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3화: 새로운 국면
“예전에 어머니가 계셨을 때도 아랫사람의 혼사에 관여하시는 걸 제일 좋아하셨지.”
복안 장공주는 조금 고소한 듯이 영원을 바라봤다. 그러나 말이 끝나기도 전에 그 고소해하는 마음이 차갑게 식었다. 그녀도 그 아랫사람 중 하나였다.
“볼일이 남았느냐?”
영 황후가 이어서 묻는 말에 영원이 우중충한 얼굴로 고개를 저었다.
“오가아는 인시 말부터 한림학사와 한 시진 동안 글공부한다. 넌 진시 정각에 가서 한 시진 동안 무예를 가르쳐라. 살인 기술은 가르칠 것 없다. 단련하는 기술이면 된다. 사시 정각에서 오시 초까지 반 시진 동안 글씨 연습을 하고 오후엔 한림학사와 한 시진 책을 읽을 것이다. 신시 정각 이후에 시간 되면 데리고 나가서 둘러보렴.”
영 황후는 오황자의 일정을 말했다. 영원에게 알려주는 것 같기도 하고 일부러 장공주에게 들려주는 것 같기도 했다.
복안 장공주는 못 들은 체하며 차 마시는 데 집중했다.
“알겠습니다.”
영원은 그렇게 대답하고는 고개를 숙인 채 영 황후부터 이동까지 인사했다.
“큰누님, 누님, 누이. 전 이만 가 보겠습니다.”
영원이 물러간 뒤 영 황후도 일어났다.
“이 낭자, 차 잘 마셨다. 고맙네. 연회에 이 낭자도 오렴. 청첩을 보내마.”
“청첩은 됐어요. 나랑 같이 갈 거니까, 청첩은 필요 없어요.”
이동이 대답하기 전에 복안 장공주가 먼저 대답했다. 영 황후는 웃으며 고개를 끄덕이고는 일어서서 돌아갔다.
이동은 영 황후를 배웅하고 돌아와서 다시 화항에 앉아서 멍하니 창밖을 바라보는 복안 장공주를 바라봤다.
“봤지? 올 때마다 한 발짝씩 압박하는 거.”
한참 만에 복안 장공주는 시선을 거두고 조금 화가 난 듯이, 그보다 허탈함이 더 큰 듯이 말했다.
“어주방 말씀이세요?”
이동은 민감하고 정확하게 판단했다.
“그래.”
복안 장공주는 잔뜩 쌓인 등 받침 쪽으로 기운 없이 기댔다. 이동은 기운이 빠진 바람에 더 왜소해 보이는 장공주를 바라봤다.
“오늘 같은 상황을 진작 예상하셨잖아요. 영 황후는 황궁에 돌아오셨어요. 이제 곧 규수를 골라 후궁을 들여야 하는데, 후궁을 장악하지 못하면 앞으로 벌어질 일을 어떻게 대응하겠어요.”
복안 장공주는 천천히 찻잔을 입가에 가져다 대고 마시는 듯 마는 듯 머금은 채 창밖을 바라봤다.
“태후께는 아이가 장공주와 황상 두 분뿐이니, 예전에 태후 계실 때는 후궁이 본인 손에 있든 장공주 손에 있든 개의치 않으셨을 거예요. 떠나신 후엔 귀비 마마는 그런 일에 그다지 신경 쓰지 않으셨고요. 하지만 지금은 설령 영 황후가 아직 별궁에 있다고 해도 태자비도 있는걸요. 귀비 마마처럼 그런 걸 신경 쓰지 않는 사람은 없어요.”
이동은 그렇게 말해놓고 문득 옛일을 떠올렸다. 의지 한 장으로 장공주를 출가시킨 그 일, 정말로 양 태후 본인의 생각이었을까?
장공주가 금을 삼키고 떠난 후 몇십 년 동안 후궁은 진 황후가 손에 틀어쥐고 있었다. 조 귀비가 입궁하고 총애받은 후엔 계략이면 계략, 수단이면 수단을 다 가진 조 귀비가 황상의 총애를 등에 업고 틈을 만들었다. 나중엔 내몰린 진 황후가 결국 이 보록궁으로 물러나게 되었고.
이동은 등이 서늘해지고 손바닥이 축축하게 젖었다.
“왜 그래? 안색이 다 변한 것 좀 봐.”
복안 장공주는 잔을 내려놓고 이동의 안색을 유심히 살폈다. 이동은 억지로 웃어 보였다.
“아니에요. 전 그저, 황후마마가 아니라, 혹시 다른 사람이 다른 수단으로, 예를 들면 장공주를 핍박해서…….”
이동은 말을 멈췄다. 예전에 생생하게 일어났었던 그 일을 어떻게 말해야 할까.
“아시잖아요. 무지할수록 겁이 없는 사람이 세상에 많다는 걸. 무지해서 겁도 없이 터무니없는 권법으로 노련한 사부를 때려죽이는 일처럼요.”
복안 장공주의 안색이 서서히 퍼레졌다. 그녀는 등을 꼿꼿이 세우고 창밖을 빤히 바라보다가 한참 만에 숨을 내쉬며 쓴웃음 지었다.
