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0화: 비료 물이 남의 밭에 흐르지 않게
눈치 빠른 묵 육낭자는 한발 먼저 계단으로 올라 이동과 인사를 나눴다.
“장공주께서 벌써 도착하셨나. 내가 제일 먼저 온 줄 알았더니.”
아까부터 이동을 본 전 노부인은 계단으로 올라오자마자 웃으며 이동에게 말을 걸었다.
“예, 백 노부인도 오셨어요. 노부인을 마중하라고 분부하셨어요.”
장공주와 백 노부인의 명으로 맞이하러 나온 이동은 살짝 허리를 숙여 예를 갖추기만 했다.
“오늘은 마마가 주인공이십니다. 제일 바쁘실 테니 어서 가 보세요. 전 이가 저아가 있으면 됩니다.”
전 노부인은 돌아서서 양 숙비에게 예를 갖췄고, 새 손님이 온 걸 본 양 숙비는 체면치레 몇 마디하고 얼른 돌아서서 계단 아래로 내려갔다. 진왕비 진씨는 잠시 주저하다가 양 숙비를 따라 다른 손님을 맞이하러 갔다.
전 노부인이 대전 안으로 들어서자마자 백 노부인이 먼저 웃으며 말을 걸었다.
“자네도 이렇게 일찍 왔는가. 육저아, 자, 할미에게 오렴. 얼굴 좀 보자.”
이동의 시선이 백 노부인과 백 노부인을 매우 친밀하게 대하는 묵 육낭자에게 잠시 머물렀다.
아마 이때쯤, 혹은 더 전에 백 노부인이 묵 육낭자를 점찍었을 것이다.
다들 묵 육낭자와 계소영이 신선과 선녀 같은 배필, 재자와 재녀, 걸맞은 한 쌍이라고 하지만, 그녀는 어쩐지 두 사람이 지나치게 깍듯하다고 생각했다.
묵 육낭자는 딸 둘뿐이었다. 둘째 딸을 낳을 때 몸이 상해서 더는 아이를 갖지 못했다고 했다. 아마도 그다음 해에 계소영에게 재능이 뛰어나기로 이름난 수재 가문 낭자를 첩으로 들여주었던 것 같다. 수재 가문 낭자는 3년 동안 아들 둘을 낳았다. 분별 있는 좋은 여인이라고 했다.
묵 육낭자의 둘째 딸이 여섯 살이 되던 해에 묵 육낭자는 병이 들어 2년 동안 몸져누워있다가 눈을 감았다. 그때 문상 갔다가 기절할 듯이 우는 두 여자아이를 보고 얼마나 마음이 아팠던지. 지금 생각해도 마음이 쿡쿡 쑤셨다.
이동은 생기발랄한 표정으로 옥 쟁반에 구슬 굴러가듯 재잘거리는 묵 육낭자를 살짝 넋이 나간 모습으로 바라봤다. 이런 모습의 묵 육낭자는 처음이었다. 전생에 그녀가 묵 육낭자를 처음 만났을 때 그녀는 이미 계 대내내가 되어 있었다.
이번 생엔 주 귀비가 벌써 죽었다. 제 아들 손에. 계소영은 아마도 지난 생과 달리 주 귀비와 주가를 평생 마음에 품고 살지 않을 것이다. 적어도 지금은 계소영도 예전보다 훨씬 활달하고 밝아 보였다.
이동은 정월 보름에 만났던 계소영을 떠올리고는 빙그레 미소 지었다. 활달하고 밝은 계소영이라면 혼인한 후에도 묵 육낭자가 지금과 변함없이 살지도 모른다. 영리하고 활발하고 옥 쟁반에 구슬 굴러가는 목소리로 재잘재잘하는 묵 육낭자로.
“무슨 생각해?”
복안 장공주가 불진으로 이동을 쿡쿡 찔렀다.
“아, 백 노부인과 묵 육낭자가 가족 같다고 생각했어요.”
“지나친 생각이야.”
복안 장공주는 전 노부인을 힐끔 봤다. 전 노부인은 차를 마시면서 웃는 얼굴로 백 노부인, 그리고 백 노부인과 이야기 중인 묵 육낭자를 보고 있었다.
“계 천관이 이미 줄을 섰어. 계소영은 외아들이야. 좋은 혼처긴 한데, 난처하기도 하지. 이번 대 양대 승상인 여 승상은 겉으로 신중한 것 같아도 속은 또 몰라. 놀라운 행동을 종종 하지. 묵 승상은 용맹한 것 같아도 사실은 묵 승상이야말로 신중해. 겉으로 용맹해 보이는 것도, 온화한 여 승상과 대비되어서 그렇게 보이는 거야.”
이동은 잠시 생각하다가 살짝 고개를 끄덕였다. 확실히 그랬다. 계소영은 계가 독자다. 묵 육낭자를 향한 전 노부인과 묵 승상의 총애는 묵칠에 버금가는데, 경성에서 그 사실을 모르는 사람이 없었다. 이 두 사람이 혼인하면 대부분 묵 승상과 계 천관이 다시는 떨어질 수 없는 사이가 될 것으로 여길 것이다. 계 천관에겐 매우 유리하지만 묵 승상에게는 매우 불리한 일이었다. 전생과 달리, 이 혼사에는 장애물이 생겼다.
