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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동-314화 (314/463)

314화: 바둑 한 판일 뿐

영원은 복안 장공주의 시선을 따라 이동을 힐끔 봤다. 재미있어하는 그녀의 얼굴에 마음이 무거워졌다.

“그 일이라면 네 누님을 찾아가서 얘기해. 나한테 아무리 이야기해 봐야 소용없지. 듣기도 싫고.”

복안 장공주가 가 보라는 듯이 손을 휘저었다. 그녀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밖에서 시녀의 목소리가 다시 울렸다. 영 황후가 왔다.

“응?”

복안 장공주가 영원을 위아래로 살폈다.

“오누이가 상의했어? 시간까지 맞춰서 온 거야?”

“전 이만 가 봐야겠습니다!”

영원은 일어서자마자 밖으로 나가면서 당부했다.

“금방 왔다고 하십시오. 문안드리고 나가는 길이라고요. 전 아무 말도 안 한 겁…….”

말이 끝나기도 전에 이미 밖으로 튀어 나간 영원은 회랑에서 영 황후를 마주치고는 장읍했다.

“누님, 장공주 누님께 문안드리러 왔습니다. 문안 올렸고요. 이제 가려고요.”

“잘 만났다. 할 말이 있었다. 일단 들어오렴.”

영 황후는 창문을 열어 고개를 내민 채 싱긋 웃으며 영원을 바라보는 장공주부터 한 번 보고는, 영원을 지나치며 분부했다.

영원이 고분고분 영 황후를 따라 다시 들어왔다. 영 황후는 장공주에게 예를 갖추고 팔걸이의자에 앉았고, 영원은 착실하기 짝이 없는 모습으로 영 황후 뒤에 섰다.

“마마의 아우, 마마를 보자마자 고양이 앞에 쥐가 되는군요?”

복안 장공주는 영원에게 쌀쌀맞고 영 황후에게도 다정한 적이 없었다.

“어머니가 저 아이를 낳았을 때 연세가 많았고 체력이 부족해서 어릴 때 거의 내가 돌봤습니다. 두세 살 때부터 무술을 익혔는데 그것도 내가 기마자세부터 호흡을 가르쳤지요. 손바닥을 많이 맞아서 지금도 두려워하나 봅니다.”

영 황후는 영원을 힐끔 돌아보고는 나긋나긋 부드럽게 장공주의 말에 대답했다. 복안 장공주는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고, 이동은 놀라서 저도 모르게 영 황후를 쳐다봤다. 영씨 가문은 남녀를 불문하고 어릴 때부터 수련한다는 건 알고 있었다. 하지만 영씨 가문의 무공은 모두 살인 기술이라고 영원이 말하지 않았나. 이렇게 유약해 보이는 영 황후와 살인 같은 걸 어떻게 정말로 연결해서 생각할 수 있을까.

“아, 마마도 무공을 할 줄 알지요.”

복안 장공주는 무슨 생각을 했는지, 이제 막 생각 난 듯이 중얼거렸다. 그녀 역시 이동과 마찬가지로 영씨 가문이 남녀를 불문하고 어릴 때부터 수련하는 걸 알았지만 그걸 영 황후와 연결하지 못했다.

“나야 할 일 없이 한가한 사람이라지만, 마마는 왜 나오셨습니까?”

복안 장공주가 갑작스럽게 화제를 바꾸자 영 황후가 웃으며 대답했다.

“양 숙비와 태자비, 그리고 진왕비도 있는걸요. 나는 몸이 좋지 않아서 더는 못 견딥니다. 장공주 거처가 조용하고 한적하니 잠시 조용히 있으면서 좋은 차를 마시려고 왔지요.”

“바닥 한 판 둘까요?”

복안 장공주가 그러냐고 대답하고는 잠시 침묵하다가 물었고, 영 황후는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금기서화, 나는 정통한 것이 하나도 없어요. 이따 봐줘야 합니다.”

“바둑은 병법과 비슷해요. 분명 바둑을 잘 두시겠지요. 봐 달라는 말은 내가 해야지요.”

복안 장공주가 대답했다.

