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6화: 노티가 풀풀
“음. 그렇긴 하지. 누님이 이런 수를 쓴 것이 바로 이러한 망상을 품게 하려는 것이니까. 오가아가 아직 어리니까 오가아가 성인이 될 때까지 무슨 일이 있어도 황상이 버텨야 합니다.”
“버티지 못하면요?”
이동이 눈살을 찌푸렸다.
전생에 황상은 바로 대황자와 사황자의 죽음, 그리고 뒤 이어진 주 귀비의 죽음 때문에 버티지 못하고 눈을 감았다. 그럼 이번에는 어떨까? 지난번엔 주 귀비가 죽은 다음 황상이 곧바로 쓰러졌다. 그 후로 다시 일어나지 못했다. 이번엔 황상이 버틴 듯했다. 그럼 지난번보다 천수를 더 누리게 되는 걸까?
“어이! 무슨 생각합니까. 눈이 다 멍한걸.”
영원이 상반신을 내밀고 이동 앞에 손을 흔들었다.
“아니에요.”
이동은 무심결에 뒤로 몸을 피했다.
“못 버티면. 휴. 내 말이 그 말입니다.”
영원은 곧바로 뒤로 돌아가서 이마를 탁탁 두드렸다.
“황상의 몸은 튼튼해 보이는데, 하지만 이런 일을 누가 알겠습니까. 뭐라도……. 됐다. 아무런 소용도 없겠지. 낭자 말이 맞습니다!”
영원의 사고 회로가 급작스럽게 튀는 듯했다.
“인생의 화복은 헤아릴 수 없는 법. 태자 문제를 어서 해결해야죠. 만일 무슨 일이 생기면 태자가 바로 천자가 될 텐데. 그런 날이 오면 반역이라도 합니까? 반역이 무섭지는 않지만……. 하, 정말 조용히 살 수가 없군요. 며칠 조용히 지내려고 했더니. 낭자의 말에……. 휴! 태자, 어디서부터 손을 대야 할지. 태자를 세우지 않았으면 좋았을걸. 태자가 없으면 소오가 적자……. 당신은 무슨 생각이 없습니까?”
영원이 돌아보며 묻는 말에 이동은 울지도 웃지도 못했다.
“내가 무슨 생각이 있겠어요. 소경에게 길을 묻는 건가요?”
“당신이 소경도 아니고.”
영원이 또 고개를 쭉 뺐다.
“당신 그 안목, 천하에 드물어요. 사람이든 일이든, 한눈에 꿰뚫지. 이런 안목, 식견, 배포, 결단력으로 애초에 어쩌다가 강환장이 마음에 들었지? 아무리 생각해도 이해할 수 없어.”
이동이 그를 흘겨보며 콧방귀 뀌었다.
“한때 어리석음으로? 아, 참! 강가에 연말에 일어난 일들, 들었나? 분명 못 들었을 텐데. 잘 들어요!”
영원은 흥분한 얼굴로 자세를 바로잡았다.
“그 묵란이라는 아이, 강환장의 장자를 낳았습니다. 보름날 밤에, 도망쳤어요. 마침 내 수하가 딱 부딪쳐서 편의를 봐주었는데 남쪽으로 내려가는 배에 타더라더군요. 사전에 그럴 생각이었는지 아니면 좌충우돌하다가 탄 건지 몰라도. 어디로 갔는지 알고 싶지 않습니까? 내가 알아볼 수 있는데. 확실히 알아내 드리지!”
“됐어요.”
이동이 단칼에 거절했다.
“하긴, 묵란이 어디로 갔는지 알아서 뭘 해. 묵란이 낳은 장자는 분명 강환장의 자식이 아닌걸. 묵란이 아이를 낳은 그날, 대걸을 보내서 알아봤거든요. 대걸의 장점이 사람 알아보는 눈이거든요. 대걸이 그러는데, 딱 보니 고가 노야처럼 생겼다더군요.”
영원은 말을 다 하기도 전에 팔걸이를 내리치며 껄껄 웃었다.
