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5화: 에둘러 해명하다
“진왕부 양 구야가 아라를 매우 좋아한다면서요.”
이동이 참지 못하고 물었다.
“그걸 어찌 알지? 하긴, 양 구야가 아라의 차 한 잔 때문에 홀딱 벗고 거리를 뛰어다닌 걸 모를 리가 없지. 하지만 내 생각엔 말입니다. 좋아하는 것까지는 아닙니다. 양 구야는 미친 사람처럼……. 지금은 미쳤다고 하면 안 되지. 성격이 솔직하고 시원스럽다고 칩시다!”
영원은 조금 화가 났지만, 이 화제가 마음에 들었다. 이런 화제로 이야기해야 티 나지 않게 은근슬쩍 해명하고 자신의 청백을 돌릴 수 있으니까.
“양 구야가 원래 그런 성격인데, 마침 아라가 걸린 겁니다. 그날 아라가 아니라, 류만, 운수, 청월, 혹은 누구라도 마찬가집니다. 양 구야는 변함없이 홀딱 벗고 몇 번이고 달렸을 겁니다.”
열몇 살 때부터 북삼로 도적과 홍등가 양대 영역을 섭렵한 영원은 양 구야 같은 일에 대해선 일가견이 있었다.
이동이 비스듬히 바라보자 영원이 어깨를 으쓱였다.
“이것 좀 봐. 안 믿을 줄 알았다니까. 이런 사내는 내가 많이 봐서 잘 압니다. 잘 들어요. 양 구야 같은 사내는 아라가 아니라, 여인, 반반한 여인, 그냥 반반한 여인이면 다 똑같아요. 아라와 류만이 무슨 차이가 있는지, 류만과 운수가 같은지 아닌지도 모릅니다. 그런 사내가 들러붙다니, 아라가 재수 옴 붙은 겁니다!”
“그럼 묵 칠소야는요?”
이동은 듣는 게 재미있어서 계속 물었다.
“묵칠은 말입니다. 진심이 조금 있긴 한데, 그 진심은 수국공, 지금은 형국공이지. 형국공부의 소육이 세견을 좋아하는 것과 같은 꼴입니다. 진심이라고 하지만, 그냥 노는 겁니다. 정말로 골치 아픈 일이 생기면 좋아하고 말고도 없어요. 주 소육, 그놈은 좋아하던 세견이 병이 나면 보고 있는 게 괴로우니 아예 안 봅니다. 새로 바꾸면 되니까. 묵 소칠도 마찬가지예요. 아라에게 아무런 일이 없으면 다 좋고, 무슨 일이 생기면 괴로우니까 다른 미인으로 바꾸면 그만입니다.”
“그런 걸 잘 아는군요.”
이동은 목 놓아 울던 묵칠을 떠올리며 조금 허탈해졌다. 영원의 말이 맞는지도 모른다. 묵칠은 괴로워했다. 매우 괴로워했다. 하지만 그때 아라를 위해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적어도 그녀가 조사했던 내용엔 묵칠이 아라를 위해 한 것이 없었다.
“그럼요!”
영원이 편안하게 의자에 기댔다.
“그냥 노는 겁니다. 진심은 무슨. 사내는 노는 거고, 아라와 기녀들도 대부분 장사로 여기지요. 마음이 동한 사람도 있지만, 적어요!”
“음, 그럼 당신은요?”
이동이 느릿느릿 묻는 말에 영원이 단번에 몸을 일으켜 똑바로 앉았다.
“나요? 뭐랄까.”
영원은 머리를 긁적이다가 복두를 바로잡은 다음 다시 아까 앉았던 모양새로 돌아갔다. 하지만 아까처럼 널브러지진 않았다.