녹운과 시녀들이 바둑판, 돌을 내어오자 이동은 차를 내리면서 두 사람 바둑을 구경할 수 있는 자리로 옮겼다. 영원은 주변을 둘러보다가 아예 영 황후와 장공주 중간에 웅크리고 앉아서 두 손을 볼을 괴고 바라봤다.

영 황후와 장공주 모두 천천히 돌을 내려놓았다. 이동은 바둑에 대해 살았는지 죽었는지만 알아보는 정도고 다른 건 전혀 알아보지 못했다. 하지만 영 황후와 장공주 모두 바둑 고수라는 건 알 수 있었다. 게다가 두 사람의 실력이 막상막하라는 것도.

영원은 턱을 괸 채 고개를 꾸벅거리다가 이내 두 눈을 부릅떴다. 그렇게 동그랗게 뜨고 있다가 뒤로 꼼지락꼼지락 움직여서 일어나더니 살금살금 이동 곁으로 다가가 웅크리고 앉아서 차를 달라고 했다.

“바둑 둘 줄 압니까?”

영원이 나지막이 묻자 이동이 고개를 저었다.

“알아는 봅니까?”

영원이 다시 묻자 이동은 다시 고개를 저었다. 아까 그가 꾸벅꾸벅 졸던 걸 떠올리고 되물었다.

“당신은요? 둘 줄 알아요?”

“나야 고수지.”

영원이 거들먹거리며 대답하는 말에 이동은 할 말을 잃었다. 뻔뻔한 건 알지만, 그 뻔뻔함 정도를 역시 얕잡아 본 모양이었다.

“바둑은 말이지요, 꽤 좋아합니다. 남이 두는 걸 보는 걸 좋아하지 않아서 그렇지. 왜인 줄 아십니까? 바둑 구경할 때 진짜 군자는 훈수 두지 않는다고 하잖습니까. 그런데 나는 가만히 있으려면 너무 괴로워요. 다른 사람 바둑 두는 걸 볼 때야 하고 싶은 말이 있으면 해도 내가 곤란해질 일이 없지만, 이 두 사람은……. 차 한 잔 더 줘요.”

이동은 웃음을 참지 못하며 차를 더 내려주었다. 영원은 잔을 쥔 채 고개를 살짝 내밀고 바둑판을 보다가 꿍얼거렸다.

“정말 구리군.”

막 돌을 내려놓고 새 돌을 쥐려던 영 황후가 두 손가락으로 돌을 들어 올려 탁자에 탁, 내려놓았다. 영원은 식겁해서 부르르 떨면서 얼른 해명했다.

“누님, 누님 얘기가 아니라…….”

그 말이 끝나기도 전에 복안 장공주도 두 손가락으로 집은 돌을 탁, 내려놓았다.

“공주 누님, 누님 얘기도 아닙니다. 두 분을 제가 어찌 감히요. 내 말은 요즘 열이 많아서 내 입이, 입 냄새가 좀 난다 이 말입니다.”

영원이 얼른 다시 변명하자 영 황후와 장공주가 동시에 콧방귀를 뀌었다. 이동은 웃음을 터트렸다. 그 입이, 화를 자초하는 입이지.

“우리도 한 판 둘까요?”

잠시 더 웅크리고 있다가 영원은 너무 지루해서 이동을 돌아보며 제안했다. 이동은 헛웃음이 나왔다.

“나는 바둑 못 둔다고요!”

“괜찮아요. 내가 가르쳐 드리지. 내가 한수 두고, 한수 가르쳐 주고. 아주 쉬워요. 당신은 똑똑해서 내가 가르치면 금세 고수가 됩니다.”

영원이 꼼지락거리며 작은 의자를 찾아오자 이동이 재빨리 손사래 쳤다.

“난 바둑 못 둬요. 한수 두고 한수 가르쳐 줄 바엔 차라리 혼자 둬요. 난 안 해요.”

“사람도 참. 됐습니다. 싫으면 맙시다. 두 분 이 판은, 보아하니 오래 걸릴 것 같고.”

영원은 자리에 앉아서 무료한 듯 바둑판을 훑어봤다. 그러고 또 훑어보며 주절주절 이야기했다.