“알았어. 고마워. 이런 이야기를 해주는 사람도 너뿐이지. 이 후궁에도 똑똑한 사람이 많아. 피하지 않으면 언젠간 헤어나지 못하고 빠져들 거야. 수행하기로 한 이상 속세의 다툼에서 벗어나야지. 생각해 볼게. 진지하게 생각해 볼게. 우린 여기 있으면 안 돼. 여긴 수행할 곳이 아니야. 난 보림암에 있어야 해.”
새해 첫날, 여 승상은 매우 늦게 저택으로 돌아갔다. 마차에서 내린 여 승상은 보물 손자 여염이 자는지 사람을 보냈다.
사실 이미 잠자리에 들었던 여염은 후다닥 일어나 글공부 중이라 아직 잠자리에 들지 않았다고 아뢨다.
여염이 다시 옷을 차려입고 조부의 서재로 달려갔을 때, 여 승상은 편안하게 흔들의자에 앉아 있었다. 그다지 피로해 보이는 기색은 아니었다.
“새해 첫날인데 순조로우셨습니까?”
여염은 조부 곁에 앉아서 싹싹하게 다리를 주물렀다.
“그럭저럭 괜찮았다. 주무르지 말아라. 간지럽지 않으면 아프기만 하구나.”
여 승상이 타박하듯 다리를 흔들자 여염이 얼른 손을 거뒀다.
“그럼 차 우려드릴까요?”
“됐다. 가만히 앉아서 할아비와 이야기나 하자.”
“예.”
여염은 서둘러 단정하게 앉았다. 여 승상은 편안하고 느긋하게 입을 열었다.
“묵 승상도 막 저택으로 돌아갔다. 주 귀비가 떠나고 태자를 세웠으니 지금 조정은 완전히 새로워졌다고 할 수 있다. 연말에 묵 승상과 상의했다. 중서성 문하는 원래 정승상 하나, 부승상 둘, 세 사람이 주관하는데 그동안은 황상이 변동을 바라지 않았고 묵 승상과 내가 일을 그르친 적도 없어서 정승상, 부승상 둘이 주관하는 세월이 이어졌다. 이제 더는 그럴 수가 없지.”
“승상 한 분을 더 올리려고요?”
여염의 눈이 한순간 휘둥그레졌다. 이건 큰일이었다. 부승상, 이 부승상을 올리면 분명 매우 중요한 자리가 빈자리가 된다. 층층이 올리려면…….
그야말로 관계(官界)에 대지진이 생긴다!
여 승상은 길게 숨을 내뱉었다. 편안해 보이는 모습이었다.
“음, 이야기해보아라.”
“예.”
조부가 가르침 주려는 걸 아는 여염은 얼른 정신을 집중했다.
“태자를 세웠기 때문에 부승상을 두려는 건가요? 그 부승상을 태자가 천거합니까?”
여 승상은 편안한 얼굴로 눈을 가늘게 떴다.
“그렇기도 하고 아니기도 하다. 묵 승상과 내가 중서 문하에 부승상 하나가 부족한 것을 거론한 이유가 태자에게 보여주려는 것은 맞다. 하지만 마지막에 누가 될지는 모를 일이다. 계속해라.”
“지금은 예전과 달라졌습니다. 귀비 마마가 돌아가시자마자 조정의 세력이 셋으로 나뉘었습니다. 태자는 보기에 든든히 승기를 잡은 것 같아도 사실 높이 쌓인 달걀처럼 위태합니다.”
여염은 조부의 안색을 살피면서 말했다. 여 승상이 고개를 끄덕였다.
“진왕은 아무런 움직임도 없고 보기에 의지할 곳도 없는 것 같아도 사실은 그렇지 않습니다. 계 천관이 보좌하는 것은 물론이요, 진왕은 황상과 매우 닮았습니다. 그것이 가장 큰 우세입니다. 조정은 이십 년 동안 황상 같은 황상에 익숙해져 있으니까요.”
“옳은 말이다.”
여 승상은 의미를 알 수 없는 한숨을 길게 쉬었다.
“휴! 바로 그거다. 안목이 얄팍한 것들 같으니. 황상 같은 사람은 황상뿐인 것을. 진왕이 아무리 닮았다고 한들 황상이 아니거늘. 계속해라.”
“오황자에겐 안으로 영 황후, 밖으로 영원이 있습니다. 거기에 할아버님의 적극적 지지도 있고요. 오황자의 성품을 볼 일만 남았습니다.”
오황자 이야기가 나오자 여염은 더욱 신중히 했다. 여 승상이 빙그레 웃었다.
“할아비가 오황자를 지지하긴 하지만 적극적 지지는 아니다. 그래, 잘했다. 많이 성장했구나. 할아비를 위해 해줄 일이 있다.”
“분부하세요, 할아버님.”
여염의 두 눈이 빛났다.
“내일 아침에 이신을 만나서 조정에서 부승상을 올리려는 일을 알려라.”
여염은 눈이 휘둥그레져서 조부를 바라봤다. 이 일을 왜 이신에게?
