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금동-313화 (313/463)

313화: 바둑 적수를 만나다

이동은 눈이 휘둥그레졌다. 계 노승상, 어떻게 감히 그런 말을. 그 말에 죽어 나갈 사람이 얼마나 많을까.

“아버지가 그런 모진 마음을 먹을 수 있을 리가 없잖아. 눈 감기 전에 그 이야기를 해주시면서, 미안하다고 하셨어. 아버지 성격대로 나를 가르치는 게 아니었다고. 그렇게 오냐오냐 키워놓고 내가 장성하는 걸 못 보고 가신다고.”

복안 장공주는 초점 없는 눈으로 저 멀리 바라봤다. 눈물도 보이지 않고 감정도 느껴지지 않았지만, 이동은 서글프고 괴로워졌다.

“보렴. 아버지는 눈 감기 전에 매우 후회하고 통한하셨어. 그렇게 나를 키우는 게 아니었다고. 그래서 아버지가 가신 후에, 난 줄곧 나를 단속했어. 아버지가 더 후회하고 더 통한할 일은 할 수 없었어. 아버지가 날 그렇게 키우셨지만, 난 여인이 해선 안 될 일은 하지 않았어. 혼인만 빼고. 아버지가 앞으로 좋은 사람과 혼인해서 잘 살라고 하지 않으셨으니까. 그저 잘 지내고 즐겁게 살라고만 하셨어.”

복안 장공주의 목소리가 낮고 가벼웠다.

“내겐 혼인하지 않는 게 즐겁게 사는 거야.”

이동은 감히 말도 할 수 없었다. 어쩐지 장공주가 그렇게 계 노승상을 존경하고 툭하면 계 노승상이 한 말이라고 하더라니. 계 노승상은 놀라운 사람이라더니, 이렇게나 놀라운 분이었구나.

“우리 가문에는 여자 장궤가 여럿 있어요. 증외조모 때부터 있었어요. 우리 가문 점포는 재능만 따지지 사내인지 여인인지 따지지 않는다고 외할머니도 자주 이야기하셨어요. 힐수방 대장궤도 여인인걸요. 하지만 세상 사람이 너무 놀랄까 봐, 평소에 접대는 조수인 이 장궤가 해요. 하지만 우리 집과 길게 장사해온 사람은 힐수방 대장궤가 누구인지 알아요. 그 덕분에 우리 점포 사람이 구매하러 가면 잘 아는 점포는 여인이 가도 절대로 무시하지 않아요. 대장궤인지 아닌지 모르니까요. 혹은 미래의 대장궤가 될 수 있고요.”

복안 장공주는 두 눈썹을 높이 치켜올렸다가 이내 큰소리로 웃었다. 그렇게 한참 웃다가 서서히 웃음을 그치고 눈꼬리에 달린 눈물을 손수건으로 찍어냈다.

“오히려 내가 못 말릴 정도로 저속했었네. 기세를 따지면 네 증외조모를 따라잡을 수가 없겠어. 네 외조모보다 못하고. 아마 네 모친보다 못하겠지.”

“어쨌든 저보단 나으세요.”

이동이 웃으며 하는 말에 복안 장공주가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꼭 그렇지도 않아. 통찰력만 봐도 네가 나보다 나아. 고작 여남은 살 낭자인데 이런 통찰력이라니. 네가 백 노부인보다 더 뛰어나겠어. 너희 집안은 증외조모부터 하나같이 하늘의 은총을 받았네. 아마도 너무 똑똑하고 너무 대단해서 다들 이렇게 외로운 건가 봐.”

이동은 조금 씁쓸하게 웃음 지었다. 증외조모, 외조모와 모친은 진정한 하늘의 은총을 받은 것이고 자신은…….

이동은 가끔 어머니가 저를 업어 온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까지 들었다. 장공주가 얘기하는 제 통찰력은 평생의 후회와 통한으로 맞바꾼 것일 뿐이다.

“계 노승상은 열몇 살 때부터 천하에 명성이 자자했어. 스무 살까지 곳곳에서 강학(講學)했고. 관리가 되어서는 부임하는 모든 곳에 장소를 골라서 달마다 적어도 한 번은 강학했어. 승상이 된 후엔 매달 한림원에서 강학했고. 한림원에서 강학할 수 있고, 또 모두가 기꺼이 승복하는 건 아마도 계 노승상뿐일 거야.”

복안 장공주의 말에 은근히 자부심이 느껴졌다.

“계 노승상의 강학을 들은 사람들은 모두 그분의 제자를 자처하지만, 진정으로 그분이 제자로 받아들인 건 모두 일곱뿐이었어. 나이가 가장 어렸던 게 나야. 하지만 그분의 의발(衣鉢: 스승이 제자에게 전수하는 가사와 바리때. 전수받은 사상이나 학술)을 받은 건, 여 승상이야.”

이동은 가만히 듣기만 했다.

“일곱 중에 아들은 없어.”

