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2화: 누님 둘 누이 하나
이동은 보록궁으로 들어갔다. 뜨락 문과 뜨락 안은 지난번에 왔을 때와 마찬가지로 낡고 썰렁했다. 그런데 서쪽 곁방으로 들어가자 눈이 번쩍 뜨였다. 서쪽 곁방 전체를 트고 지붕에 망사로 승진(承塵: 먼지가 떨어지지 않도록 앉는 곳이나 침상 위에 치는 막)을 치고 창문에도 그물을 달았다. 창 아래, 색이 아름다운 비단 깔개를 깐 화항에는 유난히 넓은 낮은 상이 있고 그 위에 보림암 작은 뜨락에서 쓰던 다구가 놓여 있었다.
이동은 실내에 서서 빙그르르 돌며 주변을 살폈다. 복안 장공주는 나른하게 화항에 비스듬히 앉아서 그런 이동을 바라보다가 그녀가 다 둘러보고 나자 앉으라고 손짓했다.
이동은 복안 장공주 맞은편에 앉아서 물었다.
“바깥도 정리하실 거예요? 언제 하실 거예요?”
“밖을 뭐 하러 정리해. 그냥 둘 거야.”
복안 장공주는 손가락을 내밀어 창문에 작은 틈을 벌렸다.
“수행하는 사람이 이런 걸 신경 쓰면 되겠어. 새로운 것이든 낡은 것이든 다 똑같지.”
“네.”
이동은 힐끔 그녀를 쳐다보고는 자리를 조금 옮겨서 보림암에서처럼 차를 그을리고 갈았다.
“오늘 조회에서 양빈을 숙비로 봉했어. 주택헌은 형국공이 되었고. 오가아의 글선생은, 여 승상이 한림원이 돌아가며 가르치자고 제안했고. 처음 글공부할 땐 여러 사람의 장점을 다 배워야 한다고 말이야.”
복안 장공주가 피식 웃었다.
“그런 이야기는 또 처음이네.”
앞의 두 가지는 예상한 일이었지만 오황자 교육을 한림원 전체가 맡게 되었다는 일은 의외였다. 이동은 살짝 얼떨떨해졌다.
“어떻게 그런 일이. 황후마마 생각은요?”
“첫째, 아직은 황후가 의견을 낼 수 있을 때가 아니야. 둘째, 바라마지 않는 일일 테고.”
황후마마라는 말에 복안 장공주가 살며시 콧방귀를 뀌었다. 그 소리를 들은 이동이 장공주를 바라보며 다시 물으려는데 회랑에서 시녀의 낭랑한 목소리가 들렸다.
“황후마마께서 오셨어요.”
“또 왔어!”
복안 장공주는 화가 잔뜩 난 얼굴로 높이 치켜들었던 다리를 내렸다. 이동은 놀라서 그녀를 바라봤다. 조 노부인이 매달 초하루, 보름에 보림암으로 찾아가 귀찮게 했을 때도 이런 표정을 본 적이 없었다.
이동은 서둘러 화항에서 내려가 곁방 밖으로 맞이하러 나갔고 복안 장공주는 내키지 않는 듯 느릿느릿 화항에서 내려가서 몇 걸음 떨어져서 기다렸다.
자주 입는 회서 두봉을 걸친 영 황후는 이동을 향해 미소 지으며 고개를 끄덕여주고는 복안 장공주가 내켜 하지 않는 걸 전혀 눈치채지 못한 것처럼 안으로 들어섰다.
“이 낭자, 차를 내리고 있었나? 내가 먹을 복이 있네. 편하게들 앉으세요.”
영 황후는 찻상을 보고 웃으며 말하고는 화항 앞 팔걸이의자에 앉았다. 복안 장공주는 벌써 다시 화항에 앉아서 이동에게 눈짓했다.
“편하게 앉아. 마마는 이 정도 추위는 아랑곳하지 않으신단다. 우리랑 달라.”