여 승상이 손자를 힐끔 바라봤다.
“누이를 통해 장공주에게 전하라고 해라. 그리고 누가 적당할 것 같은지 여쭤도 보고.”
여염의 눈이 더 커졌다.
“예? 장공주요? 할아버님, 그게 무슨 뜻입니까? 이게 장공주의 의견을 물어도 될 일입니까? 장공주는 출가했다고…….”
말을 끝내기 전에 조부가 힐끔 바라보는 시선에 여염이 다급히 뒷말을 삼키고 얼른 고개를 끄덕였다.
“걱정하지 마십시오. 실수 없이 하겠습니다. 하지만 할아버님, 장공주께서……. 정말로 누군가를 말하면 어떻게 하실 겁니까? 누구를 올릴지 할아버님이 생각하신 사람이 분명 있을 터인데 혹시라도…….”
“그건 네가 상관할 일이 아니다. 나중에, 기회가 되면 이야기해주마. 됐다. 어서 가서 쉬어라. 그리고 춘시 시험관이 결정되었다. 해 상서다. 오늘 밤부터 문을 걸어 잠그고 사람을 만나지 않는다. 이 일도 겸사겸사 이신에게 말해라. 내일부터 잡다한 생각은 버리고 춘시를 준비해라. 해 상서는 옹고집이다. 네가 시험을 잘 보면 모른 체할 리가 없듯이 시험을 못 보면 네가 누구 손자든 아무런 소용이 없다.”
“예.”
여염은 얼른 대답하고 일어서서 서재에서 물러났다. 거처로 돌아가 다시 잠자리에 누워도 이해할 수 없었다. 할아버님이 장공주에게 누구를 추천할지 묻는다? 대체 무슨 뜻일까?
언제나처럼 사람이 바글바글한 마행가.
거리에는 남색 무명천을 두른 오동나무 마차가 즐비했고, 그런 마차들과 전혀 차이가 없는 계 천관의 마차도 인파와 마차의 흐름을 따라 서서히 전진하고 있었다.
마차는 한 골목에서 돌아 들어가서 또 모퉁이를 두 번 돌아 한적한 큰 저택의 각문 앞에 멈춰 섰다. 마부가 폴짝 뛰어내려 각문을 두드리자, 거의 동시에 안에서 문이 열렸다. 계 천관은 마차에서 내려 각문으로 들어갔다.
각문 안 뜨락은 매우 공들여 가꾼 곳이었다. 계 천관은 경치를 감상하는 것 같은 느긋한 모습으로 사환을 따라 매화 숲 깊은 곳에 있은 작디작은 뜨락 안으로 들어갔다.
사환은 뜨락 문 앞에서 걸음을 멈추고 살짝 허리를 숙이며 비켜주었다. 계 천관은 자주 드나드는지 걸음을 멈추지 않고 불빛이 포근한 상방 안으로 들어갔다.
상방 안, 호부상서 초회현(楚懷賢)이 평상복을 입고 허리띠를 두르지 않은 채 일어서서 입구로 맞이하러 나와서 친히 휘장을 걷어주었다.
한기를 몰고 들어온 계 천관은 두봉을 벗었다. 화항 위에 몇 가지 안주와 좋은 술이 놓인 걸 보고 손을 비비며 웃었다.
“이게 그 오래된 여아홍인가? 제대로 맛봐야겠군.”
초회현은 계 천관을 상석으로 앉히고 데워둔 잔을 꺼내 술을 따라주었다. 두 사람이 두 잔을 주고받은 다음 계 천관이 본론으로 돌입했다.
“부승상을 천거한다는 일, 들었나? 계획이 있는가?”
“아마 태자가 결정하게 되겠지. 태자라면 고 사사를 추천할 것이고. 고 사사도 모두의 기대를 업고 그 자리에 오를 만하지.”
“나는 자네를 추천할 생각이네.”
계 천관이 술을 머금으며 담담하게 말했다.
초 상서는 얼떨떨해하더니 곧 웃어 보였다.
“나를? 몇십 년 친분 있는 사이니, 위선 떨지 않겠네. 내각에 입각하여 백관의 우두머리인 승상이 된다는데 싫은 사람이 어디 있겠나. 글공부하고 관리가 된 자에게 최고의 자리 아닌가. 하지만 생각은 생각이고, 정말로 그 자리에 오르는 사람이 몇이나 되나. 나는 감히 꿈꾸지 못하네. 하지만!”
초 상서의 말투가 확 바뀌었다.
“계 형은 가능성이 크지. 육부 중 예부가 예비 승상이라고 하지만, 이부가 가장 중요하네. 승상 자리는 대대로 예부와 이부에서 나왔지. 예부 상서 해 상서는 나이가 너무 많으시네. 여 승상보다 더 많아. 본인도 진작 그 마음을 접었고. 이번에 시험관에 낙점된 것으로 원만한 마무리를 한 셈이네. 계 형은 계 노승상의 외아들이고 경력도, 혈기도 왕성하지. 게다가 장원 출신 아닌가. 공정한 천거로 이뤄진다면 계 형만 한 사람이 없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