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9화: 꽃단장한 여인들
주육이 얼른 고개를 끄덕였다.
“원 형님이 하는 말, 무슨 말인지 알아들었다. 너도 알아들었지? 내 생각엔 너무 좋은 방법 같다! 주도면밀해! 형님, 난 동의! 이렇게 하자!”
“나도 동의!”
묵칠은 어리둥절하게 얼른 고개부터 끄덕였다. 지금 몰라도 상관없다. 돌아가서 차근차근 생각하면 깨달을 것이다. 칠 형님의 말은 언제나 오묘해서 어려웠으니까.
“그럼 이렇게 하는 것으로 하자.”
영원은 안도했다. 자기가 무슨 말을 하는지 모르겠지만, 둘이 알아들었다니 됐다.
“그럼 명가 삼낭자는 어쩌지? 할머님이 이미 말씀하셨다면…….”
묵칠은 근심 가득한 얼굴로 영원을 바라봤다. 지금 그는 머리에 아내를 이고 있는 상황이었다. 아차 하다간 뚝 떨어져서 다시는 벗어날 수 없었다.
“너, 네 육 누이와 사이가 어떠냐?”
영원이 눈동자를 굴리다가 물었다. 묵칠이 연신 고개를 끄덕였다.
“친하지. 우리 둘은 친 오누이보다 가깝지. 둘 다 할머님 밑에서 자랐고, 어릴 때 같은 난각에서 자는 사이였지. 육 누이가 나한테 참 잘해!”
“그럼 육 누이를 찾아가서 대놓고 말해라. 명 삼낭자와 혼인하고 싶지 않다고. 미룰 수 있도록 부탁해라. 무슨 방법이든 써서, 네가 마음에 둔 사람이 있다고 명 삼낭자에게 전해달라고 해. 그래, 아라로 하자. 넌 무슨 일이 있어도 아라를 저택에…….”
“난 그런 말 한 적 없어!”
묵칠이 핏대를 세우며 하는 말에 주육이 그의 머리통을 내리쳤다.
“멍청아! 그냥 네가 한 말이라고 해!”
“어쨌든, 육 누이에게 네 안 좋은 점을 명 삼낭자에게 말하라고 해라. 명 삼낭자가 뭘 싫어하면 네가 바로 그런 사람이라고 해. 어쨌든 며칠 끌어 봐라. 이 일 오늘에야 내가 알게 됐으니 판을 짤 시간이 며칠은 있어야 하지 않겠냐.”
묵칠이 깊이 숨을 들이마셨다.
“알았어! 육 누이는 나보다 영리하니까 분명 방법이 있을 거다. 형님, 정말로 형님 덕분에 마음에 드는 아내와 혼인하면, 나, 형님을 친형님으로 모신다!”
“됐거든!”
영원이 식겁하고 상반신을 뒤로 기댔다. 이런 친아우라니, 넌 날 말려 죽일 셈이냐!
궁 안, 여 승상은 점심을 먹고 소화할 겸 뒷짐을 진 채 동서 대로를 따라 어슬렁어슬렁 산책했다.
저 멀리 계 천관이 보이자 느긋하게 다가가서 손짓했다.
“식사했는가? 잠시 함께 걷지.”
계 천관은 서둘러 다가와 여 승상의 걸음에 맞춰 바람을 등지고 느긋하게 걸었다.
“계 상서가 이부를 총괄한 지 오래이니 조정의 관원에 대해 계 상서보다 잘 아는 사람은 없지. 부승상 문제, 계 상서는 어떻게 생각하나?”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다가 여 승상이 본론에 돌입했다. 계 천관도 짐작은 했지만, 이렇게 직접적으로 물을 줄은 몰라서 조금 놀라 잠시 당황하다가 웃음을 지으며 대답했다.
“부승상 문제는 황상과 승상, 그리고 묵 승상께서 상의하여 결정하셔야지요.”
“자네는 호탕한 사람 아닌가. 우리끼리 사적으로 하는 이야기니 거리낄 것 없네. 게다가 이부에서 천거한 전례도 많아. 예전에 계 노승상이 입각할 때도 다 이부에서 천거했네.”
온화하고 다정한 여 승상은 말도 봄바람처럼 포근하게 했다.
