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7화: 누가 있어?
다음 날 아침 식사 후, 이동이 장 태태와 화항 가득 의복과 장신구를 펼쳐놓고 모레 궁에서 열리는 떠들썩할 것이 틀림없는 연회에 어떤 걸 입고 가야 하나 고르고 있는데, 어멈이 들어와서 대야가 급히 찾는다고 전했다.
이동은 서둘러 장 태태에게 인사하고 물러갔다. 정원 밖에 이신이 뒷짐 지고 진지한 표정으로 석류나무 아래 서 있었다.
“오라버니, 무슨 일이에요?”
이동은 순간 긴장해서 서둘러 다가가 물었다.
“해가 밝자마자 여 대랑이 아침 차를 마시자고 사람을 보냈다. 여 승상께서 장공주에게 전하라는 말씀이 있다는구나. 조정에 부승상을 한 분 더 올릴 건데 누가 적당한지 장공주께 여쭤보라고 말이다.”
이신은 이 큰일을 단도직입적으로 말했고, 이동은 눈이 휘둥그레졌다.
“장공주께 물어요? 이게 무슨?.”
이신이 얼굴을 문지르며 대답했다.
“오는 내내 생각해 봤는데, 장공주의 의중을 묻는 것일까, 아니면 장공주를 통해서 다른 사람의 의중을 묻는 것일까?”
“다른 사람이요? 누구? 영 황후? 황상? 장공주를 움직여서 말을 전해야 할 만한 사람이 누가 있어서요.”
이동은 여 승상이 원하는 건 장공주의 의중이지 다른 사람이 아니라는 느낌이 어렴풋이 들었다.
이신이 미간을 단단히 찌푸렸다.
“나는 도저히 모르겠다. 그리고 또 하나, 올해 시험관으로 예부상서가 결정됐다는구나. 여 대랑 말이, 급제한 다음에 서길사 시험을 보고 한림원에서 몇 년 지내라고 여 승상께서 말씀하셨다는구나. 나도 한림원에 들어가서 몇 년 지내면서 오황자를 지도하라고 하시고.”
이동은 잠시 멈칫하다가 반응했다.
“축하해요, 오라버니. 오라버니 생각은요?”
“내 계획은 이번 과거에 급제하면 경성 관리를 몇 년 할 생각이었다. 한림원에 들어가는 것과 비슷하지. 오황자를 가르치는 건 나도 바라는 바고.”
이신은 돌리지 않고 솔직히 말했다. 이동은 고개를 끄덕였다. 지난 생에 태자도 오라버니의 학생이었다. 이번 생에도 오라버니는 대상이 바뀌었을 뿐, 황제의 스승이 되는 걸까?
이동은 오라버니를 올려다봤다.
“바로 장공주를 뵈러 갈게요. 오라버니는 과거 준비 잘하세요. 전에 장공주가 말씀하시길, 대왕야가 위리안치되고 오황자는 아직 어리니 몇 년은 조용할 거라고 했어요.”
이동은 그다음 말은 하지 않았다. 영원이 조용히 두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그 말은 지금 하지 않는 게 좋을 것이다. 오라버니의 춘시가 끝난 다음에 해도 되고.
“그래.”
이신은 돌아서려다가 뒤돌아보며 물었다.
“영 칠야가 아직 널 찾아오고?”
“응, 어제도 왔었어요.”
이동은 감추지 않고 대답했다. 이신은 조금 묘한 표정으로 그녀를 바라보다가 고개를 끄덕이며 돌아섰다.
이동은 장 태태에게 말하고 나와서 동화문으로 직행했다.
막 궁에서 돌아온 복안 장공주는 이동을 보고는 위아래로 살폈다.
“무슨 일이 생겼어?”
“여염이 이른 아침부터 오라버니를 불러냈어요. 조정에 부승상을 천거할 건데 장공주께서 누가 적당하다고 생각하시는지 여쭤보라고요.”
장공주는 찻잔을 입가에 댄 채 굳었다가 한참 만에 서서히 입가에서 떨어뜨렸다. 무슨 표정인지 알 수 없었다.
“내가 어릴 때, 아버지는 신하들과 논의하다가 종종 어떻게 생각하는지 내게 물으셨어. 어릴 때라 철없는 말을 많이 했지. 가끔 쓸 만한 소리를 하면 아버지는 껄껄 웃으시면서 계 노승상이 잘 가르쳤다고 칭찬하셨어. 그럴 때마다 계 노승상은 공주는 타고나길 영리하다고, 감히 그 공을 탐하지 못한다고 하셨어.”
이동은 복안 장공주 맞은편에 앉아서 말없이 그녀를 바라봤다.
“몇 년 동안은 줄곧 생각했어. 아버지가 몇 년 더 있다가 눈 감으셨다면 어떻게 됐을까 하고.”
복안 장공주의 손이 살며시 떨렸다. 그녀는 천천히 잔을 내려놓고 숨을 크게 들이쉬고 천천히 뱉었다.
“보림암으로 은거했을 때 여 승상이 찾아왔었어.”