복안 장공주가 빙긋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그것 봐. 선생은 그런 분이셨어. 자기 아들이라도, 외아들이라도 제자가 될 자격이 없으면 제자로 받지 않았어.”

“그럼 계 천관의 스승은…….”

“계 노승상은 평생 많은 이를 가르쳤어. 아들도 가르쳤고, 황상도 가르쳤어. 그게 뭐? 가르친 사람은 다 제자야?”

복안 장공주의 말장난 같은 말에 이동은 고개를 끄덕였다. 무슨 말인지 알아들었다.

“호부 상서 초회현도 선생의 제자였어. 일곱 제자 중에 살아 있는 사람은 우리 셋뿐이야.”

“초회현을 입각시킬 생각이세요?”

이동은 지극히 예민하게 반응했다. 복안 장공주가 생글생글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난 어릴 때부터 계 노승상의 가르침을 받았지만, 제자라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선생과 사형들뿐이었어. 백 노부인은 아마 조금 짐작했겠지. 하지만 짐작하는 거랑 아는 건 달라. 초회현이 선생의 제자라는 것도 아마 선생과 사형들만 아는 사실이겠지.”

복안 장공주가 다리를 흔들며 말했다.

“말 통하는 사람이 있는 느낌, 참 좋아. 이 말도 선생이 한 말이야. 그때 선생은 자주 나와 대화했지. 무슨 이야기든 했어. 선생은 몇 번이고 그렇게 말씀하셨어. ‘말 통하는 사람이 있는 느낌, 참 좋구나.’ 하고 말이야.”

“계 노승상은 정말로 우러러볼 수밖에 없는 분이셨네요.”

이동이 감탄하자 복안 장공주가 그녀를 비스듬히 바라봤다.

“우러러보긴. 넌 아예 올려다보지도 못해.”

이동은 말문이 막혀서 할 말을 잃고 일어서서 다구를 옮겨와 차를 끓일 준비를 했다.

“여 승상이 계 노승상의 의발을 받은 분인데, 왜 그런 말을 장공주에게 전하게 했을까요? 무슨 생각으로요?”

이동은 계 노승상이 선황에게 그렇게 놀라운 건의를 했다는 걸 떠올리며 저도 모르게 물었다.

“황상은 어리석은 황상이야. 하지만 조금 어리석을 뿐, 다행히 조상께서 정한 규율과 형법, 법도는 엄밀히 지키지. 하지만 지금 태자는…….”

복안 장공주는 말꼬리를 길게 늘였다.

“어리석긴 황상보다 더 어리석고 장점은 하나도 없지. 정말로 보위에 오르면 어떻게 될까? 아이고! 나 열심히 수행했었는데, 너를 알고부터 수행한 게 다 헛수고가 되는 것 같아. 곧 속세를 떠날 수 있었는데. 이제 잘 됐다. 거꾸로 점점 더 속세에 연연하네.”

복안 장공주는 갑자기 말머리를 돌려 이동을 원망하기 시작했다. 차 가루를 갈던 이동은 울지도 웃지도 못할 얼굴로 고개를 들고 그녀를 바라봤다.

“그게 저랑 무슨 상관이에요?”

“너 때문에 춘시 시험관 일에 끼어들었잖아. 네가 아니었으면 내가 그랬겠어? 그런데 너랑 상관없어?”

“그건 장공주가 꺼낸 말씀이시잖아요! 저는 장공주가 무얼 하려는 건지도 몰랐어요! 제 탓 하지 말고 본인을 탓하세요!”

이동이 가차 없이 되받아치자, 복안 장공주는 잠시 침묵하다가 한숨을 내쉬었다.

“그래, 자초한 거라 치자. 아버지는 즐겁게 살라고 하셨으니까, 그 뜻을 거역한 것도 아니지. 널 돕지 않았다면, 네 오라비는 평생 허송세월했을 거고, 너는 평생 수녕백부 핍박받으면서 살았겠지. 넌 생각이 많은 사람이니까 분명 오래 살지 못했을 거야. 말 통하는 사람이라곤 너뿐인데, 네가 빨리 죽으면 나도 오래 못 살았을 거야. 그래서, 음.”

이동은 어안이 벙벙해졌다. 그래, 그렇게 생각하신다면 그런 것으로 치세요!

“지금도 방법이 없잖아. 아무리 그래도 이 강산은 아버지의 강산이야. 아버지의 아들, 손자, 증손자의 것이야. 아버지가 남긴 강산이 몰락하는 걸 눈 뜨고 보고 있을 수만은 없어. 임가가 돌이킬 수 없는 지경에 빠져서 아버지 제사를 지낼 사람도 없게 되면 어떡해. 아버지가 외로운 귀신이 되어 구천을 떠돌게 할 순 없잖아.”

복안 장공주는 계속 말했고 이동은 고개를 숙이고 차 가루를 갈고 차를 내리는 데 전념했다.

“시국이 이러니 부득이한 거지!”

복안 장공주가 팔걸이를 철썩 내리쳤다.

“아버지를 위해서라도 좌시할 수 없고!”