“그리고 강가 세 이낭을 요즘 못 봤지요? 분명 못 봤을 거야. 그 고씨, 처음엔 봐줄 만했는데 요즘은 못 봐줄 꼴이고, 곡씨는, 쯧!”
영원이 끌끌 혀를 찼다.
“문도는 요즘 뭐 하느라 바쁩니까? 정말이지 감탄스러운 사람이야. 안목이, 안목이. 그저 감탄만 나옵니다! 그 곡씨, 유모까지 자기 거처에 가두고 젖을 짜서 자기가 마신답니다! 지금은 젖도 별로 나오지 않는답니다. 강가 두 이낭은 제 젖으로 아이를 먹이고 키운답니다. 젖을 먹이는 건 그렇다고 쳐도, 아이를 직접 키워야 한다니. 곡씨는 세탁방에서 기저귀를 빨지도 못하게 한답니다. 불길하다고.”
영원이 다리를 마구 구르며 웃어댔다.
“대영이 그러는데, 두 이낭이 같은 거처에 갇혀 사는데 더러워서 못 봐줄 꼴이랍니다. 청서는 그래도 괜찮은데, 고씨는 만두처럼 투실투실 살이 쪄서 매일 아이를 안고 울기만 한답니다. 울다가 병이 생길까 두렵지도 않은지, 원.”
“해야 할 일이 많은 사람이, 바쁜 거 아닌가요? 남의 집 이낭이 살이 쪘는지 말랐는지까지 어떻게 아는 거예요.”
이동이 비꼬자 영원이 헤헤 헛웃음 쳤다.
“그야 당신한테……. 그냥 재미난 구경하는 거 아닙니까. 긴장할 때가 있으면 풀 때도 있어야지.”
“난 남의 집 일에 관심 없어요. 우리 집 일도 끝이 없는걸요. 다른 사람 집안일 구경할 틈이 있겠어요?”
영원이 두 눈을 크게 뜨고 머리를 내밀면서 이동을 바라봤다. 그 시선에 이동은 의자 등받이에 바짝 기댔다. 들이미는 얼굴을 한 대 때려야 하나 고민하는데 영원이 드디어 머리를 집어넣고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낭자도 참. 여남은 살 어린 낭자가 왜 그렇게 노티를 풀풀 내는 겁니까?”
이동은 가슴이 철렁해서 억지로 웃어 보였다.
“파란만장한 일을 겪었는데 당연히 늙…….”
“헛소리!”
영원이 이동의 말을 잘랐다.
“그냥 사람을 잘못 만난 것뿐입니다. 파란만장은 무슨! 그렇게 스스로 속박하지 말아요. 힘들게 왜. 사람의 인생은 어떻게 살든 한평생입니다. 날 봐요. 얼마나 자유롭게 삽니까. 얼마나 좋아! 굳이 마음이 죽은 사람처럼 굴기는. 누구 보라고요? 강환장은 아닐 것 아닙니까. 이제 안중에도 없으니 강환장에게 보이려는 건 당연히 아닐 테고. 그럼 누굽니까? 나?”
“그게 무슨 헛소리예요! 난 원래 이런 성격이에요!”
이동은 영원의 말에 이번엔 정말 화가 좀 났다.
“당신이야말로 헛소리하지 말아요. 여남은 살 낭자에게 별별 성격이 다 있겠죠. 이런저런 낭자를 다 봤어도 낭자처럼 노티 풀풀 나는 게 성격이란 소리는 처음 듣습니다!”
영원이 콧방귀를 뀌었다.
“우리 누님, 성숙하기로 유명한 사람입니다. 매일 자기가 온 영가의 얼굴인 것처럼 굴고. 그런 사람도 넷째 숙부가 공처가라는 말을 듣고는 담벼락에 기어올라 엿들었습니다. 그런 사람도 낭자처럼 굴진 않아요!”
“담벼락에 기어올라 엿들은 걸 당신에게 들켰겠어요? 또 헛소리는!”
“그런 일을 할 때마다 망을 내가 보는데, 당연히 알지요! 그뿐만 아니라…….”
영원은 말을 하기도 전에 발을 구르며 웃었다.
