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금동-312화 (312/463)

312화: 큰일을 부탁하다

“동저아, 백 노부인과 할 이야기가 있다. 따라오렴.”

복안 장공주는 결국 성가신 듯 일어섰다. 그녀는 이동처럼 끈기도 없고 성격도 좋지 않았다. 보아하니 이곳에서도 조용히 있을 수 없을 듯하자 아예 일어서서 이동을 불렀다.

이동은 미안한 기색이 역력했다. 하지만 그녀가 뭐라고 하기도 전에 민 노부인이 웃으며 그녀의 등을 밀었다.

“장공주께서 부르시잖아. 얼른 가렴. 우리는 다음에 다시 이야기하자. 며칠 뒤에 내가 사람을 보내마. 놀러 오너라.”

이동은 예를 갖추고 뒷걸음질 치고 돌아서서 복안 장공주의 뒤를 따라 영 황후와 백 노부인 무리 쪽으로 향했다.

민 노부인은 장공주와 거의 나란히 걷는 이동을 부러운 듯이 바라봤다. 아까 이동이 장공주와 함께 앉아 있다고 화씨가 말했을 때 믿을 수가 없었다. 이동이 시운이 들었구나, 싶었다. 장공주가 뒤에 있으니, 강가에서 버림받았대도 이동과 혼인하려는 사람이 얼마든지 있을 것이다. 정말이지 복 받은 팔자 아닌가.

영 황후는 복안 장공주가 다가오자 옆에 앉으라고 손짓했다. 복안 장공주는 웃으며 감사 인사를 하고는 이동을 데리고 백 노부인 아랫자리에 앉았다.

“또 구석에 숨으러 가셨습니까? 마침 잘 오셨습니다. 자자, 장공주가 말씀해보세요. 육낭자가 우리 집 며느리로 가장 타당하지 않습니까?”

백 노부인은 무슨 말이든 대놓고 잘하기로 유명했고, 복안 장공주와 매우 친밀해서 그녀가 다가오는 걸 보고는 얼굴이 새빨개진 묵 육낭자를 잡아당기며 웃는 얼굴로 물었다.

“응? 누가 감히 백 노부인과 다투는 사람이 있나요?”

복안 장공주는 백 노부인의 말에 대답하지 않고 오히려 되물었다.

“있지 뭡니까!”

백 노부인은 일부러 뾰로통한 표정을 지었다.

“보세요. 마마까지 육낭자를 탐냅니다. 그리고 이 아이도요. 이 아이는 장군의 후손입니다. 장공주, 정말로 싸워야 할 일이 생기면 제가 이 아이를 이길 수 있을까요?”

백 노부인이 여염의 모친 원씨를 가리키며 매우 진지한 모습으로 복안 장공주에게 물었다. 그 말에 원씨가 웃으며 후다닥 일어났다.

“아이고, 어르신. 장군의 후손인 저는 그저 동선이나 조금 가늠합니다. 게다가 설사 제가 무술을 할 줄 안다고 해도 감히 어르신을 어쩌겠습니까.”

“그럼 육낭자를 탐내지 말아라. 다른 건 몰라도 그건 안 된다.”

백 노부인이 농담 반 진담 반인 듯 웃으며 말했다.

“어르신, 그럼 이렇게 할까요? 우리가 싸우지 말고 아이들끼리 싸워서 승부 보는 건 어떨까요?”

원씨 역시 능수능란하게 분위기를 살리는 팔방미인이었다. 그렇게 말해놓고는 금세 아이고, 하며 자기 뺨을 살짝 쳤다.

“아직 나이도 안 들었는데 노망이 들었나. 이 말은 없던 말로 해야겠습니다. 마마, 여러 어르신, 그냥 헛소리로 여기세요. 싸움하게 되면 누가 영 칠야를 이기겠습니까? 괜히 제 발목 잡을 소리를 했습니다.”

원씨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양 숙비가 웃으며 손뼉 쳤다.

“좋은 생각이군! 싸우라고 하게. 얼마나 좋은가.”

“이런, 이런, 우리 육저아 성격이 말랑하다고 다들 만만하게 보는 게지요? 육저아, 이리 오너라. 어른들이 술도 안 마시고 술에 취했구나. 상대할 것 없다. 하나같이 아이가 되었어!”

전 노부인이 나서서 웃으며 묵 육낭자를 부르자, 육낭자가 얼른 전 노부인 곁으로 다가갔다. 전 노부인이 그녀의 등을 살짝 밀었다.

“가서 저아들과 놀아라. 노인들이랑 있어 봐야 따분하기만 하다.”

묵 육낭자는 벗어난 듯 얼른 몸을 돌렸다.

이동은 백 노부인을 보다가 원씨, 영 황후를 훑어봤다. 묵 육낭자는 확실히 경성 모든 미혼 사내 집안에서 가장 좋은 며느릿감으로 생각할 만한 규수였다.

이동의 시선이 영 황후를 스쳐 지나갈 때, 영 황후도 티 나지 않게 이동을 바라보더니, 아무 일도 없는 듯이 시선을 돌렸다.