“차 드시고 목 좀 축이세요.”

이동은 내린 차를 복안 장공주 앞에 밀어주었다. 복안 장공주는 손가락으로 찻잔 가장자리를 가볍게 튕겼다.

“왜 대답 안 해? 그런 거 아니야?”

“계 노승상이 선황께 그런 말씀을 올렸는데 선황은 그를 어쩌지 않고 오히려 그 이야기를 장공주에게 해주셨죠. 제 생각엔 선황께서도 좋은 생각이라고 여기신 것 같아요. 다만 모질게 마음먹지 못했을 뿐이죠. 어찌 됐든 아들, 손자잖아요. 그러니까, 선황께서는 사실……. 맞죠?”

이동은 복안 장공주보다 훨씬 직설적이었다. 복안 장공주는 눈썹을 높이 치켜들다가 한참 후에 웃음을 터트렸다.

복안 장공주의 웃음소리가 끝나기도 전에 회랑에서 시녀의 기별 소리가 들렸다.

“장공주, 영 칠야가 뵙길 청합니다.”

“영원? 영원이 왜?”

복안 장공주는 놀란 다음 즉시 분부했다.

“들어오라고 해.”

휘장을 열고 들어온 영원은 몇 걸음 앞으로 다가와서 장공주에게 공손하게 예를 올린 후 이동을 향해 장읍했다.

“무슨 일이야?”

복안 장공주야 영원을 언제나처럼 퉁명스럽게 대했고 영원은 웃음 지으며 알랑거렸다.

“별일은 아니고, 오가아의 수련이 막 끝났습니다. 보록궁이 이렇게 가까운데 당연히 누님께 문안드리러 와야지요. 아니면 그런 실례가 어디 있겠습니까. 누님, 먹고 싶은 것이나 하고 싶은 것 있습니까? 무슨 일이든 생각나는 게 있으면 언제든 분부만 하십시오.”

복안 장공주는 얼떨떨해하다가 ‘하!’ 소리를 냈다.

“부탁할 게 있는 거야, 아니면 뭘 잘못한 거야?”

“누님, 무슨 그런 말씀을. 처음 뵀을 때부터 누님이 친누님 같았습니다. 친누님보다 더 친누님 같았어요.”

영원의 말주변과 두꺼운 낯짝은 웬만해서 따라잡을 사람이 없었다.

복안 장공주는 닭살이 다 돋았다.

“그만! 첫째, 네가 어떤 사람인지, 내가 어떤 사람인지, 서로 똑똑히 알잖아? 아는 사람끼리 모르는 척하지 말자. 이런 수작 부리지 마. 난 안 속아. 둘째, 난 네 누님이 아니야. 네 누님은 이 궁의 마마 아니신가? 나랑 누님, 아우로 엮으려 하지 마. 우린 그런 관계 아니니까.”

“누님!”

“누님이라고 하지 말라고! 네 누님이 아니라니까? 누님이라고 부른다고 널 아우처럼 대하지 않아. 난 아우가 없고 네 친누님도 아니야. 누님이라는 말이 만병통치약인 줄 알아? 볼일 있어서 왔으면 볼일만 이야기해.”

“누님, 누님도 참. 이렇게 영리하니 몸 둘 바를 모르겠습니다. 누님, 여쭤볼 게 있어서 왔습니다. 저 안에 계신 제 누님, 저 상대로 어느 댁 낭자를 점찍은 건 아니겠지요?”

영원은 복안 장공주가 앉으라는 말을 할 필요도 없이 알아서 의자를 끌고 와서 반듯하게 앉았다. 고개를 치켜들고 장공주를 바라보는 얼굴이 무고하고 억울해 보였다.

“네 누님이 어느 댁 낭자를 점찍었는지 아닌지 그걸 내가 어떻게 알아? 내가 네 누님 속에 들어갔다 온 것도 아니고. 네 누님에게 물어봐!”

복안 장공주는 속으로 조금 안도하며 단칼에 거절했다.

“어찌 감히 제 누님께 묻겠습니까. 장공주 누님한테나 여쭤보는 거지요.”

영원은 우울한 표정이었다.

“왜? 마음에 드는 여인이라도 있어서? 그럼 누님에게 말하지 그래?”

복안 장공주는 마음속으로 몇 번이나 생각하다가 결국 물었다. 영원의 혼사에 조금 관심이 있는 건 어쩔 수 없었다.

영원은 난감한 표정이었다.

“누님도 참, 대답할 수 없는 걸 그렇게 물으세요. 있다고 하기엔 혼담이 오가기도 전에 사심이 있는 것 같잖습니까. 저야 상관없습니다. 원래 명성이 별로니까요. 하지만 그 낭자는 저와 다릅니다. 그렇다고 없다고 하기엔……. 휴, 없다고 할 수밖에요. 예, 없습니다.”

복안 장공주는 무심결에 이동을 힐끔 봤다. 이동은 웃고 있었다.

장공주, 영원 이자한테 벌써 말린 것 같은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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