“태자비가 왔네.”
온통 신경이 밖에 쏠려 있던 복안 장공주가 일어나서 이동을 향해 입을 비죽였다. 두 사람은 뒤로 물러나서 눈에 띄지 않는 구석 자리에 앉았다.
전 노부인은 대전 구석으로 물러나 자리를 잡는 두 사람을 잠시 주시하다가 시선을 돌렸다. 두 사람 모두 수행한다고 자칭하는 사람이니 이런 상황에 피하는 것이 신분에 맞는 행동이었다. 하지만 자신은 이렇게 눈에 띄는 곳에 앉아 있어야만 했다. 인사가 끝난 후에야 저 두 사람처럼 조용한 곳을 찾아 구경할 수 있고.
백 노부인은 묵 육낭자를 붙들고 이야기 나누느라 복안 장공주와 이동이 물러나는 걸 전혀 눈치채지 못한 듯했다.
요화전 밖, 태자비는 양 숙비와 진왕비 진씨 뒤에 살짝 떨어져서 망설이고 있었다. 양 숙비 뒤에서 사람들과 인사하자니, 태자비인 신분에 격 떨어지는 행동 같고, 그렇다고 뒤에서 인사치레하지 않자니 또 너무 오만해 보일 것도 같고.
그렇게 주저하던 차에 동백꽃밭 쪽에서 돌아 나오는 영 황후가 보였다. 그녀는 치맛자락을 들고서 허둥지둥 맞이하러 달려갔다.
영 황후가 왔으니 됐다. 영 황후는 누가 뭐라고 트집 잡을 수 없는 진짜 시어머니니까 그 뒤에 서 있으면 된다!
양 숙비는 태자비보다 훨씬 공손했다. 내내 허리를 숙이고서 공손하고 공경한 모습으로 영 황후를 모시고 대전 안으로 들어가 상좌까지 모시고 직접 차를 건네고는 소심을 뒤로 밀어내고 영 황후 옆에 공손히 섰다.
영 황후는 차를 마시고는 살짝 허리를 숙여 양 숙비에게 웃으며 말을 걸었다.
“오늘은 자네가 주인이네. 날 신경 쓸 것 없어. 난 두 분 노부인과 이야기 나누면 되네.”
“예.”
양 숙비는 소심보다 더 말을 잘 들었다. 그녀는 뒤로 물러나면서 진왕비 진씨에게 분부했다.
“마마를 잘 모셔라.”
“진씨도 데리고 가게. 태자비가 같이 있으면 되네. 자, 이리 와서 앉아라.”
영 황후는 양 숙비의 말을 받으며 태자비에게 옆에 앉으라고 손짓했다. 진왕비 진씨는 고분고분 변함없이 양 숙비 뒤를 따라다녔다.
영 황후가 고개를 살짝 빼고 대전 안을 둘러보자, 소심이 말하기 전에 전 노부인이 먼저 웃으며 가리켰다.
“저기 있습니다. 마마 보세요. 얼마나 자리를 잘 고릅니까. 조용하고 편안하고. 다른 사람 눈엔 잘 띄지 않고 자기는 남을 잘 볼 수 있는 자리 아닙니까.”
복안 장공주는 내키지 않는 듯 일어나 영 황후 앞으로 와서 불진을 흔들며 양손으로 합장했다.
“나와 사매는 조용한 것에 익숙해서 실로 이런 상황이 난감하네요. 마마, 양해해 주시지요.”
“양해는 무슨요. 장공주와 동저아가 불편할까 봐 걱정입니다. 얼마든지 두 사람이 좋은 대로 하세요.”
영 황후가 살짝 허리를 숙이며 매우 체면을 세워주며 대답했다.
“이해해주셔서 감사합니다.”
복안 장공주는 쌀쌀맞게 대답하고는 불진을 휘두르며 이동에게 눈짓하고 다시 구석 자리로 돌아갔다.
“상대 좀 해주시면 안 돼요?”
이동은 벌써 백 노부인과 이야기를 시작한 영 황후를 힐끔거리며 장공주에게 말했다.
“후궁을 원한다기에 넘겨줬잖아. 영 황후도 나도 기쁜 일인데, 상대하고 말고 할 게 뭐가 있어. 안심해. 내가 상대하지 않으면 저쪽도 날 상대할 일이 없어. 양쪽이 기뻐할 일이야!”
복안 장공주는 영 황후를 바라보지 않고 작은 창문을 살짝 열어서 갈수록 떠들썩해지는 바깥을 내다봤다.
대전 밖, 여염 모친 원씨가 맑게 웃으며 양 숙비에게 축하하고 주변을 둘러본 다음에 전 노부인을 찾아갔다.
안원후부 묵 부인은 열정적으로 옆에서 한참 동안 축하하고 덕담한 후에야 무릎을 구부리며 물러서서 모친 전 노부인을 찾아갔다.
“저것 좀 보렴.”
