자 상 대내내의 안색이 순간 창백해졌다.

“너를…… 마음에…….”

“아니에요, 아니에요!”

탕 오낭자는 모친의 얼굴이 창백해진 것을 보고, 모친이 잘못 알아들었음을 깨닫고 얼른 해명했다.

“마음에 든 게 아니에요. 아니, 그것도 아니고, 제가 가지 않았어요. 황상을 못 만났어요.”

“그럼…… 아이고, 내 심장아.”

상 대내내는 다리에 힘이 풀렸다. 다행히 뒤에 화항이 있어서 바닥에 주저앉지 않고 화항에 기댔다.

“아미타불. 보살께서 보우하셨다. 보살께서 보우하셨어!”

상 대내내는 아미타불을 읊으며 딸을 붙들고 화항에 앉힌 다음 유심히 살폈다.

“아무 일 없는 거지? 놀랐지? 놀랐지만 위험은 없었으니 됐다. 그럼 됐어. 어떻게 된 일인지 말해 보렴.”

“들어갔더니, 진작 준비해뒀는지 고 사사부 고 부인이 몰래 와서 알려주셨어요. 밖에 놓인 동백꽃을 따라가면 된다고 계속 눈치 주더라고요. 동백꽃을 따라가라고. 가기만 하면 된다고. 다른 말은 안 했어요. 나중에 계속 눈치 주는데 못 본 체했어요. 그런데도 계속 눈치 줘서 나갈 수밖에 없었어요.”

놀라고 두렵고 난감했던 그때를 떠올린 탕 오낭자의 눈이 그렁그렁해졌고 상 대내내는 몹시 마음이 아팠다.

“대전에서 나와서 꽃을 따라가다가 샛길로 가서 숨으려고 했죠. 그런데 궁은 처음이라, 행여 잘못 들어가기라도 하면 어쩌나 싶어서…….”

탕 오낭자의 목소리가 떨리고 눈물이 떨어졌다.

“초조해하고 있는데 복안 장공주를 모시는 시녀가 석류나무 아래서 손짓하지 뭐예요.”

“복안 장공주?”

상 대내내가 놀란 듯이 묻자, 탕 오낭자가 재빨리 고개를 끄덕였다.

“네, 복안 장공주요. 장공주 곁에 이가 낭자 말곤 그 시녀뿐이었어요. 제가 똑똑히 봤어요. 그 시녀가 제가 어느 집안 낭자인지, 누구랑 왔는지, 어디로 가는지 묻더라고요. 어딜 가려는 게 아니라 안에 있기 답답해서 바람 쐬러 나왔는데 어디로 가야 할지 모르겠다고 했죠.”

“이가 낭자? 장공주와 사이 좋다는 힐수방 이가?”

탕가 미래의 종부인 상 대내내는 경성에 오기 전에 이런저런 소식을 알아봤고, 탕가와 왕래가 있는 이가의 일도 진작 알고 있었다.

“시녀를 보내 몰래 알아봤는데, 전에 수녕백부 며느리였다고 하는 걸 보면 맞아요.”

탕 오낭자의 대답에 상 대내내는 생각하는 바가 있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계속해라.”

“그 시녀가 장공주의 분부로 동백꽃 화분을 고르러 나왔다고, 같이 가겠냐고 묻더라고요. 이가 언니가 장공주랑 같이 있었으니, 장공주가 저에게 해로운 일은 하지 않으실 것 같아서 따라갔어요. 그 시녀가 절 데리고 이리저리 다니면서 정말로 동백꽃을 골랐어요. 그리고 내시를 불러서 화분을 보록궁으로 보낸 다음에 저를 다시 데리고 돌아갔어요. 알아서 가라고 하더라고요. 나갈 때 고 부인이 어떻게 됐는지 묻는데 솔직히 말할 수 없어서 길을 잃었다고 했어요. 어디로 갔는지도 모르겠고, 나중에 아는 언니를 만났는데 그 언니가 절 데려다줬다고 했죠.”

“고 부인은 그 언니가 누군지는 묻지 않았고?”

상 대내내가 다급히 묻자 탕 오낭자가 고개를 저었다.

“아마 물을 생각을 하지 못한 것 같아요.”

상 대내내는 살짝 안도하고는 미간을 찌푸리고 생각했다. 고가의 반응은 어떤지 큰딸에게 물어야 할 것 같았다. 오늘 실패했더라도 내일 다시 시도하려 할까 걱정이었다.

상 대내내가 심복 어멈을 부르는데 밖에서 고가 사람이 인사 왔다는 기별이 들어왔다. 상 대내내가 어서 들이라고 분부하자 배가 어멈이 들어와 탕 삼내내가 한 말을 나직이 고했다. 상 대내내는 크게 안도하며 열 냥을 상으로 내렸다.