이동은 영 황후의 성격은 몰라도 복안 장공주의 성격은 잘 안다. 지금 장공주의 태도와 말투를 보면 그녀를 이용해서 영 황후를 자극하려는 듯했다. 여기서 사양하면 장공주가 더 약이 오를 것이다. 그녀는 장공주와 영 황후의 불화를 바라지 않았다.
이동은 영 황후를 향해 웃으며 감사 인사를 하고는 화항으로 돌아가 앉아서 계속 차를 갈았다.
복안 장공주는 유유자적한 모습으로 앉아서 이동이 차를 가는 걸 한가로이 바라봤다. 먼저 입을 열 생각이 없는 듯했다.
영 황후도 아무 말 없이 이동이 차를 내리는 걸 바라봤다. 이동이 차를 건네자 홀짝홀짝 반 잔을 비운 다음에야 웃으며 입을 열었다.
“오전 내내 바쁘다가 장공주 거처에서 이렇게 한가로이 차를 마시니 정말 좋군요. 양빈을 숙비로 봉하는 성지가 오늘 조회에서 내려갔습니다.”
복안 장공주는 고개를 틀고 그녀를 힐끔 바라봤다.
“정말 큰 경사군요.”
“그렇지요. 소식을 듣고 연회를 열어야겠다는 생각에 우선 어주방(御廚房)에 가서 살펴봤지요.”
영 황후는 연회 문제를 장공주와 상의하러 온 듯했다.
“장공주도 알다시피, 주 귀비가 있었을 때 장녕궁이 어주방과 멀리 떨어져 있었지 않습니까. 여름엔 괜찮은데 겨울엔 따듯한 음식도 장녕궁까지 옮겨가면 다 식었어요. 그래서 황상께서 따로 작은 주방을 마련해 주셨지요. 지금 장녕궁이 비어있으니, 작은 주방을 다시 어주방과 합치는 게 나을 것 같아서요. 장공주 생각은 어떤가요?”
영 황후는 복안 장공주의 안색을 유심히 살폈다. 복안 장공주는 무표정한 얼굴로 눈을 내리깐 채 오로지 차만 마셨다.
“대왕야가 출궁하여 왕부를 세운 이래 연경궁의 작은 주방도 치웠지요. 지금 오가아가 거기에 살고 있으니 작은 주방 문제는, 내 생각엔 장공주와 함께 쓰면 어떨까 싶어요. 장공주가 계시면 오가아가 편식하는 나쁜 버릇도 나아질 것이고요.”
“어주방 총괄 오씨는 나이가 많습니다. 지금까지 일한 것도 주 귀비가 그가 만든 음식을 좋아해서였어요. 내 입맛에도 가장 맞고요. 오씨를 보록궁으로 보내주세요. 오가아 편식 문제는 황후께서 알아서 하는 게 좋겠습니다. 나는 아이 돌보는 걸 아주 싫어한답니다.”
복안 장공주가 잔을 탁, 하고 탁상에 내려놓으며 냉랭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러지요.”
영 황후가 눈을 내리깔고 곧바로 대답했다.
이동은 영 황후와 복안 장공주를 번갈아 봤다. 이러니 장공주가 ‘영’자만 들어도 화를 내나 싶었다.
이동은 시선을 거두고 열심히 차를 내렸다.
“영원이 뵙길 정합니다.”
회랑에서 시녀의 낭랑한 목소리가 들렸다.
“영원이 왜?”
복안 장공주가 눈썹을 치켜떴다. 영 황후는 그런 장공주의 시선에 모른다는 듯 어깨를 으쓱했다.
“들어오라고 해!”
복안 장공주가 창문 너머로 분부했다. 이동이 마중하려고 화항에서 내려가려는데 복안 장공주가 손을 들어 저지했다.
“너도 수행하는 사람이니 세간의 예법을 따질 것 없어. 게다가 영원을 네가 맞이해야 할 위치도 아니고.”
“장공주 말씀이 옳습니다. 오면 온 거지, 이 낭자가 상대할 것 없다.”