“예.”
계 천관은 대답부터 했다. 여 승상이 계 노승상을 입에 올렸다고 경계하는 마음을 쉽게 풀진 않았다. 그는 잠시 생각하다가 대답했다.
“경력, 공적을 따지면 육부의 상서 모두 비슷합니다. 육부 중에 하관은 능력에 한계가 있어 상공 직책을 감당할 수 없고, 공부, 병부 상서는 지난 황조부터 곧바로 입각한 선례가 없습니다. 형부 왕 상서는 상서로 승임한 지 2년이 되지 않아서 특별 임명이 없는 한 승진이 마땅하지 않습니다. 예부 해 상서는 연세가 많고 몸도 그렇게 좋은 편이 아닙니다. 이번에 시험관도 맡고 해서, 따지자면, 호부 초 상서와 사사 고서강, 그리고 추밀원 주 추밀부사 정도가 아닐까 싶습니다.”
“그럼 자네는 그 세 사람 중에 누가 가장 적합하다고 보는가?”
여 승상은 진지하게 경청하다가 곧바로 물었다.
“하관 생각엔.”
계 천관은 줄곧 빙그레 웃고 있는 여 승상을 힐끔 봤다. 지금 말한 세 사람 중에 누굴 더 적당하다고 생각할지 물어야 아나.
“초 상서가 더 적합하다고 생각합니다.”
여 승상이 살며시 한숨을 내쉬었다.
“음, 나와 묵 승상 모두 경제 쪽으로 밝지 않아서 고 사사가 중서에 들어오면 나와 묵 승상의 단점을 보완하리라 생각했네만, 계 상서가 보기에 초 상서가 더 적합하다고 하니, 음, 곰곰이 생각해 보니 그런 것 같네.”
“예.”
계 천관은 다음 말을 기다리며 여 승상을 바라봤다. 이렇게까지 말한 이상, 여 승상은 담판하려고 찾아온 것이 분명했다.
“호부는 천하 세금, 전량을 담당하는 중책 중의 중책을 맡은 곳이지. 초 상서가 있을 땐 만사 걱정할 것이 없었지만, 초 상서가 입각하여 중서에 들어가면 호부는 누가 맡아야 할까. 생각한 적 있는가?”
여 승상이 고개를 돌려 바라보자 계 천관은 그의 시선을 마주 봤다.
“하관 생각엔 묵 시랑이 매우 적합할 것 같습니다.”
여 승상은 안도한 듯했다.
“음, 나도 그렇게 생각하네. 그럼 묵 시랑의 빈자리는?”
“상공 생각엔…….”
계 천관은 머리를 굴리다가 빙긋이 웃으며 말했다.
“원외랑 영산이 매우 적합하다고 생각합니다.”
여 승상의 미소가 짙어졌다.
“그렇지. 영산은 근면하고 또 매우 유능하지. 계 상서, 과연 조정 관리에 대해 지극히 잘 아는군.”
“과찬이십니다.”
마음이 홀가분해진 계 천관은 미소도 편안해 보였다. 시랑 자리 하나로 여 승상의 지지를 얻는 건 수지 맞는 장사였다. 아마 여 승상도 다른 선택이 없으리라.
“오늘 오황자를 왕으로 봉하는 것을 거론한 사람이 있었네. 나이가 어리긴 해도 어찌 됐든 적자라고 말일세.”
여 승상의 목소리는 온화한데 화제는 전혀 온화하지 않았다. 계 천관은 마음이 철렁해서 정신을 집중해서 들었다. 오황자를 왕으로 봉하는 건 작은 일이 아니었다.
“내가 돌려보냈네. 오황자가 적자라고 해도 태자를 세운 마당에 적자인지 아닌지 거론하는 건 다른 마음이 있는 게 아니고서야. 그렇지 않은가?”
여 승상은 계 천관을 빤히 바라봤다. 계 천관은 그런 그의 시선에 조금도 물러서지 않았다.
“적자는 그저 적자일 뿐입니다. 국본을 세울 때는 적자, 장자, 현자를 고려하지요. 태자 전하는 ‘현’으로 태자가 되신 겁니다. 현명하고 대범하니 그런 것을 따지지 않을 겁니다.”