복안 장공주는 눈을 내리깔고 한참 있다가 다시 이었다.
“정치를 혼란하게 할 생각은 해 본 적 없어. 조정에 손을 뻗은 적도 없고. 아무리 그래도 우린 여인이잖아. 넌 어떻게 생각하지?”
“장공주께서 말씀하신 건 모두 국가 대사라서 저는 잘 모르겠어요.”
이동은 복안 장공주를 직시하며 대답했다.
“그냥 저희 집 이야기를 해 볼게요. 저희 집안은 묘를 잘못 써서인지, 증외조모부터 어머니까지 연속 삼대가 어린 나이에 혼자 됐어요. 똑같이 외동딸 하나를 키웠고요. 하지만 증외조모, 외조모, 모친, 모두 개가하지 않고 자기가 원하는 대로 금이야 옥이야 딸을 키웠어요. 그리고 혼수가 십 리 길게 늘어지게 잘 혼인시켰고요. 증외조모 때부터 혼수가 아주 두둑했고 장사에 소질이 있었기 때문이에요. 은자가 자신감, 밑천이라고 외조모가 말씀하신 적 있어요.”
복안 장공주의 안색이 살짝 굳었다.
“장공주도 그 자신감, 밑천이 있어야 마음 내키는 대로 사실 수 있어요. 다만 장공주 같은 분은 어떻게 해야 그 자신감, 밑천이 생기는 건지 저는 모르겠어요.”
“알았어.”
한참 만에 복안 장공주의 안색이 서서히 돌아왔다. 눈빛을 빛내며 이동을 바라보는 그녀 얼굴에 서서히 미소가 떠올랐다.
“요것이, 이렇게 빤히 알면서 모른다고 하기는. 됐다, 따지지 말아야지. 지금 네가 내게 한 말, 한마디, 한마디가 대역무도한 거 알지?”
복안 장공주가 서서히 한숨을 뱉었다.
“대역무도한 말로 날 설득하는 것도 너밖에 없지. 됐어. 돌아가. 모레 일찍 오고. 같이 입궁하자. 너무 소박하게 입을 것 없어. 그럴 필요 없으니까.”
“네.”
이동은 웃으며 고개를 끄덕이고는 일어서서 뒷걸음질 쳐서 나갔다.
복안 장공주는 화항에 정좌하고 스스로 차를 천천히 내려서 천천히 마셨다. 잔을 들고 또 한참 넋을 놓고 있다가 내려놓고 녹운을 불러 담담히 분부했다.
“네가 직접 여 승상 댁에 다녀와. 호부상서 초회현이 가장 적합하다고 전해.”
“예.”
녹운은 놀란 표정이더니, 이내 표정을 감추고 고개 숙여 대답하고는 상방에서 나갔다. 천천히 뜨락 문 앞까지 가서 고개를 들었을 때 표정은 어느새 평소처럼 돌아와 있었다.
영원은 조회가 끝나고 시위방에서 한담을 나누다가 선덕문을 나가 말에 올라서 주육을 불러오라고 대영에게 분부했다.
한가한 주육은 영원이 부른다는 말에 재빨리 날아왔다. 영원은 벌써 능운루에 자리 잡고 앉아 있다가 주육이 들어오자 앉으라고 손짓했다.
“시간을 참 잘도 맞춰서 오는구나. 이제 막 상을 차렸다. 아침 먹었느냐? 같이 먹자. 아침 일찍 일어나서 제비집 죽 몇 입밖에 못 먹었다.”
“나도 아직이오. 어제 술을 많이 마셔서 아침에 못 일어났거든. 잘 됐다.”
주육은 상을 둘러보고 차박사를 불러 몇 가지 더 시켰다. 아침을 먹고 상을 무른 다음 영원은 기분 좋게 차를 홀짝이고는 주육을 향해 축하 인사했다.
“아직 축하를 못 했구나. 이제 너도 세자 아니냐.”
“형제끼리 축하는 무슨. 어제 선물도 보내줬으면서. 형님 앞이라 솔직히 하는 말인데, 세자가 되고 나니 살판이 나는군! 단 하나, 여기에 영원히 세습된다는 말까지 붙으면 더 좋겠지만.”
주육은 체면 차리지 않고 껄껄 웃었다. 영원이 그를 흘겨봤다.
“뭐가 어렵다고. 태자 전하가 보위에 오르면 신하들에게 상을 내릴 것인데, 그때 너와 태자 전하의 친분으로 그게 어렵겠느냐. 한마디면 되지.”
“나도 그렇게는 생각해!”
주육이 탁자를 내리치며 유쾌하게 웃었다. 영웅의 생각은 다 같다더니, 원 형님과는 역시 말이 통하지!
“참, 물어볼 것이 있다.”
영원은 반나절 궁리하며 이리저리 생각하다가 결론 지었다. 주육 같은 놈 상대로는 단도직입적으로 묻는 게 제일 효과적이라고.
“무슨 일인데? 형님, 말만 하라고. 나 소육, 뭐든 말할 테니! 우리 사이에 못 할 말이 무엇이야!”
주육이 가슴을 두드렸다.