조 노부인 곁에 가까이 앉아서 수시로 여염의 모친 원씨를 힐끔거리는 주 팔낭자의 모친 화씨의 안색이 그리 좋지 않았다. 여염은 그녀가 점찍은 첫 번째 사위 후보였다.

그런데 여염의 모친 원씨가 묵 육낭자를 점찍었다고 말하니, 농담이든 진담이든 마음이 좋지 않았다. 그런데 하필 묵 육낭자는 흠잡을 것 하나 없는 규수였고 모든 면이 자기 딸 팔낭자보다 뛰어났다. 그럴수록 울화가 터졌다.

화씨는 시선을 돌려 그리 멀지 않은 곳에서 해 이낭자와 딱 붙어서 즐겁게 웃고 있는 조 구낭자를 바라보다가 이내 조 구낭자의 모친 마씨를 바라봤다. 그렇게 잠시 보다가 슬쩍 걸음을 옮겨 마씨 곁에 가서 이야기를 나눴다.

조 구낭자는 주육의 모친 화씨가 꼽은 첫 번째 며느릿감이었다.

주육 모친 화씨 안중엔 마씨밖에 없는지라, 줄곧 곁에서 알랑거리던 영안백 부인 화씨는 조금 머쓱해졌다. 그러나 그것도 한순간뿐, 계속해서 알랑거렸다. 언제나 그래서 진작 익숙했다.

게다가 아무리 머쓱해도 물러설 수 없었다. 육저아 조염이 형국공부와 혼인을 맺어서 형국공 세자 부인이 된다면 이 머쓱함도 아무것도 아닌 게 된다.

고서강 부인 유씨는 해 상서 부인 손 노부인과 다정하게 이야기 중이었다. 어찌나 다정하게 이야기 중인지, 탕 오낭자가 쭈뼛쭈뼛 대전 안으로 돌아와서 수시로 그녀를 힐끔거리며 살금살금 낭자들 뒤로 숨은 것도 눈치채지 못했다.

유씨에게는 사실 탕 오낭자 일보다 아들 고자의의 혼사가 더 중요했다. 아들과 해 이낭자를 맺어주는 일이야말로 가장 중요한 일이었다.

영 황후 옆 내외명부 가장 상석에 앉아 있던 조 노부인이 이야기할 틈이 생기자 영 황후를 향해 살짝 몸을 숙이며 정중하고 엄숙한 표정으로 말을 꺼냈다.

“마마께 부탁할 수밖에 없는 일이 한 가지 있습니다.”

“편하게 분부하세요, 노부인.”

영 황후도 살짝 몸을 숙이며 대답했다. 경성으로 돌아온 이래 그녀는 이 노부인을 줄곧 웃어른의 예로 대했다. 게다가 이 상징적인 후배로서의 예절을 끝까지 행할 생각이었다.

“분부라니요. 휴, 이 큰일은 애초에 태후마마께서 제게 부탁한 겁니다. 하지만 나는 늙고 무능해서 지금까지 태후마마의 소원을 이뤄드리지 못했어요.”

조 노부인은 울컥한 듯했다.

지금 이 주변에 앉은 이는 모두 능구렁이였고, 조 노부인이 거기까지 말하는 걸 듣고 거의 모든 이가 무슨 말을 하려는 건지 알아차렸다.

복안 장공주는 안색이 변해서 등을 곧게 세우고는 앞을 똑바로 바라보면서 무표정한 얼굴로 차를 머금었다.

이동은 눈시울이 붉어져서 울먹이는 조 노부인을 바라보지 않았다. 저렇게 슬퍼하는 조 노부인의 모습은 진심이었다. 에효!

백 노부인은 복안 장공주를 보지 않고 눈을 가늘게 뜨고 조 노부인을 바라봤다. 가소로워하고 경멸하는 표정을 남에게 들키지 않으려고 눈을 가늘게 뜬 것이었다.

전 노부인은 목을 빼고 구경하려는 묵 부인을 꼬집더니 열심히 말을 걸었다. 여염 모친 원씨는 손 노부인을 붙잡고 한담을 나누기 시작했다.

“노부인, 슬퍼하지 마세요. 무슨 말씀이든 편하게 하세요.”

영 황후는 빤히 무슨 일인지 알면서도 여전히 장담하며 말했다. 백 노부인은 눈썹을 추켜 올렸다가 다시 내렸다. 아주 난처한 일일 텐데?

“태후마마가 눈 감으실 때, 다른 건 다 내려놓으셨는데 오로지 장공주를 놓지 못하셨습니다. 태후마마는 원래 장공주의 혼사를 정하려고 하셨는데 그만…….”

주 태후를 떠올린 조 노부인은 정말로 너무나 마음이 아팠다.

휴. 정말로 마음이 아프구나. 주 태후, 내가 안주인으로 있을 때 반평생 꾀를 내주던 든든한 뒷배가 갑자기 가버리더니, 이제 딸아이까지 갔으니…….

“노부인, 너무 슬퍼하지 마세요. 이렇게 슬퍼하시면 태후마마도 하늘에서 편안히 쉬지 못하세요.”

영 황후가 부드럽게 설득했다.