복안 장공주는 원씨도, 묵 부인도 쳐다보지 않았다. 정확히는 혼자 온 부인, 노부인에게는 모두 관심 없었다. 하 십일랑을 데리고 온 수국공부 조 노부인과, 주 팔낭자를 데리고 온 형국공 부인 화씨에게 관심이 컸다.
“녹운은? 조 노부인 곁에 있는 어린 미인이 누군지 알아보렴. 주 귀비와 조금 닮은 것 좀 보렴. 며칠 만에 저런 규수를 찾아내다니……. 진작 준비했겠지. 수국공부도 참……. 쯧쯧.”
복안 장공주는 혀를 내둘렀다. 녹운은 재빠르게 나갔다가 재빠르게 돌아왔다.
“하가 십일낭이래요. 수국공 세자 부인 하씨의 서출 동생이요.”
장공주가 피식 웃었다.
“역시. 비료 물이 남의 밭에 흐르지 않게 한다더니, 남 좋은 일은 절대로 안 하지. 그리고 주 팔낭자라니. 주가는 주 팔낭자를 궁에 들일 생각인가? 저 머리로? 입궁을? 하긴, 주 귀비도 생각은 없었지. 휴.”
복안 장공주는 쯧쯧 혀를 차고 한숨을 내쉬었고, 이동은 말문이 막혀서 그녀를 흘겨봤다. 이렇게 신나서 구경하는 모습이라니요! 정말로 할 말을 잃게 하시는 거죠!
“고서강 부인은 누굴 데리고 온 거지? 참 귀엽게 웃네. 귀티도 나고. 어느 댁 낭자래?”
복안 장공주는 어린 낭자들만 요리조리 살폈다.
“고가 삼내내 친동생 탕 오낭자예요.”
일을 깔끔하게 잘하는 녹운은 아까 나갔을 때, 그녀가 모르는 규수는 죄다 알아보고 돌아왔다. 다행히 모르는 사람이 거의 없었다.
“탕가라…….”
복안 장공주가 말꼬리를 길게 늘였다.
“산서 탕가? 왜, 탕가도 한발 낄 건가? 한몫 챙기려고? 이렇게까지 엉망이 된 거야? 재미있네! 영안백부도 낭자를 데리고 왔어. 저 얼굴, 저 속셈으로……. 쯧. 주씨가 정말 좋은 모범이 되었군. 아무나 대운을 노려보려고 하잖아!”
복안 장공주는 코웃음 쳤다.
“해가 이낭자, 조 시랑네 구낭자. 초 상서네 삼낭자도 왔네. 잘됐네. 저 아이는 제대로 봐둬야겠어.”
갈수록 차가워지는 복안 장공주의 목소리에 이동이 돌아봤다. 장공주는 그녀를 상대하지 않고 오로지 어린 낭자들만 빤히 봤다.
“손 학사네 십이낭이라. 음, 넷째에게 꼭 붙어서 이득을 봤으니, 넷째를 위해 울타리를 쳐줄 생각인 걸까, 아니면 딴 맘을 품은 걸까? 재미있네! 어머!”
복안 장공주가 밖을 가리키며 주절주절하다가 이동을 휙 돌아봤다. 이동은 그녀의 손가락을 따라 고개를 돌렸다. 인파 가장자리에서, 안으로 파고들어 오고 싶어도 들어오지 못해서 쭈뼛대는 수녕백 진 부인, 그 세자 부인 곡 대내내, 그리고 흥분해서 여기저기 마구 둘러보는 강완, 강녕이 있었다. 이동의 시선이 강완과 강녕이 입은 반짝반짝한 직금 비단옷에 멈칫했다. 그녀의 옷, 그녀의 혼수였다.
“저게 왜요?”
잠시 살펴보던 이동이 담담하게 묻자 복안 장공주가 싱긋 웃었다.
“오, 내가 소심하게 굴었네. 동저아, 저게 진왕의 생각일까, 아니면 강환장의 생각일까? 아니면 계 천관일까?”
“영 황후께서 경성 모든 3품 이상 노부인, 부인을 초대했잖아요. 수녕백 부인은 백부인이고 세자 부인도 3품 안에 드니까 당연히 왔겠죠. 누구의 생각도 아니었을 거예요. 저 두 사람은 일을 망치는 데는 선수지만 성사하기엔 불가능한 사람들이에요.”
이동은 강완과 강녕을 바라보며 말했다. 예전에 그 두 사람은 평생 그녀의 골칫거리였다. 강환장의 골칫거리였고. 강환장이 두 누이가 어떤 인물인지 왜 모를까. 두 사람을 입궁시킬 리가 없다.
“음, 저 사람이 바로 곡씨?”
복안 장공주가 곡 대내내를 유심히 살폈다.
“관상을 보니 악랄해 보이는군. 박정하고 의리도 없고. 문도가 찾은 건가?”
“아마도요.”
“문도는 네 한풀이를 해줄 생각이었겠지.”
복안 장공주가 다시 유심히 지켜보다가 웃음 지었다.
“문도가 본인은 악랄하고 음덕이 모자라서 후손을 남기면 안 된다더니, 자신을 정확히 아는 거였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