“낭자 집 간식 중에 이만한 크기에 얇고 바삭한 작은 병, 파 향이 좀 나는 거. 그거 아주 맛있던데, 이름이 뭡니까?”

“그냥 총향병(蔥香餠: 총빙. 파가 들어간 밀가루 부침)이에요.”

이동이 대수롭지 않게 대답했다.

“어떻게 만듭니까? 방법 적어 줘요. 바삭바삭한 것이 아주 맛있던데. 주방에 시켜 몇 번 만들어 봤는데 파 향은 비슷한데 아무리 해도 그것처럼 바삭하지가 않아. 맛도 덜하고.”

“그냥 병 만드는 방법이랑 똑같아요. 돼지기름 대신 소젖을 걸러서 나온 소기름으로 바꾸면 돼요.”

이동은 할 수 있는 한 간결하게 설명했다. 남은 바둑 두고 있는데 쉴 새 없이 수다 떨기는.

“영원이 언제 너희 집 총향병을 먹어 봤어?”

복안 장공주가 갑자기 질문을 던졌다. 이동은 영원을 돌아봤다. 영원이 언제 자기 집 총향병을 먹어 봤는지 그녀도 모른다.

“마차 빌렸을 때요. 마차에 간식이 있길래 조금 먹었습니다. 맛있더라고요.”

영원은 복안 장공주에게 대답하고는 무심결에 영 황후를 힐끔 봤다. 영 황후는 영원과 장공주의 대화를 못 들은 듯이 열심히 바둑판을 바라보고 있었다.

“너랑 동저아, 참 허물없구나.”

복안 장공주가 잠시 가만히 있다가 천천히 말했다. 영 황후는 이번엔 고개를 들더니 이동부터 힐끔 보고 영원을 바라봤다.

이동은 복안 장공주의 말에 아랑곳하지 않았다. 복안 장공주의 거리낌 없는 말과 영원의 뻔뻔함, 이 두 가지에 이미 적응해서 담담할 수 있었다.

“누님, 자꾸 한눈팔면 집니다.”

영원이야 더 개의치 않았고, 친절하게 귀띔까지 했다.

“흥!”

복안 장공주는 그를 흘겨보고는 다시 바둑에 집중했다. 영 황후도 두 사람에게서 시선을 돌렸다.

“바둑은 전쟁처럼 집중해야 합니다. 한눈팔면 바로 집니다. 봐요. 우리 누님의 바둑은 용맹하고 예리합니다. 호탕하고 공격적이고요. 공주 누님의 바둑은 치밀하죠. 우리 누님은 잠시 한눈팔아도 되지만. 공주 누님은 이제 한눈팔면 안 됩니다. 이런 끝났네. 봐요. 내가 말했잖습니까. 지겠…….”

영원의 말이 끝나기 전에 장공주가 던진 돌이 얼굴로 날아왔다.

“그 입 좀 다물면 안 돼?”

“다물어도 됩니다.”

영원은 마지막으로 한마디하고 입을 꾹 감쳐물며 다물었다고 보여주었다.

“나가!”

바둑을 져서 기분이 상당히 안 좋아 보이는 복안 장공주가 입구를 가리키며 영원을 향해 고함쳤다.

“앞으로 다시는 오지 마! 나가!”

영원이 일어서며 헛웃음 쳤다.

“바둑 한판일 뿐인데…….”

“나가!”

“예, 예. 누님, 공주 누님. 이만 물러갑니다. 내일 다시 문안드리러 오겠습니다.”

영원은 예의 바르게 일일이 장읍한 후에야 물러갔다.

“소칠의 말대로입니다. 바둑 한판일 뿐이에요.”

영 황후는 입꼬리에 미소를 달고 평온하게 타일렀다.

“오누이 둘이 하나는 판을 짜고 하나는 허튼소리로 정신 팔리게 하고. 오누이 아니랄까 봐.”

복안 장공주가 콧방귀를 뀌었다. 영 황후는 여전히 웃으며 말했다.