“어릴 땐 노는 게 좋고 또 철이 없던 때라, 기녀들의 부추김에 넘어가서 정말로 나한테 뭐가 있는 줄 알았지요. 그래서 몇 년은 뿌듯했었고. 나중에 커서 보니 다 보입디다. 보이고 나니 재미없어졌어요. 가긴 가는데, 일 때문에 갔지요. 지금처럼요. 나처럼 개차반에 할 일 없는 놈이 홍등가 단골이 아니라니. 말이 안 되잖아요. 할 수 없이 집집마다 돌아다니며 노느라 힘들어 죽겠습니다. 재미가 없어요!”
영원은 드디어 제대로 해명할 기회를 잡았다.
“북삼로에 있을 때, 근래 몇 년은 사실 그런 곳에 거의 가지 않았어요. 하지만 그렇다고 아예 안 갈 순 없었지요. 들어 봐요. 북삼로에 석할이란 놈이 있는데, 들어 봤습니까?”
이동은 고개를 끄덕이다 말고 멈칫하다가 다시 끄덕였다.
석할을 안다. 그러나 지금이 아니라 전생에서였다. 진왕이 이미 즉위했을 때 양 태후가 동주(東珠: 중국 동북 지방에서 나는 야생 진주)야말로 보물 중 보물이라는 말을 어디서 들었는지 그 이야기를 하길래 양 태후에게 잘 보이려고 특별히 북삼로에 사람을 보내 동주를 사들였다. 1년 가까이 걸려서 구한 동주를 가지고 북삼로에서 거의 벗어날 즈음에 그 석할에게 도둑맞았었다.
“낭자도 압니까? 그놈은 홀로 다니는 대도인데, 북삼로를 종횡무진한 지 스무 해가 넘었습니다. 한두 해마다 큰 사건을 일으키지요. 조수는 아예 없어요. 그 당시 아버지가 내게 소탕하라고 준 명단이 있었는데, 길게 늘어진 이름 중에 맨 위에 그놈의 이름이 있었지요. 나는 그놈을 맨 뒤로 돌렸어요. 어려운 상대니까. 그땐 잡을 거라는 기대도 별로 하지 않았습니다. 나중에 어떻게 잡았는지 아십니까?”
이동은 지극히 협조적으로 고개를 저었다. 모르는 게 당연하니까.
“그놈이 홍등가를 돌아다니다가 잡혔습니다. 정분성에 추낭이라는 기녀가 있었는데, 가장 유명한 기녀는 아니지만 서책을 많이 읽어 유식했습니다. 안목, 식견 모두 그럭저럭 넘어갈 정도였고요. 정분성 삼대 기녀라는 명분을 얻을 만했어요. 십여 년 동안 정분성 기녀 중에 2위 자리에 든든히 앉아 있었느니 인물은 인물이었지요. 내가 정분성에 갈 때 틈만 나면 들렀습니다. 그냥 차나 마시고 이야기했을 뿐입니다. 추낭 같은 기녀랑 이야기하면 재미있거든요.”
영원이 그 부분을 콕 찍어 해명하자, 이동이 눈썹을 치켜들고 그를 흘겨봤다. 이야기하면 재미있다라……. 음, 좋네.
“재작년 봄에 내가 다시 찾아갔을 때 묻더군요. 내가 석할을 잡으면 수하로 거둘 거냐고. 석할이 재주가 뛰어나다고 들었다고요.”
영원이 뿌듯한 듯 웃었다.
“그 말을 듣는 순간 감이 왔지요! 석할을 잡을 기회가 왔다는 감 말입니다. 그래서 말하길, 내 곁엔 뛰어난 사람이 많다. 그놈은 필요 없다. 석할을 잡으면 네가 하라는 대로 하겠다. 그랬더니 말하더군요. 석할이 그녀 단골이라고. 오륙 년 전부터 종종 온다고. 작년에 석할이 다쳐서 그녀가 각루에 감춰두고 한 달 넘게 밤에 손님을 받지 않고 성심을 다해 보살폈고 다 나은 다음에 떠났답니다.”
이동은 열심히 들었다. 영원은 거기까지 이야기하고는 웃으며 팔걸이를 내리쳤다.