“그렇지. 그렇겠지. 하지만 태자와 오황자 형제 사이를 소인배가 이간질하게 둘 순 없지. 그래서 돌려보냈네. 오황자는 아직 어리고 줄곧 병약해서 이제야 삼자경(三字經: 글을 처음 배우는 아동에게 글자를 깨우치기 위하여 사용했던, 세 글자로 된 단어를 모아 엮은 책)을 배우기 시작했네. 태자 전하는 오황자 나이 때 시경까지 뗐네. 태자 전하도 장성하여 혼인할 때가 되어서 궁에서 나가 왕부를 세운 후에야 왕으로 봉했지. 오황자를 지금 왕으로 봉하는 건 지나친 일이야.”
여 승상의 목소리는 여전히 온화한데 내용은 조금도 양보하지 않았다. 계 천관은 잠시 침묵하다가 말했다.
“여 승상의 말씀이 지극히 일리 있습니다. 저도 그렇게 생각합니다.”
“그럼 됐네.”
여 승상은 숨을 내뱉고는 걸음을 멈추고 계 천관의 어깨를 두드렸다.
“지금은 태자를 세우고 국정 기반을 새로 다질 때네. 1, 2년은 조용해야지. 안 그런가?”
“예.”
계 천관이 재빨리 대답하자 여 승상은 흡족한 듯 다시 토닥였다.
“노승상께 이런 아들이 있어서 다행이네. 자네 미래가 기대되는군.”
“과찬이십니다.”
계 천관은 여 승상이 부친을 언급하는 것을 듣고 싶지 않았다. 그는 부친의 친우 같은 제자를 줄곧 좋게 여기지 않았다.
양 숙비의 진봉 조서가 떨어진 이상, 연회도 곧바로 이어졌다.
이동은 대나무가 수 놓인 쑥색 치마와 웃옷에 석청(石青) 직금 백여우 두봉을 걸치고 우선 보록궁으로 향했다. 복안 장공주는 짙은 갈색 승복을 입고 손엔 불진을 흔들고 있었다. 이동은 참지 못하고 그 불진을 잡아당겼다.
“이건 왜……. 이게 불가에서 쓰는 게 맞나요?”
“그렇게 융통성 없이 굴지 마. 불교든 도교는 무슨 상관이야. 그냥 장난감이지.”
복안 장공주는 이동의 의문을 아예 아랑곳하지 않고 희한할 정도로 예쁜 불진을 흔들어대며 이동과 함께 걸어서 궁 안으로 들어갔다.
복안 장공주는 이 재미난 구경을 처음부터 끝까지 지켜볼 생각에, 이동과 함께 아주 일찍 나서서 요화전에 당도했다. 영 황후도 아직 도착하지 않았는데, 양 숙비와 진왕비 진씨는 벌써 도착해 있었다.
양 숙비는 천천히 걸어나와 복안 장공주를 향해 살짝 무릎을 구부렸다.
“장공주, 일찍 오셨군요. 황후마마는 아직이세요. 이쪽으로 앉으세요. 차 드시면서 기다리시지요.”
“됐어요. 알아서 일 봐요. 우리는 주변 구경하지요. 오늘 날씨가 참 좋군. 하늘이 보살피는 거네.”
복안 장공주는 온몸을 새 옷으로 두른 양 숙비를 위아래로 꼼꼼히 훑어보고는 진왕비 진씨를 흘깃 훑었다.
이동은 앞으로 나가서 우선 양 숙비에게 극진하게 예를 갖추며 축하하고 살짝 돌아서 마찬가지로 극진하게 진왕비 진씨에게 예를 올렸다.
복안 장공주는 고개를 틀고 이동을 바라봤고, 진왕비 진씨는 그런 복안 장공주를 힐끔거렸다. 양 숙비는 꽤 진지하게 이동을 위아래로 훑었다. 장공주 곁에 있는, 수녕백부에 혼인해서 들어갔다가 버림받은 상인 가문 여식을 무시하는 마음이 가득했다. 그리고 우월함에서 오는 연민도 들었다.