영 황후는 울지도 웃지도 못하는 이동을 바라보며 얼른 말을 받았고 이동은 할 수 없이 다시 돌아가 앉았다.
영원의 걸음은 매우 빨라서, 영 황후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벌써 휘장을 젖히고 들어섰다.
“큰 누님! 누님! 누이!”
영원은 영 황후부터 장공주, 이동에 이르기까지 일일이 장읍하며 예를 갖췄다. 이동은 하마터면 수저에 담긴 차 가루를 쏟을 뻔했다. 이 낭자가 아니고 누이?
“오랜만에 만났더니 점점 뻔뻔해지는구나.”
장공주는 처음 만났을 때 들었던 ‘누님’ 소리를 떠올리며 진심으로 감탄했다.
“누님, 과찬이십니다. 다 누님과 큰 누님의 가르침 덕 아니겠습니까.”
영원은 겸손, 공경 그 자체의 모습이었다.
복안 장공주는 코웃음 치며 얼굴을 돌리고 더는 상대하지 않았다.
“장공주께 문안드리러 온 것이냐?”
영 황후가 영원을 바라보며 물었다.
“예.”
영원은 반쯤 몸을 틀고 고분고분, 착실하기 짝이 없는 모습으로 영 황후의 물음에 대답했다.
“누님께 문안드리러 갔더니 보록궁에서 장공주와 차를 드시고 있다고 해서 왔습니다. 문안도 드리고, 두 분 누님의 의중을 여쭤볼 일도 있고요.”
“무슨 일인데?”
“오늘 조회가 끝난 뒤 황상께서 오가아에게 무술을 가르치라고 하셨습니다. 누님의 뜻이라고 하시면서요. 하루에 반 시진이나 한 시진을요. 누님, 오가아는 이미 클 만큼 컸고 몸도 약한데 어찌 무공을 수련하겠습니까. 헛수고 아니겠습니까? 누님, 황상께 말씀드려서 없던 일로 하지요.”
“내가 말씀드린 일인데, 없던 일로 하자고 내가 말씀드리라고?”
영 황후가 눈썹을 치켜떴다. 자기 아우가 정말로 조금 엉뚱한 것 같았다.
복안 장공주는 풉 하고 웃음을 터트렸다. 이동은 그래도 꽤 담담한 편이었다. 상대적으로 자주 봤으니까.
“그건 또 그렇군요.”
영원의 어깨가 축 처졌다.
“그럼 두 번째 용건입니다. 황상 말씀이, 오가아가 줄곧 몸이 안 좋아서 가 본 곳이 없다고, 경성에 먹을 곳, 놀 곳을 두루두루 데리고 다니라고 하셨습니다.”
“음, 황상께서 꼼꼼하게 고려하셨구나.”
영 황후는 무미건조하게 그렇게 말했다. 일고여덟 살 된 아이를 먹고 노는 곳에 데리고 가라고 하다니. 음, 아주 좋군.
“적재적소네. 참으로 대단해!”
복안 장공주의 이 말은 보기 드물게 의미가 모호했다. 황상이 인재를 적합한 곳에 쓴 것이 대단하다는 건지, 아니면 영원이 쓸모가 있다는 것이 대단하다는 건지. 의미를 분간하지 못한 영 황후는 장공주를 힐끔 바라봤다.
영원은 무슨 생각을 했는지 엄숙한 얼굴로 장공주에게 해명했다.
“누님, 먹고 마시는 건 몰라도 노는 건 전 정말 아닙니다. 그런 건 정말 소질 없어요. 노는 걸 따지자면, 수국공…… 지금은 형국공이군요. 형국공 세자 주 육소야가 가장 정통합니다. 그리고 묵 승상댁 칠소야도요. 노는 덴 두 사람이 가장 정통했습니다. 저는 그런 쪽에 흥미 없습니다. 매번 다 두 사람을 따라간 것을요.”