배가 어멈을 보낸 뒤 상 대내내는 연거푸 한숨을 쉬고는 딸의 손을 잡고 머리카락을 쓸어 넘겨주었다.

“네 운명이 좋은 모양이다. 경성에 오자마자 귀인을 만났어. 됐다. 이번 일은 이렇게 끝나려는 모양이다.”

“정말로요?”

탕 오낭자의 놀라고 기뻐하는 모습에 상 대내내가 연신 고개를 끄덕였다.

“이 어미도 식겁했다. 이번 일은 이가 낭자 덕분이다. 힐수방의 큰 재물은 모두 복을 쌓아서 번 거라고 하더니, 정말인 모양이다. 우리가 힐수방과 크게 깊은 정도 없는데 이렇게 도와준 것 좀 보아라.”

“응. 이가 언니를 봤을 때 친근한 느낌이 들었어요. 나이가 비슷한데……. 조금 이상했어요. 어머니가 날 보듯이 절 바라봤어요.”

탕 오낭자는 큰 재난이 지나갔다는 말에 마음이 편안해져서 목소리도 밝아졌다.

“아무래도 혼인했던 사람이니……. 휴. 이가는 몇 대째 팔자가 그렇구나. 그렇게 좋은 사람인데 어째서 그런지. 됐다, 그 이야기는 그만하자. 명심해라. 아버지 앞에선 지금처럼 이러면 안 된다.”

상 대내내가 진지하게 당부했다.

“아버지는 정말로 제가 궁에 들어가 그 노인네를 모시길 바라는 거예요?”

탕 오낭자가 입을 내밀었다. 상 대내내는 딸의 말에 씁쓸한 표정을 지었다.

“착하지. 사내는 여인과 생각하는 게 다르다. 어미는 네가 잘 지내기만 바라지만, 네 아버지는 가문을 책임져야 하지 않으냐.”

“아버지와 할아버님은 탕가를 키울 생각만 하시죠. 그럼 탕가 사내가 과거 보고 벼슬하면 되잖아요. 탕가 여인을 밖으로 내보낼 생각만 하는 게 무슨 능력인가요?”

“방자하기는!”

상 대내내가 얼굴을 흐리며 호통쳤다.

“어떻게 그런 말을 해! 다시는 그런 소리를 꺼내지도 말아라. 생각도 해선 안 돼!”

“네, 알겠어요.”

탕 오낭자가 나직이 대답했다.

“이것아, 여긴 경성이다, 태원부가 아니야! 가자, 어미랑 같이 이가에 보낼 물건을 고르자. 이건 목숨을 구해준 은혜나 마찬가지다.”

“네, 제가 도와드릴게요. 반드시 좋은 걸로 골라야 해요!”

탕 오낭자는 활짝 웃으며 모친의 팔짱을 끼고 함께 곳간으로 향했다.

탕 오낭자가 ‘우연히’ 황상을 만나지 못한 일로 기뻐하고 있을 때, 하 십일낭은 마침맞게 황상을 만나서 더 흥분하고 들떴다.

수국공 부인 오씨는 하 십일낭의 봄바람 부는 얼굴, 그리고 하 십일낭이 끊임없이 보내는 눈짓에 성사됐음을 눈치챘다. 그녀는 들뜬 마음을 꾹 참고 수국공부로 돌아와 조 노부인과 함께 정원 상방으로 들어갔다.

“어떻게 됐어? 어서 말해 보렴!”

안으로 들어가자마자 두봉도 벗기 전에 오씨가 다급하게 물었다.

“진정해라.”

아무래도 나이가 더 많고 겪은 일이 더 많은 조 노부인은 시녀가 두봉을 벗기고 옷 갈아입히는 걸 기다린 다음에 차까지 받은 후에야 사람들을 물리고 곁에 앉은 하 십일낭을 바라봤다.

“십일저아, 이야기해 보아라.”

하 십일낭은 기쁘고 들뜬 얼굴로 대답했다.

“예. 저는 부인이 분부한 대로 동백꽃을 따라갔어요. 넓은 길이 나왔는데 처음엔 아무도 없더니 잠시 후에 황상이 오셨어요.”

하 십일낭은 수줍은 표정을 지었다.

“어르신도 아시겠지만, 저는 황상을 뵌 적 없으니 그땐 너무 놀랐죠. 숨으려다가 생각해 보니까 궁에 황상 말고 또 누가 있겠어요. 그래서 숨지 않았죠. 나중에 황상이 절 보시곤 손짓해서 부르셨어요. 이름이 무엇인지, 몇 살인지, 동백꽃을 좋아하는지, 한참 동안 이야기하셨어요. 매우 온화하셨어요. 황상이시니까, 엄격하고 위엄 넘칠 것이라 여겼는데, 너무 좋은 분이셨어요.”