“이 말은 우리끼리 하는 말이니까 어디 가서 하지 말아요. 아니면 누님이 날 생으로 삼키려고 할 겁니다.”
“그럼 하지 말아요.”
“여기까지 이야기했는데 끝까지 안 하면 괴롭지.”
영원이 웃으면서 말을 이었다.
“우리 누님, 홍등가까지 구경했어요. 구경하는 것도 모자라 마음에 드는 기녀를 불러 밤 시중도 들게 했다니까. 그때 누님은 밤 시중이 뭐 하는 건지 아예 몰랐으니까요.”
이동은 울지도 웃지도 못했다. 영원이 발을 구르면서 웃었다.
“아버지가 끌고 와서 밤새 사당에 무릎을 꿇렸어요. 몇 년이 흐른 후에야 기루에서 밤을 보내는 게 무슨 의미인지 깨달았지요. 알고 나서는 아무도 그 이야기를 꺼내지 못하게 했어요. 누님이 집에 있을 땐, 가장 하늘 무서운지 모르고 무법천지로 구는 건 누님이었어요. 나도 누님에겐 비교가 안 된다니까.”
영원은 구르던 발짓을 멈추고 스르륵 의자에 앉았다.
“연말에 누님을 봤을 때, 몰라볼 뻔했습니다.”
이동도 천천히 의자에 기댔다. 영 황후가 나이 들어 보이긴 했다. 나이를 유의한 적이 없는데, 생각해 보면 이제 서른 남짓, 장공주와 비슷한 나이였다. 그런데 장공주보다 열 살은 많아 보인다.
“낭자는 그렇게 되지 말아요. 낭자는 누님과 다릅니다. 누님은 어쩔 수 없어서 그러는 거고, 당신은 그러지 말아요. 할머니처럼 사는 게 무슨 재미입니까? 그 나이에.”
영원이 조금씩 화제를 다시 돌렸다.
“혼인할 겁니까? 혼인하든 말든 그러지 말아요. 장공주처럼 굴지 말아요. 낭자는 장공주와도 달라요. 장공주는 신분이 있잖습니까. 너무 눈에 띄고, 황가엔 법도도 많고. 놀고 즐겨야 하는데.”
“내가 언제 할머니처럼 굴었어요? 난 그냥 지금이 좋아요.”
이동이 되받아치자 영원이 코웃음 쳤다.
“참, 내일 함께 운수의 창을 들으러 가렵니까? 운수가 창을 참 잘합니다. 목청이 좋고 느낌 있게 잘 부릅니다. 그 점이 제일 어려운 건데. 심 대가 밑에서 자라서 식견이 있어요. 청음루도 운치 있는 곳이고. 심 대가가 차를 아주 잘 내립니다. 내일 내가 데리고 갈 테니 안목을 넓혀 봅시다.”
이동이 그를 흘겨봤다. 같이 그런 걸 보러 가? 잘도 그런 생각을 하네.
“이러지 맙시다. 지난번에 입은 옷, 얼마나 보기 좋았습니까. 꽤 준수한 소년 같더라고요. 밤이라 제대로 보이지도 않고. 잘 보인들 또 어떻습니까. 혼인하지 않은 어린 낭자도 아니고……. 아, 그런 뜻이 아닙니다. 내 말은……. 그 뭐냐, 그, 낭자, 앞으로 혼인할 생각입니까?”
영원은 말이 꼬여 버벅거렸고 이동은 삐딱하게 그를 흘겨봤다.
“혼인할 생각은 없어요. 그렇다고 당신과 이상한 짓을 하고 다닐 생각도 없어요.”
“이상한 짓이라니? 진짜 이상한 곳은 데리고 가지도 못하는걸? 내 말은, 나는 이상한 곳에 가지 않는다는 거지. 운수의 창을 들으러 가는 게 어때서? 예전에 태후마마도 좋아하셨는걸? 심 대가가 태후 앞에서 창을 해서 온 세상에 유명해진 건데? 이게 왜 이상한 짓이지?”
영원의 당당한 얼굴에 이동은 상대하지 않기로 하고 시선을 돌렸다.