“내가 보기엔 공주 누님과 더 친해 보입니다. 연회도 슬슬 정리하겠군요. 가 봐야겠어요. 참. 조 노부인이 부탁한 일, 아까 생각해 봤는데 장공주는 속세 여인이 아니니 혼사 문제는 장공주 생각을 따르는 게 옳지 싶어요. 장공주가 우선 사람을 잘 보고 이야기해요. 나머지는 내가 알아서 할 테니.”

복안 장공주는 영 황후의 말에 잠시 침묵하다가 대답했다.

“고마워요. 황상 쪽에 무슨 말이 나오면 사람을 보내 소식을 전해 줘요.”

“그러지요.”

영 황후가 시원스럽게 대답했다.

뜨락 문밖으로 멀어지는 영 황후의 발걸음 소리를 들으며 복안 장공주가 바둑판에서 시선을 떼고 살며시 한숨을 내쉬었다.

“바둑 풍격 좀 봐. 정말이지, 십 년 동안 어떻게 견뎠을까? 난 내가 참 힘들게 버틴다고 생각했는데, 이제 보니 황후의 성격으로 버틴 것이야말로 진짜 힘들었을 것 같아.”

“오가아가 있잖아요. 어머니는 강하니까요. 혼자였다면 아마…….”

이동은 말을 멈췄다. 모를 일이었다. 예전에 그녀도 혼자인데도 긴 세월 버티지 않았나. 기대, 희망 하나 없이 하루하루 무뎌지며 그 긴 세월을 버텼다.

“또 모르죠. 그래도 견뎠을지도. 길어지면 무뎌지니까요.”

“말하는 것만 들으면 자꾸 너도 긴 세월 버텼던 것처럼 느껴진다.”

복안 장공주가 탐색하듯 이동을 바라봤다.

“넌 참 재미있어. 분명 여남은 살 낭자인데 때때로 파란만장한 삶을 겪은 노인 같아. 참 희한한 재능이야.”

“공감하고 동정하는 마음이 있을 뿐이에요.”

이동이 얼버무리고 말을 이었다.

“저도 돌아갈게요. 내일은 안 와요.”

“응.”

복안 장공주는 이동이 나가는 걸 보고 서서히 자세를 바로 하고 한참 있다가 녹운을 불렀다.

“적당한 사람을 골라서 별원의 물건을 옮겨와. 앞으로 여기에 오래 살아야 할 것 같아.”

올 때 조모 손 노부인과 같은 마차를 타고 온 해 이낭자는 갈 때도 당연히 같은 마차로 돌아갔다.

손 노부인은 시중들 시녀를 태우지 않았고 마차가 움직이기 시작하자 해 이낭자가 건네는 차를 받고 웃으며 물었다.

“오늘 어땠느냐. 잘 보았느냐?”

“그럭저럭요.”

해 이낭자가 고개를 갸우뚱하며 즐거운 듯 대답했다.

“어르신들이 다 묵 육낭자를 붙들고 칭찬하던 거 봤어요.”

“좋은 아이니까.”

손 노부인이 웃으며 대답했다.

“그렇긴 한데, 속셈이 너무 깊고 속이 좁아요. 진짜로 복이 있어 보이지 않아요.”

해 이낭자의 입꼬리가 내려갔다.

“속셈이 깊긴 하지. 이야기할 때 자꾸 네 눈치를 살피더구나. 철이 너무 들었어.”

손 노부인이 동의하듯 고개를 끄덕였다. 해 이낭자의 입꼬리가 더 내려갔다.

“모든 이에게 잘 보이려고 해요. 좋은 말만 듣고 싶은 거예요. 하지만 다들 똑똑한 사람인데 훤히 꿰고 있죠. 육낭자가 잘 보이지 않아도 다들 칭찬할 거예요. 할아버지가 묵 승상이잖아요. 그 정도 이치도 모르다니. 똑똑해 보이는 얼굴이 아까워요.”

“얘도 참. 밖에서는 착한 아이가, 할미 앞에서는 왜 이리 각박하누.”

“할머니 앞에서나 그러는 거죠.”

손 노부인이 나무라자 해 이낭자가 노부인의 어깨에 머리를 기대어 비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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