복안 장공주는 눈썹까지 치켜들고 영원을 삐딱하게 위아래로 훑어봤다.
“못 믿으시겠으면 제 누님께 물어보세요. 제가 북삼로에 있을 때 그런 곳에 간 걸 본 적 있는지 한 번 물어보세요.”
영원은 눈곱만큼도 믿을 생각이 없는 듯한 장공주의 시선에 다급하게 영 황후를 가리켰다.
“내가 경성에 왔을 때 넌 고작 열 살 남짓했는데 그런 곳에 어떻게 가니. 근래 십 년 동안 북삼로에서 네 명성이 자자하더구나. 조금이라도 인물 되는 기녀는 너랑 작은 일이라도 있었고, 경성으로 올라오는 길에서마저 내내 소문을 퍼트리고 오더니, 어째서 경성에 와서는 그런 것에 흥미가 없어진 것이냐?”
영 황후의 말에 영원은 얼굴이 다 새파래졌다.
“누님, 무슨 헛소리를 들은 겁니까. 누가 그런 소리를 한 겁니까? 저는…….”
“복백이 한 말이다.”
영 황후가 영원의 말을 무질렀다. 영원은 입술을 달싹이고 또 달싹이다가 한참 만에 꿍얼거렸다.
“옛날 일입니다, 옛날 일. 지금은 예전과 달라졌습니다.”
“네가 예전과 달라졌는지 아닌지 나는 상관하지 않는다. 다만 한 가지, 오가아는 아직 어리다. 그런 곳에 데리고 갈 생각 말아라. 누구와 함께 갔니, 마니, 핑계 댈 것도 없다. 내가 네 성격을 몰라? 네가 네 뜻이 아닌데 남의 말을 따를 사람이냐? 네가 가고 싶으면, 나는 둘째치고 아버지, 어머니도 널 어쩌지 못한다. 아무도 널 어쩌지 못해. 또 네가 가고 싶지 않으면 아무도 널 끌고 갈 수 없지. 너는 내가 상관하지 않는다만, 오가아는 안 된다!”
영 황후는 매우 엄격하게 말했다. 어릴 때부터 하늘 무서운지 모르던 아우가 지금도 크게 나아지지 않은 듯했다. 오가아를 어쩔 수 없이 그에게 맡겨야 하는 것이 매우 마음 놓이면서도 또 매우 마음이 놓이지 않았다. 오가아는 영씨가 아니다. 오가아는 아우처럼 무법천지, 하늘 무서운지 모르는 사람으로 자라면 안 된다.
“알겠습니다.”
영원은 눈썹이랑 어깨가 다 같이 처졌다. 오늘은 일진이 사나운 듯했다. 오는 게 아니었어!
“또 볼일이 남았어?”
재미있게 구경하던 복안 장공주가 빙그레 웃으며 물었다.
“있습니다.”
영원은 잠시 주저하다가 복안 장공주부터 힐끔 보고 영 황후를 바라보며 물었다.
“황상께서 오늘 제 혼사 이야기도 하셨는데, 그것도 누님이 말씀하신 겁니까?”
“내가 아니다.”
영 황후가 살짝 눈을 찌푸렸다. 정말로 그녀가 아니었다. 누가 아우를 눈독 들이는 걸까?
어느 댁 낭자를 이어주려고?
“황상께서 저도 나이를 먹을 만큼 먹었으니 슬슬 정혼할 때가 되었다고 하시지 뭡니까. 전 지금은 싫습니다. 제 혼사는 돌아와서 이야기하자고 아버지도 허락하신 걸요.”
“나는 네 혼사에 관여할 마음이 없다만, 황상께서 그러시는 걸 내가 어쩌겠느냐.”
영 황후는 걱정스러운 듯 아우를 바라봤다. 그녀는 주 귀비가 아니라서 황상을 쥐락펴락할 힘이 없다. 황상이 정말로 어느 댁 낭자가 마음에 들어서 소칠에게 정해준다고 하면 그야말로 큰 골치였다.