“어린 낭자가…….”
“볼일 남았나요? 없으면 난 이만 쉬어야겠어요.”
이동은 영원의 잔소리를 무지르고 팔걸이를 잡고 일어섰다.
“아직 이른데. 뭘 그리 일찍 쉰다고. 할머니도 아니고.”
영원은 일어날 생각이 조금도 없어 보였다.
“이러지 말아요. 오늘 아침에 황상에게 누님을 마중하러 간 날 습격당한 일을 추궁당하고 지금까지 고민해도 두서가 잡히지 않습니다. 나중엔 또 소오 글공부 문제가 생겼지. 손 한림은 거의 주가 사람입니다. 예전에 나야 한림원에서 그럭저럭 버텼지만 소오는 그럴 수 없어요. 휴. 골치가 지끈지끈합니다. 그런데 오늘은 부 승상 천거 문제까지 나왔어요. 문제가 잇달아요. 난 상의할 사람 하나 없는데. 참, 문도는 어디에 갔습니까? 한동안 얼굴을 못 봤군요.”
“장공주의 심부름을 하고 있어요.”
영원은 이마를 탁탁 쳤다.
“이럴 줄 알았다! 낭자, 봐요. 오늘 하루! 낭자 앞에서나 이렇게 풉니다. 피곤해 죽겠습니다. 아직 쉬지도 못했어요. 자꾸 쫓아내지 맙시다.”
이동은 어이없는 얼굴로 그를 바라봤다.
“아라를 찾아가서 쉬는 게 낫지 않나요?”
“에헤이!”
영원은 이동이 아라를 입에 올리자 벌떡 일어났다.
“말했잖습니까. 아라에게 가는 건 다 일 때문이라고. 중요한 일! 가지 않을 수가 없어요. 사실 난 그런 걸 싫어합니다. 정말로! 앞으로 알게 될 겁니다. 이런 이야기도 낭자에게만 하는 겁니다. 전에 북삼로에 있을 때도 이런 말을 한 적 없어요. 낭자에게만 하는 겁니다!”
영원은 손가락 하나를 높이 치켜들었다. 이동은 다시 자리에 앉았다. 이렇게까지 이야기하는데 어떻게 내쫓겠나.
“강가 이야기, 정말로 듣고 싶지 않고?”
영원의 화제가 또 한순간 다시 돌아갔다. 이동은 그를 빤히 바라보다가 진지하게 고개를 저었다.
“정말로 듣고 싶지 않아요. 난 안 좋은 이야기는 싫어해요. 힘들어하는 걸 보는 것도 싫고.”
영원은 멍하니 있다가 깨달은 듯 웃었다.
“내가 속이 좁았군. 낭자는 이미 내려놓았어. 하긴, 나도 그래요. 즐거운 이야기가 좋지, 힘든 이야기는 싫어. 내가 잘못했습니다. 다시 이야기하지 않겠습니다.”
영원은 뼈가 없는 듯이 의자에 널브러진 듯 앉아서 이런저런 쓸데없는 이야기를 하다가 술시 정각이 가까워지자 힘껏 팔걸이를 밀어내며 일어섰다. 이동과 작별하고 두봉을 들고서 문밖으로 나와서 걸으면서 걸치고는 들어왔었던 담벼락 아래로 다가가 발을 구르다가 휙 돌아섰다.
“담을 넘어가는 건 모양새가 좋지 않구나. 각문을 열어다오.”
막 돌아서려던 수련은 영원이 손짓하며 하는 말에 어이없는 얼굴로 문간방에 들어가 열쇠를 받아서 나왔다. 문을 열어 주자 영원이 손을 내밀었다.
“열쇠는 내게 다오.”
수련은 후다닥 열쇠를 등 뒤로 숨기고 영원이 뭐라고 하기 전에 뒷걸음질 쳐서 각문 자물쇠를 철컥 잠갔다.
영원은 손을 뻗은 채 각문 밖에 서서 하, 소리를 냈다.
“저것이, 성질이 보통이 아니구나. 됐다. 이 몸이 참으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