“어떻게 됐게요? 석할이 열흘 전에 그녀를 찾아왔는데 북하로에 저택과 땅 몇 백묘를 샀다고, 속량해 줄 테니 혼인하자고 하더랍니다. 추낭은 그때 이미 독립했는데 석할이 그걸 몰랐지요. 추낭은 행수기녀와 짜고 돈을 아주 크게 불렀습니다. 석할은 그 큰돈은 없었고, 나갔다가 돌아와서는 큰 건수를 물었다고 물건을 손에 넣으면 곧 은자가 생긴다고 하더랍니다. 한 달만 기다리라고. 그래서 잘 되었다 싶어서 내가 갔지요.”
“추낭을 속량할 생각을 하기 전에 추낭이 그걸 원하는지 아닌지 묻지도 않았대요?”
이동은 이미 무슨 말인지 알아들었다.
“아라는 저택에 들여달라고 묵칠을 조르기까지 하는걸요. 기녀들은 사내에게 그 사내가 자기 정인인 것처럼 말하지만, 들어넘겨야지 진심으로 여기면 안 됩니다.”
영원은 그런 말을 믿겠냐는 표정이었다.
“그렇게 석할을 손쉽게 잡았지요. 잡아서 그 자리에서 죽였습니다. 추낭하고 그렇게 약속했거든요. 그놈이 죽어야 발 뻗고 잔다고요. 원래 그동안 벌인 일들을 어떻게 한 건지 심문해 보고 싶었는데, 잡으면 그 자리에서 죽이겠다고 군자의 약속을 했으니 그 자리에서 죽였지요. 추낭은 아라처럼 양인이 될 생각이 없습니다. 추낭은 속셈이 깊어서 진작 속량해서 독립했어요. 몰래 점포도 열어서 시녀를 사서 관리하게 했고요. 석할은 그녀와 혼인하는 게 큰 은혜를 베푸는 거라고 여겼겠지만, 흥, 자신의 목숨을 바친 셈이지요.”
“아라가 추낭이랑 같은 생각이라는 걸 어떻게 알아요?”
이동은 그 부분이 신경 쓰였다. 영원은 곧바로 대답했다.
“아라가 내게 의탁해 왔습니다. 남 눈 밖에 났는데, 첩이 되긴 싫으니까요. 아라는 지금처럼 사는 게 좋답니다. 지금처럼 사는 것에 유일하게 싫은 점이 받기 싫은 손님도 받아야 한다는 것이라고요. 그래서 내게 의탁했습니다. 핍박받지 않도록 내가 뒤에서 받쳐달라고요.”
“이런 걸 나에게 말해도 되나요?”
이동은 묻지 말았어야 했다고 후회했다.
“낭자에게 말하는 게 어때서요. 우리 사이에 못 할 말이 있습니까?”
영원은 개의치 않는 듯 대답했다. 이동의 마음속 깊은 곳, 얼마나 오랜 시간 침묵해 왔는지 모를 어느 부분이 슬쩍 흔들렸다.
이동은 한참 침묵하다가 그제야 입을 열었다.
“승낙했어요? 쉬운 일이 아닐 텐데요.”
“음. 쉬운 일이 아니지요. 아라의 운이 어떤지에 달렸겠지요. 그럴 팔자라면, 그때 낭자에게 넘기겠습니다. 그것이, 너무 어리석거든요.”
영원이 팔걸이를 탁 내리쳤다.
이동의 머리 위로 까마귀 떼가 까악까악 하고 날아갔다.
무슨 의미야? 너무 어리석어서 나한테 넘기겠다고? 내가 어리석다는 거야?
아니, 그게 문제가 아니라, 자기 사람을 왜 나한테 넘겨?!
“저기, 우리한테 그런 운명이 있을까요?”
영원이 살짝 몸을 틀고 이동을 바라봤다. 진지한 가운데 고뇌가 느껴지는 물음이었다.
“우, 리, 라, 니, 요!”