“어제 황상께서 자객 어쩌고, 급습 어쩌고, 물으시던데. 네가 한 말이라던데? 내가 자객을 만났다는 말을 한 적 있나? 그런 기억은 없는데?”
영원은 도저히 영문을 모르겠다는 표정을 지었다.
“황상이 물으셨다고?”
주육은 한 손으로 관자놀이를 문지르며 켕기는 표정을 지었다.
“형님, 그게……. 그 뭐냐. 어떻게 된 거냐면, 형님이 자객 몇백 명을 만나서 한칼에 하나씩 죽였다고 한 것 같은데, 대체 언제 형님이 그런 말을 했는지 기억이 안 났단 말이지. 내 사환이 그러는데, 그 뭐냐 우리 셋, 그러니까 형님, 나, 그리고 묵 소칠이 연향루에서 취하도록 마신 날 한 말이라고 하더라고.”
“내가? 나는 왜 기억나지 않지? 내 주량이 얼마나 좋으냐. 내가 취한 적이 있더냐?”
영원은 말도 안 된다는 표정이었다.
“형님, 그날 취했소. 나도 취했고, 소칠도 취했고. 그때 그렇게 말했다고. 한칼에 하나씩, 그 말은 내가 똑똑히 기억하지. 다른 건……. 나도 잘 기억나지 않지만. 아버지가 사환의 말을 듣고는 큰일이라고 황상께 보고해야 한다고 하시지 뭐요. 아버지가 그런 말씀을 한 이상, 황상에 고해도 형님한테 해로운 건 없을 것 같아서 말씀드렸지.”
주육이 열심히 변명하자 영원은 길게 ‘아하’ 소리를 냈다.
“어쩐지. 황상이 어찌 아시나 했다. 사실 좀도둑 몇이었는데. 내가 가진 말들은 죄다 준마 아니냐. 노리고 우르르 달려든 거다……. 그때 내가 한 말은……. 너도 알잖냐. 네 형님이 체면 세우는 걸 좋아하는걸.”
주육이 얼른 고개를 끄덕였다.
“알지, 알지.”
“네가 황상께 말씀드렸을 때, 황상은 이미 알고 계셨지?”
영원이 이어서 묻자 주육이 눈살을 찌푸리고 생각했다.
“잠시만, 생각 좀 해 보자. 음, 정말 모르겠는걸. 형님도 알다시피 황상이 얼마나 속 깊은 분인데 표정으로 어찌 알아. 하지만, 음, 아셨을 것 같다. 황후마마에게 그렇게 큰일이 생겼는데 모르시겠어? 다른 사람은 몰라도 황후마마는 말씀드려야 했을 것 아니야.”
“그건 그렇지.”
주육에게서 알아내긴 틀렸다는 걸 안 영원은 즉시 접었다. 주육 이 물건은 일을 성사하기에 부족하고 망치는 덴 선수였다. 그게 누구 일이든 망치는 데 선수!
“그 이야기는 그만하자. 한 가문에 두 국공인데, 편액은 어찌 한다더냐?”
영원은 진정한 한담을 시작했다.
“할머님 말씀이 동쪽에 새로 대문을 내서 형국공부 대문은 거기로 하라시더라고. 한 저택에 대문 두 개. 어느 문으로 들어가도 한 가족이지. 나중에 할머님이……. 그 뭐냐, 그때가 되면 저택에 벽을 치고 두 집안이 되는 거고.”
주육은 매우 흡족한 듯했다. 형국공부의 대문이 다 지어지면 다시는 수국공부 대문으로 드나들지 않아도 된다.
영원은 주육과 한참 동안 저택 대문 일을 떠들다가 슬쩍 화제를 바꿨다.
“부승상을 천거한다던데, 들었냐?”
주육은 의기양양한 표정이었다.
“당연하지! 내가 말했잖아. 나도 이제 어른이라, 아버지가 태자 전하와 큰일을 상의할 때 나도 데리고 가신다. 몇 년 동안 잘 단련해야 한다셔. 그런데 그렇게 큰일을 모를 리가 있나.”
“이게 큰일인가? 하긴, 작은 일은 아니지. 태자 전하는 네 아버지를 천거하려고 하시겠지? 네 아버지 말고 적합한 사람도 없으니까. 형국공 세자가 눈 깜빡할 사이에 상공부 자제가 되겠구나. 축하한다.”
영원이 공수하며 축하했지만, 주육은 분한 듯이 대답했다.
“나도 그렇게 생각하는데……. 말 못 해. 형님에게 말 못 하는 게 아니라 아무에게도 말 못 해. 신하는 비밀을 잘 지켜야 해서 나도 입이 무거워야 한다. 어찌 됐든, 아버지는 이번에 입각하지 못해.”
영원은 말도 안 된다는 표정이었다.
“뭐? 그럼 부승상 천거가 없던 일이 되는 건가? 아니면 태자 전하가 상관하지 않기로 한 건가? 마음대로 하라고? 다른 사람이 천거한다고 해도 당연히 네 아버지지. 네 아버지가 아니라면 누가 있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