하 십일낭의 두 뺨이 붉어졌다.

“꽃이니 뭐니 하는 한담 말고, 다른 말씀은 없으셨느냐?”

조 노부인이 물었다.

“혼인했는지 물으셨어요.”

하 십일낭은 더 붉어진 얼굴로 손수건을 비틀었다. 사실 황상은 그녀의 손도 잡았다. 하지만 그건 부끄러워서 말할 수 없었다. 게다가 말하고 싶지도 않았다. 그건 황상과 그녀의 비밀이니까.

“역시 세심하시네요.”

마음이 진정된 오씨는 기뻐서 눈썹을 까닥였다. 조 노부인도 크게 안도했다.

“다 마마께서 보살핀 덕분이다.”

그 말이 끝나기도 전에 조 노부인은 또 목이 메서 한참 만에 말을 이었다.

“십일저아에게 마마의 품격이 느껴지는데 황상이 좋아하시지 않을 리가 있느냐. 내가 봐도 어여쁜걸.”

“그러니까요.”

오씨가 재빨리 맞장구쳤다.

“십일저아가 참 영리합니다. 마마의 젊을 때와 비슷하지요. 앞으로 황상 곁에 십일저아가 있으면 어머님도 안심할 수 있겠어요. 마마도 안심하고 왕생하시겠어요.”

“적당한 사람을 골라서 십일저아를 집까지 배웅해라. 하가에 당부도 하고. 길게 말할 것 없다. 하가 대야는 똑똑한 사람이다. 금세 알아들을 것이다. 십일저아를 잘 돌보라고 해라. 집에 있을 날이 길지 않을 것이다. 준비할 것을 준비해라. 조용히 해야 한다. 괜한 소문이 퍼져서 큰일을 망칠라. 아니다, 하씨더러 직접 십일저아를 데려다주라고 해라. 그 아이가 제일 적당하다. 십일저아의 일도 맡아서 하라고 하고.”

조 노부인이 주절주절 늘어놓는 분부에 오씨는 연신 대답하고는 하씨를 불러 조 노부인이 보는 앞에서 당부하고 직접 하 십일낭을 데려다주라고 분부했다.

하 십일낭이 수국공부에서 나가기도 전에 수국공은 이 큰 경사를 듣고 너무 기쁜 나머지 눈시울이 뜨거워졌다. 하 십일낭이 입궁하게 되면 마마가 있을 때보다야 못하겠지만, 주가 장방도 되살아날 기회가 생길 것 아닌가.

수국공 세자 주유해는 근심 가득한 얼굴로 눈살을 찌푸렸다.

“아버님, 황상 생각만 하실 게 아닙니다. 태자 쪽은요. 하가는 예전에 대왕야를 위해 장사했습니다. 태자는 그때…….”

태자는 그때 하가에 맺힌 게 많아서 하가 이야기만 나오면 이를 간다. 그런데 지금 하 십일낭을 궁으로 들여 황상 곁으로 보내면, 태자가 뭐라고 생각할까.

“뭐라고 생각하긴, 이건 효심이다.”

잠시 침묵하다가 수국공이 강변을 늘어놓았다. 주유해는 부친의 억지를 아랑곳하지 않았다.

“아버님, 성지가 내려오기 전에 미리 태자께 해명해야 합니다. 신경을 거슬렀다간 큰 화를 부를 겁니다.”

“성지가 내려오기 전에 태자에게 말했다가, 행여 적절치 않다고 생각해서 황상을 찾아가면? 황상은 태자를 제일 아낀다. 좋은 일을 망치는 꼴이 아니냐.”

수국공의 눈살도 찌푸려졌다.

잠시 침묵하다가 주유해가 말했다.

“그래도 말해야 합니다. 아버님, 생각해 보세요. 오늘 어머니와 할머님만 입궁한 게 아닙니다. 둘째 숙모도 가셨습니다. 둘째 숙모는 됐다 치고, 고서강 부인 유씨는요? 우리가 이야기하지 않아도 태자는 알게 될 겁니다. 차라리…….”

그 말에 수국공이 손뼉 치며 찬성했다.

“맞다, 맞아. 어차피 감출 수 있는 일이 아니니 차라리 먼저 이야기하자. 기선을 잡아야지. 얼른 가라. 가서 제대로 설명해라. 다 태자를 위한 일이라고. 대왕야는 이미 갇혔으니 우리 주가엔 태자 전하밖에 없고, 이게 다 전하를 위한 일이라고.”

주유해는 연거푸 대답하고 밖으로 나가서 성큼성큼 태자를 만나러 달려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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