고개를 틀고 이동을 바라보는 복안 장공주의 입꼬리가 처지는 걸 봐서인지, 진왕비 진씨는 조금 어색해졌다. 무심결에 답례하려다가, 그런 생각이 들자마자 타당하지 않다는 생각이 들어 등을 꼿꼿이 세우고 살짝 고개를 끄덕여주는 것으로 답례했다.
복안 장공주는 바쁜 가운데 여유로운 사람처럼 이동이 진지하게 예를 갖추는 것을 기다렸다. 그리고 양 숙비 고부를 실컷 살핀 다음에야 이동과 함께 느긋하게 오늘 연회장을 따라 꼼꼼히 한 바퀴 싹 둘러보았다.
만개한 동백꽃이 요화전에서부터 그 앞에 있는 정자 몇 곳까지 쭉 이어지고, 다시 정자 밖까지 뻗어 있었다. 복안 장공주는 밖으로 이어진 동백꽃을 따라 이리 돌고 저리 돌다가 길 끝에 있는 난각을 둘러보고 다시 돌아 나왔다.
“여기 좀 보렴. 얼마나 좋아. 동백꽃이 이렇게 길 안내를 해주니까, 이 길 위에서 누군가를 만나는 게 너무 당연하겠지.”
“황상……께서 지나가시나요?”
장공주가 난각 밖 넓은 청석길을 가리키며 하는 말에 이동은 곧바로 알아듣고 물었다. 그 뒤로는 동백꽃이 없었다. 이 동백꽃은 이 길가로 사람이 오도록 끌어들이고 있었다. 확실히 적합한 장소였다. 영 황후가 마련한 연회장과 멀지도 가깝지도 않고, 지켜봤다는 의심을 피해서 참으로 우연히 만날 수도 있고.
“이렇게 자비롭다니까. 이런 자비심이라니! 흥!”
복안 장공주는 불진을 휘두르며 싸늘하게 웃었다. 이동은 마음이 쓰여서 걸음을 멈추고 좌우를 둘러보다가 복안 장공주의 뒤를 따라갔다.
확실히 자비로운 배려였다. 우연히 만나고 싶은 사람은 꽃길을 따라 이쪽으로 오면 되고, 싫은 사람은 오지 않으면 된다.
이동이 복안 장공주를 따라 요화전으로 돌아갔을 때 백 노부인이 도착해 있었다. 복안 장공주를 본 백 노부인이 웃으며 다가와 인사했다.
“제가 가장 먼저 온 줄 알았습니다. 그런데 진왕비가 먼저 와 있더니 장공주도 오셨군요. 그리고 이 낭자도. 한동안 자네를 못 만났군. 잘 지냈는가?”
“잘 지냈어요. 마음 써주셔서 감사해요, 노부인.”
이동은 서둘러 다가가 예를 갖췄다. 그녀는 진심으로 백 노부인을 존경하고 친근히 여겼다. 지난 생에 시간이 흐를수록 백 노부인은 어른이 손아랫사람을 아끼듯 애틋하게 그녀를 대해주었다.
“나야 가깝지만, 노부인은 정말 일찍 오셨군요.”
복안 장공주가 웃으며 대답했다.
“이 나이엔 아침에 일찍 눈이 떠져서 할 일이 없으니까요. 떠들썩한 일이 있으니 일찍 왔지요. 어디에 앉으면 되려나.”
백 노부인은 농담인 듯 진담인 듯 우스갯소리를 하고는 복안 장공주와 앞서거니 뒤서거니 요화전으로 들어갔다. 자리에 앉기 전에 뒤쪽에서 양 숙비의 열정적인 목소리가 들렸다.
“노부인 오셨군요! 어서 들어가세요. 이분이 육낭자겠군요. 선녀 같은 분이네요. 이렇게 어여쁜 낭자는 처음이네요. 육낭자, 체면 차리지 말고 재미있게 즐기게.”
복안 장공주가 빙그레 웃으며 이동을 바라봤다.
“전 노부인이 오셨나 보네. 나와 백 노부인 대신 네가 나가서 맞이하렴.”
이동은 서둘러 대전 밖으로 나갔다. 묵 육낭자가 전 노부인을 살짝 부축하고 있었다. 전 노부인은 살짝 허리를 숙이고는 양 숙비와 공손한 모습으로 이야기를 나누며 대전 위로 올라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