이동은 복안 장공주를 돌아봤다. 복안 장공주는 여전히 굳은 채 앉아서 이를 악물고 찻잔을 입가에 대고 있었다. 매달 초하루와 보름에 혼인하라는 조 노부인의 타령을 들어와서 단련이 된 모양이었다.

“이 나이가 되면 오늘 잠든 후에 내일 눈을 뜰는지 아닐지 모릅니다. 근래 꿈을 꾸면 항상 태후마마를 봅니다. 아무래도…… 곧 태후마마 곁으로 가려나 봅니다. 그런데 태후마마가 부탁한 일을 아직…….”

조 노부인이 눈물을 훔치며 말을 이었다.

“그것만 생각하면 마음을 누가 할퀴는 듯이 괴롭습니다. 마마, 제가 무슨 낯으로 태후마마를 뵈러 가겠습니까.”

“태후마마는 현명하신 분이라 다 이해하실 겁니다.”

사람을 그다지 설득할 줄 모르는 영 황후는 이만하면 적당하겠지 싶은 말을 쥐어짰다.

“노부인을 탓하지 않으실 겁니다.”

“태후마마는 자비롭고 대범한 분이니 탓하지 않으실 겁니다. 하지만 태후마마가 탓하지 않는다고 해도 나는 내 탓이다 싶어요. 마마, 나는 이제 늙어서 오래 못 삽니다. 요즘엔 생각을 조금만 오래 해도 어지러워서 앉아 있을 수가 없어요. 태후마마가 내게 맡긴 그 큰일, 아무리 생각해도 부탁할 사람이 황후마마밖에 없습니다. 마마, 부디…….”

“걱정하지 말고 저에게 맡기세요.”

노부인의 말이 끝나기 전에 영 황후가 장담하며 그 짐을 넘겨받았다.

백 노부인의 눈썹이 휙 올라갔다가 곧바로 다시 내려왔다. 눈빛에 웃는 기색이 스쳤다.

영 마마, 역시나 단순하지 않군.

묵 부인과 이야기 중이던 전 노부인은 누가 말을 자르기라도 한 듯이 덜컥 말문이 막혀서 입을 다물었다.

이동은 아무도 보지 않고 눈을 내리깐 채 열심히 차를 마셨다.

복안 장공주는 움찔하다가 영 황후를 삐딱하게 바라봤다. 이동은 코웃음 소리를 들은 듯했다.

“그럼 됐습니다. 됐어요!”

조 노부인은 안도하며 영 황후의 손을 붙잡고 태후마마의 당부를 주절주절 읊었다. 복안 장공주 성격은 어떤지, 어떤 상대를 골라야 하는지, 태후마마가 얼마나 장공주를 아꼈는지, 그동안 자기가 장공주 지아비 감을 어떤 식으로 골라왔는지, 장공주는 그 지아비 감의 어떤 점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했는지…….

복안 장공주가 벌떡 일어났다.

“머리가 너무 아파. 동저아. 우린 이만 돌아가자.”

영 황후는 조 노부인의 말을 열심히 듣는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이며 복안 장공주를 향해 손을 젓고 알겠다는 듯 환하게 웃어 보였다.

복안 장공주를 따라 보록궁으로 돌아온 이동은 작은 뜨락 문으로 들어서자마자 더는 참지 못하고 웃음을 터트렸다.

“조 노부인도 참…….”

“항상 그랬어. 그런데도 평생 부귀영화를 누려. 게다가 보아하니 천수를 다 누리고 편안하게 임종을 맞이하겠어. 정말이지 이런 홍복이 없다니까.”

팔걸이의자에 기댄 복안 장공주는 그다지 화난 기색이 없었다. 이미 익숙한 일이었다.

“원래 그런 사람인 걸 몰랐다면 오늘 일, 일부러 장공주 체면을 짓밟는 건 줄 알았을 거예요.”

이동은 조 노부인이 진심으로 슬퍼하며 흘리던 눈물을 떠올리고 웃고 싶은데 웃지 못하고 한숨을 내쉬었다.

“그런 어리석은 사람하고 뭘 따지겠어. 영씨는 참으로 시원스럽게 받아들이던데, 무슨 생각인 거지? 환심 사려는 거야, 협박하려는 거야?”

“장공주께 감사해서 그러는 거겠죠.”

이동이 모호하게 말했다. 복안 장공주는 등받이에 기대며 팔걸이를 톡톡 치더니, 한참 만에 콧방귀를 뀌었다.

“그런 감사 필요 없어. 궁에서 일어나는 사소한 일, 진작 상관하기 싫었어. 맡길 사람이 없었을 뿐이야.”

“부승상 일, 의견 내셨어요?”

복안 장공주의 속뜻을 민감하게 알아차린 이동이 자연스럽게 물었다. 복안 장공주는 대답하지 않고 고개를 살짝 숙였다. 그리고 한참 만에 나직이 입을 열었다.

“아버지 병이 심해졌을 때, 계 노승상이 아버지에게 말씀드린 적 있어. 내 오라비 둘 다 제왕의 재목이 아니니 차라리 황손 중에서 고르고 내가 곁에서 가르치게 하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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