이동이 한 글자, 한 글자 힘주어 되물었다.
“우리란 그대와 나, 우리 둘. 여기 다른 사람도 있나?”
영원의 당당한 얼굴에 이동이 눈을 부릅떴다. 한순간 이자가 정말 순진무구하다고 여길 뻔했다.
“우리 같은 소리 하지 말아요. 당신은 당신, 나는 나예요.”
이동이 퉁명스럽게 대답했다.
“왜요? 그래요, 그럽시다. 그대는 그대. 뭐, 나는 우리라고 생각하니까.”
무마하는 게 속 편하다는 듯 눙치는 영원의 얼굴을 흘겨본 이동은, 그 ‘우리’란 말을 물고늘어지지 않기로 했다.
“그래서 무슨 일로 온 건가요. 어서 이야기해요.”
이동이 다시 한번 물었다.
“별일 없고, 그냥 당신이랑 이야기하고 싶어서.”
영원은 이동을 바라보지 않았다. 이동은 의자에 지나치게 편안하게 앉은 영원을 바라봤다.
“평소에 집에서 뭐 합니까? 매일 장부만 들여다보진 않을 거 아닌가?”
영원은 할 말을 찾아서 말하는 느낌이었다.
“장부를 매일 볼 필요는 없지만, 매일 바빠요. 오늘도 탕가 대야와 대내내가 경성에 와서 선물을 준비해야 하는데 선례가 없어서 직접 골라야 했어요. 영안백부 조 육낭자의 생일이 다음 달인데, 조 육낭자는 격식을 따지는 사람이라 해마다 생일 때 내가 직접 선물을 골랐어요.”
영원은 의아해졌다.
“응? 영안백부랑 무슨 관계길래?”
“영안백부 민 노부인의 친정이 염색방으로 시작했어요. 그 염색방에서만 낼 수 있는 색이 많아요. 우리 외할머니의 외할머니 대부터 우리 주단은 모두 그 집에서 염색했어요. 민 노부인은 지난 대 민가 가주의 외동딸이고, 이번 대 가주의 친누이예요. 조 육낭자는 민 노부인의 외동딸이니 그녀의 생일은 우리 집안에서 당연히 큰일이죠.”
영원은 하하 웃었다.
“정말 그렇군. 탕가 대야와 대내내라니, 고서강 사돈인 산서 탕가 말입니까?”
“예. 탕가 대내내 적녀 오낭자도 같이 왔어요. 탕가 대내내는 딸 둘 아들 둘을 낳았는데 장녀가 고 사사 셋째 며느리예요. 장자가 탕호우, 당신도 알죠. 차녀가 탕 오낭자예요. 작은아들은 올해 열한 살, 산서 탕가 고향 집 어르신 곁에 있어요.”
이동은 상세하게 설명했고 영원은 눈썹을 까딱이며 ‘하’ 소리를 냈다.
“탕 오낭자만 데리고 왔다라. 계획이 있는 거군. 아니지, 산서는 경성에서 그리 멀지 않지만 가깝지도 않아. 경성에 지금 도착했다니, 출발했을 땐 주 귀비 일이 없었지. 좋은 혼처를 구하려고 데리고 왔다가 마침 이런 일이 생긴 건가.”
“규수 선발 때문만은 아닐 거예요.”
이동은 영원의 말속의 말을 바로 알아들었다.
“흥! 탕가는 그럴 생각이 없는지 몰라도 고서강은 모를 일이죠. 고서강은 공명심이 아주 큰 사람이거든요. 제 사람을 여럿 궁으로 들여서 지위를 튼튼히 할 생각을 하겠죠. 황상을 포섭하고 태자의 지위를 공고히 하고. 더 멀리 생각해서 고서강이 들여보낸 규수 중에 두 번째 주 귀비가 난다면, 거기에 회임까지 하면 금상첨화지. 하나 같이 꿍꿍이가 대단합니다.”
“인지상정이에요.”
이동은 매우 담담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